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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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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제 8 장 성 령- 옮겨부음
lhyunsik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 8 장 성 령- 옮겨부음 웟치만 니 성령의 부음과 내주하심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바로 우리 몸에서의 그분의 모든 다루심의 동기이자 해석이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각종 단계들을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주제를 떠나서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대해 말해보자. 이것은 우리의 모든 체험에서 우리의 생명과 봉사를 효과 있게 하는 데 결여 되어서는 안 될 힘인것 이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두 단락의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한 곳은 5장 l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이다. 다른 곳은 8절, 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이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엉뚱하거나 임의로 주지 않으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한 기초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체험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취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취하는 근거를 알아야만 한다. 성령의 은혜에 관해서는 두 방면에서 보는 것이 가장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이는 곧 성령의 옮겨부음과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지금 우리의 목적은 어떤 기초에서 성령의 이중적인 은사가 우리 것이 되는가를 보는 데 있다. 나는 그분의 역사를 외적인 표현과 내적인 표현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계속 전진할 때 우리는 이런 구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를 비교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훨씬 귀하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밖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귀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다 좋은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권리가 너무 풍성해서 그런지 우리는 쉽게 이것들을 경시한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우리처럼 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부어짐의 은혜를 우리보다 더욱 감상하였다. 그들 당시에 이 은혜는 택함받은 소수에게만 주어졌었다. 주로 제사장과 사사와 왕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모든 자녀틀은 다 이런 은사를 얻을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취할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벗 모세와 사랑받은 다윗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와 같이 성령의 옮겨부음을 입을 수 있다니! 성령의 옮겨부음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택한받은 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은혜에 대한 가치를 보고 그것이 갈급히 필요하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성령의 옮겨부음을 얻을 수 있고. 봉사할 능력을 갖기 위해 어떻게 내 자신을 영적인 은사로 장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내게 성령을 주시는가?』 성령의 옮겨부음 먼저 우리는 사도행전 2장 32절부터 36절을 읽어보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34)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35)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느니라(36)』 34절과 35절은 시편 110편을 인용한 삽입된 말씀이기 때문에 잠시 한쪽에 제쳐 놓고 먼저 33절과 36절을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먼저 인용한 두 구절을 상관하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33절에서 베드로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으로 높여지신 것에 대해 말하는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분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으셨다. 』 이어서 무엇을 말하는가? 오순절이 임하였다! 그분이 높여진 결과는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이다. 그러면 성령을 먼저 주 예수님에게 주사 그분으로 하여금 성령을 그분의 백성에게 부어주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분이 하늘로 높이 올려지심에 근거한다. 이 구절 말씀은 주 예수님이 높이 올려지셨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다. 성령의 옮겨부으심은 당신과 나의 공로와 무관하고 오직 주 예수님의 공로와 관계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고 그분이 무엇인가에 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되셨기 때문에 성령이 부어진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기에 내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으로 높이 올려지셨기에 내가 성령의 옮겨부으심을 얻었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한것이다. 죄 사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근거한다. 거듭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부활로 인한 것이다. 성령을 주심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한․것이 아니라 주님의 높이 올려지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당신과 내게 부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제 36절을 보기로 하자. 이 구절 안에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즉」이다. 이 단어는 어떻게 사용되는가? 이 단어는 이 구절의 문장의 시작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미 한 말 뒤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이미 언급된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항상 암시한다. 이 「그런즉」 앞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과 관계 있는가? 이것들이 34, 35절과는 무관하고 33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매우 현저한 사실이다. 베드로는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에 대해 말했었다.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또 그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 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너희 보고 듣는 성령을 너희에게 부어주신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이미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데 있다.』. 성령이 이 땅 위에 부어진 것은 하늘에서 발생한 일-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높여지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요셉이라는 청년은 그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자였다. 야곱은 어느 날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로 인해 수년 동안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요셉은 무덤에 있지 않고 영광과 권세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야곱은 그 아들의 죽음 때문에 수년 동안 애통해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요셉이 아직 살아 있고 애굽에서 고위에 있다는 것을 누가 그에게 알려주었다. 처음에 야곱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좋은 소식이 그에게는 사실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해준, 요셉이 높여졌다는 말은 참이었다. 그는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야곱이 나가서 요셉이 애굽으로부터 보내어준 수레를 보고서야 그 말을 믿었다. 여기서 수레는 무엇을 대표하는가? 물론 성령을 대표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로서 보내심을 받았을뿐 아니라 더우기 우리를 영광 안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거의 이천 년전 행악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께서 순교로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더욱 지금 영광 안에와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는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그분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아무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을 아는 것은 그분의 영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예수는 주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주 예수님의 높이 올려지심은 성령이 강림하신 것의 근거이다. 주님께서 이미 영광을 얻으셨는데 당신은 아직 성령을 얻지 못했다면, 이것은 가능한 일인가? 당신이 죄 사함을 얻은 것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당신의 기도가 간절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신이 한두 번 성경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인가? 당신이 자주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인가? 당신의 공로 때문인가? 아니다! 천만 번 아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에 근거하여 죄사함을 받았는가? 히브리서 9장 22절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사함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피 흘림이다. 보혈이 흘려졌으므로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해진 것이다. 이미 부어진 성령 우리가 성령의 부어주심과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원칙상 완전히 동일하다. 주님이 이미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주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그분의 피를 흘리셨는데 당신의 죄가 아직 사함받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는데 당신이 아직 성령을 얻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에 동일하나 자신은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게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자만자족하여 내가 모든것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객관적인 사실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주관적인 체험도 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실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결코 체험을 가질 수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실이 우리의 체험의 근거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칭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당신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는가? 당신이 의롭게 된 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한 것에 있지않고 주님이 이미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데 있다. 당신이 성령을 얻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다만 주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써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체험이 결여되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침례는 높이 올려지신 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은사라는 영원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도록 그분께 구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점을 보았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멈추고 찬미로 간구를 대신할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람을 위하여 주님이 이루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이다. 같은 법칙에서,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이루신 것을 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면 우리는 더이상 성령의 침례를 얻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고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면 믿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믿을 때 우리에게 체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는 복음을 매우 반대하다가 후에 구원을 받은 한 청년이있었다. 그가 구원받은지 다섯 주도 안 되었을 때 내게 일련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상해에 왔었다. 마지막 날 내가 말한 것은 성령의 옮겨부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여 내게 참으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이미 영화롭게 하셨는데 왜 지금 곧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그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 주었다. 『주여. 완전히 내가 잘못했습니다.주 예수여. 나와 당신은 종일토록 동반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두 가지 곧 당신의 영광 얻으심과 당신의 성령 부어주심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으므로. 만일 내가 아직 성령을 얻지 못했다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고 나도 성령을 이미 얻었습니다. 』 그날부터 그는 성령의 능력이 그의 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감지하였다. 비결도 역시 믿음이다. 우리의 죄사함과 성령을 얻는 것도 모두 믿음에 달렸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계신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게 되고, 주 예수님이 보좌 위에 계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을 얻는 근거는 우리의 기도나 금식이나 기다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우심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몇몇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기다림을 강조하고 「기다리는 집회」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게 된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어떠함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근거한다. 성령의 부어지심은 우리의 선량함과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량함과 위대하심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그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구원받고자 하는 뜻을 표명한 한 불신자가 있다 하자. 당신이 그에게 구원의 길을 설명하고 그와 기도할 때, 그가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위해 이미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능히 내 모든 죄를 씻어내실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이 나를 용서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하자 당신은 이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믿을 수있는가? 그렇지 않다. 언제 그가 이미 거듭난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가? 그가, 『주여, 당신이 장래 내 죄를 용서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때가 아니라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내 죄를사하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 죄는 이미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라고 말할 때이다. 사람의 기도가 간구에서 찬미로 바뀔 때, 비로소 그가 구원받았음을 믿을 수 있다. 이 때 그는 더이상 하나님께 그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어린양의 피가 이미 흘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그를 사하셨다는 것을 찬미할 것이다. 같은 원칙에서, 당신은 성령을 얻기 위해 수년 동안 간구하고 기다렸지만 아직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성령을 부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멈추고 도리어 믿는 마음으로 그분을 찬미하면서 주 예수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이미 부어졌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을 발견할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자! 성령을 얻기 위해 애쓰거나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없다. 예수님은 장차 주가 되실분이 아니라 이미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고, 지금 그분이 주이심을 기억하라.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장래 성령 얻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믿음의 문제이다. 또 믿음은 계시로부터 온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이미 영광을 얻으신고로 성령님이 이미 부어졌다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 속의 간구는 자연히 찬미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을 확실한 기초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는 우리 편에서 우리가 영접하기 위한 어떤 조건들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 말씀에는 부어지신 성령을 받는 조건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2장 38절, 39절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구절은 네 가지를 말한다. 즉 회개와 침례와 죄 사함과 성령이다. 앞의 두 가지는 조건이고 나중 두 가지는 은혜이다.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얻으려 한다면 어떤 조건을 수행해야 하는가?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그 조건은 두 가지 곧 회개와 침례이다. 첫번째 조건인 회개는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전에는 범죄가 일종의 즐거운 일이었으나 이제 이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전에 나는 세상을 매력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좋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불쌍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이다. 전에는 가장 즐겁게여겨졌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천하게 여겨지고, 전에는 아무 가치 없게 여겨졌던 일들이 이제는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서 회개이다. 만일 사람의 생각에 이런 변화가 있다면 그의 생명에는 참된 변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침례이다. 침례는 내적인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내가 마음 속으로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으며 또 함께 부활한 것을 믿었다면, 나는 침례를 주도록 요청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믿은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함의 조건은 두 가지, 즉 회개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당신은 회개하였는가?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주와 연합하여 하나 된 것을 간증하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죄 사함과 성령의 은사를 얻었는가? 당신은, 첫번째 은혜만 얻고 두번째 것을 얻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친구여, 만일 당신이 두 가지 조건을 이행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신다! 왜 당신은 한 가지만 원하는가? 두번째 것에 대하여 당신은어떤가? 가령 내가 한 서점에 들어가서 가격이 십 실링인 상 하권으로 되어있는 책을 택했다 하자. 내가 돈을 지불하고 서점에서 나올 때 부주의로 그 중 한 권을 서점 계산대에 두고 집에 와서야 그것을 발견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즉시 서점으로 돌아가서 잊어 버리고 가져오지 않은 그 책을 가져올 것이다. 그 책값을 다시 지불하려는 생각은 합당치 않다. 나는 서점 주인에게 설명하고 두 권의 책값을 드렸으니 나머지 한 권을 달라고만 하면 된다. 나는 돈을 지불할 필요 없이 즐겁게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만일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바로 이런 상황 하에 있다. 만일 당신이 이미 조건을 수행했다면, 당신은 마땅히 두 가지 선물을 다 얻어야지 한 가지만 얻을 수 없다. 당신이 한 가지를 이미 얻었다면 왜 즉시 두번째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은가 주님에게 빨리 이렇게 말하라. 『주여, 저는 당신이 죄 사함과 성령을 주시는 조건을 수행하였으나 내 어리석음 때문에 전자만 얻었을 뿐입니다. 이제 돌이켜서 당신에게 성령의 은사를 요청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 체험상의 차이 혹 당신은 「성령이 내 몸에 강림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안다. 성경은 오순절날 제자들 각 사람의 느낌과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 그들의 느낌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느낌과 행동에서 그들이 다소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을 본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 위에 강림하실 때, 그들 몸에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광경이 있는 법이다. 비록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느낌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 느낌에 따라 불가사의한 초월의 능력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옮겨부음에 어떤 특별한 밖의 표현이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의 옮겨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한 것을 안다는 것이다. 오순절날 당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했을 때 그들의 행동은 매우 특별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 그럼 그 날 베드로가 예언을 하였는가? 우리는 그날 베드로가 요엘이 말한 예언을 하였다고 단정할수 없다. 그 백 이십 명이 예언을 하거나 이상을 보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몽을 꾸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는가? 그들은 생각이 매우 청명하지 않았는가? 베드로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말씀을 인용했단 말인가? 대체 무슨 뜻인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말(을 2:28-29)은 예언을 말함과 환상을 보는 것과 꿈 꾸는 것이 성령의 옮겨부어짐에 따라 오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증거들은 오순절날에 분명 보이지 않았었다. 다른 면에서 요엘은 성령의 옳겨부음을 받을 때의 광경을 예언함에 있어서 『큰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니』, 또는 『불 같은 혀가 나타나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작은 다락방에서 발생했다. 당신은 그들이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말한 요엘의 말을 찾아낼 수있는가』 그럼에도 오순절날 제자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그럼 베드로가 요엘의 말을 인용한 것은 무슨 뜻에서였는가? 생각해보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오순절날의 체험이 바로 요엘이 말한 성령의 옮겨부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요엘이 말한 그 증거들은 오순절날 한 가지도 출현하지 않았다! 요엘서에서 말한 것을 제자들은 소유하지 않았었다. 제자들이 소유한 것은 요엘서에 언급되지 않았다. 베드로가 인용한 성경은 그의 논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는 것 같다. 이 비밀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그날 베드로가 성령의 통제 하에 말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가 임의로 한 말씀이나 합당치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으며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베드로가. 『너희의 보고 들은 바는 선지자 요엘의 말씀이 응한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의하라. 그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행 2:16)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일을 체험한 것일 뿐이다. 「이는 곧」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은 예언한 바와 동일한 일이라』는 뜻이다. 만일 이것이 성취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체험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고, 예언도, 환상도, 꿈꾸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는 곧」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일을 중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일이 동일한 부류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령은 베드로를 통하여 체험상의 차이점을 강하게 설명하였다. 밖의 표현들은 다양하고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지라도 성령은 오직 한 분이고 그분은 주이시다(고전 12 : 4-6) . 토레이(R. A. Torrey)가 여러 해 동안 목회를 한 후 성령이 그의 몸에 강림하였는데, 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가 한 말로 설명해 보도록 하자. 『나는 내가 무릎 꿇고 기도한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한다.․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신 것임) 「이것은 네 것이다. 이제 가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일서 5장 14절부터 15절에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성경에 대하여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지함을 긍흘히 여기사 내 마음에 직접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가서 전파하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사역자가 되었다. ‥‥ 이 체험 후(얼마 후인지는 모름) 어느 날 내가 집안에 앉아 있을 때 ‥‥ 갑자기 ․ 나는 내 자신이 다음과 같이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큰 소리로 외쳐본 적이 없다. 내 성품상 큰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웨슬레 교인들처럼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세.」 나는 멈출수 없었다.‥‥그러나 이 때 내가 성령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할때 성령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토레이의 「성령은 누구이시며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가?J 198-199쪽) . 토레이에게 성령이 옮겨부어졌을 때 밖에 나타난 것은 요엘 혹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비록 그것들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동일한 것이다. 성령이 무디(D.L. Moody)에게 임할 때 그는 어떻게 느꼈고 또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주 하나님께 그분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어느 날 뉴욕시에서-아, 그것은 얼마나 기억할 만한 날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 나는 그것에 대해 언급한적도 별로 없다. 이는 그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십 사 년후에야 말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계시하여 나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손을 멈추시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 나는 여전히 전도하러 다녔다 내가 전파한 것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 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다. 당신이 온 세상을 내게 준다 해도 나는 복된 체험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이 복된 체험과 비교할 때 온 세상은 저울 위의 작은 먼지같을 뿐이다. 』(무디의 아들 W.R. Moody가 지은 「무디의 생애」 149쪽) 무디가 체험할 때 밖으로 나타난 것은 요엘이 말한 것이나 베드로가 말한 것이나 토레이가 말한 것과 다 다르다. 그러나 누가 무디의 체험이 오순절날 제자들이 가진 체험임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의 체험에서 밖으로 나타난 것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동일하다. 성령의 능력이 위대한 피니(Ch』rles Finney)에게 임했을 때 그의체험은 어떠 했는가? 『성령 능력의 침례를 받기 전에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 속에서도 내가 이런 일을 체험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는 누구에게서 이 일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성령이 내 몸에 임할 때 그분은 영광으로 내 몸을 투시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부어진 기묘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인하여 큰 소리로 웃었다. 』 (「피니의 자서전」 제2장) 피니의 체험은 오순절의 복사판이 아니요 토레이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리고 무디가 체험한 것의 복사판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체험이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어질 때 그들의 체험은 왕왕 크게 다르다. 어떤 사람은 환상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남을 주께로 인도할 때 새로운 해방을 얻고,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큰 능력을 얻는다. 또 어떤이들은 하늘의 기쁨과 넘치는 찬미로 충만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광경이든 그들이 체험한 것들은 바로 오순절날의 체험인 것이다. 모든 새로운 체험이다.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우심과 관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이것」이 「그것」의 증거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다루시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우리 자신 혹은 다른 사람 위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물샐틈 없이 격리된 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은 마땅히 성령 강림의 증거로서(방언과 같은)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사람과 어떠한 표현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자유로이 행사하시고 그분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증거를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양보해 드려야만 한다. 그분은 주이시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대신하여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보좌 위에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또한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졌음을 인해 그분을 찬미하자. 우리가 단순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사실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이는 곧‥‥』임을 확실히 알고 담대히 선포하게될 것이다. 제 8 장 성 령-인격으로 내주하심 웟치만 니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의 두번째 방면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하겠다. 로마서 8장에 이를 때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할 것이다. 이는 로마서 8장의 주제가 성령의 내주하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8장 9절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 11절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등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의 옮겨부음과 같이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곧 그분이 하늘 보좌로 높이 올리우심-을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몸에 능력으로 임한 것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곧 우리의 생명 안에서 그분이 능력 있는 통치자가 되심-을 볼 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이지 않음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계시를 그들의 구원으로 삼았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선입감을 품고 있었고 성령이 옮겨부어질 때 보이는바 징조를 주의하고 방언과 기적을 높였지만 그들의 체험 속에는 모순이 가득하고 결국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그들이 성령을 얻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그들은 성숙하지 않은 갓난아이 같았다. 하나님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치료책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대한 치료책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했다. 에베소 성도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무언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엡 1:18). 거룩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의 필요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필요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 마음 눈이 밝아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리스도도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아버지와 아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나 교훈이 아니라 복된 실제인 것이다. 혹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위격이 있는 성령임을 아는가?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 임을 아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영향력-의심할 바 없이 사람으로 선을 향하게 하는 영향력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양심이 성령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악을 행할 때 성령도 그들을 질책하고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그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안에 계신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로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적이지 못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누가 그들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한 것이다.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가?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볼수 있기를! 내 안에 거하시는 분은 다만 어떤 영향력이 아니라 위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다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뻐서 큰 소리로 외칠 것만 같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인격적인 성령임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이것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말이 없다. 나는 다만 반복하여,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 친구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인격이 있는 분임을 백 번이라도반복하여 말하겠다. 나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이 질그릇 안에 비할 데 없는 보배인 영광의 하나님을 담았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이 열려서 그들 안에 감추인 보배가 이렇게 놀랍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풍성한 자원이 당신이 당한 어떤 환경의 필요도 채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당신이 거주하는 도시를 이동시킬 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에게 이 우주를 흔들만한 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오, 내가 가장 경건한 말로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남을 얻은 당신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 안에 담은 보배의 위대함을 안다면, 그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호주머니 속에 십실링밖에 없다면 길거리를 다닐 때 당신의 몸은 매우 가벼울 것이다. 당신은 가볍게 말하면서 당신의 지팡이를 휘두를 것이다. 당신이 부주의하여 돈을 잃었다 할지라도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이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몸에 천 파운드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전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기뻐도 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발걸음을 늦추고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보화를 만져볼 것이다. 그리고는 신사답고도 유쾌한 심정으로 길을 걸어갈 것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營) 안에는 수천 개의 장막이 있었다. 그 중 다른 모든 장막과 다른 한 장막이 있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혹 음식을 먹거나 금식하거나, 일하거나 쉬거나, 기뻐하거나 엄숙하거나, 소리지르거나 조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장막에 대하여는 공경하고 경외해야만 했다. 보통 장막 안에서는 마음대로 출입하고 원하는 대로 말하며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장막에 가까이할 때에는 조용히 걸어야 했다. 그 앞에 서 있을 때에는 장중해지고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만지고서도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만일 사람이나 생축이 그것을 만진다면 정녕 죽게 된다. 왜 이 장막은 이렇게 특별한가?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었다. 장막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 장막에 사용된 자료도 보통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극히 크신 하나님께서 그 장막을 그분의 거처로 택하셨다. 당신은 주님을 믿을 때 당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곳을 그분의 성전 삼으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돌로 만든 성전 안에 거하셨다. 오늘 그분은 살아 있는 믿는이들로 건축된 성전 안에 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참으로 보았다면, 우리의 일생은 얼마나 경건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 때, 모든 경솔함과 얕음과 자만은 다 종식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성령님을 모시고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가? 당신은 성경이나 하나님께 속한 많은 선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하나님 자신을 모시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알아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경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성령이 임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령은 그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생활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실패의 생활을 하는가? 그들의 차이점은 성령의 임재여부에 있지 않고(이는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르는 데 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 참된 계시를 얻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주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 이제 이 두 구절은 우리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시키는 데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볼 때, 우리는 즉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에 헌신이 계시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과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성령이 있고 없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 데 있다. 결국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생명 안에 있는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주로 삼는다. 계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첫 걸음이고 헌신은 두번째 걸음이다. 우리의 일생 중에 우리가 우리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절대적인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는 날이 있어야 한다. 이런 날은 우리가 구원받은 날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우리의 헌신의 진실성을 시험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안 하시든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무 보류함 없이-우리 자신,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재산. 사업 우리의 시간을 다 주님께 맡기는 날이 필요하다. 그 날 이후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어떠함은 다 그분의 것이 되고 완전히 그분이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 그 날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다만 청지기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 안에서 확실한 사실이 되지 않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효과적인 참된 역사를 하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완전히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다스리시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효과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이끄실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그분으로 우리 안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게 하지 않아도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는 있겠지만. 그분은 결코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게 된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사는가? 이 질문은 너무 광범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실제적인 것을 묻겠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그것을 당신은 보류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하나님과 다투는 점이 없는가? 만일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고 성령에게 충분한 주권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은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이상 주실 수 없다. 지금 이미 주님께로 간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편리를 위해 폴이라고 부르겠다. 어려서부터 그는 폴 박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그는 대학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얻고 나중에는 박사 학위도 취득할 것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즐거운 그 날이 임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폴 박사라 칭하기를 기다렸다. 그 후 주님이 그를 구원하셨고 또한 그를 보내셨다. 얼마 후에 그는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 때 그는 이미 석사 학위를 얻었고 박사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비록 그의 학업에 진보가 있었고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었다. 그의 안에는 성령이 있었지만 아직 그는 성령의 능력 혹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였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복음 전하는 자와 교회 목사로서 믿는이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고 알려주나 내 자신은 진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만 내 자신은 아직도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지만 내 생활은 거룩하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겉으로는 세상을 피하고 있으나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 그는 이로 인해 근심이 생겨서 주님께 그의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수개월 동안 기도하였지만 응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면서 그의 생활 속에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지적해 달라고 주님께 구하였다. 매우 빨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나는 네가 나의 성령의 능력을 알기 원한다. 그러나 네 마음은 내가 원치 않는 것에 있다. 너는 모든 것을 다 내게 주었지만, 한 가지 스스로 보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 박사 학위이다. 』 누가 우리를 폴씨라고 하든 폴 박사라고 하든 우리는 아마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 칭호는 그의 생명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느 날 박사가 될 꿈을 꾸었다. 청년기 전체를 통해 그는 이것을 위하여 온갖 힘을 쏟았다. 이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거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짧은 이 개월만 더 지나면 그는 박사가 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내가 철학 박사가 되는 것이 내게 무슨 해가 됩니까? 폴 박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폴씨로 복음전하는 것보다 당신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바꾸시지 않았다. 폴씨의 충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그가 이것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는 동일한 응답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께 조건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로 박사 학위를 얻게 하기만 하면 어느 곳에도 가고 어떤 일도 다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뜻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러는 동안 폴은 점점 더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기말시험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폴은 다음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해보았으나 그는 전할 메시지를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그는 일생의 포부를 실현할 시점에 당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박사 학위에서 오는 영향력과 그의 생명에 영향을 줄 하나님의 능력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바로 그날 저녁에 그는 굴복하였다. 무릎을 꿇고서 그는 주님께,『주여, '내 일생토록 평범한 폴로 족합니다. 그러나 내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능력을 알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그는 일어나서 월요일 시험에 응하지 못하겠다는 사유서를 써서 시험관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는 별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그는 참석한 회중에게, 육년 이래 처음으로 제목 없이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하나님은 과거에 준비해서 전한 메시지보다 그 날 그의 간증을 더욱 축복하셨다.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를 축복하셨고 그를 얻으셨다. 그날 이후로 그는 세상과의 분별을 더이상 밖의 사물로부터만이 아닌 더 깊은 내적인 실재로서 알게 되었다. 이후로 매일의 생활에서 그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분 사이의 모든 다툼을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폴 선생에게 있어서 다투는 문제는 그의 박사 학위이나 우리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아마도 완전히 다를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절대적으로 항복하는 관건은 항상 어느 특정한 일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그것을 얻으려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한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쓴 자서전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즉 『내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나의 국가를 위하여는 모든 것을 원한다. 』 만일 기꺼이 자기 나라로 하여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단 말인가? 『주여, 내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원치 않고 당신을 위하여는 어떤 것도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 원하고 당신의 뜻 외에는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노예의 위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 몸에서 주인이 되실 수 없다. 그분은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우리를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항복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당신은 그분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폴 선생과 같이 주님과 다투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기 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구원받은 후 그는 즉시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주님 앞으로 이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하여 그녀는 아무런 취미가 없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회피하면서 계속 주님을 섬겼고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러 다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성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 느낌은 그로 흑암의 나날에 들어서게 하였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할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그의 간구를 계속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같았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다른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한 것은 시편 73편 25절 말씀이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자 없나이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어느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 자매가 똑같이 시편 73편 25절 말씀을 읽었다. 이 자매는 그가 좀 전에 이 구절에 대해 설교한 것을 몰랐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녀는 이어서, 우리가 참으로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마음 속으로 하늘이나 땅 위에 주님 외에 달리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이로써 그는 그의 모든 일이 그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할 수 있느냐 없느 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그에게는 너무 심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핑계로, 『주여, 만일 내가 그 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신다면 티벳이라도 가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티벳으로 가는 것을 관심하시지 않고 오직 그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관심하시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핑계를 대어도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을 조금도 바꾸시게 할 수 없는 듯했다. 이런 다툼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다시 성령의 충만을 위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여전히 한 가지 일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 날 주님은 승리하셨고 그 청년은 고개를 들어 주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이제 저는 마음 속으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날 그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사함을 받은 죄인과 그냥 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주님께 드린 그리스도인과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완전히 다르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우리를 확실한 위치로 이끌어주시기를!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원하고 내주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구할 때, 우리는 특별한 느낌 혹은 초자연적인 표시를 바랄 필요 없이 다만 단순히 그분을 앙망하고 찬미하면 일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분께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그분의 전을 충만케 한 것이다.『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것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