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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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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2장 십자가와 육신
lhyunsik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12장 십자가와 육신 Philip E. Howald, Jr. 육신의 고백 만약 육신이 말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육신은 십자가를 보고서 아마 아미엘의 고백과 비슷한 고백을 할 것이다.(이 고백은 Amy Carmichael에 의해 인용된 바있다). 아미엘은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언도받고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들을 놀랄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란 말인가? 끊임없는 굴욕감과 아울러 나의 "노예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갔고 나의 행동범위는 점점 좁혀져갔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요 비참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결국은 숨이 끊어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하나 하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육신에 대한 판결 - 십자가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바로 십자가이다. 한마디로 육신은"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바울은 오랜 신앙여정 끝에 "내안에는 (즉 내 육신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깨어있는 성도는 "아니 나에게도 바울의 이 고백이 해당된단 말인가?"라는 갈등을 겪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육신의 생각(혹은 육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순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복 할 수도 없다." 결국 판결은 내려졌고 심판은 집행되었다. 육신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저주와, 십자가 처형이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것만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육신은 한 떼의 더러운 무리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운명에 처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그의 정욕과 애정"과 더불어 저주받은 나무에 못박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성취하셨다. 즉 그분에 의해 옛 생명은 죽고 새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죽음은 결코 생명을 상속받지 못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육신은 "지옥의 냄새"를 풍긴다. 육신은 썩은 냄새만을 풍길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가야할 곳 곧 십자가로 보낸 것이다. 성경은 "육신"을 "성령"과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타락한 상태에 놓여있는 인간의 성품과 연관시켜 제시한다. 성경은 육신의 뜻, 육신의 욕망, 육신의 생각, 육신의 지혜, 육신의 목적, 육신의 신뢰, 육신의 더러움, 육신의 일, 육신의 싸움, 육신의 영광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육신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육신을 전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안간의 감정, 사고,능력-인간의 모든 의지, 생각, 에너지-이 모든 것은 육신을 주인으로 섬긴다. 이 육신은 십자가로 가야만 한다. 육신 역시 십자가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도록 해야한다: "구원의 희망은 전혀 없구나, 모든 희망은 사라졌고 이제는 숨을 거둘 때가 다가오고 있다. 희망도 미래도 사라져 버렸도다. 바로 이것이 내가 처한 상황이로다." 십자가는 바로 이 인간의 육신적인 자아의 생명을 붙들어다가 심판을 선언하고 이 심판으로 육신은 사망에 처해져야하는 것이다. 아미엘은 자기에게 내려진 그 잔혹한 선고를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을 그리스도에게 내리심으로써 우리들로(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동일한 심판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는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이제 그분의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정)과 정욕을 십자가에 달아 버렸느니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드려라 이제는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즉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처럼 살면),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해주신 죄로부터의 자유는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입증해주는 다음 말씀을 주목하기 바란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주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그분께서 너희 안에 거주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니라."(롬8:11,12). 이제 육신은 심판을 받았고 우리의 위치는 "성령안"이 된 것이다. 아직도 다루어야할 자아 비록 성도가 바울의 권면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김"으로써 로마서 7장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 안에 아직도 구속받지 못한 부분 즉 육신을 통해 자아가 자기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도 우리는 육신 즉 "속세의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죽을 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번 8장에서는 육신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이 제시되어있다. 승리하는 성도라면 아직도 다루어야할 여러 가지 형태의 자아의 모습에 대해 알고 있어야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섬김에 있어 자기신뢰와 자기존중이 숨겨져 있으며 약간의 고통에도 자기를 보존하려는 성향과 자기연민이 드러나며 조금만 오해를 받기만 해도 자기방어와 자기변명에 급급하기 일쑤이다. 생활에 있어서는 자아추구와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표출되며 약간의 시련만 주어지면 자신을 점검하며 자신을 비난하는가 하면 일상적 생활에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는 자기주장과 자기존중으로 일관하며 지식에 관해서는 자기자랑과 자기 주장을 펼치기 일쑤이다. 약간의 성공이 있을라치면 자기찬양과 자기축하에 정신이 없고 영적인 성취가 주어질 경우 자기의와 자기만족에 빠지고 만다. 공개적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자기를 내세우기 일쑤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생은 자기사랑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육신은 "자기"(I)를 내세우는 전문가이다. 지금 열거한 것들은 우리가 찾아내어 십자가로 가져가야할 "육신"의 수많은 모습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맨틀(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부르충(Wurtzung)궁전에는 유리로 된 방이 하나있는데 이방은 천개의 거울 홀이라고 불린다. 당신이 그 방에 들어가면 1000개의 손이 당신을 맞이하며, 1000개의 미소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우는 경우에는 1000개의 눈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당신 자신의 것들이다. 이기적인 사람의모습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자아로 둘러싸여 자아를 가득 번식시킨 모습 속에서 당신은 속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이 지닌 수 천개의 모습을 동시에 보지 못하도록 해주시는 것은 실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무거운 짐을 결코 담당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케 하심을 통해 구속받은 우리의 중심에 있어서는 자유를 얻긴 했어도 여전히 우리 앞에는 싸워야 할 싸움이 놓여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싸움을 승리자이신 주님 편에서 싸우게된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처해져야할 많은 부분의 육신의 모습이 남아있다. 우리는 끝내 그리스도처럼 되어야한다. 아프리카출신의 한 흑인 크리스챤은 이렇게 고백했다: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나는 성도가 될 운명에 처해졌다. 우리는 "급히" 이집트를 떠났다. 이집트로 "이를 갈면서(복수심으로)" 우리 곁을 떠나도록 하라. 이집트 쪽으로는 더이상 눈길을 돌리지 말라. 그 방향은 해방이 아닌 죽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토끼와 함께 달리며 사냥개와 더불어 사냥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 세상과 우리 사이에는 갈보리의 죽음의 홍수가 가로 놓여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 서 있어야한다. 두마음을 품지 말라 어찌하여 두 견해사이에서 머뭇거리는가? 어찌하여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가? 어찌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제공하는가? 어찌하여 육신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며 따라서 육신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분의 것인가? 그렇다면 그분의 것이 되라. 당신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말고 품위를 지키라.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시면 기도를 하면서 양심을 달래는 대신 즉각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끊어버리라"고 하시면 울고 매달려도 소용없다.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적이며 오랜동안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아왔다. 우리는 육신적인 경향이오랜동안 몸에 배어있는 존재이다. 당신은 어쩌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라고 단념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머물고자하는 "가나안인"들이 여전히 있는 법이다.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자들이다. 남아있는 육신의 모습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육신의 모습들(평범하면서도 교묘한 것들) 몇 개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당신은 어쩌면 늘 불평을 일삼는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마 "슬프고도, 달콤한 자아"에 대해 부루퉁하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면" 그분께서 당신의 수군거리는 가련한 자아를 처리하셔서 당신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심으로써 불평을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주목할 만한 것은 승리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승리가 쟁취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것뿐이다: "너희가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 살리라"(롬8:13). 당신은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당신은 그것을 죄악된 교만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다음 번에 누군가가 당신을 책망하면 그때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하라: "당신은 잘 모르시는군요, 당신이 내가 누구인지 잘 아신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말씀을 하실텐데요"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십자가와 조화를 이루고 사는 길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당신의 육신은 당신의 환경만 바뀐다면 당신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논리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환경이란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물의 영원한 본질은 그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우리가 내적인 평온을 유지하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괴롭혔던 일들은 바람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고 기억에서 멀어져갈 것이다. 바람이 불때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Amy Carmichael) 당신은 질투심이 많은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짜릿함을 가져다주는 능력의 침례를 받고 싶은 육신적인 요구를 극복하였는가? 당신은 믿기 전에 표적과 이적을 요구하는가? 육신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도 자신의 영광을 구한다. 하나님께 그와 같은 오만스러운 요구를 하는 사람은 여전히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기준을 붙들고 있는 것이며 이런 것은 즉시 십자가로 가져가야만 한다. 구약의 제사의식에 따르면 죽음을 의미하는 피가 성령을 의미하는 기름부음보다 항상 앞서 제시되었다. 우리는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분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다섯 개의 상처를 여전히 갖고 계신다. 이 상처들은 육신이 그 정욕과 욕심과 더불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 앞에 이상한 불을 드렸다가 죽고 말았다. 당신은 남들의 흉을 보는 그리스도인인가? 호기심이란 가라앉을 줄 모르는 물결과 같다. 당신의 혀는 더럽고 추잡한 것들을 쏟아내고 있는가? 나는 자기 혀를 통제하고자 뜨거운 부지깽이로 혀를 지지려고 했던 한 목사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자세는 옳았다. 그는 혀를 지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라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후일 그 목사는 "성령을 통해" 혀의 행실을 죽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타협하지 말라 열정적인 원주민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복음전도자였다. 그의 아내는 매우 자기확신에 차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녀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했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그녀의 편을 들었다. 그는 육신과 타협하고 만 것이다. 물론 가정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타협의 대가로서의 화평은 의미가 없다. 결국 성령께서는 이 설교자를 사용하시기를 중단하셨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만일 네 어미의 아들인 네 형제나, 네 아들이나, 딸이나, 네 품의 아내나, 네 자신의 생명과 같은 친구가 가만히 너를 현혹하여 말하기를 '너와 네 조상이 모르는 다른 신들 즉 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 네게 가깝거나 너로부터 멀거나 땅 이 끝에서부터 땅 저 끝에 있는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에게 동의하지 말고 경청하지도 말며 네 눈으로 동정하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며 숨겨 덮어 주지도 말고 오직 너는 반드시 그를 죽일지니, 그를 죽이는 데 네가 맨 먼저 손을 댈 것이며 그후에 온 백성이 손을 댈 지니라. 너는 그를 돌로쳐 죽이라. 이는 그가 이집트 땅, 종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주 너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오늘날의 세대는 영적으로 유약하고 거의 죽어있는 상태에 처해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달리 더이상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도 모세의 강직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못된 상태에 있을 때면 잘못을 저지른 다른 사람에게도 매우 부드럽게 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Amy Carmichael은 이렇게 답한다: 달콤한 사랑은 영적인 순전함을 가져올 수 없다. 겉보기에는 그것이 마치 믿음과 소망보다 더 위대한 사랑(charity)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찬미"하지만 그것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랑은 죄이기 때문이다. 그 원주민 설교자가 그처럼 쉽게 타협하고 만 것은 그가 이미 육신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이미 지니고 있었던 육신적 모습을 드러내도록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다. 육신은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사탄은 결코 내분되어있지 않다. 육신은 늘상 육신을 편들게 마련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어째서 참다운 징계가 없는가? 그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너무도 부드럽게 처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집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 내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 그러나 십자가에 서있지 않은 사람은 의의 편에 서있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치워버리신다.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전 5:13). 육신이 표출되는 경우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경우가 가족관계에서 일 것이다. 서로를 물고 뜯는 그러한 육신적인 모습들은 쉽게 드러나지만 가족관계에서는 육신의 모습이 매우 교묘하게 나타난다. "달콤한 사랑"으로 가장한 육신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십자가의 도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들 자신이 십자가의 길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의 한 친구가 몇년전 세상을 떠났다. 이 여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그것이 음식이든 옷이든간에-은 모두 필요한 것이며 꼭 소유해야한다고 믿도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낭비나 사치에 빠진 여자는 아니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에 탐닉해 있었다. 그녀는 매일의 삶속에서 이것들에 파묻혀 지냈다. 그녀는 밝은 붉은 색을 특별히 좋아했으며 기름진 음식과 단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녀는 이것들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들은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나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 이것은 단순한 신학이론이 아니라 진리요 삶의 원칙이며 불변의 법칙이다. 이 원칙은 이 세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욕심을 내고 우리가 자신을 위해 붙들려고 하는 것들은 얼마 있으면 잃게 되기 마련이며 금방 싫어하게된다. 이런 싫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온다. 그녀가 죽기 얼마전 그녀는 붉은 색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 역시 지방질을 거부했으며 단것은 입에만 대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녀가 평생 사랑했던 것들을 이제 와서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사랑했고 결국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제 와서는 자신의 생명을 싫어하게까지 된 것이다. 구세주께서 말씀하셨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코자 하는 자는(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자) 잃게 될 것이라." 롯의 아내는 소돔을 떠나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는 소돔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육신은 여전히 소돔의 달콤한 것들을 붙들었고 그녀는 그녀의 육신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그것을 잃고 말았다. 하나님께는 소돔이 잿더미에나 적합했던 반면 그녀는 소돔을 구출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쏟아지는 불로부터 "생명"을 구원코자 마음먹었다. 물론 이 생명은 육신적인 생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성밖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명"은 그녀가 원하는 것, 소돔에 남아있는 세상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곳의 삶을 사랑했고 갈망했고 쳐다보다가 결국은 그것과 아울러 육신적인 목숨마저 잃고 말았다.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어 육신을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십자가의 능력 오 나의 친구여, 주님께서 오시고 계신다. 당신의 생활은 어떠한가? 당신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육신에 묶여있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 십자가의 능력, 오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직 성령께만 빚진 자들이다. 당신의 삶에서 십자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당신 자신을 단호히 십자기에 못 박히셨던 분께 맡기라 왜냐하면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앞에서는 육신이 꼼작을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당신을 붙들어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단호히 분리시키도록 하라. "모든 강력한 확신은 우리를 소유하게된다. 이 확신은 우리를정복하고 흡수하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차단시킨다." 십자가가 당신의 삶을 완전히 장악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더이상 자기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된다. 그렇게되면 당신은 한 옛 성도가 울부짖은 것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께서 자비를 베푸신 자의 외침을 들으소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저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나의 모든 즐거움 안에 가시를 놓으시고, 모든 조롱박 위에 벌레를 놓으소서, 나의 즐거움이 당신께 대한 나의 온전한 헌신을 방해하거나 당신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주소서(T.C. Upham). 우리는 이번 장을 마무리 하면서 인도에서 병들어 주님의 군사로 살았던 Amy Carmichael 자매의 고백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녀는 실로 고통의 길을 배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성도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이 세상 삶의 즐거운 일들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 즉 고통을 위해 고통을 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뭇거림과 도피행각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장미왕관을 쓰고자 합니까? 그분의 손에는 못이 박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에는보석이 끼워있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맨발로 샌들을 신고 다니셨는데 우리는 고급 양말과 신발을 신고 다닙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고생을 해보았습니까? 피눈물과 애끓는 상황과 조롱을 당해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느슨한 삶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것만을 좋아하는지요 . 주님의 삶과 비교해 볼 때 근처에도 못 가는 그런 삶으로부터도 도망치려는 우리의 얄팍한 마음을 주님께서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안락과 사랑하는 자들, 재산, 소유를 갖고 싶은 마음에 노예가 되어있음을 주님께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갈보리로, 그리고겟세마네 동산으로 인도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하는 그러한 기도를 드려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그곳에 가본 적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안락함, 안정을 사랑하는 마음, 자기동정 및 자기중심적인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것만을 붙들고 있어야 하겠는가? 주님, 제가 수고로 지칠 때 당신의 계명을 무겁다고 느낄 때 내짐으로 인해 불평이 터져나올 때 주님, 당신의 손을 내게 보여주소서, 당신의 못박히신 손, 당신의 상처난 손, 나의 구세주시여, 그 손을 보여주소서. 그리스도여, 만약 내 발걸음이 비틀거리면, 내가 뒤로 물러서고자 하려하면, 사막이나 가시가 탄식을 자아내면, 주여, 당신의 발을 보여주소서, 당신의 피흘리신 발, 못자국이 선명한 발, 나의 예수님, 당신의 발을 보이소서, 오 하나님, 제가 감히 주님께 저의 손과 발을 보여드리나이다. - Brenton Thoburn Badl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