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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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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크리스챤이란? - 알버트 N. 마틴
lhyunsik

기록:알버트 N. 마틴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알버트 N. 마틴 전적인 무지와 완전한 무시가 비극적이지도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다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가 있다. 황소가 녹색 풀을 먹고 흰 우유를 내는 것에 대해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우리들 중 거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유를 즐긴다. 우리들 중 다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전적으로 무지하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설명해보라고 강요받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만 무지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중 대부분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다; 즉 우리의 무지와 무시는 비극적인 것도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지와 무시가 비극적이고 치명적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다음의 질문에 답할 때이다.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누구인가?" 다시 말해, 성경에 의하면, 한 남자가, 여자가, 소년 혹은 소녀가 언제 "크리스챤"이란 이름을 합당하게 가질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가 진실한 크리스챤이라고 가볍게 확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거짓 결론은 비극적이고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질문에 대한 성경 답안의 4가지 면을 당신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 의하면, 크리스챤은 그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와 실제적으로 직면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챤 믿음을 세상의 다른 범주의 것들과 구별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는 크리스챤정신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죄인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근접한 탄생을 알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기록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누가복음 5:31-32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크리스쳔이란 그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와 실제적으로 직면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 각 한사람 한 사람은 죄와 관련하여 2중의 개인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는 나쁜 기록(bad record)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나쁜 마음(bad heart)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항과 죄로 인한 그의 타락의 비극적 결말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 계시록까지를 통하여 내내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추적해 간다면, 우리는 성경이 죄에 대한 교훈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모든 것을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범주- 나쁜 기록의 문제와 나쁜 마음의 문제-로 요약하는 것이 결코 과도한 축약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쁜 기록의 문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로 인한 인간의 범죄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우리 앞에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용어를 채택하였다. 우리가 지상에 어떤 개인적 존재를 가지기 전에 우리는 나쁜 기록들을 오랫동안 획득해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모두"가 언제 죄를 지었는가? 우리는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온 인류의 표상으로 지명되었다. 그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죄인되었고 그와 함께 그의 첫 번째 죄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하였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죄없이 창조되었으나; 아담이 죄를 지은 순간부터, 우리 역시 유죄로 판결 받았다. 우리는 그와 함께 그의 첫 번째 죄에 가담하였고 우리는 정죄 아래 있는 종족 중 하나가 되었다.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가 태어난 이후, 우리 자신의 개인적 죄과들을 통해 우리에게 죄를 가중시켰음을 말씀하신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고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신다; 모든 개별 죄는 죄를 가중할 뿐이다. 천국에서의 우리의 기록은 형편없는 기록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불변하는 기준으로 우리 인간의 모든 경험들을 관측하신다. 이 기준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 영혼의 바로 그 동기까지 다루신다 - 바로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부당한 화를 발하는 것이 살인의 시발점이며, 음욕을 품은 시선이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5:22, 28). 하나님은 상세한 기록을 보유하고 계신다. 그 기록은 심판의 날에 펼쳐질 "책들" 사이에 있다(계20:12). 그 책들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기준에 반대되거나, 혹은 그 기준에 맞추는데 실패하거나 혹은 그것을 범했던 모든 생각, 모든 동기, 모든 의도, 모든 행동, 그리고 모든 인간의 경험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나쁜 기록- 우리가 지은 죄에 관한 기록-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진리 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지은 실질적인 죄에 대한 실질적인 범죄를 가지고 있다. 전 인류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롬3:19). 당신 자신의 나쁜 기록의 문제가 뜨겁고, 간절한, 개인적 문제가 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아버지 아담이 죄인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죄인이라고 판결하셨던 진실과, 그리고 당신이 완전한 거룩, 공의, 순전함 그리고 의로움에 반하여 언급했던 모든 개별 단어들에 대하여 당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신 사실과 직면한 적이 있는가? 그분은 신성한 소유권에 대항하여 당신이 만지고 취했던 모든 물체들을 알고 계신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항하여 말한 모든 단어들을 그분은 알고 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분 앞으로 호출하셔서 당신의 영혼에 죄에 대해 인식시켜왔던 그분의 법에 반대하는 모든 개별 행위에 대해 설명할 것을 당신에게 요청하실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 사실들이 당신을 깨뜨린 적은 없는가? 그러나 이 나쁜 기록의 문제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부가되는 문제-나쁜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리의 죄 문제가 우리의 행위에서 비롯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담이 죄인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뿐 만 아니라 그는 또한 그의 본성에서 흠있고 타락되었다. 이 흠은 예레미야 17:9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수님은 막7:21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후 매일 매일 모든 신문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죄상들을 열거하셨다 - 살인, 간음, 악독, 교만. 예수님은 이것들이 오염된 우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퍼올려지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사회의 압력과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의해, 살인과 간음과 교만과 도적질이 나왔다"고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하라. 그것은 다만 우리의 소위 사회학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범죄와 반항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의 상태"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본성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성경이 "심히 부패"하다고 설명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불의의 출발지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7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이, 즉, 하나님에 의해 결코 정화된 적이 없는 마음은 일종의 원수이며; 그는 그것이 원수 자체라고 지적했다:"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나니".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의 마음의 기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반대하여 형성되는 꽉 쥐어진 주먹처럼 그려질 수 있다. 이것은 나쁜 마음-죄를 사랑하는 마음, 죄의 근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의 내부 문제이다. 당신의 나쁜 마음의 문제들이 당신을 괴롭게 하는 개인적 관심사가 된 적이 있는가? 나는 당신이 인간의 죄성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이론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죄성과 죄인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이 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내 질문은 당신의 나쁜 기록과 당신의 나쁜 마음이 당신에게 있어서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문제가 된 적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당신은 죄에 대한 실질적이고,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양심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의 공포를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성경적 크리스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죄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중하게 마음으로 부딪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죄의 두려움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나쁜 기록과 나쁜 마음을 양심으로 자각하게되는 시간의 길이도 다르다. 많은 것들이 다르지만, 그러나 위대한 의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인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치유를 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 성경적 크리스챤인가? 2.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유일하게 거룩한 처리법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 죄인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음을 성경은 거듭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던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처방을 준비하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KJVB-요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모습은 당신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당신 자신을 치유할 때 종교적 자기-도움의 계획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신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참된 도움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아준다는 것이 또한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신조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태까지 오셔서 우리가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방이 최소한 세 가지 단순하지만 심오하게 경이로운 초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우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한 분(a Person)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한 거룩한 처방을 진심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은 그 처방이 마치 다른 철학이나, 제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일련의 사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한 분(a Person)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KJVB-요3:16);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14:6) 죄를 위해 준비된 신성한 처방은 한 분(a Person)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며,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신성(神性)에 진실된 인간의 본성을 연합시키며 인간이 되신 영원하신 말씀이시다. 여기 바로 인간의 나쁜 기록과 인간의 나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처방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구세주로서, 두 본성이 그 분 안에서 영원히 연합되었다. 만일 당신의 개인적 죄 문제가 성경적 방법으로 처리된다면, 오직 당신이 주 예수님 개인과 개인적 관계를 가짐으로 인해 치유되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챤 믿음의 독특한 특성이다: 다급한 죄인이 구주의 은혜에 충만하여 구주와 연합되고,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구세주는 직접적으로 복음 안에서 화목시키신다. 그 실상이 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좋은 소식의 영광이다. (b) 둘째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저주받은 나무 사형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에 연관된다. 우리가 성경으로 향할 때, 독특한 방식의 거룩한 처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중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희생양이라는 구약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1:29)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복음의 신실한 가르침은 골고다의 죽으심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바울은 예수님 죽으심의 기록이며 그에 관한 메시지라고 기록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이 고린도-주지주의와 그리스 이교 철학의 중심지-에 갔을 때 그는 그들의 수사학적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했다. 나무 사형틀에서 피흘리심을 추상적 사상이나 혹은 종교적 상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리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의미한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나무에 못박히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죄를 전가시켜, 사람들의 죄를 쌓은 곳이다. 그 사형틀에서 대신하여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은 막연하고, 애매한 자기에게- 주는 사랑의 상징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여전히 죄인들을 용서하심을 보여주는 기념비이다. 사형틀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의 죄들을 예수님에게 전가하시고 그분의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그분의 아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 나무 사형틀 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마27:46)고 절규하실 때까지 가차없이 그분의 분노의 잔을 쏟으셨다.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죄들과 내 죄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지옥의 바깥 어둠 속으로 그분의 아들을 몰아넣으심을 온 인류에게 알게 하시려고 완전한 흑암으로 하늘을 덮으셨다. 예수님은 범죄한 죄인의 자세로 사형틀에 달리시고; 그에게 사회는 오직 하나의 판결을 내렸다: "그를 떠나라" - "그를 못박으라" - "그를 죽여라" - 그리고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신다. 인간들이 볼 수 있는 극장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예수님이 그분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내려져야 할 모든 맹렬한 분노를 담당하도록 하셨다. (c)셋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법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양심에서 자각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은 바뀌게된다. 우리는 티끌과 같은 작은 벌레로, 그 생명과 호흡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피조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천사들이 하나님께 반항하였을 때 그들을 영원한 어둠에 회부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히 도전하여 왔음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과오들, 인간의 마음들의 부정함의 표출을 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 후에 우리는 말한다, "오 하나님, 어찌 당신이 공의로우실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제 죄가 받아 마땅한 것을 저에게 주신다면, 저에게는 분노와 심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용서하시고 어찌 여전히 공의로우십니까? 어떻게 당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대항한 그 천사들과 함께 영벌에 저를 처하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실제로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죄사함이라는 가장 벅찬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 그 때, 인자, 대신 희생되신 한 분, 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치료법을 준비해놓으셨다는 것과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예수님의 방법에 다른 조건들이 자리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나는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확실히 나는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속박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리게 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이 주시는 아름다운 은혜의 초청을 보라! 우리는 천국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정당하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말씀 안에 자유로운 은혜의 초청장을 가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두 가지의 거룩한 단어가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 예수님의 최초의 사역에 관하여 기록된 바에 의하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15)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다(행20:21). 3.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심으로 그 조건을 채우고자 하는 자이다. 거룩한 치유법을 얻기 위한 거룩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한다. 이것들을 분리된 개념으로 논해야하지만, 회개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해서 혹은 믿음을 회개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실한 믿음은 회개로 충만해있으며, 그리고 진실한 회개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다. 거룩한 죄 처리법을 올바르게 적용할 때, 그것들은 서로 흡수되며, 당신은 믿는 회개자 그리고 회개하는 믿는 자를 발견하게 된다. 회개란 무엇인가? 숄터 카테치즘(Shorter Catechism)의 정의는 탁월한 것이다: "삶에서 회개란 한 죄인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가책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이며,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과 증오심과 아울러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순종하기 위해, 이후로 노력하며 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게 된다." 회개는 먼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탕자이다. 그의 아버지 지배 아래 집에 있는 것보다 그는 자신의 상속을 먼저 받기를 청한 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고 거기서 그는 그것을 낭비했다. 그의 죄들을 통하여 궁핍하게된 그는 자신에게 돌이켜 말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충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탕자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시를 쓰고 또는 그것을 집에 계신 아버지께 전보로 보내지 않았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20). 그는 죄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버리고, 그는 그 삶의 방식들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무엇이 그를 집으로 데려간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올바른 규칙과 넓은 마음을 가지신 은혜로운 아버지가 그곳에 계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 여기서는 모든 것들이 나빠져갑니다. 밤마다 제 양심은 발작을 합니다. 치료할 수 있도록 제게 돈을 보내주십시오 아니면 제게 한 번 오셔서 저를 좀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는 단순히 낫는다고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나아야만 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 먼 나라를 떠났다. 그가,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라고 했을 때, 우리 주님의 그림 속에 아름다운 일필이 가해진 것이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그의 아버지께 뽐내며 오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에 와서, 잠시 기도하고, 자기들이 내린 결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것은 진실한 회심과는 상관이 없다. 진정한 회개는 위대하고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그리고 내가 그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 죄를 떠나 그것으로부터 등 돌려 순전히 돌아온다면, 만일 진실로 나를 위한 은혜가 존재할까하고 의아해할 때, 놀라고 놀랍게도! - 아버지께서 나를 맞아 주시고, 화해의 사랑과 나에 대한 은혜가 넘치는 그분의 팔을 벌려주신다. 나는 감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미리 용서해 놓으시고 속해주시는 사랑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을 감싸주신다. 그러나 탕자가 여전히 돼지우리에서 살고 음녀의 팔 안에 있을 때는 탕자에게 그분의 팔을 던져주시지 않았다. 그 영혼이 세상과 결혼하고 세상의 방식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개인적 삶에서, 혹은 당신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혹은 그 체제의 신성함을 그토록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신의 사회적 삶에서, 당신은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들 중 몇사람은 간음하고 있거나, 혹은 몹시 언짢아있거나, 혹은 텔레비젼 속의 물건들을 선망하거나, 혹은 당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영화에 빠져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당신은 돼지우리에 살면서 주일에는 하나님의 집에 다닌다. 부끄럽지 않은가! 당신의 돼지우리와 당신의 죄의 소굴들을 버려라. 당신의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행태들과 행위들을 버려라. 회개는 당신의 죄를 중단할 만큼 충분히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당신이 여전히 당신의 죄들과 함께 동거하며 살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회개는 죄로부터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며, 그것은 항상 믿음과 함께 동반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복음에서 그에게 제시된 대로 예수님에게로 영혼을 던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혼이 갈급할 때 생수되시는 예수님을 마시는 것처럼, 믿음은 예수님을 마시는 걸로 비유된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리고 예수님께로 도피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유사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려울 때 구세주가 갈급한 죄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나에게 주실 것을 믿고 나 자신을 구세주께 던지는 것이다. 믿음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거기에는 예수님과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지은 죄들에 대한 완전한 용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내 것이 된다. 그분의 죽으심이 내 것으로 간주된다. 그 분 안에 성령의 선물이 있다. 양자됨, 정화, 그리고 완전한 영광스러움 그 모든 것이 그 분 안에 있다; 예수님을 택함으로 인한 믿음이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성경적 크리스챤은 죄에 대해 준비하신 거룩한 처치법을 획득하기 위해 거룩한 조건들을 전심으로 충족시키려는 사람이다. 그 조건들은 회개와 믿음이다. 나는 종종 그것들을 경첩삼아 구원의 문이 회전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첩은 두 받침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는 문에 달려있고 다른 하나는 문설주에 달려있다. 그것들은 핀으로 함께 달려있고, 그 경첩 위에서 문이 회전한다. 예수님은 그 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지 않는 자는 누구도 그분을 통하여 들어갈 수 없다. 오직 회개로만 구성된 진정한 경첩은 없다.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 회개는 세상법적인 회개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죄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처럼, 믿음으로만 이루어진 진정한 경첩도 없다.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믿음이란, 내가 죄 속에 그대로 있는 상태(in)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죄로부터(from)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은 분리할 수 없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고하신 말씀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4.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챤은 회개와 믿음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 진실임을 자신의 삶에서 증거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26:20)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2:8-10)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한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자라게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 있게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14:21-24)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순종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순종을 생산하지 못하는 믿음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사랑의 역사는 아름다운 별밤에 앉아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에 대해 시를 읊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진실한 믿음은 성경이 당신에게 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당신이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어머니에게 순종하게 하거나, 혹은 당신의 남편 혹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을 사랑하게 하거나 또는 당신의 학교 혹은 당신의 일터로 돌아가서 당신의 동료들의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의로움을 위한 입장을 취하게 한다. 진정한 믿음은 당신이 기꺼이 바보 혹은 미쳤다는 소리를 감당하게 하고- 기꺼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소리를 감당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윤리와 도덕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당신은 기꺼이 인간 생활의 순결과 존엄을 믿으며, 낙태를 반대하고 혼전순결을 중시하는 당신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성경적 크리스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오, 그래, 나는 내가 나쁜 기록과 나쁜 마음을 가진 죄인임을 안다. 나는 죄인들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치료법이 예수님과 그분의 나무 위 사형틀에서 흘리신 피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값없이 주어진 것도 안다. 그것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것도 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회개하고 믿는가?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다면, 당신은 그 고백을 예수님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9)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2:4) 당신은 크리스챤이라는 당신의 고백이 성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삶이 회개와 믿음의 열매들을 보여주는가? 예수님께 접붙힌 생활, 예수님께 순종하는 생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들을 생활로 옮기는가? 당신의 행동들은 예수님의 방식에 충성함으로 구별되는가? 완전히는 아니다-결코! 매일 매일 당신은 기도한다, "주님 저같은 자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당신은 또한 기도할 것이다. "제 삶이 주를 위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혹은 다음 찬송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수여, 내 사형틀을 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릅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예수님을 따른다. 진실한 성경적 크리스챤은 얼마나 되겠는가? 당신의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골방에서 그 답을 생각해보도록 당신에게 맡기고 싶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항상 그 답을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불원간 찾아올 임종시 평안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외에는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말라.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