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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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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 11 장 십자가와 두가지 본성(2)
lhyunsik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났다 제 11 장 십자가와 두가지 본성(2)   요일 3:6-9 이번장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성경의 매우 어려운 부분인 요일 3:6-9에 대해 특별히 (비록 짧지만) 상고해 보고자 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과 설명들이 주어진 바 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본문의 교리적 해석에 주안점을 두다보니 요한서신의 기록 목적을 등안시 하고 있는 것같다. 그리스도와의 체험적 교제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체험적인 교제"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이와같은 교제의조건은 매우 실질적이면서도 매우 엄격하다. 즉 합당한 믿음과 합당한 행실이 그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한 변호인이 계시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성결"을 내세우는 자들은 본 구절의 앞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뒷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우리 집안부터 청소하도록 하자. 우리는 A.J 고든(Gorden)박사의 지혜로운 발언을 다시한번 상기하고자 한다. 성경에 계시된 신성한 진리는 종종 두 개의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 따라서 가장 심각한 오류는 성경의 한 극단적인 구절을 가지고 또 다른 극단적인 구절을 거부하는 것이다....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은 죄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면 죄가운데서 불완전한 상태에 만족하려는 자들은 더 커다란 이단이라고 할 수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심같이 의로우나"(요일3:7)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의로움을 자랑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들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와 "죄안에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요한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분안에 거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에 대해 요한은 다음 구절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치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의 속에 머물러 있음이요 그가 죄를 짓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음이라." 그릇된 이해 이와같은 말을 한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선한 삶이라고하는 일반적인 사실로 만족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와같은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미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끌고자 할 목적으로 요한 서신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는 이보다 훨씬 깊다. 혹자는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으로서는 죄를 짓지 못하며 오직 옛 사람만이 죄를 짓는 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극단적 생각은 그리스도인은 그 안의 죄가 완전히 뿌리 뽑혀져 자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이 그런 억지주장과 결코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바른 이해 먼저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Is born)라는 표현의 시제가 현재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의 과거의 중생체험이 아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 태어났기 때문에(was born of)라고 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즉 과거에 거듭난 사람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상태로 이 조건하에서만 이미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의 교제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설명해 보자면 요한은 우리가 영적 선택을 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으로 "태어나면" 그때는 그 상황에 관한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같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표현은 요셉이 육신을 따를 것인가 성령을 따를 것인가의 선택을 할 순간(창39장)의 상황을 잘 예시해 준다고 하겠다. 요셉은 그 순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 이 순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씨가 그의 속에 머물러 있음이요- 그는 죄로부터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육으로 더럽혀진 의복조차 미워"했던 것이다(유23). 그 순간 요셉은 분명히 "죄를 짓지 않았다". 요셉은 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태어났다." (그 순간 말씀의 씨앗으로, 그 분의 씨았으로) 따라서 나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육신과 성령 사이에서 선택해야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옛 사람과 새 사람 중에 어떤 사람으로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새로운 의무는 새로운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는 자가 태어나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때 이를 위한 새로운 빛이 새로운 복종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보장된 승리 안의 점진적 승리 앞서 언급했던 가나안 땅에 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 땅은 열매가 풍성한 땅인 동시에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던 땅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축복의 땅은 이미 그들의 유업이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을 이미 받았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을 모든 곳은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여호수아가 그의 대적들의 목을 발로 밟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역시 우리의 지체들을 즉 "몸의 행실들"을 죽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한 번에 모두 점령하라고 하셨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년 내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리니, 이는 그 땅이 황폐하게되고 들짐승들이 너를 대적하여 번식할까 함이라.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이어받을 때까지는 내가 그들을 네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23:29,30). 우리는 평생동안 새로운 영토를 계속해서 점령해 가야만 한다. 우선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 너머에 있는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보다 더 강력한 일곱 민족과 대면하여야 했다. 그들은 전능하신 분의 힘을 힘입어서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옛 생명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만약 당신이 성령에 의해 당신의 몸의 악습, 술책, 그리고 음모를 죽음에 처하게 한다면, 당신은 살게 될 것이다(Moule). 요새를 점령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우리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소유물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신다. 자 좀더 계속해보자. 이스라엘이 마주친 첫 번째 요새(점령이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은 물론이다)는 여리고였다. 그러나 "여리고 성벽은 믿음으로 무너져내렸으며" 또한 여호수아는 그 도시(성읍)안에 있었던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하루 걸러 여러번 점령하였는가? 결코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단 성읍을 점령한 후엔 이미 획득한 승리에 기초하여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며 굳건히 "서 있었다." 이 여리고에 관한 한 그들은 승리를 유지했고 "죄를 범치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결정적인 요새를 점령해야 하며(예를 들면 게으름, 탐심, 이기심 그리고 무절제한 생활 등), 그 다음에는 그 옛 생활의 한 부분에 십자가를 심어 놓고서 "굳게 서" 있으면 된다. 그 요새는 이미 점령되었으므로 그곳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저주받은 카나안인들과 타협을 한다든가 거짓 평화동맹을 맺는다면 사탄이 그의 "철병거"를 내세우며 서 있는 "산당"을 재탈환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여부스족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도전을 했다. 이 요새는 지난 400여년간 이스라엘을 대적해 왔던 유명한 요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시온이라고 하는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 성읍은 다윗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다윗은모든 지역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의 삶에는 여러분이 입성하지 못하도록 반항하고있는 요새는 없는가? 더 위대하신 다윗의 아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분 자신이 그 요새를 공격하고, 대적을 쫓아 내어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한분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안에서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is born of God) 세상을 이기느니라." 당신이 이겨야할 다음 요새는 어디인가? 당신의 삶가운데 그 어떤 부분이든 하나님에게서 "난다면"(is born) 승리는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십자가를 대한다. 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는 생명의 새로움안으로 "나는 것"이며 매번 순종이라는 방식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 승리위에 굳건히 "서게"되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그순간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요구하시는 그 수준인 것이다). 요한 뿐 아니라 바울도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두 마음(본성) 사이의 모순 사랑하는 형제여! 광야에서 뼈를 깍는 고생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할진대 두 마음을 품고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천상에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런 땅도 점령하지 못하면서, 젖과 꿀과 포도열매를 맛보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구속주를 위해 아무런 포로도 잡지 못하면서 고국에서의 영광만을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두 본성사이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아담-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로부터 공물을 받으라든가 그들을 묶어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공물이 아닌 죽음에 처해져야만 하기때문이다. 당신은 모든 열매를 뿌리채 뽑아버리고서는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경은 물론 당신 자신의 경험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두가지 본성사이에서 왔다 갖다 하는 것이나 뿌리째 옛 사람을 뽑아버리고서는 더 이상의 싸움은 없다는 주장은 모든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십자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옛 사람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을 적용하라. 십자가로 하여금 거룩하지 못한 이중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당신을 부끄럽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그대의 마음을 정결케하라." 십자가는 우리가 성도처럼 살도록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는 당장 올라가 유업을 차지하자. "성령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내자. 침체를 벗어나는 길-자백과 그리스도의 피 적용 이미 타락해버린 자들을 위해 한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자한다. (한번이라도 미끄러져 본 적이 없는 성도가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이 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죄를 당장에 자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화해하실 의향이 있으시다. 우리쪽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무지하여 지은 죄나 실패에 대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적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항상 요한과 동일해야한다. 즉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 점령해야할 땅 - 선교 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에게는 아직도 점령해야할 많은 땅이 남아있다." 우리의 눈을 들고 하얗게 익어 추수하게된 밭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가운데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전세계에 아직도 점령되지 못한채 남아있는 밭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프로그램과 목적에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오 속히 "내란"을 마무리 짓고 세상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어린양을 위해 그분의 고통의 보상을 얻기 위해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자. "다른 양"의 위대한 목자장 되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올때까지 점령하고 점령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이를 소홀히 한다면 "그들도 내가 데려와야하리라"고 하신 그 양들로인해 심히 고통을 당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 대해 여러 면에서 불복종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불순종이 아닐 수 없다. 탐심과 게으름이라고 하는 이 "가나안인들"은 -사실 하지말아야 할 것을 행함으로써 짓는 죄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가 훨씬 크다고 생각된다- 이미 교회의 생명력을 무력화시킨지 오래이다. 현재 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아 "육신을 따라" 살고 있으며 "발육감퇴"를 거쳐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아니 이미 죽은 상태에 돌입해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음은 글로버(Glover)의 Progress of World-wide Missions에서 유명한 선교지도자인 Charles R. Watson목사(카이로에 있는 미국대학교 총장)의 발언을인용한 것이다. 아직 점령하지 못한 곳을 점령하는 것이야말로 이 선교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도전임에 분명하다. 교회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기독교회가 생명력을 회복하느냐 마느냐, 수백만 인류의 행복과 복지문제, 민족들의 생활조건의 향상에 관한 문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느냐 않느냐의 문제들. 점령되지 못한 곳들은 반드시 점령되어야하며 우리는 이를 위해 대가를 치러야한다. 이 점령이 현실화되려면 먼저 우리의 삶과 마음 가운데 아직도 그리스도의 뜻에 순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령되지 못한 부분들이 먼저 점령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하신 사랑과 우리의 헌신이 요구되며 그분의 영이 역사 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완전히 점령되지 못한 부분이 먼저 해결될 때에야만 그분께서는 더 멀리 있는 요새들을 점령할 길을 여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