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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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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디모데전서 1:18-20
lhyunsik


본문 - 디모데전서 1:18-20

제목 -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내용 -

[서론]

박 청호목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자연을 통해서라든지,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마지막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가운데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제에 대하여 일일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양심”이라는 기능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양심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권면하기를 선한 양심에 의존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로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은“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7절과 18절 말씀을 보시면 이들과 합세한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데 필레토라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들은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던 바울 당시에 최초의 이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cf. 벧후 3:16).

양심이라는 영어의 어원을 보면 “~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con"과 ”지식, 과학, 원리“라는 뜻을 지닌 ”science"라는 단어와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성경을 통하지 않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지식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진리의 지식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낳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잘못된 믿음이 잘못된 양심을 낳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이 믿음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양심과 뗄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양심”에 관해서 박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초의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연동되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의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와 더불어서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구원받으면 이런 파괴된 양심이 “선한양심”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선한양심을 소유했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양심이 제대로 기능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건전한 교리를 꾸준히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게 되면 그의 양심은 더럽혀지고 약해집니다. 결국에는 그 양심이 화인 맞아서 마귀가 제안해 오는 어떤 회유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귀가 제안하는 어떤 획책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을 수 있는 양심으로는 영적인 삶을 결코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까,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파손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이 지금 파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파선된 양심”과“정상적인 양심”에 대한 가르침에 익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선된 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양심은 사람을 경고하고 인도하도록 완전하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양심은 파손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제 기능을 못할 뿐입니다. 거듭나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내주하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양심과 영이 하나님에 대해서 제 기능을 하게 됩니다.

양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로 본문의 권면과 마찬가지로“선한 양심”이 있습니다(딤전 1:18-19). 이와 반대로 히브리서 10:22에 보시면“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순수한 양심”이 있는데(딤전 3:9), 히브리서 9:14에서는 이 양심을 “정결한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순수한 양심”과는 반대로 디도서 1:15에서는“더럽혀진 양심”이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파선된 양심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4:1-2에서는“화인 맞은 양심”으로, 그리고 또 고린도전서 8:7과 12에서는 “약한 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양심상 결백하다고 해서 꼭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틀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고 우리의 양심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우리의 양심을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본론]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Ⅰ. “순수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딛 1:15).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텔레비전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들을 보면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분명한 양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이 불결하게 되고 건강한 양심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수한 생각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텔레비전과 무익한 인터넷 사이트나 세속적인 잡지나 책들에 오염되어서 많이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악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양심을 위해서 순수하게 하여서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할 때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대부분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데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책임질 수 없다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다면 결코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양심이 정결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일들을 말해 줄 “믿음의 선배”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실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할 때 옳고 그름의 선택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셨습니다. 목회자들이 우리의 양심이 전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우리의 양심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양심은 거짓말을 할 것이며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Ⅱ. 사랑해야 합니다(딤전 1:5-7).

“이제, 계명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서 헛된 언쟁에 빠져 율법 선생이 되고자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순결한지 우리를 인도해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랑은 거룩하고 이기심이 없으며 육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랑은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사랑은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Ⅲ.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딤전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에게 부탁하노니, 전에 너에게 주어진 예언들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하였느니라. 그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는데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준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배우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바른 양심을 가지려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양심은 죄에 동화된 채 올바르지 못하게 되어서 곧바로 더러워질 것입니다.

죄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대게 의지에 문제가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의 양심이 마귀의 제안으로 꺾여 있기 때문에 확신들이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와 아론이 최초로 파라오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파라오를 두려워했던지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담대하게 표명하지 못했습니다(출 5:1). 그랬더니 파라오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력하게 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파라오가 말하기를 “주가 누구기에 내가 그의 말을 복종하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스라엘로 가게 하지도 아니하리라.” 하더라.”(출 5:2). 잠언 29:25에서“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고 했는데, 당시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도록 죄로 유혹하고 기세를 꺾고 의지를 공략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믿음안에서 큰 담력을 얻고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딤전 3:13).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Ⅳ.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기를 힘써야 합니다(행 24:16).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4장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오니 즉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내가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리라는 소망을 저 사람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듯이 나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나이다. 이 소망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나이다.(exercise)”고 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그렇게 섬겼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제대로 지키려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의 양심은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이 원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중심이 잡혀가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진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자비가 없습니다. 친절도 없으며 진정한 사랑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양심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성도들의 필요에 흠뻑 젖은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양심은 건전해 지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Ⅴ. 매사를 정직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매사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정직하지 않은 사람의 양심은 신뢰할 수 없는 양심입니다. 그런 사람의 양심은 파선당한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서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거짓 조언을 할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Ⅵ. 구령을 해야 합니다(벧전 3:15-16).

베드로전서 3:15-16에 의하면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들이 행악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희를 비방하다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건전하고 건강한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구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구령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은 자신의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양심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야말로 성령님의 인도를 가장 잘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으려면
Ⅶ.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

사도행전 8:37은 베드로전서 3:21을 가장 잘 입증해 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성경을 제외한 다른 변개된 성경들에서는 이 사도행전 8:37 말씀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이 철저히 무시된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침례를 말하는 구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자마자 가장 먼저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우리가 기꺼이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건강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들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성별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TV 프로그램에 자신을 내어준다든지, 영화관에 가서 세속적인 영화를 본다든지, 락 뮤직을 즐겨 듣거나, 인터넷을 통해서 무익한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오락이나, 세상 유행을 지나치게 따르려는 것은 모두가 양심이 깨어져서 더럽혀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 더럽혀진 양심을 가지고도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좀더, 좀더 하다가 마귀가 쳐 놓은 죄악의 올무에 깊게 빠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스스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행에 여과 없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순간 자신의 양심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양심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언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 보루를 진리 아닌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의 양심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양심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양심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양심의 지주대란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우리의 양심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양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 보았으나 양심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이 기도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하십시오! 지금 곧 지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