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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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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5장 십자가와 하나님의 뜻(2)
lhyunsik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5장 십자가와 하나님의 뜻(2) Philip E. Howald, Jr. 고통을 거부하는 육신 순종과 고통은 육신과는 철저히 모순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자아가 살아 있는 곳에서는 자아와 부딪히게 되었다. 자아는 고통을 거부하며 저항한다. 고통은 육신에 의해 철저히 거부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서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고 무죄하셨지만 그가 당하신 고통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죄와 자아의 의지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최고로 받들고 고통과 수치와 죽음 앞에서도 그 분의 뜻을 붙드시기 위하여 극심한 자기 부인과 모든 시험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것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미모사가 드디어 자기 언니 스타(Star)를 미션 학교에서 만났을 때 미모사는 언니의 성경과 책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그 분을 배워서 알고 있지만 나는 그 분을 고통을 통해 알고 있어요" "인간의 죄로 인한 파면, 사악함, 비참함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돌이켜 자기 뜻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은 인간으로 타락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도 없고 다른 목적도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라고 앤드류 머레이(Andrew Marray)는 말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를 위해 죽으셨다. 그 분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셨다. 그 분은 자기의 뜻을 행하는 대신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 분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을 때 고통과 고난과 죽음마저도 그 분의 하나님의 뜻을 향하신 사랑은 제거될 수 없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죽으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행하신 분은 영원히 거하신다. 세상은 지나가 버린다.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한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심으로 십자가를 가르치신 주님 주님께서 지상에서 사셨을 때 그 분께서는 인간들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셨고 그것을 주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셨다. 그 분은 인간의 육신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을 명령하셨다. 그 분의 명령은 인간의 육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요 몹시 거스르는 것들뿐이었다. 인간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한쪽 뺨을 맞았는데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고 고통과 책망과 박해 가운데서 기뻐하라는 것보다 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외에도 주님의 요구는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와 같은 요구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을 돌이켜보고 무기력함을 깨닫고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의 은혜없이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뿐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공격하셨다. 그 분은 인간의 의지를 지적하고 그것과 모순되는 것들을 요구하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키고자 하셨다. 바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원리 강론, 교훈, 비유 등을 통해 계속해서 십자가를 가르치셨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락함을 치셔서 우리로 긴장하며 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우리의 오른손이 우리를 실족케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셨고 우리의 눈이 우리를 실족케하면 뽑아 버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것들마저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우리의 영혼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단호히 잘라 내야 한다. 이 말은 매우 "엄격한"말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부드러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성품을 우리 안에 집어 넣어 새로이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인간의 천연적인 성품"과는 모순되게 행하셨다. 십자가야말로 이 모순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지신 십자가가 자신이 하나님께 보이신 완전한 순종의 가장 숭고한 표현이셨기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내적인 십자가를 배우도록 하셨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가르치셨다. 이미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성품을 고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오신 것이다. 마른 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그의 손은 불구였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으며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는 그 손으로 아무것도 붙들 수 없었다. 그는 그 손으로 쟁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이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명령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었고 불합리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그와 같이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해야만 한다. 그는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마른손에 생명과 능력을 얻게 되었다. 즉 주님의 말씀을 택하고 자신의 자아를 버린 결과였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도 해야 할 그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에 대해 우리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라 우리 의지의 결핍이다. 주님의 명령은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 준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를 드러내고 우리의 원치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한다면 그 분께서 명령하신 불가능한 일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당신의 손은 말라붙어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것이 불가능한가? 어쩌면 당신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손을 내밀라" 당신은 당신의 손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만지시기 원하신다. 그것은 당신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구세주께서는 그 이외의 것은 결코 받아 주지 않으신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 분의 말씀대로 손을 내밀라. 그리하면 당신의 말라 버린 손에 그 분께서 부으시는 능력으로 당신은 놀라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제시하는 이 원칙은 구약의 율법의 원칙인데 어찌하여 신약 성도들에게 그것을 적용시키느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죽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 율법의 목적(뜻, 목표)을 성취하셨고 지금도 성취하고계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면상 충분히 다룰 수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당신은 그 사람 앞에서 혹은 그 단체 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가? 구세주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당신의 말라 버린 혀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오는 그 순간 입을 열어 증거 해야 한다. 당신은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것이다. 죽고나서 입을 열라 죽으면 살 것이다. 죽으라(자아에 대해), 그리고 담대히 나서라. 그리하면 당신의 말라붙은 혀를 가지고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증거 하는 말로 마귀를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자아가 그 과정에서 죽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당신의 자아가 십자가를 붙들 때 사탄은 그의 요새를 잃게 된다. 당신의 다리는 마비되었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께 순종으로 다가설 수 없는가? 그 분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갈 수가 없는가? 당신은 어쩌면 "주여 그곳만은 안됩니다"라고 불평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꼭 그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자아는 다른 곳들에는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은 그 곳만은 안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아를 보좌에서 내려오도록 하셔야 한다.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이야말로 당신이 명백히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분은 당신의 발을 통해 당신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주님께서는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하신다. 당신보다 훨씬 더 심한 불구자도 그 불가능한 명령에 순종하고 나서 다리에 힘을 얻어 "걸었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당신의 절름발이 발은 치유된 것이다.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라. 당신을 굴복시키고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하라.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당신은 걷게 될 것이고 뛰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달콤하다고 노래할 것이다. 벙어리의 입은 열릴 것이고 찬양이 흘러나올 것이다. 더 나아가 "절름발이가 수사슴처럼 뛰놀 것이다." 믿음의 순종이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위대한 원칙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여덟가지 복은 천년 왕국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이 육신적인 자아에 대해 거스르는 내용이 몹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의 생활 여건이 훨씬 나아지게 될 천년 왕국에 가서야 이 높은 수준의 계명들이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사자의 발톱에 죽어 간 것은 어찜인가?어째서 그들은 사자가 짚을 먹게 될그날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구세주께서는 인간의 이기적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명령들을 인간에게 요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팔복설교를 하신 것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은 그의 모든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제쳐놓고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여 자아의 사악한 교만과 자기 존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복된 뜻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다. Huegel의 말을 들어보자 십자가의 능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 마음이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토록 애착하던 것이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던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다 할 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외치게 되는 것이다. '오 하나님, 당신과 자아의 연합으로부터 나의 생명을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아끼지 마시고 제거하소서'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위대한 승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바울이 고백했듯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로 자아에 대해 죽게 만든다. 그렇게함으로써 십자가는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연합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받아들인다. 그 어떤 다른 종류의 구원도 허상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당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여라 따라서 당신이 인생에 어떤 상황이나 어려움에 처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매번 "죽을 기회"를 엿보라. 당신이 하나님께 살려 한다면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죽어야 한다. 당신의 바라는 바는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이미 무시되었는가? 당신의 지혜는 내던져졌는가? 당신의 마음의 상처는 어떠한가? 당신의 의견이 조롱을당했는가? 당신은 거짓 비난을 받았으며 당신의 이름은 악한 것으로 낙인 찍혔는가? 이 모든 상황중 그 어떤 것이라도, 혹은 모든 것을 당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매 상황마다 당신의 교만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 죽을 기회를 얻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 받을 것이다. 당신의 자아 의지, 자기의, 자기 방어는 실로 당신의 가장 커다란 대적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참된 위치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위치로 당신을 이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영광스러운 진리 즉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생명은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중심을 향한 생명이요 하나님께 고정된 생명이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셨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이 지상 생애에서 "나의 평안" "나의 기쁨"에 대해 최초로 말씀하셨던 분(그런데그 분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의 밤에 평안과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라)이 가지고 계셨던 그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위해 기도하시면서 "나의 기쁨이 그들 안에서 충만케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의 최악의 순간인 죽음 앞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분께서 그 순간 그의 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잘 말했다: 기쁨은 완전한 순종의 결과이다. 기쁨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기쁨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우리의 혼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자기 아버지로 취하셨고 결국은 아버지가 내리신 잔이 십자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뇌 가운데서도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나이다'라고 고백하셨다. 이 결단은 피를 요구했고 결국 그 분은 피를 대가로 치르셨다. 우리 모두 구세주이신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받아들이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뜻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즐거워하자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머리를 하나님께 숙이고 하나님의 복된 뜻만이 이루어지도록 하자 그리스도께 완전히 순복하고 의지를 바친 사람으로는 조지 폭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실로 "나무처럼 곧았고, 종소리처럼 순수했다. 우리는 결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반면 그가 거짓 고소를 당해 죄수들과 함께 투옥되어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곳은 더럽고 추잡한 곳이었다. 남녀 모두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장소가 비록 형편없는 곳이기는 했어도 죄수들은 나에게는 모두 사랑스러웠고 내 말을 잘 들었다. 그들중 몇몇은 진리를 깨닫기도 했다." 그는 후일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감옥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낼 수 없는 그런 감옥은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구령의 기쁨은 얼마나 실제적이며 또 전염성이 강한지! 그런 기쁨을 가진 사람은 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신실하신 창조주께 하듯, 의탁할 지니라(벧전 4:19)."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주신 것이 그 분을 믿는 것뿐 아니라 그 분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도 있음이라(빌1:29)." 그 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의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이와 같은 위로의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은 얼마나 달콤한지. 마담 귀용은 이와 같은 축복을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다른 사람의 혼을 위해 수고하면서 견뎌 내지 못한 고통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나의 용기도 나의 열심도 결코 꺾지 못하였구나 죄인들과 방황하는 자들에게 화평과 사랑의 증인으로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그 분께서는 내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시련에 못지 않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로 이 사명을 감당토록 하시기 위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나를 준비 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