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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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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4장 십자가와 하나님의 뜻
lhyunsik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4장 십자가와 하나님의 뜻 Philip E. Howald, Jr. 인도소녀 미모사 나는 미모사(Mimosa)라고 하는 불쌍한 한 인도의 소녀를 생각하고있다. 그녀는 위대하신 창조주의 사랑에 대해서 짤막한 메시지를 들었다. 그 위대하신 사랑이 인간의 구속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녀는 그에 대해 들을 시간이 없었다." 미션스쿨에 다녔던 그녀의 언니처럼 그녀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잔인한 아버지가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무려 22년간이나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런 처지에서 하늘에 계신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 짤막한 메시지를 그녀가 기억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그 사랑에 사로잡혔다. 실로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집으로 쫓겨나 고통과 배신과 절망에 처하게 되었었다. 결국 그녀는 속아서 불행하고 비참한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게으른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밭에서 노예로서 일해야 했다. 너무도 큰고통 가운데 그녀는 드디어 그녀가 단 한번 그것도 아주 조금밖에 듣지 못한 그분께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오 하나님, 내 남편은 나를 속였습니다. 그의 형제도 나를 속였고 심지어는 저의 어머니마저 저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를 속이지 않으실 것입니다."그녀는 잠시 기다린 후 하늘을 쳐다보고는 두손을 쳐들고 이렇게 계속 기도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에 대해 당신께 불쾌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선하시기 때문입니다"(그녀는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매우 친밀하게 당신(You)이라고 불렀다). 그후 그녀는 오빠로부터(그는 모진 자로서 이교도였다)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는데 인도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요 잊어버릴 수 없는 짓이라고 한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어서 서구사회에서는 그와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사건이 있기 전 그녀는 한 나이든 그리스도인(매우미적지근한 신앙인이었음)을 우연히(?) 만났으며 그녀의 인생에 있어 두 번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한 문장으로 된 간단한 것이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의 모든 일에 놀랍게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그녀에 대한 그분의 인도하심이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그녀의 오빠의 집에서 크게 모욕을 당했고 계속해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 그러나 미모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새롭게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그들을 용서했고 그 집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 모든 사건을 하늘에 계신 그녀의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선하옵니다." 에이미 카마이클 자매의 시 에이미 카마이클 자매(Amy Carmichael)는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시로써 잘 표현하고 있다. 슬픔을 없애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어 가는 얼굴을 잊겠노라. 텅 빈 그것은 다시 채워지겠지 내 안에서 깊은 탄식소리 들리나, 멈추거라" 헛되도다, 그 말은 헛되도다, 헛되도다. 잊어버린다고 화평이 오는 것이 아니니라. 이와 같이 첫 번째 조치가 실패로 돌아가고 나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간구해서 빈 마음을 채우려고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행동하고 행동하리라, 어떻게든 애를 쓰면 내 영이 불붙겠지 오 남자의정열을 꺼버리는 눈물이여, 멈추거라." 헛되도다, 그 말은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애쓴다고 화평이 오는 것이 아니니라. 혹은 이와는 반대로 뒤로 물러나 조용히 초연해한다. 그는 이렇게말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 조용히 있겠노라. 어찌하여 인생의 풍랑 속에 빠지리요? 문을 걸고 고통과 함께 하리. 욕망, 그대는 나를 속이는 자니 그대는 멈추거라" 헛되도다. 이 말은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초연해 한다고 화평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는 "나는 희생자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순복하리라"이다. 큰 종의 억지 복종인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복종하겠다 나는 패배하였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부를 가져가셨다. 오, 쓸데없는 불평일랑 그만 두라. 불평은 멈추거라" 헛되도다. 그 말은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어쩔 수 없는 복종 속에도 화평은 없느니라. 드디어, 육신이 추구하던 모든 오류가 실패로 끝나고 실로 축복된 순간이 오게 된다. 자아는 죽고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며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깊은 슬픔을 받아들이겠노라.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의 아들인 나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실 것이라." 이제야 그의 안에 있는 노고는 끝이 났다네 그 말은 헛되지 않았네, 헛되지 않았네. 이는 기꺼이 받아들임 속에 화평이 있기 때문이라네. 저항할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여야 함 다음 장에서 우리는 마귀에게 대항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먼저 철저히 항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허락하시는 고통과 질병을 대항하거나 벗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신경증 환자가 되어 버린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통이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에 대항한다. 이 불쌍한 영혼들은 그와 같은 고통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보내신 것이요 따라서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야 승리와 평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들이 그 분께로부터 왔다면 그 분께로 가야 그 문제가 풀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일이 분명히 마귀의 직접적인 역사요 따라서 저항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그 어려움을 받아들일 때 평강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Carmichael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울부짖는 사자(먹이를 삼키려고 달려들고 있음)를 대항할 힘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을 할 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숙명론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주님과 동역하는 적극적인 마음 자세로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적극적으로 원해야 한다. 믿는자에게 모두 적용되는 신유인가? 우리는 한때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않는 사람들을 접촉한 적이 있었다.그들은 십자가에서 죄가 구속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치유 역시 완전히 이룩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을 끈질기게 거부했다. 그들에 따르면 아무도 멸망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치유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갖고 기도하면 신경과 사고가 긴장되고 결국은 치유는 커녕 정신적인 병까지 얻게 되는 수가 있다. 아무것도 배운바 없던 불쌍한 미모사는(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는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령에 의해 올바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단번에 오지 않지만 평강은 순간적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그녀는 주님께서는 치유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화평은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 왔다. 그녀는 순수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 무엇보다 평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고초에 대한 욥의 신앙 우리는 욥이 마귀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마귀를 더 잘 물리칠 수 있었을텐데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내가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자 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을 진대 나쁜 것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뭘 모르는 성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탄이 빼앗아 갔으니 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말했다. "주신 분도 주시요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 욥은 모든 재산을 다 빼앗겼고 심지어는 심한 병까지 얻는 고초를 겪었으나 전혀 '자아'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나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보다 더 마귀에게 큰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탄은 계속해서 욥을 공격했지만 그에게서 조그만 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욥은 하나님께 반역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마귀는 욥을 어찌할 수 없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욥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루심을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옵을 본받는다면 결코 아무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루심이 결국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페이버(Faber)의 찬송을 들어보자. 하나님 편에서는 자 항상 승리하네. 그에게는 어떤 기회도 잃는 법이 없네. 하나님의 뜻이 그의 희생을 딛고 승리할 때 그에게는 실로 달콤하다네. 그가 축복하시면 질병도 유익하고, 그 분이 축복치 않은 것은 좋은 것도 나쁘다네. 아무리 나쁘게 보이는 것도 그 분의 뜻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네. 고난과 바울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그것은 마귀의 책략이라고 쉽사리 주장할 수도 있었다. 사실 그 당시의 네로는 마귀의 종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네로는 간수에 불과하다고 무시해 버리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 바울"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네로의 치리 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사무엘 러더포드를 기억한다. 그는 기쁘게 고난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나는 곧 아버딘(Aberdeen)에 있는 왕궁으로 가노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었고 그곳에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네. 나는 인간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없을 걸세. 심지어 나의 쇠사슬마저도 금빛으로 빛나고 있네. 그 어떤 펜으로도, 그 어떤 말로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네." 이와 같이 주님께 순종하는 영혼을 마귀인들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마귀는 뜨거운 숯불을 너무 뜨거워 떨어뜨리듯이 그런 사람을 내버리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의 주님"(따라서 모든 상황에서의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철저히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방법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온전한 정복자가 되려면 나의 주인께 철저히 순복해야 한다. 그 분의 대문 위에 나의 귀를 대고서 귀를 뚫으면서(자진해서 노예가 되겠다는 서원임) "나는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결코 주인님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되지 않으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헌신과 시험 참된 헌신은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중세때 영적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쟁취한 것으로 유명한 귀용(Guyon)여사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님께 완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는 자는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될 수 없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완전히 헌신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바로 고난이 시험인 것이다. 모든 것이 행복한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것은 자연인도 할 수 있다. 자기의 길이 어긋나고, 기대감이 무너지고, 슬픔이 넘쳐 날 때 하나님의 뜻에 기뻐할 수 있는 자는 헌신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시련은 기피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의 참된 모습을 검증하는 시험으로서 환영받아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잠시 있다 지나가 버리는 위로가 있는가 하면 참되고 지속적인 위로는 완전히 자신을 포기할 때 즉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으로 자신을 드릴 때만 찾아온다. 십자가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신비를 연상시킨다. 아담이 전능하신 왕께 반역하여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세계로 타락해 버리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아담 앞에 반역과 죄악으로 인한 파면과 비참함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으로 상함을 입으신 구속주를 제시하셨다. 죄란 자아를 드높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아보다 더 강력한 분께서 자아가 차지해 버린 보좌를 되찾으실 때까지는 자아가 지배하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 분께서 나를 총리를 시켜 주신다면 나는 그리스도께 나의 왕좌를 내어 드릴 텐데" 실로 자아의 끈질긴 집념이다. 그러나 자아의 의지는 본질상 자기 파괴적이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지배받지 않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에 지배를 받게 되어 범죄케 된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멍에는 가볍고 쉽다. 만약 이 멍에를 벗어버린다면 그는 자아 의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Bernard of Clairvaux). 자아가 하나님의 보좌를 차지해 버리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셔야 했다. 예수님의 모범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께서는 첫 번째 아담의 일을 무력화시키고 뱀의 머리를 부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첫 아담이 자신을 드높인 반면 마지막 아담께서는 자기 자신을 비우셨다. 첫 번째 아담의 교만이 하나님을 자기 보좌에서 몰아낸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솔로몬의 궁궐이 아닌 말구유를 택하여 탄생하셨다. 그는 지상 생애 동안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던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낙원에서 시험을 받고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 분은 들짐승들과 같이 광야에서 40일간을 지낸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 분의 생애는 완전한 자기 부인이었다. 그 분은 이 땅에 사시면서 머리둘 곳이 없으셨다. 그 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을 세 번 드리신 후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완전히 자아를 거부했던 그 분 삶의 절정이었다. 사실 그 누구도 그 분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 분은 자진해서 희생 제물이 되셨고, 자진해서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자진해서 모욕을 당하셨고, 자진해서 범죄자로 취급당했고 자진해서 저주받은 나무 위에 치욕적인 방식으로 매어 달리셨다(Huegel). 이 분은 요한이 외친 대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사람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고 조롱하였다. 친구에게 버림을 받고, 대적들에 의해 조롱을 당하신 그 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 감당하셨다. 그 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아담께서는 첫 번째 아담의 자아를 처리해 버리신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은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