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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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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제 5 장 십자가의 경계
lhyunsik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 5 장 십자가의 경계 웟치만 니 두 창조 이 세상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 안에서 체계적인 체계인 그분이 창조한 무주 곧 그 아들 그리스도를 머리(골 1:16-17) 삼은 우주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체계를 세웠는데, 성경은 이것을 「이 세상」이라고 부른다. 이 체계 아래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사탄 자신이 그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사실상 사탄은 「이 세상 임금」(요 12:31)이 되었다. 이 때문에 첫 창조는 사탄의 손에 의해 이미 옛 창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더이상 첫 창조가 아닌 두번째 창조에 있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의 새 창조, 새 왕국, 새 세계를 가져오셨다. 이 새 창조 안으로는 옛 창조와 옛 왕국과 옛 세계 안의 어떤 것도 가져올수 없다. 이제 문제는 이 대립되고 대적하는 두 왕국 중 우리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물론 우리가 어느 왕국에 속하느냐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 : 12-13)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새 왕국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우리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새 창조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새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게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 15:50). 당신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얼마나 교양이 있든지 또는 얼마나 개선하든지 간에 육체는 여전히 육체이다.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느 창조에 속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옛 창조에 속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에 속하는가? 우리는 육체로 난 자들인가, 아니면 영으로 난 자들인가?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결국 우리의 근원 문제에 달려 있다. 문제는 선하고 악한가에 있지 않고 육체냐 영이냐에 있다. 『육으로 난 것은육이니』. 육신은 결단코 다른 것을 낳을 수 없다. 옛 창조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결코 새 창조 안으로 가져올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일임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결코 옛 창조의 어떤 것으로도 새 창조에 공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얻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낡은 원래의 우리들을 그분의 계획 안으로 이끄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그분은 십자가로 우리를 제하시고 그런 다음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기능을 지니고 새로운 왕국, 새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전 것」을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그분은 우리 「옛사람」을 완전히 한쪽으로 제쳐 놓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 새 세계 안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우주 가운데 가장 큰 부정(否定)은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셨다. 그 반면에 우주 가운데서 가장 큰 긍정은 바로 부활이다.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신 모든 것을 새로운 영역 안으로 이끄셨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 창조의 벽두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첫 왕국에 속한 모든 것들을 끝내는 십자가와 두번째 왕국에 속한 모든 것을 가져오는 부활을 보는 것은 복된 일이다. 부활 이전에 시작된 모든 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부활이 하나님의 새로운 기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앞에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낡은 것이고 하나는 새로운 것이다. 낡은 세상 안에서 사탄은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옛 창조 안에서 당신이 선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옛 창조에 속해있을 때 당신은 사망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중 새 창조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것 중 십자가 이편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저편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빨리 볼수록 좋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옛 창조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그의 아들에게 돌리셨다. 그런 다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미 그분 안에서 제거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신 듯하다. 『나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한쪽에 제쳐놓았다. 옛 창조에 속한 너희들도 그 안에 포함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 중 이런 판결에서 벗어날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점은 우리를 침례의 문제로 이끈다. 『무룻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롬 6:3, :k). 이 말씀에는 무슨 중요한 의의가 있는가? 세례(침례)-옛 창조를 끝내고 새 창조안으로 들어감 성경에서 침례는 구원과 관계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비록 우리가 성경에 근거하여 침례의 중생을 말할 수는 없지만 침례의 구원을 말할 수 있다.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구원은 죄나 죄의 권세와 무관하며 이 세상 체계와 관계된다. 우리는 사탄에 속한 세상 체계 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사탄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베드로는 여덟 사람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다』(벧전 3:20)고 말한다. 이 예표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설명해준다. 노아와 그의 일가는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패괴한 옛 세상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그들이 이로 인하여 익사를 면한 것에 중점이 있지 않고 그들이 패괴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데 중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21절)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은 침례로 표명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당신을 구원하신다. 또한 당신의 침례로 말미암아 이 점을 확증하셨다. 침례의 한 방면은 『그분의 죽으심에 합하고』 옛 창조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의 다른 방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새 창조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롬 6.3) 당신이 물 속에 들어갈 때 당신의 세상도 함께 물 속에 들어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질 때 당신의 세상은 이미 멸절된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한 그들은 간수와 그의 일가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와 그에게 속한사람들은 즉시 침례를 받았다.(행 16:31-34)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영적인 권세 앞에서 그들이 심판받은 세상으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 하였다』 . 그러므로 침례는 단지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기는 문제만이 아니다. 침례는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된 너무 큰 일이다. 또한 두 세계와도 관련된다. 무릇 이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 사역해 본 사람은 침례로 야기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것이다. 장사는 바로 끝냄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침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것이라』(벧전 3 21)고 말한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와 세상과 옛 창조 그리고 옛 왕국에 대한 심판을 알려주셨다. 십자가는 단지 그리스도 개인에게 속한 「개인적인」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십자가요 당신과 나를 포함한 공동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각 사람을 그의 아들 안에 두셨고 그의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그분은 이미 첫 아담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완전히 일소하셨다. 나는 옛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 침례를 요청하는 것이 나의 응답이다. 왜 그런가?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침례는 곧 장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침례 자체는 죽음이나 부활이 아니다. 그러나 침례가 장사이기 때문에 침례는 죽음과 부활과 서로 연관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장사될 자격이 있는가? 당연히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례 받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오직 무덤에 들어가기에만 합당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장사를 죽음의 방법으로 취한다. 그들은 장사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내가 강하게 말하거니와, 우리 눈이 열려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또한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침례받을 권리가 없다. 우리가 물 속에 내려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이미 죽었음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간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간단하고도 명백하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이미 죽었고 또 내가 너를 그의 안에 포함시켰다. 이 사실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말하느냐?』고 말씀하신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나는 『주여, 당신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죽음과 장사에 넣으신 것에 대해 나는 예라고 말할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분이 이미 나를 죽음과 무덤에 넣으셨기 때문에 내가 침례를 청하는 것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어떤 여인이 그녀의 남편을 잃었다. 그 여자는 비통한 나머지 미쳐서 남편의 장사를 거절하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시체를 집 안에 두었다. 그 여자는 『그이는 죽지 않았어요. 매일 나는 그이와 대화하고 있는데요.』라고 말했다. 이 가련한 여인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을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하기 원하는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이다. 만일 그들에게 최소한의 소망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장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침례를 청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의 완전성과 내가 죽어 마땅한 것과 하나님이 정말로 이미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믿을 때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때 나는 침례를 청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이미 죽었음을 인해 하나님께 찬미합니다! 주여, 당신이 이미 나를 죽이셨으므로 이제 저를 장사하소서!』 중국에 긴급 구조기관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적십자사」이고 다른 하나는 「청십자가」이다. 「적십자」의 일은 전쟁터에서 부상만 입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간호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청십자」의 일은 기근이나 수해 혹은 전쟁 중에 사망한 사람들을 장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다루심은 적십자의 일보다 더욱 철저한 것이다. 그분은 옛 창조를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려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사람을 못 박고 장사하심으로써 그들로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갖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셨고 지금 우리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청십자」의 일에 복종해야 하며 장사로 죽은 사실을 확증해야 한다. 오늘날 옛 세상과 새 세상이 있는데 이 두 세상 사이에는 무덤이 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못 박으셨지만, 나는 무덤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나의 침례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십자가 안에서 내게 주신 판결을 확증하는 것이고 또한 내가 이미 옛 세상과 갈라졌고 지금은 새 세상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옛 생활 방식으로부터 단호하고 의식적인 구분을 짓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6장 2절에서 말한 바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의 뜻은 『만일 너희가 옛 세상에 계속 머물기 원한다면 왜 침례를 받는가? 만일 너희들이 옛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 원한다면 침례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옛 창조를 장사함으로써 새 창조를 위한 토대를 닦아 두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5절의 말씀도 역시 침례받은 사람(3절)에 대해 말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침례로 말미암아 우리가 상징적으로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을 완성하신 것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내가 한 형제에게 이 진리를 강조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나는 내 찻잔에다 설탕을 한 덩어리를 넣고 저었다 몇 분 후에 나는 그에게, 『지금 설탕이 어디에 있고 차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두 가지를 섞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나눌 수 없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간단한 예화이지만 그로 하여금 우리가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의 친밀성과 최후성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를 거기 넣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역사는 역전될 수 없다. 그러면 사실에 있어서 이 연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침례 배후의 진실한 의미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 안으로 잠기고 결국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과 이같이 친밀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물 속에 잠길 때 우리는 이 역사적인 「잠김」 곧 하나님이 완성하신바 그분과의 연합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침례받을 때 우리가 대중 앞에서 한 간증은 바로 이천 년전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유를 포함하고 능력 있는 죽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의 능력과 포괄성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제하고 끝내셨다. 부활로 인해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 : 5) . 이제 부활의 다른 상징이 있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활에 들어간 것은 침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찬미하자!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은 내 안에 들어오시어 새 생명을 나에게 나누어주셨다. 주님의 죽음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안에」있는 것이다. 부활에 관하여도 물론 내가 그분 안에 있지만,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나에게 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어떻게 이 새 생명을 얻는가? 바울은 「그와 연합하여」라는 용어로 이에 대한 좋은 설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헬라어에서 연합이라는 단어에는 「접붙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것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을 설명하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제공한다. 복건(福建)에 있을 때, 나는 용안(이것의 원산지는 중국 남쪽 지방인데 그 크기는 살구만하다. 맛이 달아 먹기도 하고 약으로도 쓴다. ) 과수원을 경영하는 어떤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오천 평이나 되는 대지에 삼백 그루의 용안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의 나무에 접붙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당신은 내가 접붙이지 않은 과수를 심고서 내 땅을 낭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접붙여지지 않은 원래 나무가지에서 어떤 이익을 얻기를바라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접붙이는 과정을 좀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는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한 나무가 일정한 높이로 자랄 때 나는 윗부분을 잘라내고 거기에다 접붙입니다. 』라고 했다. 그는 한 그루의 특별한 나무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나무가 보이십니까? 나는 그 나무를 아비 나무라고 부릅니다. 이는 접붙이는 데 사용되는 모든 가지가 그 나무로부터 취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 나무들을 접붙여주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게 둔다면 그 과실은 매실처럼 작고 껍질은 두껍고 씨가 큽니다. 그러나 그 아비나무의 과실은 매실보다 크고 껍질은 아주 얇고 씨가 매우 작습니다. 이 나무 가지의 접붙임을 받은 나무도 그 나무와 똑같은 과실을 맺습니다. 』 내가 다시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는 『이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는 한 나무의 성질을 다른 나무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무에 상처를 내고 그런 다음 거기에 좋은 나무의 가지를 끼워 놓습니다. 그리고 잘 묶어서 그냥 자라게 둡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또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는 『나도 잘 모르지만 자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는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를 지적하면서, 그 나무의 접붙여진 부위 밑의 원 줄기에는 나쁜 과실이 맺혀 있고 그 윗부분인 새 줄기에는 좋은 과실이 많이 맺혀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 나쁜 과실을 맺는 가지를 남겨 둠으로써 양자의 차이점을 표명합니다. 이 나무에서 당신은 접붙임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접붙인 나무만을 기르는지 알 것입니다. 』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떻게 다른 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나쁜 나무가 어떻게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가? 오직 접붙임 곧 좋은 나무의 생명을 연결시켜 접붙임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이 한그루 나무의 가지를 다른 나무에 접붙일 수 있을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더욱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연결시킬 수 없으시겠는가? 한 중국 여인이 팔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었다. 상처에 딱지가 생길 때 발생할 심한 수축을 방지하기 위해 상처 난 부위에 새 살을 이식시켜야 했다. 그 여인은 너무 나이가 들었었고 또 영양 부족이어서 그의 살을 이식시키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중에 한 외국 간호원이 그 여인에게 피부를 제공하여 수술은 성공적 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살과 원래의 살을 같이 꿰멤으로써 그 여인은 팔이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의 황색 팔에 횐 피부 가 일부 붙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피부가 다른 여인의 팔에서 자라는 것은 어떤 영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나 다만 아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 땅의 외과의사가 한 사람의 몸에서 피부 일부를 취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시킬 수 있다면, 더욱 큰 외과의사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에 접붙일 수 없으시겠는가? 나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 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이 세상에 천만 인의 생명 안에 접붙여진 열매 맺는 유일한 생명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새 생명이라고 부른다. 새 생명이란 전에 사람에게 없었던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나의 천연적인 생명이 완전히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생명 곧 전혀 새로운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 다.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 창조를 제 하셨는데. 그 목적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를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이미 흑암의 권세로 향하는 낡은 문을 닫아버리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다 나의 영광은 바로 이미 완성된 일 안에 있는데, 그것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것이다(갈 6:14). 나의 침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개적 간증이다. 이것은 입을 열어서 하는 간증이 나의 구원을 위함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