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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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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과 구원받은 악한 사람 - 존 R. 라이스
lhyunsik

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과 구원받은 악한 사람 바이블파워 존 R. 라이스 『그후 주께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더라.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도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이는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니라』(눅 18:9-14). 예수께서 세상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셨을 때,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이 땅에 계신다면 이것을 다시 설교하실 것입니다. 종교란 자신을 신뢰하며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인류의 아주 오래된 습성으로 하나님께는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역시 그 같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런 종교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죄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범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가리고 변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비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것인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이중적인 죄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어떤 모임의 회원들은 자신들이 아주 정욕을 억제하는 귀족적인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칠거라 생각하면서도 회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멸시합니다. 나는 자신들이 방언을 하므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무리들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 영혼도 예수께로 인도하지도 못하며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최근 유행하는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비난하고 인격을 모독하곤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책망하신 두 가지 죄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메시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Ⅰ. 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 R. A. 토레이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대해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과 구원받은 악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제목은 이 비유에 알맞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을 살펴봅시다. 1. 그는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혐오하도록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바리새인이 도덕수준이 높다고 자칭하는 것은 확실히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바리새인이 말하는 것 중 어느 것도 부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도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히브리 지도자들을 언급하면서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받았으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지극하기로는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과 마찬가지였노라”고 했습니다(행 22:3).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이 바리새인이고 율법의 의로 말한다면 흠이 없다고 썼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이 바리새인이 선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비유로 든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성전에 갑니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자신의 신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러 갑니다. 그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으며 무정하고 무관심한 사람들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의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는 군인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는 구명 뗏목에 표류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불경건한 항해사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대중 앞에서 정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는 착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 악한 세리가 다른 로마 세리들처럼 할 수만 있다면 많은 돈을 끌어모아 최소한의 액수만 정부에 내고 나머지를 갈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불의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류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 십니다”(마 5:45).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며 도둑들의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지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남편일 것입니다. 그는 간음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훌륭한 미덕입니다. 그는 가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결혼 서약을 지킵니다. 그의 아내도 그를 성실한 사람으로 믿습니다. 그는 방종한 생활로 인해 생기는 병에 걸려 본 적도 없습니다. 그는 비밀스런 사랑이나 수치스런 과거가 드러나서 망신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으로 비칩니다. 그는 의로운 일에 신실한 열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성전으로 십일조도 가져옵니다. 자신이 기르는 가축의 첫배 새끼들은 주님께 드립니다. 그의 수입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집을 부양하는데 쓰이도록 거룩하게 드려집니다. 그 자체로는 그의 종교심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심인 것이 입증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드리는 것이 증거로 나타나지 않으면 근 사람이 회개했다고는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갖지 않습니다. 단지 7일 중 2일 동안 하나님에 관한 “일”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질 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진솔한 열망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충격적인 진리를 주십니다. 이 바리새인은 비록 선하지만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그가 구원받지 못한 채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지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한 사람이 왜 구원받지 못했는가를 알아봅시다. 2. 그의 의는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일곱 번씩이나 지적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주님께서는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박하와 아니스와 커민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라. 너희는 이것들도 마땅히 행하고 또 저것들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23).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도 십일조를 철저히 내면서도 ‘심판과 자비의 믿음’의 더 중요한 것들은 모르고 있는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의 눈 먼 안내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그분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속은 약탈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 너 눈 먼 바리새인아, 잔과 접시의 안을 먼저 깨끗이 하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되리라.” 이 바리새인은 외모를 중시하며 사람들을 유난히 신경 쓰는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잔과 접시는 깨끗이 하지만, 종교심으로 꽉 찬 그의 내면은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의 변화가 없는 할례나 침례 또는 견진례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겉으로만 도덕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산다한들 그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3. 그 바리새인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니코데모라 하는 바리새인 한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왔습니다. 구세주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신사 여러분, 도덕적이고 정직한 숙녀 여러분, 모든 종교적이신 여러분들, 잘 들으십시오!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받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처럼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나 속에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도다”(마 23:27-28) 여러분의 삶이 사람들의 눈에는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해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여러분은 의로울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여러분은 사악하고 파멸당해 마땅하며, 당연히 지옥에 가야만 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은 아름답고 하얀 멋진 무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그것이 태양 아래에서는 또한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거려 보이겠습니까?)그러나 그 안에서는 좀과 벌레가 썩어가는 시체를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 전에 교만하던 얼굴이 닳아빠진 해골로 변개합니다. 머리카락은 다빠지고 그 자리에는 심한 악취가 진동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종교적인 모든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4. 그 바리새인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당당하게 성전에 갑니다. 죄에 대한 어떠한 수치스러움도 없습니다. 얼굴을 겸손히 수그릴 만한 죄책감 하나 없습니다. 그는 앞을 보고 당당히 걷습니다. 교회 출석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기에 그는 아주 편안합니다. 그는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만치 서서 수치심과 무가치함에 가슴을 치는 불쌍한 세리보다 무한정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사탄의 속임수이며, 여러분의 혼을 저주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3장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아무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다니고, 기도하고, 십일조를 내고, 금식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죄인이나 종교인 행세를 전혀 하지 않는 세상 지향적인 사람이나 모두 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외적으로는 거의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도 아니고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같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담과 이브의 죄로 얼룩졌습니다. 한 사람은 한풀 꺾인 죄인이고 또 한 사람은 기세가 등등한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존경받는 죄인이고, 또 한 사람은 멸시받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바리새인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죄인입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배우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6).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흔히 유대인 지도자를 부르듯 랍비라 또는 선생이라 부르는 젊은 부자 관원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9). 예수님께서는 자신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분 자신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하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선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가장 정숙한 여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한 마음을 가졌습니다(렘 17:9).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새로운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죄로 얼룩진 옛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여자도 거듭나지 않았다면 창녀와 다름없이 죽는 즉시 지옥에 갑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보는 가장 정직한 시민, 정당하게 사업을 하는 사업가,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고 모든 예배와 종교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교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을 멋지게 하려고 할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도둑질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탐심으로 가득찬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고 그것은 도둑질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무도 죽인 적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일 3:15). 여러분은 간음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28).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키지 않았던 제일 첫째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 22:37). 그리고 여러분은 둘째 계명도 지키지 않았는데, 이는 여러분의 인간관계에 관한 모든 계명들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진리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이든간에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저는 텍사스, 브릿지포트에서 있었던 한 집회를 기억합니다. 아주 훌륭한 가문과 성품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 성가대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으라고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집회 중 어느 밤에 그녀에게 “하나님의 눈에는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렇지 않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몹시 당황하며 응수합니다. “글쎄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럴지 몰라도, 사람들 눈에 저는 누구보다도 가장 훌륭한 사람인 걸요.” 죄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을 보면,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도둑과 살인자와 창녀와 제멋대로인 탕자와 부정직한 세리와 형제 자매처럼 똑같습니다. 겉이 아닌 속을 보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자신을 속이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같은 악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위선적인 바리새인과는 달리 아주 쉽게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여러분이 이 구원받지 못한 선한 사람 이야기를 듣고 경각심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법은 멸시하고 땅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지옥은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고, 견진례나 침례를 받고, 교회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마음으로는 회개하지 않았던 그런 무리들을 수용할 것입니다. 정직하게 거듭나지 않은 선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다름아닌 지옥입니다. Ⅱ. 구원받은 악한 사람 세리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한 문장으로만 그의 기도를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이 악한 사람에 관해서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봅시다. 1. 그는 확실히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그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진실로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바리새인이 언급한 바로 그런 죄인임을 시인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것, 이 세리와도 같지 않고, 착취하는 사람도 아니고, 불의한 사람도 아니고, 간음자도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안 이 불쌍한 세리는 솔직하게 “저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그런 죄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갈취했고 세금이라는 명목 하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저는 악하고 불의한 사람입니다. 저는 또한 간음자입니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세금 정책은 아주 간단하였지만 막중한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특정한 세리로 하여금 각 지방으로부터 일정량의 액수를 거두게 합니다. 그 세리는 또 다른 세리로 하여금 인구와 재산에 따라 달라지는 액수를 도시들과 마을들에서 거두어들이도록 합니다. 각 세리들은 요구되어진 액수만 정부에 냅니다. 그러나 각기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자신들을 위해 걷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부자이고, 타락하고, 도처에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가장 나쁜 사람이 그러한 직업을 찾았고 그 직업은 그들을 더 나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이 세리에게 착취당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가난을 밟고 부를 누린 것입니다. 그는 수차례나 가난한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소나 나귀를 취하고, 법이라는 이름하에 과부의 가재도구를 빼앗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불쌍한 세리는 분명히 바리새인이 암암리에 세리를 지칭하며 열거한 모든 죄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착취자일 뿐 아니라 그는 문자 그대로, 불의하고 사악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이 사악한 세리를 쳐다보며 하나님께 자신이 그와 같은 간음자가 아님을 감사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세리는 비뚤어지고 부정직하고 음란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악한 세리는 술주정뱅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자였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단순히 고백하는 말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정죄를 받고 지옥에 가기에 마땅하다면 이 세리도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 세리처럼 사람들에게 더 많이 해를 끼치는 사람을 또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진실되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세리가 성전에서 매우 불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마도 거기에 그다지 자주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에 익숙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로 저주할 때나 사용했을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며 죄를 짓다가 진노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수많은 다른 불경스런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열심히 갈취한 이 강탈자가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가져왔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소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강제로 빼앗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가 식탁에서 하나님께 주신 음식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이제껏 그는 하나님과는 멀리 떨어진채 얼마나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해 왔겠습니까! 이제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는 거절당할 것만 같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호되게 야단치실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악한 사람으로부터는 얼른 눈을 돌려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의외입니까, 정직하고 종교적이고 친절한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사실입니다. 세리는 그 바리새인보다도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구원받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는 용서받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아무런 비난 받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들으시고 그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글을 읽는 다른 죄인들도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 그는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화평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배워야만 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여기에 바리새인이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가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분명히 “죄인 전용”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호텔이나 공공건물에서 “직원 전용”이라 쓰여진 문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 하나님과 화평하는 길은 “죄인 전용”의 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복음은 죄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처방 약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2).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곤 하던 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비단 옷이 더러워져서 감히 왕의 앞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왕이 매일 왕궁의 문을 열고 거리에서 배고프고 돈이 없는 모든 거지들을 불러 식사를 하게 하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단 옷을 벗고 거지들이 입는 옷으로 바꿔 입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른 거지들처럼 환영받아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왕을 뵐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타락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또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오직 죄인들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세리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옆에서 죽어가는 강도처럼 “...네가 동일한 정죄함을 받으면서...우리는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이 참으로 당연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눅 23:40-41). 그는 마치 모든 것을 탕진하고 누더기 옷을 걸치고 배고픔을 안고 살았던 돼지우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라고 하는 탕자와 같았습니다(눅 15:21). 죄인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할 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들은 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단지 도덕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현대주의자들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근본적으로 사악하지 않고 다만 법이나 교육 등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은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자신이 타락한 죄인이며 지옥에서 불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시카고에 사는 젊은 여인이 라디오에서 저의 설교를 들었답니다. 그녀는 제게 자신이 거의 절망적인 상태라고 편지로 알려왔습니다. 그녀의 말로는 다른 설교자들은 시간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저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호텔 로비에서 그녀는 자신이 신학원에서 가르치는 일, 거리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 산에서 사역한 것 등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일을 할수록 그녀는 자신이 점점 마귀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온갖 종류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저주가 자신의 머리속을 맴맴 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저주하고자 하는 충동심이 생겼고 집밖으로 나가 가장 끔찍한 죄를 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게서 10마일 밖에나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았고, 평안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학원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대신 당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리고 그리스도께 드려진 당신의 헌신이 찬양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간증을 듣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여자가 공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자,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는 제 질문에 대한 당신 자신의 대답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당신이 어떤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알겠습니까?” 그 불쌍한 여자는 순간 저를 쳐다보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리며 “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막중한 죄인입니다. 저는 당장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신 것이 이상합니다. 그분은 늘 오래 참으셨어요. 저 같은 사악하고, 가치없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에게 말입니다. 예, 그래요,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이 화평과 기쁨을 갖고 모든 것들을 즐겁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1:9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죄 씻음과 용서를 구하여 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도 평안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고 싶으시다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일 기쁨을 잃고, 구원의 확신을 잃고,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타락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요한일서 1:9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세리는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세리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죄를 버림으로써 분명하게 해결하였습니다. 그는 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기 원했습니다. 그는 거칠고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틀림없이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이 비뚤어진 세리는 그렇게 잘못된 삶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사람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차마 눈을 들지도 못한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깊이 회개하며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자백합니다. 그의 마음은 정직하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역시 세리인 삭캐오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시는 길목에서 그분을 잘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를 올려다보시며 “삭캐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으리라.”고 하시자 그는 기뻐하며 서둘러 나무에서 내려 왔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 세리는 “보소서,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나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삭캐오가 늘 이렇게 살아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심하자마자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한 것에 대해 네 배로 환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 절반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저는 성전에 있는 이 세리가 삭캐오처럼 완전히 회개했으며,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버렸다고 믿습니다. 또 다른 세리, 레위인 마태가 회심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첫 번째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마태가 되었습니다(마 9:9).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라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그는 변화받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이 요단강에서 침례인 요한이 설교하는 것을 듣고자 사두개인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침례인 요한은 그들에게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으라고 외쳤습니다(마 3:7,8). 그는 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마음으로부터 회개한 확실한 증거를 보인 후에 침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구원받습니다. 그렇지만 진정 회개했다는 증거가 마음으로부터 밖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언제나 죄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입술로 자신의 죄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을 들을 때 참으로 기쁩니다. 세리는 회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들을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그것들을 미워하고 그것들을 버렸습니다. 4. 세리는 자비를 구했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과 세리 사이에 다른 점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선한 행위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자비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죄책감을 갖고서 자신의 사악함을 자백하고 자비를 간청했습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차이점이 연상됩니다. 카인은 땅의 소산물을 가져왔습니다. 고생해 가며 오랫동안 곤충과 해충으로부터 곡식을 보호하며 농사지은 후에 하나님께 자신의 수고의 결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를 나타내는 그러한 제물은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믿음으로 가축의 첫 배 새끼를 가져왔습니다. 오실 구세주를 예표하는 의로운 아벨은 양의 피를 흘림으로써 자비를 구했습니다. H.A. 아이언사이드 박사에 의하면 세상에는 2가지 종교밖에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적을 기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자비를 구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죄인들은 거지처럼, 지불한 돈없이, 하나님의 환심을 얻기 위한 아무 공로없이, 다만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에게 직접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받기 위해 반드시 나아와야 합니다. 자비란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러나 그 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희생이 치러졌습니다. 저의 죄를 위해 치러진 피의 구속을 통해, 자비로 저를 보아 주십시오.”라고 죄인은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사악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셔서 죄인들의 죄값을 치르게 하시고 죄인의 자비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러분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값을 치르심을 근거로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악하고 불의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무관심하며 어떠한 형벌도 내리시지 않는다면 하나님 자신의 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실 수도 없고, 그러시지도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tm도의 죽음으로써만이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제물이 되시어 인간의 죄값을 치러주심으로써 그때서야 비로소 자비로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에 드디어 그 의가 인정되었습니다. 죄가 처벌되었습니다. 빚이 청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순결한 아들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향해 기꺼이 화해하시고 그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자비는 희생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써만이 어떠한 죄인도 합법적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죄값을 치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죄인들 외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자비를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화해를 해 놓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화평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얼굴을 대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뿐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부인하는 현대주의자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부여하는 유일한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대속하셨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의 상처들! 갈보리에서 흘려진 그 피!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의 고통!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저에게 희망을 주며, 저에게 확신을 줍니다. 저는 담대히 주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나아옵니다. 주님은 자신의 아들을 죄값으로 내어 주셨고 그래서 저는 정당하게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가 기도했을 때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는 치러진 희생을 근거로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화해하시고 자신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5. 세리는 즉시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짜증이 납니다. 그들이 애초에 신실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신실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무디 성경학교의 학장 휴튼 박사가 한 번은 제게 “사람들이 때때로 ‘주님 저를 겸손케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겸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케 하신단 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실함을 유지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신실하다는 것으로는 구원받지 않습니다. 제가 구원받았을 때 저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전혀 아무런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저는 지금 이순간도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저는 9살 때, 텍사스 게인즈빌에 있는 제일 침례교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단순히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저를 용서해 주시도록 의지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자비를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저는 구원받고, 용서받은, 거듭난 소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리가 구원받은 방법이었습니다.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죄들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그 죄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시편 32편에서 인용한 그 축복된 약속이 로마서 4:5-8에서는 이미 그에게는 실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복에 관하여 다윗도 말하였으니 말하기를 “죄악들이 용서받고 죄들이 가리워진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느니라.』 구원은 행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죄들이 가려져 참으로 복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성전에 있던 세리는 자비를 구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 뒤편으로 멀리 사라져 용서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 저를 하늘나라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지상에서 받는 것이지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현재 시간 안에서 받는 것이지 영원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정직하게 그에게 자비를 구할 때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성경은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정죄받지 아니하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18, 5:24, 6:47). 이 불쌍한 죄인의 기도는 매우 짧았습니다. 한 구절도 안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구원받은 채로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애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비를 구했고 구한 것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께로 오는 죄인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사람들은 종종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어리석게 말합니다. 그들은 죄인이 “마침내 구원받았다”, 또는 죄인이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 앞에 자신을 맡겼다.”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단어들은 비성경적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리거나 애걸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그 순간, 그는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는 세리가 즉각적으로 구원받아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근거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했을 때, 나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구원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시험 삼아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신실함을 유지해야 한다거나, 선한 삶을 살아야만 겨우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믿을 때 즉시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즉시 영접되었습니다. 죽어가는 강도가 예수님께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을 때, 그도 즉시 용서받았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은 죄인이었던 여자도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많은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고 또 “네 죄들이 용서되었노라”고 하시고 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즉각적입니다. 불쌍한 세리는 벌써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신도 이 설교를 다 읽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