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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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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제 7 장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lhyunsik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 7 장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웟치만 니 창조의 목적 우리가 말한 바 있듯이, 만일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계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또한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갈망 안에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왜 앞의 절차들이 필요한지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절차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내적 체험의 문제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목표를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로마서 첫부분의 두 단락에서 각각 한 마디를 빼내어 그내용을 총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롬3:23) 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롬 8:21)이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본래 영광이었다. 그러나 죄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켰다. 우리는 죄를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죄에 따른 심판과 정죄를 지옥과 연결시켜 생각한다. 사람의 관념은 항상 내가 죄를 범하면 내게 형벌이 임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죄로 인하여 사람이 영광을 잃었다고 생각하신다. 범죄의 결과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결과는 우리에게 다시 영광을 얻을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영광. 영광, 영광이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심 이제 우리는 이에 관계된 부분인 8장 16절부터 18절. 29절, 30절을 먼저 보기로 하자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8:16-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 : 29-30)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로 모두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떻게 이 목적을 실현하시는가?『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분의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를 영광을 얻은 많은 아들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포함된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보기고 하자. 요한복음 1장 14절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그분 외에 하나님께 다른 아들이 없다는 말이다. 그분은 영원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갖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시지 않고 그를 맏아들로 세우고자 하심을 말한다. 독생자는 어떻게 해야 맏아들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더 있으면 된다. 만일 당신에게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는 독생자이다. 그러나 나중에 당신이 아들 몇을 더 낳았다면 독생자는 자연히 맏아들이 되는 것이다. 창조와 구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많은 아들들을 얻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만족하시지 않는다. 얼마 전에 나는 「구원의 안전, 확신, 기쁨」이란 책의 저자인 죠지 커팅(Mr Geroger Cutting)을 만나보러 갔었다. 내가 93세의 나이든 형제의 면전으로 안내되었을 때 그는 내 손을 붙잡고서 조용하고 사려 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당신은 내게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 그분에게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말했다. 그가 고령이었으므로 육신의 약함 때문에 다른 것을 말할 수는 없었고 단 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만남이 항상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반복했던 두마디 때문이었다. 즉 『형제여, 당신은 내게 그분이 없으면 안 된다는것을 아십니까』 『당신은 그분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탕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대개 탕자가 당한 어려움에 대해서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탕자가 거친 곤경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 비유의 요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문제는 아들이 무슨 고통을 당했는가에 있지 않고 아버지가 무엇을 잃었는가에 있다. 이 아비 된 자야말로 고통을 당한 자요 잃어버린 자이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이것은 누구의 손실인가? 당연히 손실 당한 자는 목자이다. 드라크마 하나를 잃었을 때, 누구의 손실인가? 물론 여인의 손실이다. 한 아들을 잃어버린것은 누구의 손실인가? 아버지의 손실이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이 우리에 게 보여주는 바이다. 주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분이 독생자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그의 독생자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성육신과 십자가의 전체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다. 또 이로써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안에 들어가게 하는」(히 2:10)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온전히 이루고자하는 목적도 완성될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우리는 「많은 형제들」을 보고 히브리서 2장10절에서는 「많은 아들들」을 본다. 주 예수님의 측면에서 말하면 많은형제들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측면에서 말하면 많은 아들들이다. 이 두용어는 성경에 근거한 용법이고 모두 성숙의 뜻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것은 완전히 성장한 아들들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들이 곡간이나 차고(車겨)나 들에 거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분의 집에 거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로마서 8장 30절에서 설명하는바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다. 아들의 명분-그의 아들의 충만한 표현-이 많은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분은 어떻게 이 목적에 이르시는가? 먼저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아들들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도록 정하셨다. 그분은 하늘 전체가 영광을 얻은 아들들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구속의 목적이다. 한 알의 밀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는 어떻게 그분의 맏아들이 되실 수 있는가? 요한복음 12장 24절은 그 방법을 설명해준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그 밀알은 누구인가? 주 예수님이시다. 온 우주 안에 하나님께는 두번째 밀알이 없고 오직 하나의 밀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땅에 두시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게 했던 유일한 밀알은 처음 밀알이 되었고그 밀알로부터 많은 밀알이 산출되었다. 그분의 신성으로 말할 때 주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러나 부활로부터 영원까지 그분은 또한 맏아들이시다. 이는 그때로부터 그분의 생명이 많은 형제들 안에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성령으로 난 우리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름 8: 15 16) . 주 예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아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버지로 하여금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게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된 하나님의 마음은 만족되셨다. 요한복음 1장과 20장은 이 방면에서 가장 귀중한 장들이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예수가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복음서의 끝부분은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 17). 본래 주님은 자주 「아버지」혹은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앞에 한 마디를 추가하여 「또한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이것은 맏아들 곧 먼저 나신 자가 하신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이끌려졌다. 그러므로 같은 구절에서 그분은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말한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이다. 아담이 당면한 선택-생명과와 선악과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많은 나무를 심으셨는데 「동산 가운데」-특별히 드러난 장소-에 그분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 피조되었을 때 아담은 순진하여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다. 생각해 보라 가령 삼십 세 된 한 성인이 옳고 그름을 모르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도 없다 하자! 당신은 이런 사람이 미성숙되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아담도 처음에 이러했다. 하나님이 그를 동산 가운데로 이끄셨을 때 사실상 그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너는 이 나무 근처에 생명나무라는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두 나무는 어떤 의의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피조된 아담이 도덕성에 있어서 중성적-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룩한 것도 아닌 무죄 상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두 그루의 나무를 동산에 두사 그로 자유로이 택하게 하셨다. 그는 생명나무를 택할 수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나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먹는 것을 금지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 나무가 없다면 아담은 자신을 위하여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그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었으므로 아담이 어떤 문제에 당면할 때 그의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 안에 있는 생명은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명임을 본다. 그러므로 이 두 그루의 나무는 두 가지 큰 원칙을 상징하고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자신인데 이는 하나님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최고의 생명 형태이시고 생명의 근원과 목적이시다. 과실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나무는 먹을 수 없지만 과실은 먹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면에서 말하자면 그분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주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 과실은 나무에서 먹을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겸손히 말하지만, 주 예수님은 우리가 영접할 수 있는 형태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과 연합되었더라면,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만일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천연적인 성향에 따라 자기의 인성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 방면에서 고봉에 이를 때 그는 자족한 사람이 되고 그의 안에 단독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앞에 놓인 하나의 선택이었다. 만일 그가 성령의 길을 택하고 순종의 길을 택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만일 그가 천연적인 길을 택했다면, 그는 자기를 발전시키며 단독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 밖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의 선택의 결과이다. 아담의 선택이 바로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했으므로 그는 독립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사람(곧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바라는 것과 같다. )이 되었다. 그는 어떤 지혜를 구사할 줄 알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행동하거나 멈출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지혜」(창3:6)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사망이지 생명이 아니었다.그의 선택은 사탄과의 동역과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나무를 가까이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두 종류의 생명이 아담 앞에 놓여져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룩한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하고 자족하는 사람에 속한 생명이다. 아담이 후자를 택한 것이 죄였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선택은 사탄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대항하여 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인성을 개발하는 길을 택했지만-비록 그가 아주 선한 사람이 되고 심지어 그의 표준에 따라 「완전한」사람이 될지라도-결과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의 결과는 바로 사망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거룩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기꺼이 원수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되어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매여 모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거치실 필요성을 볼수 있다. 또한 우리는 참된 헌신-죄에 대하여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자기를 산 자로 여기며,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같이 자기를 그분께 드려야 함-의 필요성을 볼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천연적인 것에서 나온 자아 생명은 죄의 법 아래 복종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반드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워야만 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생명을 거절하고 자아의 생명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안의 모든 것을 한 데 묶어서 제거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미 다 제거 되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셨다. 여전히 그분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더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계셨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원문 참조). 지금 주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영적인 몸, 영광스런 몸을 갖고 계신다. 그분이 더이상 육신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지금 그분은 사람들에게 영접될 수 있으시다. 주 예수님은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그의 샅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이런 사상을 악하다고 생각하여 당시에 그분을 영접하지 못했다. 이는 그분이 아직 육신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영접하는 자 ․. 에게는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요 1 12. 13)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의 생명을 개선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상은 우리의 생명을 개선하는 단계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잘못된 생명을 영광 안으로 이끄실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거듭난 사람 곧 새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거듭남과 의롭다 함은 병행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생명에는 각종 등급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낮은 등급에 속한 동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 사이에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등급이나 낮은 등급에 속한 것 사이에 있는 격리하는 큰 도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 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은, 우리와 낮은 등급에 속한 동물의 생명과의 간격보다 더욱 큰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 어느 날 나는 침상에 누워 있는 한 기독교 지도자를 만나러 갔었다. 편리를 위하여 그를 왕 선생이라고 부르겠다(그의 진짜 성은 왕이 아니다. ). 그는 매우 학식 있는 철학 박사였다. 그의 도덕성은 중국 전역에서 존경받을 만 했다. 그가 기독교 사업에 종사한지도 수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남의 필요성을 믿지 않고 다만 사회복음만을 선창했다. 내가 이 왕선생을 보러 갔을 때, 그가 기르던 개가 그의 침상 옆에 있었다. 나는 그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격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 개를 가리키면서 이 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바둑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어서 또 나는 그에게. 『이것이 개의 이름입니까? 성입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다만 개의 이름이오.』라고 말했다. 『개의 이름이라고 하셨지요? 그럼 내가 그 개를 왕바둑이라고 불러도 좋습니까?』 그는 매우 강하게, 『그럴 수는 없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이 개가 선생님 집에서 사는데 왜 왕바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의 두 딸을 가리키면서 『당신의 딸들을 왕양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라고 물었다. 『그렇소!』 『그럼 나는 왜 당신의 개를 왕바둑이라고 부를 수 없나요?』 그때 그 박사는 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 뜻을 아시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는 집에서 난 자들로서 당신과 같은 성을 가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당신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신 집의 이 개가 영리하고 말도 잘 듣고 참 좋은 소중한 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가 좋은가 나쁜가에 있지 않고 한 마리의 개라는 데 있습니다. 이 개가 당신 집안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개가 나쁜 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한 마리의 개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원칙을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악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사람인 것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생명의 등급이 하나님의 생명의 등급보다 낮다면 결코 하나님의 집에 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일생 전도하시는 목적은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개선하는 것이지만 이런 사람이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과 결코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없습니다.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 날 그 박사는 이 진리를 깨닫고 마음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아담 안에서 잃은 것보다 횔씬 뛰어나다. 아담은 자기를 개발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 등급 안에 머물렀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우리들은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로 대표된 하나님의 생명도 얻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아담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우리는 아담이 놓친 것을 얻는 것이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안에서 함께 후사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이런 목적에 이르시는가? 이제 히브리서 2장 10절부터 11절을 읽어보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여기서는 두 방면이 언급되었다. 곧 많은 아들들과 그들을 구원할 원수이시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한쪽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편이 하나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는데, 그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새 생명도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고(마 1:20) 우리도 성령으로 태어났다(요 3 : 5. 1 : 13) .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 하나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맏아들과 아들들은 다 한 생명의 근원에서 나왔다. 오늘날 당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것을 아는가?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배하신 생명은 바로 하늘에서 그분이 소유하신 생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롬 6:23)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생명이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해 주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생각할 때 전체 죄의 문제가 연기같이 사라짐을 주의한 적이 있는가? 죄에게는 더이상 지위가 없다.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왔다. 죄가 처리된 후, 우리는 아담의 원래의 위치로 이끌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목적-우리로 생명나무를 가까이하도록 회복하심-과 관계를 맺을 때 , 구속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소유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다.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