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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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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잘 가거라 사망이여! - 찰스 헤이든 스펄젼
lhyunsik

바이블파워 찰스 헤이든 스펄젼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고 하셨으니』(고전 15:26,27). 지난 4주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시요, 사탄을 정복하신 분이시며, 모든 새로운 것들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망을 멸망시키신 주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망을 멸망시키신 것은 구속주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의미를 완전하게 계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기자인 다윗이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본문을 두고 여러분은 아마 다윗이 겸손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실까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이 몇 마디 안에 영광스러운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편 8:6에서 『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해석을 따라 바울이 시편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시편 8편은 단지 야만적인 피조 세계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본문에는 또 다른 훨씬 더 중요한 해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로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신 분, 바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높임을 받은 인자이시요, 모범이 되는 인간이시며, 둘째 아담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는...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언급한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에만 이상할 뿐이지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람이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인간과 같이 되신 분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부활의 필연성을 어떻게 추론해 냈는지 보도록 합시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것”이 놓여져야만 한다면, 모든 악한 것도 그분께 정복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사망이 정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셔야 하리니.』 그러므로 사망도 궁극적으로 정복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간단한 시편의 한 문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부활의 교리를 이끌어 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었다면 결코 시편 8편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일반 독자라면 결코 생각지 못했을 귀중한 진리를 도출해 내게 하십니다. 성경 본문은 요술 상자 같습니다. 상자를 열면 또 상자가 나오고 또 나오다가 제일 안에 있는 상자에 보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비밀들은 그 안에 비밀을 감추어 두신 분이 일깨워 주실 때에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책들은 대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아주 못미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책은 빛으로 차 있으며, 값으로 따 질수 없는 귀중한 계시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성경에 무엇이 더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 안에 거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저장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저장고를 밝히는 계시의 불빛이 현재 우리 눈에는 너무나 밝아서 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성령의 조명을 통해 다윗의 노래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도 바울 서신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망은 원수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1. 원수인 사망 사망은 원수로 태어났습니다. 아각인 하만이 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은 우리의 가장 끔찍한 원수 “죄”의 자녀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약 1:15).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롬 5:12). 죄의 열매가 인간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이 타락한 그 암울한 날에 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이며 반역자인 마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볼 때 사망은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사망은 사실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같습니다. 사망은 원래의 창조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타락된 피조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온 세상이 손상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망은 목자장께 속한 양무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라는 이리는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초대하신 손님이 아닙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연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와 사탄이 낙원의 축제에 들어오려 할 때 어리석은 인간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사망을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멀어버린 눈으로도 그것이 잔인한 적인 것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에게 사망은 평원의 소떼를 노리는 사자와 같고, 싱싱한 들꽃을 내리치는 잘 드는 낫과 같으며, 시들어 버린 나뭇잎에 잔인하게 불어대는 강풍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본능적으로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죄의 자녀라고 양심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원수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망은 원수가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오는 이유는 뿌리째 뽑아 버리고 넘어뜨리고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작품인 사람의 몸을 흉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없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토록 경이롭게 지으신 것을 말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의 솜씨를 자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을 무덤 속의 벌레들에게 던져 줍니다. 그러면 이 벌레 군단은 포획물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건장한 남성의 육신은 아름다운 집과 같지만, 파괴자의 사망은 그 창을 어둡게 하고 그 기둥을 흔들리게 하며, 결국 그 문은 닫히고, 맷돌질 소리를 그치게 만듭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딸들도, 강한 남자들도 사망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전 12:3,4). 이 파괴자는 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많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일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망은 생의 모든 영역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오는 침입자입니다. 사망이 들어오면 모든 훤칠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모든 샘들이 멈추며, 모든 훌륭한 땅이 돌밭으로 변합니다. 사망이 어떤 사람을 먹이삼을 때 그 사람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재로 변하고 썩어 버립니다. 죽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힘을 과시합니다. 무덤이 없는 나라가 있습니까? 묘지가 없는 도시가 있습니까? 비석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우리의 원수인 사망은 불칼을 들고 인류를 파괴시키며 전진해 왔습니다. 아무리 포악하고 야만적인 민족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습니다. 죽음은 모든 곳에 손을 뻗쳐 가정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과 한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해가 뜨는 모든 곳에서 죽음은 사람들의 시야를 눈물로 가렸습니다. 사별의 눈물, 과부의 울부짖음, 고아의 절망, 이런 것들은 죽음이 일으킨 전쟁의 음률이며, 거기서 죽음은 승리의 노래를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수하에 있는 사형 집행인에 불과하며, 죽음의 아수라장에서 일하는 고용된 도살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이 평상시보다 좀더 서둘러서 식인 축제를 열고 희생자를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어 본 사람이라면 사망이 어떤 원수인지 잘 알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친구를 빼앗아 가고, 우리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집안의 가장을 데려갑니다. 집안의 따뜻한 햇살 같은 어머니를 나꿔채 갑니다. 어린 아이를 그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갑니다.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를 그 아버지 곁에서 빼앗아 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걸었던 부모의 애정어린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입니다. 죽음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선하든, 아름답든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죽음의 낫은 아름다운 꽃이나 백해무익한 잡초를 가리지 않고 잘라 버립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정원에 들어와서 백합화를 짓밟고 장미 송이를 땅에 흩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퉁이에 심겨져서 수줍은 듯 나무 그늘 아래 그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수수한 꽃들조차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꽃들의 향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호흡으로 그것들을 시들게 합니다. 특히 죽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침입해서 하나님의 일꾼을 데려갈 때, 죽음은 성도들의 원수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역자들이 죽음의 강타로 쓰러지면 교회는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경계하던 예리한 눈초리를 어둠 속에서 감겨지게 하고, 훈계를 말하던 혀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망인 것입니다. 사망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대적합니다. 가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지치지 않고 일하던 일꾼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의 사람들, 마음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담고 있던 사람들, 생에서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창 일하다가 이들을 참으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를 뒤로하고 쓰러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사망으로 넘겨지도록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분의 백성들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망을 최악의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전쟁에서 면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징병자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지만 마침내 그의 백발은 겨울 아침에 내린 서리를 무색하게 하며, 제아무리 철인일지라도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쇠를 막을 수 없으며 젊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불로장생의 묘약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권력자라도 ‘멸망’을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값나가는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빛나는 면류관을 쓴 군주도 무덤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용감하고 강인한 용사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통치자는 벌레의 형제요, 벌레와 같은 집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교활한 적으로서 사방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무해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사망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 복병을 매복시켜 놓지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죽음은 어디서나 우리를 공격합니다. 식탁 음식 속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샘에서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에 독을 넣기도 합니다. 죽음은 침실에서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죽음은 바다의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도 합니다. 오 사망이여, 우리가 너를 피해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느냐? 교활한 원수 사망은 우리가 사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 등 뒤에서 소리없이 따라옵니다. 죽음은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원수이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다 되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새들처럼 우리 모두는 새 사냥꾼의 그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게 됩니다.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저 대양 속에 있는 모든 물고기는 그 때가 되면 죽음의 거대한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침에 떴던 해가 반드시 지는 것처럼, 한밤을 수놓던 별들이 마침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처럼, 땅을 돌며 여행하던 물이 결국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끝이 옵니다. 이른 나이에든 늦은 나이에든 반드시 끝은 오며, 그러면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산 자들 가운데 더 이상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원수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죽음을 인지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입술에 한 편의 시를 싣고 그들은 사라져 갑니다. 혹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에 분주하다가 대차 계정을 제출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간 신문에서 사업상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으면서 자기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경시되거나 사소하게 여겨질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속주께서 멸망시키신 잔인한 원수를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죽음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습니까? 죽음의 특징에 대해 살펴봅시다. 2. 멸망당할 원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평생 속박되어 있는 우리를 구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죽음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거의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죽음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에 대단히 근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영적인 죽음에서 구해내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을 때 우리는 모든 영적인 것들과 신성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려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키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망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자신의 희생자들을 단념했던 세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셔서 이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셨습니다. 그 소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신 뒤 주님께서 소녀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파괴자가 강타를 당하고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인성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젊은이가 일어나 앉자 주님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또 한 번 죽음의 희생자가 막강한 원수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너무 오랫 동안 무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누이는 『주여,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에 복종하여 수의에 동여진 채 죽음에서 일으켜진 나사로가 걸어 나왔을 때, 죽음이 인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속박이 제거되고 포로가 석방된 것입니다. 그밖에도 구속주께서 부활하셨을 때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주님께서 사망과 무덤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정복한 위대한 승리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음의 형벌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죄에 대해 두 번이나 똑같은 형벌을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대한 벌로서 지불해야 할 고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이 죽는 것입니까?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몸이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혈과 육”은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변화시키셔서 불멸과 영광에 어울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죽음과 무덤은 말하자면 정제시키는 용광로 같은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몸은 미래의 축복에 합당하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완전히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살아 계신 구속주께서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셨습니다. 성도들은 이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서히 분해되고 떠날 뿐입니다. 죽음은 범선을 묶어 둔 밧줄을 끌러 아름다운 항구로 항해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해 주는 불병거입니다. 위대하신 왕께서 자신의 연회장에 들어오셔서 다정한 음성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독수리의 날개 위에 타고 안개 구름 자욱한 이 세상을 멀리 떠나 영원한 평안의 집, 저 높은 곳에 있는 찬란한 하나님의 집으로 날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폐기하셨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이며,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속주께서는 그 쏘는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 쏘는 것을 제거당한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는 하지만 이들에게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정복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히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봅시다. 무덤의 한 켠에서 잠깐 동안의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조용히 수의를 벗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여유 있게 움직이셨을까요! 먼저 작은 수건을 개서 옆으로 놓으신 뒤에 수의를 벗어서 따로 개어 놓으셨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덤에 왔을 때 잘 개어져 있는 옷을 발견하도록 말입니다. 이제 무덤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지하 납골실이 아니었습니다. 잘 정돈되고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기숙사 방처럼 된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습기차고 어둡고 으시시한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완전히 바꾸셨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우리 주님의 무덤에서 바위를 굴려 내어 신선한 공기와 빛이 안에 계신 주님께 닿도록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실 때, 주님은 정복자 그 이상의 모습이셨습니다. 죽음은 달아났습니다. 무덤은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성도들이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분은 모든 성도들의 몸이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증하셨습니다. 성도들의 혼의 생명은 단 한 순간이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날의 커다란 승리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매일같이 죽음을 이기고 계십니다. 성도들에게 그분의 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안에 그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두려움 없이 마지막 원수를 대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때로 노래하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대개 온화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으며 평화롭게 잠이 듭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죽음은 용처럼 보이지만 그 쏘는 것은 사라졌습니다. 죽음은 이빨 부러진 늙은 사자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다만 우리로 황금문을 통과하게 해 주는 사자(messenger)로서 보냄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문을 통과했을 때 우리의 구세주를 영원히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많은 성도들이 죽음의 잠을 자기 위한 침상이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침상 중에서 최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혼이여, 내게 말하라. 어떻게 이것이 죽음일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너무도 고상하고 즐거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근심을 다 벗고 안도했습니다. 이런 것이 평생 두려워했던 죽음일 수 있을까 하고 기이 여겼습니다. 죽음이 칼로 찌르는 것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는데 압정으로 찌르는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눈을 감았다가 하늘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때 이들은 죽음은 침대에서 기지개를 쭉 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섭고 섬뜩한 통로를 통과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높임을 받으신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이런 죽음의 쏘는 것을 없애 주셨습니다. 3. 그러나 사망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를 볼 때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의미에서 죽음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멸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전에 몸의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을 무수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해서 볼 때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잠들고 육체와 뼈가 썩어서 흙이 된 무수하게 많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죽음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이들은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망이 멸망받는 것입니다. 저는 무덤으로 들어간 몸의 입자가 그 전과 동일하게 재구성되어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리라고 가르친 적도 없으며, 그렇게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을 보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땅 속에 심겨진 씨가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몸은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씨 자체가 아니라 꽃입니다. 동일한 소재도, 모습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무덤이 아니라면 땅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바다 생물에게 잡혀 먹혔다면 바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 지상에 거할 때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몸으로 나올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소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로 어떠한 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망은 우리 주님의 승리로 인해 완전히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입게 될 새로운 몸은 노쇠함도 없을 것이며, 병색도 없을 것이며, 순교의 상흔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어떤 표도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흔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상흔처럼 그들에게 존귀를 가져다 줄 영광스러운 표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상흔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며, 못에 찔리신 손과 발은 성도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은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썩어짐의 흔적은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나팔 소리 이후에는 마침내 더 이상의 죽음도,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울부짖음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은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지 않으며, 죽음은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받고 잠들었던 성도들도 부활한 뒤에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또 다시 고통이나 유혹이나 죽음을 겪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입니까?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또한 살게 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혼의 불멸이라는 이 당연한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어떤 혼들은 미래에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어떤 혼들은 영원한 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둘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며,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받을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의인이 받는 생명도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이 형벌에 쓰이든지 생명에 쓰이든지, 그 의미는 다 같습니다.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무덤도 없는 나라에서 죽음은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4.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지막에 나가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들 중에서 첫 번째로 오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처음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이 죄이고, 그 다음이 사망입니다. 사망은 최악의 적은 아닙니다. 사망은 원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다른 대적들에 비하면 훨씬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는 수천 번이라도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죽음의 시련을 받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과 연관된 단순한 육신의 고통은 죄로 야기되는 섬뜩한 슬픔과 죄에 대한 양심으로 혼에 지워지는 짐과 비교해 볼때는 사소한 것입니다. 죄로 오염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죽음은 부차적인 재앙일 뿐입니다. 먼저 제일 강한 원수를 패배시켜야 합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모든 악의 주인인 죄와 사탄을 먼저 패배시키십시오. 그러면 사망은 “마지막”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망은 “마지막”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망이 마지막이라고 했다면,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사망이 마지막 원수가 되게 하십시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죽기 오래 전부터 죽음을 원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죽는 순간까지 죽음의 은혜를 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살아 있는데 죽는 은혜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강가에 이르렀을 때만이 배가 필요합니다. 사는 데 필요한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죽음의 은혜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멸망당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싸워야 할 적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이 죽음이라는 원수를 내버려 두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원수는 멸망당할 것이지만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가 받은 지혜대로 살면서 매일 이행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시련이 닥치면 시련을 그대로 받으십시오! 원수들이 몰려 오면 그들을 무찌르십시오. 계속해서 무찌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방을 강타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 뒤에 공격해 오는 후열을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적이 전진해 올 때까지 최후의 일격을 보류해 두십시오. 그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투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때가 되면 여러분이 마지막 원수를 이기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동시에 죽음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의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로다.』 사망은 왜 마지막까지 남겨졌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크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기 전에 대단한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많은 교훈을 배웁니다. 친구들의 죽음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리석고 눈 먼 열정을 꺽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잡았던 고삐를 놓고 다가올 세상을 `향해 날아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죽음만큼 강력한 설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하나님의 장엄한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남겨 두셔서 죽음으로 하여금 성도들에게 설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만일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성도들은 사랑의 최고의 열정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까? 화형대와 고문대에 묶여 죽어간 순교자들의 죽음에서였습니다. 박해의 숲에서 하늘 나라로 올라간 사람들은 손으로 엮은 화환을 주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것은 피의 시내를 건너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으로서 성도들은 그분을 가장 영예롭게 했던 것입니다. 평범한 죽음으로 죽은 성도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과 행위에 있어 인내했다는 승리의 간증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은혜 시대가 지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결코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승리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가져다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몇몇 회원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처럼 제가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저도 그런 장엄한 기회를 얻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들이 노래한 것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저는 죽음을 피해 다른 우회로를 찾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서 빛나던 그런 호산나와 할렐루야의 빛이 제 눈에서 빛나게 된다면 죽음은 축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가장 크게 시험하는 사망은 마지막까지 멸망받는 것이 잠시 보류됩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잠들 때 우리는 그분과 완전하게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성도들 사이에 약간의 질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된 성도들이 죽음을 맛보게 될 여러분과 저를 만나서 느끼는 질투일 것입니다. “형제님, 제가 경험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무덤에 누워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결코 죽음의 차거운 손이 닿은 적이 없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나의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은 죽음에 있어서까지 주님과 교제를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주 안에서 잠든 사람들보다 호의를 덜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편애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잠들어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깨어나게 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성도들을 본향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죽음의 메시지를 속삭일 뿐입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성도들은 지고의 복을 받게 됩니다. 죄와 근심과 저주가 없는 곳에서 이제 구주와 함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아직 멸망받지 않았습니다. 유용한 목적들에 소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멸망받게 될 것입니다. 사망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마지막 원수입니다. 현재 교회에게는 대항해서 싸워야 할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우리는 “사망은 마지막 원수이고, 이제 다른 원수는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끝없는 축복 속에서 영원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 속에서는 훨씬 더 놀라운 축복의 시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고의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분노하는 적들로 인한 갑작스런 경보도 없으며, 마지막 휴식이 깨질까봐 근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마지막 원수가 살해되면 더 이상의 적은 없습니다. 전투는 끝나고 영원한 승리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누구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분께 존귀와 영광과 위엄과 권세와 권능을 영원 무궁토록 돌립시다. 오 주여, 우리의 엄숙한 경배를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