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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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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가정- M. 더크센
lhyunsik

결혼과 가정(1) M. 더크센 -------------------------------------------------------------------------------- 교회에 미치는 가정의 영향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서의 가정 하나님을 위한 가정이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너무도 자주 가정이라는 "대단위 계획"이 해결책보다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고, 또 우리는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우리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 자신들의 가정을 이룬 것으로만 만족해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 가정이라는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은 가정을 향한 고유한 계획을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정에 대한 지침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침들을 통해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가정이 증인으로 부르심 받은 근거 하나님이 만드신, 혹은 제정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손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궁창이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깊이 감동이 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에 허락하신 많은 축복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시 19:1-6). 또한 시편 기자는 계시의 완전함과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유익들에 의해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시 19:7-11).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는 두 가지 위대한 실체가 숨겨져 있는데, 곧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과 그 피조물에게 주신 축복 등이 있습니다. 놀랄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러한 위대한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가정은 하나님의 인격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개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 메시지는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한 어떤 목적과 및 더 많은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두려워 떨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며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흥미롭게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은 그 사람의 가정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이 세상을 향한 증인이 되는 근거로써, 그리스도인 부모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는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와 계속해서 다투었던 것도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with our sons and with our daughters: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출 10:9)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믿는 자로 만들 수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청지기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로써 가르치고 또 본을 보임으로써 "훈련하고", "다스리고", "교육하고", 또한 "인도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 가정이라고 해서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책임과 청지기 직분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증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두 가정이 그려져 있는데, 곧 하나님의 가정과 하나님의 사람의 가정입니다. 사람은 자기 집 온 식구들에게 증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노아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창 7:1)는 매우 은혜스러운 초청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자기 온 집에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창 18:19)키게 할 것으로 확신하셨습니다. 무엇을 증거할 것인가 그리스도인 가정의 간증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든지, 아니면 복음의 손실을 가져오든지 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받는 축복이 엄청나게 클 뿐 아니라, 그 책임에 있어서도 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하고 건강한 모임의 간증이 약하고 결점이 많은 가정들 가운데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증거할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 우리의 가족과 가정은 우리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모임이 거룩하고자 한다면 또한 우리 믿음의 가정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해야 합니다(벧전 1:15-16).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근신하며 의로우며 경건함으로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딛 2:12). 따라서 야곱도 벧엘에 올라가서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영적인 전을 말끔히 청소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하나님의 성품에 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제하고"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돌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훈계의 말은 주님을 향한 전적이고 참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러한 사랑은 서로에 대한 관계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종종 베다니에 있는 한 겸손한 가정에 들리셨는데, 그 가정에는 참된 교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가정은 사랑이 없고 또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 세상에서 매우 특별하고 영향력이 있는 간증으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영구성 창세로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목적은 결혼관계는 영구한 것이며, 가족관계도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6) 오늘날 "조건적인 헌신"과 결혼이 쉽게 깨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평생 헌신과 부부간의 정절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정의 확고한 영구성은 행복의 발전과 잘 양육된 자녀들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증거할 믿음의 가정이 이혼과 슬픔에 의해 깨어지는 것을 들을 때,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진실과 성실 오늘날 세상에는 진실이 상대적인 것으로 변하고, 성실은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위에 세워지고 양육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가정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의 삶 속에 심는 가정이었는데, 그 어머니와 조모의 "거짓없는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와 사무엘도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순종할 때 큰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써 형성된 또다른 예들입니다. 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부모님들이 영적인 나라를 위해 사는 분들이며, 부모님들의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녀들이 자라서 자기 시대에 하나님의 강력한 증인들이 되는 일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요? 권위(Headship)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두신 합당한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족과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과 그에 대한 실험은 결과적으로 역기능적인 가정들을 낳고 있습니다. 부모가 다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는 독재적인 군주와 같습니다. 어떤 아버지는 "꼭두각시"와 같습니다. 또 오늘날 어머니들의 행동은 자녀문제에 관해 극성맞거나 수수방관하거나, 그 사이를 오락가락합니다. 두 부모의 징계행위에는 서로 일관성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사단의 공격 목표인 가정 가정,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공격 아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계획과 및 목적에 관련된 모든 것을 대적하고, 무효화시키려고 획책하며, 그리고 멸절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단은 최초의 가정을 불순종하게 하고, 부부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형제간에 대적하게 했으며, 살인까지 하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증인으로서의 가정이 좋지 못한 출발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 가족에게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일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실패는 결과적으로 그 나라에서 추방되도록 했으며(창 12), 야곱의 아들들의 배신행위와 잔혹성은 그 가족의 이름을 더럽혔고, 따라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창 34:30)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경우에 가정의 영역에서 실패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해야 할 모든 측면이 계속해서 대적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순결과 거룩이 강하게 도전을 받아 그 가치가 희석되고 있으며, 세상적인 윤리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의 책장에 비치된 책들과 비디오 테이프, CD 등을 살펴보면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악하고, 폭력적이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성적인 부도덕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과 눈에 대리적인 만족함을 주도록 허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는 슬프게도 예배에 있어서 무기력함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의 부족과 복음전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금방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사랑과 돌봄은 종종 물질주의적인 이익과 일시적인 쾌락에 대한 갈망에 의해 상실되곤 합니다. 아버지들은 돈을 버는데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영적인 지도를 등한히 하게 됩니다. 어머니들은 가정 밖에서 자아 추구나 성취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각자가 알아서 살도록" 방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왜 우리 자녀들이 자기 영혼 구원에 대해 그토록 관심이 없으며,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지 않은지 놀라곤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많은 비행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하는 공항과 같아서 인격적인 접촉은 거의 없으며, 있어도 피상적인 대화로 그치고 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족의 연대감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필요들이 충족되고 가족 간의 안락함을 누리는 피난처와 같은 장소라기 보다는 "잠자고 먹고 나가는" 하숙집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가정의 통치도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철학이 경건한 가정의 근본적인 토대마저도 지속적으로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권위에 대해 도전하고, 의심하고, 또한 불신하도록 교육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부에서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의 가르침과 훈련에 대해서 조차도 법적인 제재를 가하려 하고 있습니다. 슬프지만 확실한 자녀교육에 대한 한가지 본보기로 엘리 대제사장에 관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문제를 "흐물하게" 가르쳤습니다. 엘리의 아무 효력이 없는 책망의 말과 자기 아들들을 징계하는 일에 대한 실패가 결과적으로 성막 문앞에서 엄청난 패륜을 저지르도록 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러한 위기적인 상황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점차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대적의 잔인한 공격이 지속됨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책략을 바로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가정에 대한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세우고 지켜가고자 하는 경건한 부모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경건한 가정의 수가 늘어가길 바라며, "만민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우리에게 위탁된 명령이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더욱 힘있게 되고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결혼과 가정(2)-교회에 미치는 가정 생활의 영향 훈육과 가르침의 현장인 가정 Ⅰ. 가정의 본질 1) 가정은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첫 번째 학교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하나님이 인간 조직체의 기본적인 단위로 정하신 가정은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배움터입니다. 예의바름, 공손함, 정직함, 공정함, 그리고 친절함 등등. 이러한 덕목들과 그 밖의 미덕들이 가정이라는 학교의 교과과정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원칙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첫 번째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부모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반드시 이러한 일에 책임을 감당하면서, 자기 자녀들이 법을 잘 지키며,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말로써 교훈해야할 뿐만 아니라, 친히 본을 보임으로써(말뿐인 교훈은 잔소리로 끝나기 쉽니다) 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이러한 일을 큰 손실을 보고난 후에 시작하곤 합니다(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처럼 중차대한 과업에 대해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러한 일생의 과업을 큰 혜택과 함께 시작하기도 하는데, 즉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절대적인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잠 17:6).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히 12:9). 자녀들은 어린 시절, 즉 그 생애의 초기에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더 존경하거나 우러러보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에 비견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국면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일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도 존경은 수고를 통해서 오는 것이며, 또한 (잃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가정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훈련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 대한 행복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여기에다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자녀들의 삶을 돌보아야 하는 추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마노아의 질문은 모든 부모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 13:12) 하나님은 장래에 삼손을 쓰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한 가정에 두시고, 모든 해로운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Ⅱ. 가정의 역할 성경에 나타난 몇몇 가정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가정과 가족이 자녀들을 위해 마땅히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항 중에서 몇 가지 항목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안전한 보호처를 제공함 - 삼손, 사사기 13장.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20세기말의 상대주의와 상황윤리학은 이미 사사시대에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한 기준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그 차이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자들은 변함없는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흐르는 모래와 같은 현대 사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삼손의 부모의 마음에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신 천사의 말은 그들을 확신케 했는데, 그 속에 담긴 진리가 나중에 시편에 기록되었습니다. "(보라) 그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은 그분을 위해서 양육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녀를 귀찮은 존재나 짐으로 생각하는 폐단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형성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니, 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그들의 손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에 대한 양육방식과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에 대해 들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우리의 손에는 자녀의 장래에 대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권위가 있으며, 가장 실현 가능성이 있는 대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녀들에게 새로운 이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방식을 따라 자녀를 양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말씀의 교훈을 잘못 이해하거나 또는 잘못 적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자녀 양육에 대해 가르치시고 있는 말씀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통해 자녀들에게 최선의 교육과 양육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들은 성경이 "징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체벌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효과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들에게는 비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볍게 볼기를 치거나, 아예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기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초리 사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단지 때려서 혼내준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잠 23:13)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순종을 요구하는 강력한 명령이 됩니다. 어떤 자녀들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서 "볼기를 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어떤 자녀들에게는 그 소중한 특권(징계: 역자주)을 잠시 보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훈계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저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회초리"가 병행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건전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삼손은 죄악과 세상의 어수선함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가정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삼손의 나실인으로서의 삶에 해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모든 것이 나실인으로 살기에 적합했는데, 바로 그러한 건전함이 그 가정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술의 발전은 부모들이 가정의 "문을 지키는 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이 구원을 받는 일이나, 구속함을 받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해가 될만한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자녀들의 삶을 통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인터넷이나 음란 비디오, 및 폭력성 텔레비전 프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깨어 경성하는 파수꾼이 되어 자녀들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하며, 가정의 건전한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견고한 터를 놓음 - 디모데, 디모데후서 3:15. 디모데는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이고 사려 깊은 훈육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홈 스쿨링(믿음 안에서의 가정 교육)"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됩니다. 우리는 유능한 전도자와 교사들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양육을 전적으로 전도자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시편 78편에는 4세대 이상이 나타나 있는데, 각 세대가 배운 진리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시 78:5-7). 3) 영적인 유업을 물려줌 - 모세, 히 11:23-27. 믿음으로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던 그 부모는 세상이 모세를 없애려고 했던 것을 막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의 부모들은 일찍부터 부유한 영적인 유업을 모세가 소유할 수 있도록 돕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으므로 상 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그 상급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자녀들에게 모임의 가치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바라며,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위해 삶을 허비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데 헌신하도록 도우시길 빕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모임 생활의 출혈을 가능한 일찍 막을 수 있으며, 우리를 도우사 우리 자녀들이 모임 안에서 하나님께 유용한 그릇으로 빚어가도록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중요성과 목적을 마음에 심어줌 - 사무엘, 사무엘상 1:27-28.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의 손이 자기 어깨 위에 얹혀진 그 느낌과 자기 어머니의 확신에 찬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는 나지막한 말을 따라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로 우리 자녀들을 사용하고자 하시는 은혜로운 목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은 것들을 함께 생각해봄으로써 부모된 우리의 마음에 큰 도전과 자극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매우 경건한 성도들조차도 자기 자녀들의 회심을 바라며, 위하고 기도했지만, 그 결국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받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거나, 우리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의 삶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큰 특권입니다. 부디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 자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의식을 크게 해주시고, 우리가 자녀들의 구원과 축복과 장래에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일에 대해 주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힘주시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교제 기간 일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문제는 젊은 청년들의 영적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선택 위기의 순간에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매일의 삶이라는 잔잔한 물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될 때, 비로소 폭풍의 시기에 배가 파선되는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이 연마될 수 있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잠언 8:33-34의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날마다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가운데 가능하면 일찍부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직후에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우 극적인 상황, 즉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위기적인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하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5,6)라며 이러한 일에 대해 간증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우리에게 엄습해 올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기를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우리의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관계인 결혼관계에 포함되는 내용들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일이 필요한데,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결혼 배우자를 만남으로써, 그 삶이 놀랍도록 보완이 되어 더욱 풍성해지고,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삶이 몰락되어 극심한 황폐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모호한 부분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단순하면서도 실제적인 지침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위한 성경적인 원칙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호하시는 능력에 대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시 17: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함으로써 얻은 원리와 원칙들만으로도 거의 대부분 우리의 의사결정이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환경의 도움 없이도 간단히 내려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기도의 가치를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성찰함으로써, 불순한 동기나 건전치 못한 기질 등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숨겨진 다른 동기가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주의가 요구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만을 묻고 다니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는 말씀이 참된 것은 틀림이 없지만,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는 말씀도 참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을 우리 주변에 두셨으며, 그들의 조언은 매우 유익합니다.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나, 부모님들, 또는 모임 안에 장로들은 우리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영적인 원칙들을 통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말해주는 상황적인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황적인 요소들은 위에 말한 지침들이 우선적인 자리를 잡고 있을 때에만 도움이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지침들을 따른 후에,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우리가 이미 배운 원칙들과 잘 들어맞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동적이기 보다는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행동한다면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적용해야 되는 원칙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상황적이고 환경적인 인도를 따르게 될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우리가 이미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에 정한 경우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상황적인 요소를 따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상황적인 요소들은 다른 모든 요소들이 고려된 후에 마지막으로 참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하나님의 뜻 감정은 또 하나의 위험 요소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경험 요소 가운데 필수적인 부분으로써,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의사 결정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사사기 14-16장에 나타난 삼손의 경험들은 감정이나 충동적인 마음이 일으키는 재앙에 대해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문제는 감정이 종종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결혼을 생각하면서, 어떤 문제들을 미리 말해주는 모든 경고적인 조짐이나 징후들을 그냥 무시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한 후에 따라와야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44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간절히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한 후에야 기쁨이 온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기쁨은 정당한 발견 후에 따라왔으며, 따라서 이를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 혹은 그밖에 감정들이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될 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감정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일은 특히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위험스럽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큰 실수를 깨닫고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는 몇 주일이나 혹은 며칠밖에 안 걸립니다. 결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유쾌한 감정들은 비참하고, 불행한 관계 가운데서의 삶의 고통으로 쉽게 대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상상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결혼 관계를 그저 참고 견디면서 지속하고 있는 상태에 처한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현재와 같이 그저 황량하기만 할뿐이라고 느껴지게 되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생의 배우자를 찾는 일이 신비에 속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매일의 삶의 원칙들을 우리 삶에 적용해왔다면, 삶을 나눌 배우자를 찾는 일도 그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시다. 첫째, 우리는 한 사람과 일생의 관계를 맺는 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서로간의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만, 주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삶의 다양한 측면들은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가치를 같이 중요하게 보고 있는가? 미래의 배우자는 교회 생활과 성도간의 교제를 과연 가치 있게 보는가? 사회 생활이나, 믿음 안의 친구를 사귀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접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하는가?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삶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함께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다면,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러한 의뢰 가운데 자신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과 그것을 나누는 일을 고려해보기 전에, 우리 삶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목표가 비록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할 때,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함께 인생을 살기로 계획한 배우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로써 고려되지 않는다면 깊고도 지속적인 우정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가 요나단의 마음속에 다윗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진 듯해 보입니다. 이러한 존중하는 마음으로부터 평생의 우정이 꽃을 피웠습니다(삼상 18:1). 이러한 존중하는 마음이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다윗이 한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의 말 가운데 최고의 칭송이 되었습니다(삼하 1:17-27). 이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상호 존중이 결혼관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면, 더욱 아름답고 복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 앞에서 우리 삶을 위한 타협할 수 없는 목표를 결정하고, 이러한 목표를 일평생 존중할 수 있는 어떤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배우자에 대한 인도를 주님께 구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인도를 구하며, 기도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다른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조언을 참고하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황적인 요소들을 고려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4. 관계를 세우고 형성하기 위한 행동지침 -A.J 하긴스 신중한 접근의 필요 여러분이 짐 비티가 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권면을 지혜롭게,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으셨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배우자로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 주님 앞에서 평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어떻게 그 관계를 진전시켜 가야 할까요? 당신은 어떤 접근방법을 택하시렵니까? 기도함으로 계속해서 주님이 모든 길의 걸음마다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급함이나 감정에 기초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상대편에게 당신의 관심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지에 대한 최선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예의 바르게 대화를 처음 시작하는 남자의 경우나, 혹은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만 하는 젊은 여자의 경우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삶 가운데 가장 민감한 영역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거절당하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젊은 형제가 자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면서 관계를 진전시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또한 더 좋은 관계형성의 기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당사자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예의 바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제 기간 중에라도 여러분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내함으로 결혼으로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당사자 모두가 계속해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추구해야 하며,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하는 것은 역시 잘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취하는 각 단계마다 주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는 일에 있어서 인내심을 갖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 인한 정신적인 압박감이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한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관계 진전을 위한 활동들 교제 기간 동안 많은 커플들이 관계 진전을 위해서 "합당하고 좋은" 여가 활동에는 무엇이 있는지 더 성숙한 크리스챤들에게 묻곤 합니다. 과연 교제 기간 동안 젊은 크리스챤 커플들이 결혼 약속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여가 활동이나 오락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후 결혼생활 동안 오래도록 추억이 될만한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적인 관심이야말로 음조를 맞추기 위한 첫 건반을 두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하고자 하는 활동(혹은 행동)이 결혼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현재 하고자 하는 활동이 단지 생각하기에 재미있을 것 같은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며, 상대방을 더 잘 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균형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활동에 매우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교제 중에 있는 커플은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습니다. 우선적으로 이러한 일을 하게 되면,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며, 이는 곧 서로의 관계 형성에 크게 도움을 주게 되고, 또 현재 교제 중에 있는 사람의 진정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크리스챤의 결혼은 2차원적이 아니라, 3차원적이라는 것입니다. 커플 두 사람의 관계는 주님과 그리고 여러분 각자와 삼각형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관계의 질은 곧 주님과 여러분의 관계의 질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과의 관계를 최상의 우선 순위로 두고 시작하십시오. 더 나이 많은 크리스챤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20대 초반인 경우, 더 나이가 많다는 말은 훨씬 더 범위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더 성숙한 분들을 찾아 교제하게 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여러분을 격려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목적을 분명히 함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물론, 교제 기간과 약혼 기간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간은 함께 소풍을 가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시간이 다 매우 값진 시간입니다. 이 시기는 커플 쌍방 모두에게 결혼생활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들, 즉 자녀 문제, 재정 문제, 삶의 목표, 장래 희망, 그리고 삶에 있어서 영적인 우선 순위 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문제를 미루다가 결혼 이후에야 서로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대화 기술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타고난 재능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대화 기술은 따로 배워야 하는 분야입니다. 아마도 대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상대방을 참으로 존중해주고, 상대방이 말하는 바를 잘 경청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듣는 것이야말로 대화에 있어서 핵심요소입니다.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대화 기술과 함께, 여러분은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해결 방안을 찾고, 개발시키는 기술을 키우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고자 합니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떻게 대응하고자 합니까? 심지어 낭만적인 교제 기간 중에라도 겉보기에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불화나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일이 생길 때, 두 사람은 이 일을 주님 앞에서 크리스챤으로서 문제 해결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자라난 가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감정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자신의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까? 교제 기간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마음 속에 결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혼이란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음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주님 앞에서 결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험을 피함 서로에 대한 관계가 이제 상당히 진전이 되고, 서로에 대해 확신이 생기게 될 때, 이처럼 성공적인 관계형성은 "절제"라고 하는 일이 상당히 요구되어 집니다. 성공적인 관계형성은 때론 이제 내 스스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는" 무모한 생각으로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주일학교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가르칠 때, 여러분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가르치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제 마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고, 다만 도망할 필요가 있는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황의 위험 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만일 제 자신을 믿는다면 그것은 제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시는 거룩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까? 오염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로 결정한 형제·자매님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참으로 기뻐하는 대상입니다. 거룩은 극단적인 상황, 즉 잘못된 상황 가운데 끝까지 가보자는 심사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은 관계 형성의 모든 단계마다 성경적이고 영적인 표준을 유지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에 대한 갈망과 나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지식은 위험한 상황을 피함으로써만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들을 피하십시오. 다음과 같이 경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이 많은 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도 같지만,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 형제·자매 여러분, 고린도전서 7:1-5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체는 결혼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순결을 지키십시오! 애정을 표현하는 것과 정욕을 자극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사랑은 결코 자기 만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5) - 편부모 문제 머레이 프렛트 -------------------------------------------------------------------------------- 편부모 문제는 다양한 환경에 의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각 경우마다 예기치 않은 특별한 고통과 상처가 남게 됩니다. 열왕기하 4:1절의 경우처럼, 배우자의 죽음은 편부모 문제를 일으키는 일반적이고 가슴 아픈 경우입니다. 또한 별거와 이혼도 오래전 하갈이 경험했던 것(창 21:14)과 같이 편부모 문제라는 슬픈 결과를 초래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편부모들이 경험해오고 있는 것처럼, 다말의 경우도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친히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창 38장 참조). 창세기에서 주님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선언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편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둘이 아닌 하나, 곧 홀로 된다는 것일 것입니다. 홀로 책임을 떠안고, 한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하면서 다양하고 벅찬 의무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부모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홀로 울며 보채는 아기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고, 보다 큰 아이를 징계하기도 하고 양육하며, 또한 반항적인 십대와 대면해야 합니다. 후에 자녀들이 다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어 집을 떠나게 되면, 홀로 남아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편부모는 자녀를 홀로 기르고,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돌보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긴 밤을 배우자의 도움이나 조력도 없이 울어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새워야 하며, 이 일의 반복으로 인해 매일의 일과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데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고갈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빈자리로 인한 상처에 대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편부모는 자녀를 홀로 키우는 일로 인해 자녀들이 받게 되는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혼의 경우에 자녀들은 양부모로부터 서로 싸운 이야기를 양측으로부터 듣기 때문에 이중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편부모는 자기 나름대로의 편의를 따라 자녀 양육 기준을 설정하는 문제로 고민하게될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를 극단적으로 과보호하거나 아니면 아예 신경 쓰지 않고 풀어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조언과 조력이 없으면 균형 잡힌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의 삶에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또는 덜 중요한 일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다루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대의 경우 구원받지 않은 친구들과 그 집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친구 집에서 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이유가 매우 유감스러울 때도 있는데, 곧 자녀로 하여금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고, 또한 성숙하도록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지 집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주 이유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편부모의 상황이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사실일 때가 많습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가난과 정서와 생활의 염려에 관한 문제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편부모에게 있어서 더욱 큰 문제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과부에게 재정적인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욥이 말한 것처럼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정당치 못하게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욥 22:9)라고 말했지만, 욥은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욥 29:13)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돌봄의 정서적인 필요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편부모는 그러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사실은 그들이 친교를 위한 모임에서 늘 제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이야기 속에서(눅 7장), 우리는 주 예수님이 그녀의 필요를 알아주셨고, 자기 아들을 다시 살리셔서 돌려주심으로써,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도록 동정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편부모는 서로 터놓고 교제할 참된 친구를 필요로 하지만, 참견을 잘하거나 가십거리를 만드는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힘과 지혜과 인도, 그리고 도움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음과 같은 우리 구주의 약속이 없었다면 상황은 매우 절망적일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편부모의 정서 상태는 또한 매우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종종 독특합니다. 거기에는 절망감과 무력함이 어울려 극도의 불안 심리를 자아냅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 당혹감과 실패 의식 등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근심과 불안,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등은 마음의 평안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는 잠재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에 덧붙여 에베소서 1:6에 제시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붙드심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를) 거저 (받아)주시는바"(KJV 참조) 만일 편부모의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가 별거나 이혼의 경우라면, 거기에는 추가적인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양육과 후견에 대한 합법적인 투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쪽 부모를 자녀가 방문하는 일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그 자체 속에 자녀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위한 헌신된 삶을 사는데 어려움을 겪게될 잠재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편부모 상황은 한 쪽의 시간과 에너지를 크게 해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죄악되고 부정적인 행위를 발전시킬 위험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보복하고픈 감정에 휩싸일 수 있고, 심지어는 자녀를 협상의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쓴뿌리, 분노, 그리고 원한 등의 감정이 떠난 부모를 향해 표출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그 부정적인 행위나 생각을 깊게 하게 되면, 곧 우울증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과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쓴뿌리나 분노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신자는 그 생각 패턴이 빌립보서 4: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변화되도록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 할 줄로 압니다. 결혼과 가정(6)-독신생활의 유익과 고통 레슬리 웰즈 -------------------------------------------------------------------------------- 1세기 이래로 허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고전 9:5)도 결혼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개역성경에 따르면 이 구절은 "나머지 사도들(the rest of the apostles)"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의 형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도들이 결혼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후 수세기에 걸쳐서 잘 알려진 주의 종들은 모두 결혼을 했습니다. 윌리암 캐리, 조지 휫필드, 존과 찰스 웨슬리, 허드슨 테일러, 데이비드 리빙스톤, 조지 뮬러,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 아도니람 저드슨, 디 엘 무디, 찰스 스펄전, 그리고 해리 아이언사이드와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틴 루터는 42세까지는 독신으로 있었지만, 후에는 전직 수녀였던 케이티 폰 보라 양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섬김을 위해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던 탁월한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1세기에 살았던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더욱 최근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존 넬슨 다비, 인도와 페르시아의 선교사였던 헨리 마틴, 그리고 동시대 인물로는 아프리카 차드에서 선교했던 호주 출신의 존 올리와 캘리포니아 출신의 W. J. 맥클루어가 있는데, 이들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독신으로 남아서 주님을 섬김으로써 얻는 유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독신의 유익 첫 번째 유익은 마음이 나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독신인 사람은 영적인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생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주님을 섬기기 위한 일에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독신인 사람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가장 관련이 있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은 "…에 대하여는"이라는 구절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24절까지로, 혼인한 자들과 및 하나님이 복음으로 부르신 각 사람에게 부르신 그 상태로 지낼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25절부터 40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부분에서 25절부터 38절까지는 혼인한 일이 없는 처녀들에 대한 권면의 말과 39절부터 40절까지는 재혼하지 않은 과부들에 대한 말씀으로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소단락의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혼인하지 않은 남자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34절에서는 혼인하지 않은 여자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의 두 경우를 비교해서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장가가지 않은 형제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하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 자매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장가간 형제의 경우,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33절)하며 염려하게 되고, 시집간 자매의 경우에는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34下)하며 염려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너희로 하여금…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문자적인 의미로 '계속 곁에 앉아 있도록' 혹은 '자신을 부지런히 헌신하여'의 의미가 있음-W. E. Vine의 신약 단어사전 참조)하려 함이라"(35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의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 뿐 아니라, 그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전심 사역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사실 주님을 더욱 섬기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7절). 이에 처녀들에 대한 말씀에서 "(형제가)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28절)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헌신적으로, 또한 희생적으로 섬기기 원한다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은 독신생활을 하도록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결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독신상태는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는데 위험한 장소나 상황에 있어서 주님을 섬기는 영역을 넓혀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독신인 형제는 더 연약한 그릇인 아내가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그러한 곳일지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매 선교사의 경우 남편과 자녀들이 지속적인 테러의 위협을 받는 곳일지라도 기꺼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적인 고난" 혹은 핍박에 대해서, "이런 (혼인한)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고 말하면서,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下)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독신으로 생활할 수 있는 젊은 형제들이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복음화되지 않은 많은 나라들이 현재 이처럼 전적으로 헌신된 일군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적진으로 뛰어들 준비가 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 때, 섬김에 있어서 또다른 유익은(이미 암시를 드렸지만), 주님을 섬기기 위해 움직이기 쉬운 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독신인 형제는 주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정 문제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즉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집에 반드시 돌아올 필요도 없이 다른 포도밭으로 이동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주의 일의 최선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문제에 관한 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가 있으면, 그는 모든 것을 처분하고,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가는데 자유롭습니다. 주님이 어떤 사역에 그를 적합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더욱 용이한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의 경우에 이러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그들이 감당해야 할 짐은 더욱 무겁습니다. 같은 경우라도 독신인 형제는 자신의 몫만 감당하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감당해야 할 짐이 더욱 가볍습니다. 독신의 고통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물론 이상적이지만, 실제로 독신인 형제도 일상생활의 의무적인 일들을 감당해야 하며, 특히 아내의 몫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가사 일에 대한 시간을 줄임으로써, 주님의 복된 사역에 자신을 더욱 헌신하기 위한 계획들에 매진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어딘가에 살아야 하고, 그 집은 주님을 위한 하나의 간증이 됩니다. 그는 집안을 지저분하게 해놓거나, 소홀히 한 상태에서 집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집안도 돌보아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정돈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만, 항상 적당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쇼핑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바깥 허드렛일도 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옷을 세탁하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주의 일을 위한 시간은 기대한 만큼 그리 많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도 당면해야할 하나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은 어떤 문화에 있어서는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결혼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이러한 문화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아내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무슨 은밀한 죄악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도덕적으로 부패하거나, 혹은 피폐된 삶을 사는 사회의 범죄자로 오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집을 비운 부재기간 동안, 혹은 불규칙적으로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바로 그러한 증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증거나 간증은 효력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어려움 없이도 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 특히 여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계략을 써서 미궁에 몰아넣고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부정한 행위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경험은 영적으로 해로운 것이며, 심지어 주님을 위한 사역에 치명적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신인 형제는 섬김에 있어서 그러한 두려움을 잘 감당할 수 있지만,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일에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슬픔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거기서 위안을 얻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분야에 많은 동역자들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누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시련과 제반 문제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통한 마음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긴장과 그의 영을 압박하고 있는 걱정과 짐으로 인해 자신이 섬기고 있는 분야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있는 동역자와의 교제에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지만, 또한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느끼는 마음의 평안도 더욱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은 아담에게 배필이 필요한 것을 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와가 창조된 이유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은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인 주님의 종은 예고된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각 경우를 충분히 고려해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결혼과 가정(7) - 결혼을 결정하기에 앞서 개리 N. 샤프 -------------------------------------------------------------------------------- 지금까지 우리는 결혼과 가정 시리즈를 연재해 왔는데, 이제 결혼전 상담이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매우 유익한 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조쉬와 카밀라 얘기 들어봤어? 그 두 사람 말야 무척 사랑스런 커플로 보였잖아. 서로 잘 어울리는 사이였던 것 같았는데…. 그래도 지금까지는 잘해오고 있잖아!" "우리가 미리 알았더라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분명히 무언가 숨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패한 결혼에는 무언가 징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징후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가족과 성도들과 교회들은 더욱더 이러한 문제들과 그로 인한 당혹스러움에 봉착하고 있으며, 결혼이 깨어지는 재앙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러한 비극이 우리 가정들을 덮칠 때,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해결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고, 무능해 보이는 상황에 처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히 고백해야 할 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잘 준비되어 있는 결혼, 가장 잘 구비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을 오염시키는 문제들에 의해 우리는 전혀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준비라고 하는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상고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줄로 압니다. 1. 결혼전 상담 그 필요성 우리는 결혼 면허증을 획득하는 일보다 운전 면허증을 따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운전자를 위한 도로주행 연습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을 결혼에 완전히 헌신하기 이전에 상담을 받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일,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차량은 세심하게 관리하며, 과연 안전한지 잘 점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모양과 형편이 다른 도시나 고속도로를 운전해야 할 때,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자동차 정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혼 전에 취할 수 있는 모든 경계조치를 취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산산이 부서진 삶과 그에 대한 간증들은 우리가 다만 함께 사는 인생의 여로가 우여곡절이 많은 길이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만 했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가 상담해야 하는가? 그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만이 상담에 응해 왔으며,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에 응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상담을 시작하면,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결혼생활을 해보면, 상담을 받아야 하는 범위와 또 상담을 받는 시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들 대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부모로서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한 좋은 가이드라인과 안전장치 등의 성경적인 교훈들을 잘 따르기만 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더 나이 많고, 경건한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는 부분을 맡도록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딛 2:3-5). 제가 믿기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 안에서, 그리고 전적으로 빈틈없고 본이 되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평판이 좋은 성도들도 상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상담에 응할 수 있는 인격과 성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아보고 책임지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지역교회의 장로들의 자격과 같습니다. 이러한 경건한 감독들은 그들 사역의 결과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상담할 것인가? 충분한 기도와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 체계적인 상담이 필요합니다. 상담이 시작되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잠 18:13). 제가 확신하는 바로는 미리 준비된 질문지에 의해 체계적인 질문이 이루어지고, 문제점들이 충분히 검토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기록된 것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약 1:19 참조). 무엇을 상담할 것인가? 결혼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문제는 그저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에 다루어야 할 주제들은 다양하지만,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이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필요성. 2. 결혼과 가정을 세우는 원칙과 우선 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 3. 개인의 독특성 및 서로를 용납하는 일. 4.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 및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성 차이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담긴 그 엄청난 잠재 력. 5. 결혼의 필요성 - 세 종류의 사랑: 에로스(결혼 관계를 통한 친밀성), 필레오, 그리고 아가페, 그 차이점과 독특성이 결 국 사랑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룸. 6. 가족계획 - 자녀의 수. 7. 욕구의 충족 - 욕구의 다양한 측면이 고려되어야 함. 8. 역할, 서로를 존중함과 책임 - 여성의 위치와 남성의 위치. 9. 의사 결정 - 의사 결정에 있어서 쌍방이 차지하는 비중. 10. 배우자 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길 것인가? 아니면 원수로 여길 것인가? - 선택 사항! 11. 의사소통 -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이해함. 12. 갈등과 해결 - 무엇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가? 부지 중에 "소리를 지르며" 싸울 것인가? 아니면 신사적으로 "그래요. 함께 풀어봅시다!"라고 할 것인가? 용서에 대한 서로의 책임. 13. 성생활 - 이 부분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음. 그러할 때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게 됨. 14. 서로에 대한 헌신. 15. 재정 및 그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 숙고할 부분 한 젊은 부부가 제게 자신들을 상담해준 상담사가 서로에게 러브 레터를 쓰도록 조언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느끼고 있는 특별한 감사와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을 흐뭇하게 할 뿐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문장은 그때 상담사가 그 부부에게 읽도록 권했던 것입니다. 또다른 제안을 말씀드리자면, 각자 개인적인 영적 성장 기록을 하도록 권하고 영적인 목표 등을 써보도록 함으로써, 함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에 대해 참으로 열리게 될 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이 되겠습니까! 함께 힘쓸 일(미 6:8) 1. 정직 - 결혼할 상대와 상담자와 및 주님 앞에서 서로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일의 필요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겸손 - 결혼과 의사소통 모두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태도 한 가지는 "우리"라고 하는 연대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자기 중심과 교만과 자기 주장으로 점철된 "나" 혹은 "내 생각" 때문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는 신앙 태도를 함양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태도를 바르게 고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 소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3. 소망 - 결혼과 이를 통한 연대감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그렇게 하셨고, 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값진 축복들을 경험하도록 도우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4. 들을 수 있는 귀와 순종할 마음의 자세 -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준비를 하십시오. 상담 참여 횟수 이것은 이처럼 필요하고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상담자를 포함하여 개인들의 수용성, 즉 시간을 내는 문제라든가, 상담을 통한 문제 해결 정도 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전심 사역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은 그 일의 특성 때문에 보통은 필요로 하는 만큼 충분히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주의 양 무리를 맡은 목자는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 재정 문제 이 부분도 결혼 전에 충분히 의논되어야 하는 영역으로 이미 말씀드린바있지만,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통계들은 재정 문제가 별거나 이혼사유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탐욕과 탐심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따라서 재정 문제가 크던 작던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점차 물질주의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많은 결혼이 부채의 짐을 안고 시작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비 외에 추가된 여러 금융 비용들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수입을 초과하여 외식 비용이 지출되고 있다면 체면 유지는커녕, 오히려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과도하고 무책임한 소비는 다만 재앙을 부를 뿐입니다. 질병이나 예상치 못했던 사고는 잘 계획된 가계부에 차질을 줄 수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경고의 말씀이 히브리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주님은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선언하신 후에, 곧 이어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최고한 자원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계십니다. 즉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날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큰 확신이 따라 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매우 실제적인 영역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재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부분과 우리가 한 몸 지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를 위한 부분과 우리가 진보를 보기 원하는 주의 사역을 위한 부분을 따로 떼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라고 하는 원칙을 망각하고,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물질적인 축복을 위한 위대한 회계사이시며, 경영자이신 분으로 마땅히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번성케 해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정직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심지어는 미래를 위해 예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의 마땅한 바입니다(딤전 5:8). 적당한 수입과 여러 가지 혜택들이 보장된 좋은 직장을 갖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와 동시에 주님은 우리에게 때에 맞는 하나님의 요구를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균형감각을 갖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시간외 근무를 많이 함으로써, 아내나 가족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재정 예산과 균형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결혼과 가정(8) - 친밀함으로의 여행 데이빗 올리버 -------------------------------------------------------------------------------- "그 사람과는 대화가 되질 않아", "우린 서로 통하질 않아", "그는 전혀 이해를 못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이러한 말들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5)가 돌아다닌 흔적을 보여주는 발자국들입니다. 무언가 부부간의 기쁨의 원천을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주님과의 깊이 있는 사귐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요 15:5).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이 땅의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관계인 결혼관계에 설레는 감정을 가져다줍니다. 결혼의 주춧돌인 사랑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갈 5:22)에 의해 꽃을 피웁니다. 친밀함은 결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숭고한 목표입니다. 친밀함은 육체적·정서적·영적인 연합을 통해서 실현되는 실체입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의 주된 주제는 곧 부부가 서로 나누는 순결하고, 친밀하며,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사랑입니다. 이 "노래 중의 노래"(아 1:1)는 하나님과 사람,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엡 5:32) 사이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그러한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상적인 관계가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지, 아가서에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의 부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반면에, 신부의 부족함은 교훈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결혼관계에 있어서 결코 어느 한쪽에만 잘못이나 결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결혼관계를 발전시킬 주요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남편에게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상호간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 자체만으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보존하며, 향유하는 일에는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필수적입니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은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대화의 문이 닫힐 때 아가서에 보면 관계의 발전에 방해를 받는 장면이 두 번 나타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아가서 3:1-4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자의 존재를 당연히 여겼는지, 그녀는 너무 바쁜 나머지 그의 필요에 반응하지 못한 것 같이 보입니다. 물론 앞서서 그는 자신의 기대하는 마음을 이미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아 2:14)고 표현했었습니다. 하지만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은 부부간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대화는 그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를 통해 사랑이 성숙되어지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을 나누는 일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깊어 가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신뢰하는 친밀함은 결혼관계를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결코 처음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초기에는 다만 친밀함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존재하며, 그 목표를 향한 자원함과 약속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목표를 향한 움직임은, 우리가 서로에 대한 기대들에 대해 함께 대화하며 그러한 기대들에 서로 반응할 때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경청이야말로 배우자의 욕구를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는 말씀은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킬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를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인도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헌신이 없는 결혼은―그밖에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로―의미 있는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화에 있어서 두 번째 실패는 아가서 5:2-7에 나타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사랑하는 자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해 신부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감싸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아로 가득했습니다. 이기적이지 않는 것, 곧 이타심이 대화에 있어서 두 번째 열쇠에 해당합니다. 그저 나 자신의 관점에서만 결혼관계를 바라보는 것은 대화를 제한합니다. 다른 관계에도 그렇듯이, 부부 사이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쌍방이 동시에 듣는 것은 분명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자의 말에 반응하며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임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바로 그 순간에 대화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배우자의 필요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선 쌍방간에 자신의 필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배우자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하는 권리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섬기겠다고 하는 선택입니다. 배우자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자의 필요를 알아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결혼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를 닮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3).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경청이야말로 조화를 이루는 열쇠입니다. 경청 여부에 따라 배우자의 영적·정서적·사회적·경제적·육체적 필요들이 채워질 것도 결정됩니다. 대화는 종종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손을 붙잡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침묵이 더욱 풍성한 표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침묵은 다른 한편으로 파괴적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 하거나, 혹은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방편으로 침묵을 사용하는 것은 대화에 있어서 두 가지 열쇠 모두를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할 것을 택하는 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선택입니다.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한 침묵은 자신의 필요를 알리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남편이 감정이 격발되어 화를 낼 때에라도 아내가 잠잠히 순종하고 따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내들은 남편의 원자로의 시동 장치가 막 가동되는 순간, 남편을 대하는데 있어서 친절하고 지혜롭게 행동하기보다는 움츠러들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 남편이 남편 자신과 결혼생활에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꼴이 됩니다. 그 어간에 아내들은 기대하고 존경했던 남편에 대한 실망을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남편에 대해 원한을 쌓게 되어 부부간의 친밀감을 제한하게 됩니다. 남편이 격분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필요를 다루고 해결하고자 남편 눈앞에 들이대서는 안됩니다. 너무 나중은 아니더라도, 전처럼 위협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합당한 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는 것과 대화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만일 서로의 필요를 배려해주는 마음과 비이기적인 마음이 대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면, 말 그 자체는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듣는 사람이 대화 중에 사용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전혀 대화가 아닌 것입니다. 연료 탱크에 기름 채우기 언어는 연료와 같습니다. 언어는 대화를 친밀함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이탈리아 형제를 알고 있는데, 그는 스페인 이발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둘 다 라틴계(Romance) 언어이기에 서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연락(聯絡: connect-삼상 18:1 참조)"되지는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사랑의 밀어(romance: 필자는 여기서 라틴어를 뜻하는 'Romance'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뜻하는 'romance'가 같은 단어로 되어있음에 착안해 언어 유희로 부부사이의 언어생활에 관한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다-역자주)로 말한다면, 그들 역시 서로 연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남편들은 남성 언어로 말하고, 아내들은 여성 언어로 말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배울 때까지, 대화는 이루어지질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서로 다른 역할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공동의 책임을 주셨지만(26-28절), 2장에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성취하기 위해 각각의 구별된 역할을 주셨습니다(남자는 15-20a절, 여자는 20b-24절). 아담은 가정 밖의 영역을 돌봐야 했고, 하와는 가정 안의 관계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남자는 행동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데, 행동의 언어란 효과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에 대한 분석이나, 성취의 결과로 성공여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감정의 언어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목표달성을 위한 편안한 방법의 강조나, 관계에 미치는 영향으로 성공여부를 측정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남편은 결혼관계 밖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취함으로써 중요성의 개념을 생각합니다. 반면, 아내는 결혼관계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취함으로써 안전의 개념을 생각합니다. 남자의 언어에 있어서, 성취는 A에서 B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언어에 있어서, 성취란 여행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에게 계획이란 A에서 B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을 발견하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여행을 하는 동안 경치 좋은 길을 찾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성취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성취를 증명해주는 보상(돈, 지위, 완전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자들은 "성취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단지 "나는 결과에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의 언어로 성공은 "내가 선두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자의 언어로는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틀림없이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두 가지 언어 모두가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퇴색되어 왔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남녀 각각의 역할들에 알맞는 언어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또 결혼의 친밀함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부부는 각각 서로의 언어를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서로 배우자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매력적인 사랑 표현 아가서에서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다양한 로맨틱한 언어로 서로의 사랑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적어도 다섯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가서 1:8에서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9-11절과 15절에서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현대의 애정 표현으로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와 같이, 사랑하는 자를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말들이 배우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낮(아 1:7)과 밤(1:13)같은 뜻 깊은 시간으로도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와 같은 표현은 단어 자체가 명백하게 애정을 듬뿍 담은 표현입니다. 아가서 1장 8절("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과 11절("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에 나타난 친절한 행동은 그 사랑하는 자가 자기 배우자를 돌보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가 그녀를 자기 잔치 집으로 데리고 갔을 때(아 2:4), 그 사랑하는 자는 적합한 선물을 주면서(상대방의 입맛, 혹은 기대에 맞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은 사랑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사랑의 표현들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것들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순서대로 열거한 다섯 가지 표현들을 가장 효과적인 것부터 그렇지 못한 것까지 차례대로 생각해보십시오. 120가지의 조합이 가능하고, 각 조합에 잘 맞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로맨틱한 어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결혼이라고 해서 부부가 같은 로맨틱한 어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만원 상당의 선물이 자기 사랑을 표현하는(적합한 선물을 주는 것) 남편의 방법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실제로 남편의 사랑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적합한 선물을 받는 것보다 격려의 말이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정이 가득한 마음으로 경청할 때, 우리는 배우자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만("왜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거죠?"), 소망("저는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쓰레기를 치워주시길 바래요")과 인정("당신이 제 손을 잡을 때면, 정말 좋아요.")의 말들이 배우자의 마음을 아는 데에 실마리가 됩니다. 배우자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관계를 원활하게 해줍니다.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인지 알 때에,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의 숭고한 목표로 나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