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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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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2장 십자가와 사탄
lhyunsik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22장 십자가와 사탄 Philip E. Howald, Jr. 사탄과 육신적 성품 필자의 친한 친구중 한 사람은 선교지에서 본 장의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빛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체험을 한 바있다. 그의 이름과 선교지는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때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탄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생애에 커다란 시련을 허락하시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는 오랫동안 사역을 하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가 돕고자 하는 자들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독살시키고 말았다. 내 친구는 수많은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슬픔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비록 그는 구원을 받은 터였지만 그는 두 마음을 품음으로써 완전히 패배당하고 말았다. 그는 그들(원수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온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등을 벽쪽에다 댄 채로 패배하고 말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간의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자연인"으로서의 삶과 같았다. 그는 이제 그의 원수를 사랑하고 죽음보다도 더 큰 상처를 안겨 준 그 일에 대해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그저 "나는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있노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를 알고 계신다. 나는 나의 구속주께서 이 모든 일에서 어떻게든 나를 끄집어 내실 것이라고 하는 은밀한 확신과 절망적인 희망(이 소망은 결코 죽지 않는 것이었다)으로 인해 완전한 절망과 자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탄은 한때 나에게 자살하도록 미혹하였었다. 이 사건은 결국은 나에게는 선을 이루었다. 나는 사도들 중 한사람 역시 형제들을 돕기 전에 사탄에 의해 키질을 당했었음을 기억했다. 이 어마어마한 마귀의 공격 앞에 나의 영적인 상태는 큰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장난감 총을 들고 있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크게 놀란 것은 이와 같은 지옥의 화신들이 내안에서 요새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자신의 육신적 성품과 이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스스로가 대적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나는 "자아"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유일하고 분명한 해결책이었다. 예외에는 결코 승리가 보장될 수 없었다. 이들 어두움의 권세들은(마귀들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실제적인 분이신 것만큼 실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의 은밀한 이기심이 제공해 준 요새 위에 굳게 서서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에게는 대항하고 적군에게는 홍수처럼 밀려들어올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왔던 나의 자아생명을 어떻게 제거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 엄청난 의미가 내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나에게 마련해 주셨던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서는 그 순간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의 무덤위에 나의 옛 생명 즉 옛 사람을 묻는 그순간에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순간부터 악한 영들의 군대들은 내게서 물러갔고 완전히 축출되었다 우선 이 사람의 체험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도들이 마귀와 그의 역사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내면에서 자아와의 "내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엄청난 대적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성도들과 원수와의 싸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는 우리의 씨름이 . . .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항하는 것임이라." 그리스도 안에와 내 안의 그리스도 강하지만 보이지 않는 원수가 높은 처소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고 우리는 이들에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세상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이와 같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 1장과 3장에서 이와 같은 영적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악한 현 세상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3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도록 함으로써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력해질 수 있는 법을 보여준다.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난 후에 이곳 즉 아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대체하시고 내란을 끝내시게 되어 내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나니"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될 때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게 된다) 비로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적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사자의 입에서 혼들을 구출해 내는 용사가 된다. 다시 반복하지만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 앉음으로써만이 해결된다. 엡1장). 그 다음에는 육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체험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가능하다. 엡 3장). 이 두가지가 선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된다. 성도들이 세상이나 육신을 위해 사는 한 그는 마귀에게 그 어떤 상처도 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기까지는 마귀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 위대한 성경교사가 "느슨해"지고 난 후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설교자들에 대해 "싸구려" 동정심을 표현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설교자들은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 성경교사는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마귀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그가 말하는 마귀란 도대체 어떤 마귀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자아와 사탄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자아는 죄가 머무는 거처와 좌석일 뿐 아니라 죄의 생명 자체이다. 마귀의 모든 역사는 자아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아야말로 마귀가 일하는 작업장인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하고 있는 가장 교묘한 일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모든 책임을 마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내주고 나서 마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무슨 짓인가? 마귀의 교두보는 우리가 허락하는 자아의 생명이다. 자아는 결코 자아를 내어쫓지 않는다. 사탄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도 사탄에 대해 "이 세상의 통치자(군주)가 올 것이나 그는 내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노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아가 전혀 없으셨다. 사탄은 그분 안에는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마귀를 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에게 틈을 주는 순간 우리는 지옥과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자아는 십자가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사탄은 우리 앞에서 패배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을 들어보자 :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치리라"(약4:7).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순서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탄에게 성공적으로 대항하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다.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마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농담에 불과하다. 순종이 없는 자들에게 마귀는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 마귀를 올바로 대적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나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고 난 후에야 우리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그분과 함께 설 수 있다. 사탄을 이기는 길 십자가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심판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진정 유다지파의 사자로서 사탄을 심판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십자가에 돌리셨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이 세상의 통치자는 심판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가? 그분은 나약함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닌가?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비극이 어떻게 그와 같은 엄청난 승리가 될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 않은가? 본서의 저자도이 문제로 고심했다. 그리고 나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믿었다. 이런 태도는 매우 올바른 태도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대로 믿는 것은 옳은 것이다. 살인마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갈보리에서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너의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의 때라"고하셨다. 주님께서는 그 순간 열두 군단의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셨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마귀와 그의 수하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사탄을 그가 있을 곳으로 보내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시다. 도덕세계에서의 승리는 물질을 재는 저울로는 무게를 달수 없다. 도덕과 물질은 다르기 때문이다. 불신자인 한 변호사가 이렇게 물었다 : "당신네들의 신은 전지전능하다면서 어째서 마귀를 이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거요?" 이 질문은 꽤 똑똑하고 그럴싸한 것처럼 들린다. 수많은 성도들도 이에 대한 답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실로 하나님의 길을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사탄은 얼마 후 1000년 동안을 묶이게 될 것이나 다시 한번 "풀려나게 될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길은 예측 불허이다. 마지막으로 사탄이 가야 할 곳은 불못이다. 하나님께서 왜 처음부터 마귀를 묶어 놓지 않으시는 것일까? 왜? 왜? 왜? 마귀는 늘상 "만약" "만약", "왜" "왜" 라고 파고든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신뢰한다. 주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성도들은 이미 맛본 자들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임이 그들에게 입증되었다. 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죄악을 치료하였고 그들의 삶에서 마귀의 올무를 부숴 버렸다. 성도들은 마귀는 단지 종에 불과하고 그들의 구세주께서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탄의 희생자들은 갈보리의 전능한 이끄심을 통해 사탄의 눈앞에서 주님께로 찾아온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천사들과 권능들을 노획하사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공개적으로 수치거리를 삼으셨느니라"(골2:15). 주님의 승리의 비결은 육체적인 힘의 행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 모두 어린양께서 골고다의 십자가로 내려가시는 모습을 바라보자. 그분은 무방비 상태로 십자가로 가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고 아무런 저항없이 그곳으로 가셨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자아를 비우신 채 한 인간으로서 원수를 무시무시한 장소에서 만나고 계신 것이다. 사탄은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그의 주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셨고 그의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셨다. 그분은 자기연민을 버리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거절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를 거부하셨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외면하신 채 세상의 저주를 지고 가시는 그의 아들을 내리치셨을 때 그 두려운 순간에서조차도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하나님!" 하고 부르셨다. 그분의 순종은 죽기까지의 순종이었으며 그것도 십자가의 처형을 감수한 순종이었다. 그분의 승리는 그분을 온 우주의 보좌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사탄은 더 이상 딛고 설 곳이 없게 되었다. 그는 갈릴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그는 혼들을 죽인 살인자이다. 그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멸시키려고 이 세상에 온 자이다. 그는 거짓말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뱀이다. 그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함께 거룩하시고, 죄없으시며, 깨끗하신 분을 살해하였다. 자, 이제는 이 세상의 심판이있게 된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쫓겨났고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마귀들의 군대들을 괴멸시키신 것이다. 그분은이들을 포로로 잡으셨다. 그렇다. 십자가 사건으로 즉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쟁취하신 승리로 인해 이 세상과, 세상적인 원칙과, 세상의 통치자의 결정적이고 적대적인 심판은 이미 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보셨듯이 십자가는 마지막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도덕적 영적인 원칙들이 그 참모습을 드러낸 그곳이 바로 십자가의 심판이었고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승리하신 것이다.(Huegel이 인용한 Mabie박사의 글에서) 십자가로 이기는 사탄 우리 모두 이 어두움의 통치자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믿고 신뢰하며 이에 동참하도록 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지니고 있던 그 자를 파멸시키셨다. 그분께서는 평생동안 죽음을 두려워하여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오늘날도 구원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마귀로 우리를 괴롭히고 이 세상을 장악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우리와 대적 사이에 십자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여 구속주의 상처안에 숨어있게 되면 사탄은 우리 발밑에서 맥을 못쓰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지탱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는 내 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자기 사역과 오늘날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F.J.Huegel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시기 이전에 나의 선교사역을 뒤돌아 볼 때 (당시 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무지했었다) 실로 부끄러운 생각뿐이다. 그 당시 나의 사역이 왜 그렇게 열매가 없었는지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시 내가 빈약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허공을 치는 영적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고 몇몇 촌들을 불가운데서 끄집어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는 영적전투의 참 성격도 몰랐고 대적의 특성도 알지 못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볼 때 "그때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가져가 버렸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당시는 깨닫지 못했던 것같다. 왜 그처럼 많은 씨를 뿌렸는데 어째서 그토록 열매가 적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수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변화가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와같은 영적위기를 겪게된 이래로 이 하나님의 사람은 멕시코라고 하는 메마른 땅에 생명수의 강물을 흘려 보내고 있다. 그때부터 수천명의 병사들이 주 예수그리스도께 몰려왔다. 전투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사탄의 권세 또한 무시무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전진하였다. "약탈물을 용사로부터 빼앗을 수 있으며 적법한 포로를 건져낼 수 있으랴? 그러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길 것이요 포악한 자의 약탈물도 건져내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너와 싸우는 자와 싸워서 네 자녀들을 구해낼 것임이라."(사49:24-25).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토록 버림받은 것과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좁은 속안에 우리의 구원의 대장께서 갇혀 버리신 많은 경우를 깨닫게 된 이 하나님의 사람은 멕시코에서의 체험을 통해 성도들의 영적전쟁에 눈을 뜬 후 주님의 몸된 교회가 "깃발을 높이 든 군대처럼 강력"하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저귀를 벗어버리고 영적전투에 참여할 만큼 성숙하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군대로서의 모습이다. 교회의 활동에 대한 사도바울의 상징들 가운데 선한 군사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스도인은 먼저 그리고 항상 군인이어야 한다. 그는 민간인으로서의 세상적인 삶을 끊고 군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딤후2:4). 군인은 항상 거칠고, 치열하며, 목숨을 건 전쟁에 종사하는 자이다. 소심한 겁쟁이들만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전쟁에 대해 듣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바울은 군사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군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자주 묘사된다. 다시 한번 Huegel씨의 말을 인용해보자 : 십자가가 희생과 고통과 죽어가는 혼들을 위해 피를 흘리며 애써야 할 사역으로 우리를 부를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달콤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마귀적인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요람에 머물고서 자신의 구원에만 만족하면서 영적인 유아기를 자장가속에서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많지만 않더라도 이 세상은 또다른 심판을 향해 술취한채 굴러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요한복음 14장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그것만 붙들고 안주하고 있는 것이 혹시 마귀의 간계가 아닌가? 왜 기저귀를 내던지고 로마서 6장이나 마태복음28:18-20절 그리고 골로새서 1:24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당신의 어리석은 자족감을 조각내어줄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질책 앞에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는 해방받았고, 구속되었으며, 피로 산 바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 육신에게 붙들려서, 그리고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지 아니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뒤로 물러나서 패배한 채 서서 떠내려가고 있다. 완전한 패잔병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주여!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있어야 합니까? 오 주여 얼마나 더 이래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군사들이여, 멈추어서 얼굴을 들라. 그리고 "세상"과 "육신"에 못박았음을 선포하고 해방받으라. 마귀가 심판받은 바로 그곳에서 당신도 못박혔고 그리하여 위대한 승리가 주어졌음을 주장하라! 이제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울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이 세가지는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무기가 된다. 우리는 대적을 묶고 허를 찌르기 위해 그리고 그의 불화살을 꺼버리기 위해 주님의 피를 의뢰한다. 보혈앞에서는 마귀가 설 수 없다. 두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증거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뱀을 죽일 수 있다. 세번째로 우리는 죽기까지 우리의 목숨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마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도록 하라. 우리는 이미 "죽음"에 서있다. 이 죽음안에서 사망과 마귀는 이미 제거되었고 심판받았다. 우리 모두는 "희생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굳게 서있는 주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