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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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다음에 고작 한걸음뿐인데…
Hwanghyunsoo

 

아내가 지난 가을부터 노스욕(North York)에 있는 문화교실에서 고전무용을 배우러 다니는데, 내가 ‘운전병’을 하고 있다. 기다리는 2 시간 동안 근처를 산책한다. 공원도 걷고 동네도 걷는데, 그러다가 아주 좋은 곳을 찾았다. 세미터리(cemetery), 묘지다.

노스욕 시청 뒤에 있는 <섹션 36, 요크 묘지/Section 36, York Cemetery>는 1948년에 만든 곳으로 그 크기가 172 에이커나 된다. 이곳을 한 바퀴 돌려면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색다른 흥미로움이 있다.

묘지가 워낙 크다 보니, 센낙 로드(Senlac Road)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나눠진다. 동쪽에는 국가 영웅, 반란군, 왕족 등 서양인들이 있고, 서쪽 묘지에는 동양인, 대부분 중국인들의 묘지들이 모여 있다.

죽어서도 똘똘 뭉쳐 있는 모습을 보며,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잘 뭉치는 민족성을 보게 된다. 자세히 보니 황(黃)씨 들도 많이 있다. 이 멀리 타향에서 황씨 가문을 만나다니, 우리 선조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맞는 듯하다.

 

이 부지는 원래 1805년에 조세프 쉐퍼드(Joseph Shepard)가 구입해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쉐퍼드 애비뉴(Sheppard Ave)라는 길 이름을 쓰게 되는 것도 쉐퍼드 일가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1940년대 이전에는 윌로우데일 비행장으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 묘지가 공식적으로 문을 연다. 동쪽 묘지에는 캐나다 하키 영웅인 팀 호튼(Tim Horton)의 묘지도 있고, 전쟁 기념관, 재향 군인, 헝가리 공동체 묘지 등이 있다.

팀 호튼의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Olga Alexandrovna)의 무덤이 있다. 나이 많은 공작과 강제 결혼한 그녀는 황제인 오빠에게 그 결혼을 무효화해 달라고 해, 승인을 받아 낸다. 러시아 혁명 후, 애인 쿨리코프 스키(Kulikovskys) 대령과 크림(Crimean)으로 도피했다가 외가가 있는 덴마크에 머문다. KGB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1948년 캐나다로 이주해 쿡스빌Cooksville)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공작부인은 올가로 알려지기를 좋아했다. 고양이 아가씨로 명성을 얻었고, 예술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60년에 사망한다. 

한국 같으면 묘지 사이로 산책을 한다고 하면 ‘미친놈!’ 하겠지만, 이곳에서는 동네 가장 좋은 위치에 묘지들이 있어 무섭거나 위험하지 않다. 사람들도 별로 없다. 묘지는 혼자 걸어야 좋다. 옆에 누군가 있으면 명상이나, 자연스러움이 덜하다. 말없이 걷다 보면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묘지를 걷는 것은 몸 보다, 정신의 일이다. 나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다.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 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서서히 나타난다. 

<걷기 예찬>을 쓴 프랑스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David Le Breton)의 말에 의하면 “한 걸음 다음에 고작 또 한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30 킬로 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려갈 때, 세계는 우리의 바깥을 스쳐갈 뿐이다. 우리 속으로 세계가 들어올 수도 없고 우리가 세계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도 없다. 한 걸음 다음에 또 한 걸음밖에 걸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 한 걸음 사이에 나와 세계를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초조해하든 간에 삶은 한 걸음 다음에 열 걸음, 스무 걸음의 비약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욕망을 우리 실제 삶의 보폭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열 걸음, 스무 걸음의 비약을 꿈꾸는 사람보다, 지금 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사람이 더 멀리 갈 가능성이 크다. 그 한 걸음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 숲의 향기를 느끼고 그 한 걸음 사이에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며 그 한 걸음 끝에 온 생애가 저물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출발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멀리 떠나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묘지를 걸으면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많이 남지 않은 삶 속에서 어떤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정리할 수 있다. 남에 대한 배려가 모자랐음도 깨닫게 된다. 건강을 챙겨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운이 좋아 직장을 다니며 한번도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은 삶이 "당신은 해고됐다(You are fired)"고 하는 통보이다. '해고'되지 않고 ‘백수’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묘지는 대부분 눈 높이 아래에 있다. 그러기에 자연스레 묘비를 눈 여겨 보게 된다. 마치 무언가를 조사하는 학자처럼, 이름과 태어난 곳, 생년 월일과 사망일, 묘지명 등을 자꾸 보게 된다. 그는 누구일까? 어떻게 살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묘비에 이름 하나를 남기려고 그토록 마음 졸이며 살았는가? 조금 더 걸을 수 있었는데 서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 묘지는 죽은 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는 곳이다. 어떠한 삶을 살았던, 대부분 조촐한 묘비만이 죽은 자를 지킬 뿐이다.

오늘 아침, 동창 단톡방에는 ‘투병 중이던 친구 영경이가 죽었다’고 올라왔다. 모두들 추도의 글을 다느라 부산하다. 이제 가슴 뛸 일보다, 슬퍼할 일이 더 많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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