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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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천 개의 강에 비춘다
Hwanghyunsoo

 

나의 어렸을 적 꿈은 화가였다. 초등학교를 들어 가면서 어머니는 너무 흥이 많아 까불대는 나에게 차분히 앉아 참을성을 배우라고 그림을 가르치셨다. 덕분에 그림을 제법 그렸고 각종 그림대회에 나가 상도 탔는데, 그리 넉넉치 못한 살림에 그림을 가르쳐준 어머니께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 그 화가의 꿈은 접었다. 그림을 꽤 그렸으니, 특별활동으로 당연히 미술반을 지원했다. 미술반에 가보니 반원 대부분이 어찌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기가 죽었다. 2주쯤이 지나 고등학교 선배가 “너희들 수채화 물감 중에 검정색과 흰색은 앞으로 그림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며 전부 내놓으라 한다.

 

나는 기분도 나쁘고 싫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물감을 건넸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물감을 가져간 선배는 그것을 구성 작품을 하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서 잠을 뒤척였고 그 뒤 2주간 미술반에 안 나갔다.

 

어느 날, 미술반 동기생이 찾아와 선배들이 보자고 해 끌려갔다. 나는 “이제 미술반을 그만 두겠다”고 했는데, “네 맘대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곳이 아니다”며 그만 두려면 “빳다를 맞아야 한다”고 해서 옛 포도청에서나 벌어질 곤장 십여 대를 맞고 나왔다. “다시는 미술반, 아니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 라는 다짐을 하며…


▲임충섭 작품 <월인천강> 10x10x10 inch video projector, Sound system, Water tank, 2 fishes_2009-2010

 

누구나 살면서 인생의 멘토가 있다. 나는 비록 화가가 되지 못했지만, 어려서 그림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 있는데, 지금 뉴욕에서 활동하고 계신 임충섭 선생이다. 임충섭은 1941년생으로 진천에서 태어나 서울예고와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알려진 화가인 임충섭이 대학시절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4년간 그림을 배웠다. 어머니가 동네 또래 아이들을 모아 주셔서 함께 그렸는데, 미술대회나 사생 대회가 있을 때는 별도로 개인 지도도 받았다.

 

그는 그리기만 아니라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기만의 특별함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존경하는 내 마음 한 구석에 그의 가르침이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5학년 여름 방학 때, 임 선생을 따라 그의 고향집에 갔다. 시골집이었지만, 진천에서 쌀판매상을 하여서인지 마당이 꽤 넓었고 가족들이 서울에서 온 꼬마 제자라 엄청 잘해 주었다. 태어나 처음 농촌 생활을 해 보았는데, 넓은 논과 논 사이의 도랑에 양어장이 있었다. 무르팍 정도 깊이여서 들어갔는데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정도로 고기들이 많았고 발과 손 사이를 비집고 달아나는 미끈미끈함을 첫 느낀 곳이다.

 

밭에서 내 손으로 딴 노란 참외, 수박을 먹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1주일 정도 있었는데, 전기불이 귀한 시절이라 해가 떨어지면 마을 전체가 어두워져 크고 또렷한 달을 보았던 신선함이 어렴풋하다. 세상 어디에나 비추는 달을 그 시골집에서 처음 본 것이지 싶다.

▲<월인천강>은 ‘달은 천개의 강에 비춘다’는 뜻이다. 조선 선비 퇴계와 기대승은 강에 비친 달도 “달이다”와 “아니다”로 논쟁을 폈다. 이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임충섭은 뉴욕으로 건너가 추상과 비구상을 넘나 들다가 설치 미술가가 된다. 그의 말을 빌면 "구상은 한마디로 '보고 그린다(Looking & Drawing)'는 거지요. 꽃이나 풍경, 모델을 그리는 게 구상입니다. 추상은 '생각한 뒤 그린다(Thinking & Drawing)'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겁니다”라며, "사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설치 미술을 했다”고 한다. 설치 미술이 뭐지? 하는 분은 백남준이 한 미술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의 대표작 중에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것이 있다.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은 조선시대 세종이 지은 불교를 찬양하는 노래다. 세종은 두 아들인 문종과 세조와 머리를 맞대고 <금강경>에 주석한 책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한다. 두 아들이 한자를 한글로 새기면, 세종이 구절구절 함께 따져 본 뒤에 손수 풀고, 끼어들어 거들었다. 그만큼 생생한 기록이다. 임금이 앞장서 글자를 만들고, 두 아들과 함께 석가의 생애를 쉽게 한글로 번역해 백성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한글로 지은 노래 <월인천강지곡>은 달은 하나지만 모든 강에 비추듯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 새겨 있다.

 

<월인천강>은 ‘달은 천 개의 강에 비춘다’, 즉 달은 하나지만 모든 강에 다 비추듯이 부처는 하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의미이다.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한 줄이 불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천강(千江)은 모든 강을 의미한다.

 

우리말에서 백이나 천, 만은 수많은 것을 표현한다. 모든 물을 가리킨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땅에는 물이 있다. 강도 물이고, 바다도 찻잔 속의 물, 거미줄의 물방울도 물이다. 어디든 물이 있다면 달빛이 어리고 달이 뜬다. 언제나 한결같고, 어디서나 똑같은 달과 물의 평등이다. 세종은 이 노래를 통해 모든 이의 평등을 힘주어 드러내려 했다.

 

임충섭은 작품 <월인천강>을 조선 선조들의 논쟁을 예로 들며 “퇴계는 물에 비친 달도 달이라고 했고, 기대승은 물에 비친 달은 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이미 현대 미학의 고민을 한 것이죠”라며 퇴계의 말이 옳다고 편을 든다.

 

임충섭의 설치 미술은 드물고 드문, 세상에서 처음 본 작품들이어서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소통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스승에 대한 내 마음은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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