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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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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 얻을 때와 잃을 때 - 챨스 스펄젼
lhyunsik

◎ 기록:스펄젼 평안, 얻을 때와 잃을 때 - 챨스 스펄젼(C.H. Spurgeon) 『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며.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실것임이라』(시 85:8). 『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수많은 음성과 음성이 있습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자비를 전하는 음성을 들어보십시요.『주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총을 베푸셨으니 주께서 야곱의 포로들을 데려오셨나이다』(시 85:1). 그러나 이 음성과 함께 슬픔에 겨운 음성도 공존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울부짖으며 간구합니다.『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주께서 모든 세대들을 향해 주의 분노를 발하시겠나이까?』(시 85:5). 그리고 시편 기자는 노래와 한숨이 뒤섞인 혼잡함에서 돌이켜 이렇게 울부짖습니다.『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며,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시 85:8). 주목하십시요. 바로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길 자주 하십시요. 거리에서 나는 음성들이 마구 뒤섞일 때, 교회 안의 음성이 서로 엇갈릴 때,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하나님의 음성 앞으로 나아가십시요. 다윗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비석 앞에서 간구의 기도를 펼쳐 놓고 있습니다.『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어 주의 백성들로 주 안에서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겠나이까? 오 주여,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보이시고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시 85:6, 7).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대답을 주실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나를 몹시 아끼던 어떤 친구 하나는 정성스럽게 사연을 쓴 뒤에 제일 마지막에는 "답장은 필요 없네."하는 사족을 붙여 편지를 띄우곤 했었습니다. 이런 추신이 사람들의 기도에도 자주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속으로, "나는 간구할만큼 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리라."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기도 뒤에는 항상 이런 거룩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해 놓고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죄악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간구의 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분의 존재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우상 대하듯 하는 자와 같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방의 형상들 말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면, 아버지가 자기 자녀의 말을 듣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매일『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라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목소리들 때문에 혼란스러워져 있을 때나 기도로 마음을 쏟아 놓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발하신 그분의 음성은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혼란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됩니다. 교리를 공부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기준을 정할 때에도 저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말씀은 우리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줍니다.『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시 85:8). 그분의 명령에 귀를 기울인다면, 뼈아픈 충고나 채찍이 없어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교훈이 아무리 많아도, 저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얼마나 위대합니까? 태고의 흑암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빛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말씀으로 그 흑암에 빛을 주셨다면, 우리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죽은 자들도 이 음성을 들을 것이고, 또 이 음성을 듣는 자들은 생명을 얻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기쁨 가운데서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님의 계명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그것들로 저를 살리지 않으셨나이까?" 우리 구주께서는 절름발이나 앉은뱅이, 또 눈이 한쪽밖에 없는 자일 지라도 그가 생명을 얻은 자라면 그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그러나 귀를 잊어버리고 생명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게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고 했습니다. 임마뉴엘 우리의 왕께서는 '귀의 문'을 통하여 '인간의 혼'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만지는 것이나 보는 것, 혹은 맛보는 것이나 냄새를 맡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들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 12).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내가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들으리니』어린 사무엘처럼 우리 각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다윗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대하고 또 그 말씀을 들으려고 열망하는 지에 관한 특별한 이유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며』(시 85:8)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듣게 될 음성은 두려움들을 없애고, 마음에 힘을 돋우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천둥 소리를 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음성은 부드럽고, 그분의 말씀은 자비로우며, 그분의 영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메시지는 화평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발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오직 평안만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설교의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첫번째 소제목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평안"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소제목은 "우리는 왜 평안을 잃어버리는가?"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1.첫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평안"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평안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겠군요. 나는 주님께서 내게 평안을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다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머거리가 된 자들에게는 아무 음성도 들려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평안의 복음을 듣지 않은 자는 절대 복음 안의 평안을 알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자는 용서를 뒤따라 오는 평안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통한 화해를 제시하실 때 이를 들으려 하지 않고,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실 때 귀를 막으며,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으라고 하시는 데 이를 무시하는 자는 절대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리스도 바깥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 대사가 계시며 오직 한분 중보자가 계십니다. 오직 한 분뿐입니다. 속죄제도 하나님의 피를 통한 하나의 속제죄가 있습니다.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평안의 언약도 오직 하나이며, 절대 둘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 한길 외의 또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죄를 속죄하신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귀를 막는다면, 그런 이의 마음은 절대로 평안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귀를 열어 놓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의 표식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나는 선한 목자라』(요 10).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그분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들은 실상 무신론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계획, 행동들 그리고 사업과 삶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느끼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행복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첫째도 하나님 둘째도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도 하나님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들은 모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군중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위에서 다스리시고, 그의 밑에서 붙드시며, 그의 속에서 그에게 힘을 북돋우고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서 기뻐합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면, 당신이 그의 백성 중에 속해 있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언제나 거룩함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이란 말과 그분의 성도들이란 말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분이 거룩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하기 위해 늘 힘을 씁니다. 성도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삶을 사는 자는 그분께 평안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고, 조심성 없고, 불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마음에 많은 의심을 품고서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에게는 화평이 없느니라』(사 48:22). 그러나 그분의 백성들에겐,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자녀들에게는, 의를 따르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평안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아, 슬프다! 내가 어찌 감히 성도의 모임에 함부로 내 이름을 올릴 수 있으리오!" 이런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고,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한때는 어리석은 데에서 허우적거리던 사람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구요? 성경 구절을 보십시요.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이 구절은 그들이 한때는 어리석음을 쫓는 자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죄악을 쫓았고, 하나님을 모르며 그분을 섬기지도 않고 살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 회개를 하고, 죄와 수치 그리고 어리석음에서 돌이킨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현재 하나님께로 왔다면, 과거의 어리석음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 마십시요. 한때는 어리석은 자였으나, 주님께서 그 어리석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을 그분의 백성으로, 또 거룩한 자로 계수하셨다면, 주님은 분명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전 어리석음에서 돌이킨 것은 확실한데, 제 마음 속에는 자꾸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압니다. 저 역시 옛 아담이 저를 옛 길로 돌이키게 하려고 제 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에게 이런 경향이 없다면, 주님께서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그분의 백성이었으며, 또한 그분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본성은 그들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들을 다시 옛 길로 돌이키게 하고자 수시로 그들의 소매를 이끌곤 합니다. 만일 당신 속에 옛 누룩이 작용을 해서 죄를 부풀리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당장 구주 앞에 엎드려서 세리가 했던 것처럼 이렇게 간구하십시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눅 18:13). 기억하십시요. 당신에게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이며, 또 그분께 평안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고, 악을 전혀 혐오스러워 하지 않으며, 의를 간구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인 적도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절대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우뢰와 같은 소리가, 불같은 음성이, 격노하여 발하시는 말씀이 준비되어 있을 뿐입니다.『'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 25: 41). 여러분 중에는 이 분노의 음성을 들을 사람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평안의 음성이 여러분의 혼에 가득할 것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이 아닌 또다른 평안을 갈망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입니다. 혹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우린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며, 선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 평화스럽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삶의 단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아니죠. 왜 악인들이 평안을 누릴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들의 평안은 어리석음의 소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뭘 숙고하거나 자숙하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의 상황이나 한치 앞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눈뜬 소경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바로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도 모르고 또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벽의 맨 가장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디디는 순간 그들의 평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을 곧게 하고서, 우리가 아무리 충고를 해 주어도 오히려 그 충고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지금 술잔을 높이 쳐들고 있지만, 그들의 발치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며, 즐겁고 유쾌하게 지내며 시집가고 또 장가가며, 또 취할 때까지 마시고 흥청대지만, 그 옛날처럼 홍수는 어김없이 닥칠 것이고 그날에는 비상구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양심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너무도 많은 일로 가득차 있어 양심의 소리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사업에 열중해서 아침 저녁으로 그것만 생각합니다. 돈을 세고, 주식 시세를 살피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뿐입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 몰두해 있었듯이, 이들은 그들의 사업장과 차고, 그리고 선박과 농장, 그리고 시장 상황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세상에 대해선 전혀 생각이 없는데, 이는 현세의 세상이 그들을 꿀꺽 삼켜 버린 까닭입니다. 이러한 류의 평안은 얼마 안 가서 깨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굳어 있습니다. 즉, 딱딱하고 무감각하며 냉담해진 상태란 말입니다. 전혀 감각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죠. 건강한 양심은 살갗이 벗겨진 피부처럼 예민합니다. 항상 무엇에 닿을 까봐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양심은 굳은살이 코끼리 가죽처럼 덮여 있어서 전혀 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떤 죄인들의 양심은 마치 인두로 지져 버린 것처럼, 신경이 모두 죽어 버려서 영원한 저주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탄이 지켜 주는 평안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강한 사람이 무장을 하고 자신의 관저를 지키면 자기의 소유물이 안전하리라』(눅 11:21). 사탄이 그 사람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으면, 그를 어지럽히는 생각은 전혀 틈을 타지 못하고, 그의 죄악된 마음은 늘 만족 가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 이는 사탄이 그들에게 강력한 미혹을 주어 거짓을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데후 2:11). 그들은 마치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입 다물고서 조용한 가운데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우울함의 평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이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런 절망이 주는 고요함 가운데 평안을 누립니다. 소름끼치는 평안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혼이란 걸 알아요. 자비를 얻기엔 제 죄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뭐하러 분투하면서 선한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서 단두대 앞에 서 있는 죄수 같이 그는 절망감이 휩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난 이미 결판이 났어. 모든 끝난 거라구!" 그러나 친구여, 절대 그렇지 않다네. 사탄이 자네를 속이는 거야. 죽기 직전까지는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는 걸세. 아직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면, 이제 오게, 그리고 주님께 영생을 얻으시게. 무심한 마음과 우울, 그리고 완고함은 그들의 가장 큰 적이죠.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물은 종종 소리 없이 다가오는데, 이는 그 물이 너무도 깊고 도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는 영원한 심판을 비웃고 하나님을 무시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도 구원해 주시길!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아닌 다른 모든 평안들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오십시요.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십시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다가올 진노에 떨고 있다면,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밖에 없습니다. 사역자들도 그들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저도 종종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려고 노력해 본 일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실패했죠. 책을 많이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우아한 말이 담긴 책이래도 말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영만이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의식들, 즉 침례와 주의 만찬, 혹은 기도회나 선교 활동도, 만일 주님의 음성과 동떨어져 행해지고 있는 행사들이라면, 그것들도 다 부질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저는 여러분들 중에 확신이 없어 헤매고 있는 분이 단 한명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십시요, 헤매는 자들의 눈 앞에 물결치고 있는 노도를! 그리고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 옵니다. 아, 베드로여, 일어나시오! 파도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시오! 요한 일어나시오, 그리고 저 파도에 기름을 부으시오! 그러나 보십시요. 사도들 자신들 마저도 가라앉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보다 더 위대하신 이가 나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아마 영영 가라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키 옆에서 잠들어 계셨던 그분만이 그들에게 화평을 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분은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죄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들에게 『평안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그대들에게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빌 4:7). 성경을 보십시요. 폭풍이 소동하던 바다는 『아주 조용해』졌습니다(마 8: 27). 속죄의 능력을 알고 느낀 사람들의 혼에 임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고요가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앞서 오직 하나님만이 평안을 말씀하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나온 한 마디는 모든 문제를 끝냅니다. 어떤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말씀 하나면 됩니다. 평안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을 만드는 작업은 2000여년 전 십자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우리의 평안의 근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던 불화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거기서 다툼을 끝내신 것입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사 53:5).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평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 이루었도다』(요 19:30). 의와 화평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한 화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화평은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 이 화평은 오직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면 그 즉시 인간의 마음과 양심 속으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멸시하지 마십시요. 그분의 음성은 전능한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암흑에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왕의 음성이 있는 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즉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시는데, 누가 감히 분란을 일으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죄지은 혼들을 위한 거룩한 평안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지극한 고통과 번민이 있을 지라도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그 즉시로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의 백성이기만 하다면 주님께서는 조금 늦어지더라도 당신에게 반드시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당신은 그리스도께로 왔고, 또 그분을 신뢰하고 있으나, 지금 바라는 만큼의 평안을 누리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조만간에 그분은 당신에게 평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투쟁과 분투의 시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몇 달 동안이나 전쟁으로 인한 소란이 온 마음을 휘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이나 몹시 지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야만인들의 해안에 난파한 채로 해도 달도 떠오르지 않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죠. 저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힘이 빠져 있는데 더더욱 낙담할까 봐 그랬습니다. 그에겐 분명 무슨 잘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빛으로 나아와 사람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는 간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만일 그들 앞에 평안을 예비해 두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은 결코『온전한 사람을 살펴보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그 사람의 마지막은 화평이니라』(시 37:37)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를 어두운 침상에 방치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이의 곁에 양초를 켜실 것이고, 그 아이는 마치 죽음과도 같은 달콤한 잠을 이룰 것입니다. 몸의 쇠약함이나 마음의 피로, 그리고 여러 다른 사연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얼마 동안 즐거움을 앗아갈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결국에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낙망 중에 죽어 가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고통의 심연 가운데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팔이 당신 아래에 있음을 아십시요. 그 팔이 당신을 다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슬픈 영을 지닌 채로 어려운 세월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그 팔이 당신을 다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많은 여인들이 슬픈 영을 지닌 채로 어려운 세월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주께서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오! 사로잡힌 딸들이여, 당신의 사슬이 영원하리라고 생각치 마십시요! 소망을 붙드십시오. 밤이 아무리 깊고 어두워도,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빛은 어둠을 물리치러 나아오기 마련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침의 찬란한 빛과도 같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분의 자녀들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보십시요.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그 평안은 안전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가 원하는 만큼 평안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가식이 없는 거룩한 것입니다. 이 평안은 얻으면 얻을 수록 당신은 주님과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 평안은 우리의 마음과 지성에 내려앉는 것이며, 단순히 혀와 얼굴에 찾아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모든 상황을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일지라도, 평안이 있으면 그의 마음은 언제나 풍요롭습니다. 당신이 외롭다면 주님은 당신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며, 당신이 몸에 병을 얻는다 해도 주님은 불평없이 고통을 참을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고통스러운 영을 지녔다 할지라도 당신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찾아든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담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안에서 불안해 하느냐?』(시편 42:5).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면, 마귀는 이를 앗아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불어넣으시면, 이 세상 그 어떤 풍조도 당신 속의 평안을 날려보내지 못합니다. 이 평안을 누려본 사람들은 이 평안을 천상의 여명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걷는 순간만큼은 사람은 낙원을 걷는 왕과도 같습니다. 완전한 평안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천상에는 불협화음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이 세 분이 모두 우리와 화해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도 다툼이 없습니다. 양심은 깨끗하게 되었고, 마음은 안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 속에는 지하의 왕 마귀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이를 갈지만, 우릴 어떻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자연과도 화평을 누립니다. 『이는 네가 들의 돌들과 제휴하게 될 것이며 들의 짐승들이 너희와 화목하게 될 것임이라』(욥 5:2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 깊고 높은, 그리고 넓고도 끝이 없는 평안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누가 혐의를 씌우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 정죄하리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은 그리스도시라.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롬 5:1). 좋죠? 그리스도인들이여,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하지 못한 삶에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해 있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평안을 간구하십시요. 당신은 그 평안을 얻어야만 합니다. 이 평안은 당신을 왕보다 더 위대하게, 재벌보다 더 부유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인이 복종과 헌신으로 나아갈 때 발에 신는 신발입니다.『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2. 자, 이제 여기서부터는 어떤 것들이 이 놀라운 평안을 방해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이는 그가 그의 백성들과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러나 그들로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평안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누리는 데는 개인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물론 거룩한 유업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항상 유업의 열매를 즐기진 못합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닥치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고난과 싸웠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병으로 인해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병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집어삼키거든요. 때때로 사람의 마음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것때문에 쇠약해집니다. 육체의 연약함은 영적인 평안을 쉽게 무너뜨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육체 모두가 무너져 내려도 우리의 마음에 힘을 돋우어 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내적인 갈등도 우리를 평안에서 멀리 떼어놓곤 합니다. 죄와 힘들게 싸우고 있을 때, 예전의 습관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타락한 성품이 너무도 강하게 작용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저도 사실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죠?" 여러분들 대부분은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예, 대답드리죠. 저는 제가 싸우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제가 만약 하나님의 잔가 아니라면 죄를 대항해 고된 싸움을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원수 마귀를 대적해서 죄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가 죄의 종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넘치는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러함에도 역시, 사탄의 공격 아래서 평안을 누리기란 참으로 힘들더군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진저리를 칠 때까지 집적대는 방법을 씁니다. 마귀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우리 머릿속에 주입시키고는, 우리가 그 생각의 창시자라고 몰아붙여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가 주입한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 내 원수야 나를 대적하여 기뻐하지 말라. 내가 쓰러진다 해도 일어날 것이요, 내가 어두움 가운데 앉을지라도 주께서는 내게 빛이 되시리라』(미카 7:8). 주님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타락의 길로 내려가고 있을 때, 우리의 평안은 급격히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찾아가자, 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자!" 그분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다시 찾기까지, 그분의 성실한 자녀들 사이에 다시 들어가기까지 우리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평안을 잃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이키기"때문입니다. 어떤 어리석음이겠습니까?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죄와 잘못, 그리고 신성한 지혜에 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그 어리석음의 다양한 국면들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우선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지도 않고, 그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 버린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루시는 것에 관해 성급하게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적은 없습니까? "이건 무언가 잘못 된 거라구.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순 없는 거야. 무언가 잘못 되었어." 그러나 후일 당신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성급한 판단은 명백한 어리석음의 소치였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은 후에도 연이어 이런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당신은 분명 평안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이 무한한 지혜를 당신의 유한한 판단 기준으로 성급히 판단하려 들지 마십시요. 영원한 목적을 시계 속에 갇힌 사고로 판단하려 들지 마십시요. 우리가 재판관이 되어서 주님을 고소하는 순간, 우리의 평안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길들을 살필 때는 긴 시간을 두고 숙고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영원 속에 거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판단은 영원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원칙들을 알아야 그분의 길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드는 우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작은 어린아이가 되는 순간, 우리는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어리석음이란, 불평과 가장 높으신 분과 다투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창조주와 다투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잔디가 낫과 다투거나, 지푸라기가 화염과 다투는 건 그냥 웃을 일일지는 몰라도,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려 들면 나서서 말려야 됩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이길래 감히 하나님과 다투려고 듭니까?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롬 9:20). 하나님과 다투려 드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야곱처럼 격심한 타박상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순종의 자세를 취하십시요.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실 것입니다.가시채를 발로 걷어차는 우를 범하지 마시길. 갓 멍에를 메기 시작한 황소는 자신을 모는 몽둥이에 심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옆구리에 몽둥이질만 더 불러들일 뿐입니다. 소를 모든 농부를 조금만 두려워했더라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행 9: 5). 하나님과 다투어서 득 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며, 그의 다스림은 영원의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돛단배가 바위를 보고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한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무릎을 꿇으십시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무릎을 꿇는 자세에 있는 것이며, 거만한 자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거만과 교만은 가장 천한 어리석음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빠져드는 어리석음 중에는 의심이나 불신이 있습니다. 평안은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며 믿음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주님을 의심하는 것보다 더한 어리석음은 없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저는 그분을 신뢰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마음 속에는 평안이 강같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리에 누워서도 그러한 평안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본다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자넨 참으로 힘들게 살아왔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온전한 평안을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의 평안을 온전히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십시요.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들, 즉 가시채를 걷어차던 옛날로 돌아가지 마십시요. 여러분들 중에는 옛 의심들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이 믿는 사람일 것이나, 게중에는 의심하는 자도 간혹 섞여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하늘 나라에 관해 설교를 해도 만일 불신의 습관이 있다면 그는 제 말을 귓등으로 받아칠 것입니다. 주님을 의심하고, 그분의 약속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지 않는 자 중에 주님께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신실하시며, 스스로를 부인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의 말씀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이 사악함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채로 너희의 눈 앞에 분명히 제시되었는데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갈 3:1).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해지려 하느냐?』(갈 3:3).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을 가지고 평안을 얻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입니다. 자아란 것은 기껏해야 메마른 샘에 불과 합니다. 자신의 헌신이나 성화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자신의 성화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 그리스도의 반대자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그분은『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번도 사람에게 사람 자신의 의를 신뢰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얼마만한 거룩함에 이르렀건 간에, 심지어 거의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욥의 현명한 말에 귀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온전하다 할지라도 내가 나의 혼을 알지 못하리니...』(욥 9:21). 우리의 지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 위에 있습니다. 그 지반을 떠나면, 당신은 얼음 위에 올라서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닥이 녹아내리지 않더라도, 쫄딱 미끄러질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에 어떤 행위를 섞으려 든다면, 당신은 다시 어리석은 길로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예전에 당신에게 큰 멍에가 되었던 것처럼, 돌이키는 순간 다시 당신을 짓누르고 억압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오직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십시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키지 마십시요. 오직 주님께 기대를 두는 그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평안이 강물처럼 흘러 넘칠 것입니다. 지적인 공론에 빠져드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들 중 몇몇은, 한때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공중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가, 사악한 책을 몇 권 접하고 나서는 지난날에는 생각치도 못한 난관에 빠져들어 그들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닥친 난관들에 대해 일일이 답변을 해 주었을 것 같습니까? 제가 그들이 했던 것처럼 그 책을 읽고 그들과 똑같은 질문을 눈 앞에 고정시켜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또 다른 책을 읽고 또 다른 의심만 가득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사 그 모든 질문을 해결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해적들이 그들의 마음의 해안으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해치우고 또 해치워도 끝이 없는 무리들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눈앞의 모기들을 모조리 잡아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