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9 전체: 179,009 )
평안히 가라 - 챨스 스펄젼
lhyunsik

◎ 기록:스펄젼 평안히 가라 - 챨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 『그러나 주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더라』(눅 7:50). 이번 설교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평안히 가라'가 적당할 것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바로 방금 전에 주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만약 주님께서 "가라"라고만 말씀하셨더라면 그녀는 속으로 탄식을 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을 용서하신 주님 곁에 머무르고 싶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에게 "가라."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앞에 한 단어를 더 붙여서 "평안히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악들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이제 평안이 예비된 것입니다.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던 그녀는 이제 일어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 또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으로의 첫 발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흔히 좌우명 하나씩을 새로 정하곤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큰 사업에 도전하거나, 큰 시험을 눈앞에 두고서 힘이 되는 말을 입으로 중얼거리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 아직 이른 새벽과도 같은 그 시절에 자신에게 특별한 성경 한 구절을 만나 평생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주 낯선 느낌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음성처럼 다가오는 그런 말씀은 처음 들었던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메아리칩니다. 이 말씀은 세월이 흘러 죽음의 침상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그들의 가슴 속에서 속삭입니다. 요단강의 물결이 거셀 때, 이 속삭임은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듣게 되는 평안과 기쁨의 말씀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갈 때에도 그들에게 다시 다가옵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 위대한 선언을 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섬김이 끝날 때에도 그 끝을 알리는 선언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음성은 천국문 앞에서 울려퍼지는 환영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기의로 가득 차서 덮어놓고 트집을 잡으려는 냉랭한 분위기를 느끼고 즉시 회개한 여인을 내보내십니다. 그녀가 자신을 두고 부정하다느니 하는 논쟁을 하는 것을 듣지 않게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그것보다 더 은혜로운 축복을 발견합니다. 제가 보기에 주님은, 이 가난한 죄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박을 닦아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서 한 행동임을 아셨기에, 바리새인들에게 그녀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시고, 그녀에게는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씀은 당장은 그녀의 마음에 힘을 돋우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장차는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즉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야 할 시기에 그녀에게 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는 위로의 목소리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평생 "평안히 가라."하는 말씀이 메아리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음성이겠습니까? 그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의 설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바라며, 또한 여기 참석한 몇몇 사람들을 통해 고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 이 설교를 듣고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메아리를 얻으실 분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기 앉으신 사람들 중에는 힘을 돋우어 주시는 주님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성도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평안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늘 우리 속에 솟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술은 기쁨의 샘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샘을 마시며 우리 여정의 끝까지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찬송가 가사 내용처럼 말입니다. 건강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그리고 잃을 때나 얻을 때나 주여, 내 마음의 평온함을 지켜 주소서. 주님의 품안에서 달콤한 쉼을 쉬게 하시고, 거룩한 시와 찬송가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며, 내 영에게 평안을 명하여 주소서. 아, 우리의 생이 유리 바다 같기를! 우리의 모든 교제들이 거룩한 평안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여러분, 우리에게 와서 쉬라고 하신 그분께서 또한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어떻게 그 여인이 평안히 갔는가에 설명하는 근저가 될 '확고한 확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주님은 50절에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고 하셨고 48절에서는『네 죄들이 용서되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확신 가운데 구원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그녀는 평안 가운데 자기 길을 갔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사려 깊은 교훈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주께서는 그녀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당시에는 그녀의 평안을 지켜 주는 명령이었고, 장차는 그녀의 생을 인도하는 지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Ⅰ. 첫째로, '확고한 확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회개한 여인이 평안 가운데 갈 수 있었던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녀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주께서는 그녀에게『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셔서 그녀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녀는 우리처럼 고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가 몹시 받고 싶어하는 또다른 한 가지를 받았습니다. 즉, 그녀는 주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통해 구원의 확증을 받았던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주님께서 제게 직접 오셔서 그분의 입술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그녀처럼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환경적 조건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 그대로 육신을 입으시고 당신 앞에 서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시든,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든 결국 그 효력은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제 육신의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전해들을 때, 아버지를 대면해서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듣던, 마치 직접 만나 이야기하듯 써서 부친 편지를 통해 그의 말을 전해 받든, 결국 제가 아버지의 말을 아버지의 말로 믿고 받아들이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으시거든 꼭 언덕 위에 있는 제 집으로 올라와서 직접 하시라고 당부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저는 아마 천치 축에 드는 사람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진 왜 편지로 사랑의 말을 전하세요? 그렇게 하니까 제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잖아요? 아버지 다음부터는 직접 제게 오셔서 눈과 눈을 맞대고 제 귀에다 직접 음성으로 전달해 주세요. 부탁해요." 그러면 아버지는 십중팔구, "얘야, 왜 도대체 그러느냐?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릴땐 안 그랬는데. 이제까지 편지로도 충분했지 않느냐? 그런데 느닷없이 직접 만나서 얘길 하지 않으면 못믿겠다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도 그런 청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기록하신 말씀을 믿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직접 말씀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진실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제 말에 동의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는 갑니다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향해서 오직 그녀에게만 말씀하셨잖습니까? 물론 기록된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란 데는 의심이 없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확신시켜 주시지 않는 이상, 글쎄요, 우리가 평안히 갈 수 있을까요?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하는 말씀을 혼잣말로 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눅 8장에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노라』하셨을 때는 그저 혼잣말로 하신 것이 아니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쳐다보시며 하셨고, 그녀는 분명 그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확신을 주어야 할 대상이 오인되는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구요. 누가복음 6장에서도, 다른 사람들도 방안에 있었지만, 주님은 그 말을 시몬에게 하신 것이 아니었잖아요? 물론 베드로나 요한을 향한 건 더더욱 아니구요. 그녀는 주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말씀이 분명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자작했을 거라구요. 오직 그녀만이 그 자리를 떠났으며, 그러므로 오직 한 사람만이 '평안히 갔던'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 속에도 분명 단수를 지칭하는 단어가 쓰였잖아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그러니까, 저도 주님이 저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씀해 주시길 바라는 거라구요." 하지만 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다시 비유를 들어 봅시다. 만약 제 아버지가 저와 제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얘들아, 난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 꽤 많은 재산을 아껴서 모아 두었단다."그런데 제가 이 말을 듣고선 아버지에게, "아버지, 전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겠어요. 아버지 말이 조금도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구요. 아버진 분명 절 제외시킨 다른 형제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거죠? 전 아버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 형제들과 자매들에게까지 그 말씀을 하시는 거죠? 콕 찍어서 저한테만 말씀하시지, 왜 두루뭉실하게 복수 격을 사용하셨냔 말입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가 보증하시는 말을 듣고서도 안심이 안 된단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을 한다면 저는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사람이겠습니까? 아버진 아마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나와 모든 형제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 거라면, 그분의 말은 진실성이 떨어지기 보단 오히려 더 믿을 만한 약속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 혼자한테만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여러 형제에게 공언하는 것이 더 많은 신뢰를 형성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대상으로 저를 지목해 단독적인 계획을 추진하시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저를 은혜롭게 다루시는 것 사이에는, 믿음에 관하여는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끝끝내 토를 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 맞아요! 그런 게 있어요. 전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다수 사람 안에 제가 포함되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전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 속에 저도 속해 있는 건지 그게 궁금하단 말입니다." 친구여, 그런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성경은『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라고 말씀하셨네. 자네가 그분을 신뢰하는지 혹은 신뢰하지 않는 지는 자네 자신이 더 잘 아는 것일세. 자네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자네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하신 모든 약속 또한 자네 것일 걸세.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일반적인 법칙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모든 곳,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서든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만약 주님 앞에 나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오니, 나의 도움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은 증거 하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입니다. 무오한 증거자께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으므로, 이를 의심할 믿음의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분명 진리입니다. 그분은 단지 입으로 나온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증거하셨을 뿐인 것입니다. 직접 안 들린다고 해서 당신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곤 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글로 쓰여진 말이든 직접 음성에 실어 내놓는 말이든 그 사람이 진실되다면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언질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에 관한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말보다는 글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성은 발한 후 곧 사라지지만, 글로 기록된 말은 그보다 더 오래 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거듭 읽어야 하기에, 말씀에 관한 한 그런 판단은 더더욱 타당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밤에 당신에게 나타나 "네 죄는 용서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책으로 기록된 것을 거듭해서 읽는 것이 우리의 확신에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록된 문자가 일회성의 음성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군요. "아니예요. 전 당신 말을 도통 이해 못하겠어요." 그럼 이 얘길 해야겠군요.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드로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후일 영감을 받아 성경을 쓸 때,『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벧후 1:19)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보고 들었던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테지만,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그에게 지속적인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제 생애의 어느 순간, 주님을 직접 뵈옵고 그분이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경험이 있어서, 오늘 이 아침에 그일을 다시 떠올린다면 제 가슴을 다시금 감동으로 벅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우울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가끔씩 그러하듯이 흑암의 세력이 제 혼을 짓누르고 있다면, 저는 제 스스로에게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니가 보긴 뭘 봐? 잠시 정신이 이상해져서 헛것을 본 거겠지. 일시적인 정신착란이었던 거라구.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러나 제가 말씀으로 확신을 얻었다고 합시다. 제 눈앞에 그 말씀이 있는데, 제가 헛것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저는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며, 제가 이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성경의 행간에 손가락을 얹고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책에 있는 이 말씀을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들에는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있으나, 이 성경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제 혼에게 하셨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몸소 겪은 경험들이 진실임을 확신하는 만큼이나 이 책이 주님이 쓰신 것임을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서 의심을 제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게 직접 나타나셔서 주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성경의 기록으로 약속하신 것보다 더한 구원의 확신을 주진 못했을 것임을 저는 잘 압니다." 여러분 기록된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이 믿고 있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 확실하듯, 당신의 구원도 그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 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당신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3:36).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이 약속에 관한 위의 말씀 중에는 "만약"이나 "그러나"같은 단어가 없습니다. 말씀에서 구원은 현재적이며,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경우에서도 확실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믿고 안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소한 논쟁들을 가지고 성경을 던져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분명한 언약의 말씀으로 믿고 그 위에 굳게 서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을 구원의 확신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진리라면, 그리스도 안의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만큼이나 안전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믿어요.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이 말은 성경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 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온전히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모두 믿을 것입니다.『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요일 5:11). 위대하신 아버지의 증거이며, 또한 영원하신 성령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말씀을 감히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에는 아직도 자신이 믿고 있는 건지 안 믿고 있는 건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과 있듯이, 믿음이라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믿었다면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요. 평안히 가십시요. 의심을 거두고, 논쟁을 그치고, 평안히 가십시요. 가서 당신이 하는 일을 하십시요. 구원에 관한한 더 이상 볼일은 없습니다. 가서 완성된 구원을 즐거워하고, 더이상 이러쿵저러쿵 질문을 던지려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 14:15). 어찌하여 계속 의심하고 질문을 던집니까?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들을 즐기십시요. 당신은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성화의 길을 떠나십시요.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은혜의 언약에 명시된 다른 모든 축복들을 찾아내십시요. 그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확신하고, 완전한 평안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예비하신 선한 것들을 누리십시요. 구원의 확신이야 말로 "평안히 가라"라고 하시는 명령의 근저입니다. Ⅱ. 두 번째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깃든 사려 깊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지혜를 따라, 용서해 주신 여인을 뿌리치시며 "평안히 가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속에 깃든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은 『가라』하는 말씀을 보고, 그 후에는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라』는 말씀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는 어디로부터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어디로부터 떠나가는가? 첫째로, 그녀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갑니다. 그 자리에 있던 시몬과 바리새인들은 침을 잔뜩 세우고 있는 벌떼들처럼 불만에 가득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들도 용서하는가?』하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완벽하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인인 여인이 가까이 접근하여 눈물을 자신의 발을 씻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꼬투리로 잡아 그분의 정결하심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긴 유약한 어린 아이 같은 성도가 머물기엔 너무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그녀의 혼은 사자 떼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담긴 속뜻은 아마, "더 머물러 있다간 이 트집을 일삼는 자들에게 고통을 당할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 너는 이미 엄청난 축복을 얻었다. 이 축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자들은 자기들끼리 으르렁대며 싸우게 놓아두어라. 너는 보물을 지녔다. 그 보물을 해적들에게 강탈당하지 않게, 어서 가거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주님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자기들끼리 놓아두고 그 자리를 떠나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큰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자주 합니다.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당한 질문을 주기 위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읽어야 하는 것이 비극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궁창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영적인 건강해 해롭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증명해 내셔야 합니다."예, 물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저녁 성찬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 위에는 각종 육류가 그득했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고기 접시 하나를 골라 고기를 얇게 저민 후 그 토막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입 속에 넣는 순간 고기가 상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고기가 상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고기를 다 먹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쁜 책이라도 끝까지 샅샅이 다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악한 설교자의 설교도 그게 얼마나 나쁜지 알아보려고 끝까지 다 들어보곤 합니다. 5분이면 모든 걸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당신이 만약 썩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면 속으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오우, 이런! 주인장 이건 개 먹이로나 적당할 음식인데! 난 괜히 이런 거 먹고 탈 나기 싫단 말이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보십시요. 주님도 여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으셨습니다. "잠깐, 게 섯거라. 시몬이 할 말을 한번 들어보거라. 선한 여인이여, 그대는 눈물로 내 발을 씼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 시대의 지성 바리새인의 말을 들어보거라. 그는 너에게 지식인답게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조용히 귀 기울여 끝까지 들어보거라. 그리고 그 외에도 여기에는 내가 네 죄를 용서한 것에 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반대는 뼈에 새긴 맹세보다 더 뿌리깊은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라. 내가 그들의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리니, 그렇게 너의 마음을 안심시키리라."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구주께서는, "평안히 가라."라고만 하셨습니다. 평안을 가졌으니, 잃어버리지 않게 조용히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안정과 기쁨을 얻었느니 그것을 말쟁이들에게 강탈당하지 않도록 그 자리를 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그 방안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거기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당신을 쏘아보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들이 당신의 존경을 유도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 지켜보고 있기보다는 그저, "이 자리를 떠나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며 방을 나와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반대가 극심한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서 우리의 믿음을 강탈해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집으로 가라. 그들을 내버려두고, 평안히 가라." 저는 주님께서 이 잡다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보호하신 것 외에 이런 숨은 뜻도 가지고 가지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본의 아니게 유명해지겠다. 이 자리를 피하라." 만일 주님이 요즈음의 어느 유명한 인물들과 같으셨다면 그분은 그녀에게, "이 사람들 앞에 서서 너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어라. 그리고 이번 주중에 6일은 시간을 내서 이모임에 참석해라.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네 이야길 해 주도록 해라."하고 말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구주의 발을 눈물로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대단한 여인이 아닙니까? 그녀가 만일 주님께 그런 부탁을 들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눈물과 머리카락에 얽힌 그 기막힌 이야기를 주저없이 구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그 들 중 몇 명이나 그녀의 말에 감명을 받았을까요? 그녀는 주님께 감사해 하는 그만큼 또 흥분하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다시 말하면 이런 속뜻이셨을 것입니다. "너는 여자들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전해라. 너처럼 타락한 불쌍한 여인들을 찾아가서 내가 네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 주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이것으로 족하다. 너는 네 사랑으로 참으로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서지 마라. 행여 멋있고 영웅적인 행동을 계속하려는 생각은 그만두고, 그만 평안히 가거라." 또, 여기에 더하여 이런 뜻도 담겨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라. 네 자매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사람들이 네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보게 하라. 그리하여 내 교리를 돋보이게 하라. 너를 백성들 중의 죄인이 되게 한 그 나약함이 또한 성도로서의 네 삶에서도 큰 위협이 되리라.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내 제자들과 함께 하거나 나를 따라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평안히 가라." 저는 주님께서 이 부분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교훈을 알려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세하게 말하자면, 저는 구주께서 그녀를 그녀의 생애를 통해서 단 한 번 수행했던 위대한 사역에서 물러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에서 우러나온 행동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모든 곳에서 회자되고 기억될 만한 것이었으며, 우리 또한 그녀의 사랑은 물론하고 진실한 회개와 영웅적인 용기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그런 영웅적인 행동만을 행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삶이란 그야말로 평범한 행위들로 가득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묶은 머리를 풀어서 수건 대신 발을 닦는 것 같은 여웅적인 행동만을 하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늘 실수하기 일쑤여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은 늘 영웅적인 행동이 불러오는 경탄과 찬사에 귀가 솔깃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가 혼자서 어떤 대단한 일을 했다는 얘길 들으면 자신도 몸소 그 일을 해보고 싶어하고, 나아가서는 계속 그런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오, 자매들이여! 당신에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을 열어야만 하는 순간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은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사랑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돌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말을 깁고, 아이들을 위해 작은 양말을 손수 만들면서, 그 여인이 주님의 발을 씻으며 아무 말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일상의 삶을 영위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앙은 천박한 것입니다. 일상의 고된 일들은 곧 거룩한 사역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손도끼와 대패를 손에 들고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혹은 계산대 뒤에서, 또는 연필을 들고서 사무를 보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는 자리에 나아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행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또 이런 일은 한 번 행하고 나면 그들은 평생을 들뜬 상태로 살아갑니다. 지금 플래쉬 불빛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안히 가라."저는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정말로 보통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서,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에 응당한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혹시나 일상적인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사역에 흥미를 잃을까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행위 하나 때문에 일상을 삶을 망쳐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일상의 삶 속에서 나를 섬기고 가정에서 내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여기서 무거운 짐으로 고통받지 말고 가정으로 돌아가 가벼운 멍에를 지라." 저는 또 주님의 말씀에는 그녀에게 그녀가 잠시 누렸던 주님과의 단독적인 친밀한 교제를 그치도록 하신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누가복음 7장에서 주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겠지만, 육신을 가지고는 다시는 그렇게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매우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 종종 일상적인 삶을 망각하기 심상입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 앞에 앉는 것과 함께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일도 해야 합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인 기쁨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일이 서로 상충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의무를 지혜롭게 수행하고 한가지 일이 다른 일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루 종일 성경만 읽어야 한다거나, 하루 종일 기도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면, 버리십시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거룩한 모범을 따라 모든 일들을 알맞게 배치시킨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모양의 모자이크가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리고 부지런히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런데, 그녀는 무엇을 하기 위해 가야 했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이런 의도를 자기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라. 너는 타락한 여자로 살아왔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네 집이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친지들을 만나라. 가정에 적응하라. 그리고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집이 아니더라도 가서 정착할 만한 곳이 있으면 거기로 가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유혹이 다시 너의 머리채를 잡아당길 것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가정의 질서에 순응한다면, 너는 유혹에서 안전할 것이다. 머리와 마음, 그리고 두 손을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채운다면, 길에서 벗어나 다시 그릇되이 가는 사태가 있을 수 없으리라." 혹시 여러분 중에 자신을 특별한 인물, 말하자면, 흙을 밟지도 않고 꽃잎을 따먹으며 사는 환상 속의 성인쯤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망상에 빠져 있다면 어서 빠져나오십시요. 저는 중국에 가면 구름 위를 걷는 신발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기회만 된다면 그걸 돈 주고 사려고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마치 꿈 속을 걷는 것처럼, 망상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실제 이상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당신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뭣이나 된 듯한 착각에서 어서 벗어나십시요. 세상에서 같이 일하기 가장 까다로운 사람은 바로 젠체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중요한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진실입니다. 가련한 인생들이여! 어리석은 자만으로 인한 망상에서 제발 벗어 나십시요! 머물러 있지 말고 가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요. "평안히 가라.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사랑을 증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눈물로 내 발을 씻은 너는, 너와 같이 타락한 자들에게 가서 네 눈물을 보여주거라. 가서 그 진실된 눈으로 그들에게 나의 사랑을 전한다면, 너는 내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안을 가지고 네 삶 속으로 돌아가서 나를 위하여 일상의 일들을 부지런히 행하라. 그러면 내가 나를 위해 일할 기회들을 만들어 주리라."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에 담긴 속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그 자리에 머물러 스스로를 즐겁게 하려는 생각이나 하고 있지 말고, 가십시요. 가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요. 가십시요! 자, 여기에서 다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평안히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안 속에서 남은 생의 여정을 모두 마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 주님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요!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헛된 두려움을 몰아내어 주소서. 어둡고, 수치스러운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요. 못자국 난 그 손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음을 잊었습니까? 더이상 옛 일로 마음에 소동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평안히 가십시요. 우리 죄의 짐이 벗겨졌으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합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를 확실하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평안의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실 때의 상황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주님은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을 비평가들을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그녀에게, 그들을 신경 쓰지 말라 하시는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도 그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평가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종은 그저 주인이 받아들이면 만사가 끝나는 것입니다. 종은 타인들이 자신의 섬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셨으면, 그들이 뭐라고 불만을 터뜨리던 간에, 무어라고 혹독한 말을 들고 와서 우리의 마음을 들쑤셔 댄들, 우리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 신랄한 비평가들처럼 호들갑 떨지 말고 평안히 가라. 저는 또 주님이 "네가 한 일로부터 물러나 평안히 가라."라고 하는 뜻으로 평안히 가라, 라고 하셨으리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지금껏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나서, 저는 제 자신이 영적으로나 전하는 형식, 또는 전하는 시간의 길이,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부분을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괴롭게 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저를 받아주셨다면, 저는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야말로 대단한 행동을 했습니다.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그 자리를 물러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했을까? 내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지? 내가 주님의 발을 씻길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나 같은 죄인이, 나 같은 여자가 그 거룩하신 분에게 그런 일을 하다니! 그분은 내 무례한 행동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도 몰라!"우리도 주님을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행하고 나서는 종종 그렇게 느끼곤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너무 시건방진 행동을 한 건 아닌지 몰라? 아휴, 내가 너무 나섰나봐!" 어떤 선한 젊은이 하나가 처음으로 설교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엔 어떻게 설교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다시는 안 할 겁니다. 전 이런 거룩한 사역에 별로 적합하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라고 하신 겁니다. "평안히 가라. 나는 너의 섬김을 받아들였다. 네가 행한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네 사랑의 향기는 그윽했고 나에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네가 한 일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말라. 너는 옳은 일을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평안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해 일 한 후에 얻는 평안, 인간들의 신랄한 비평에서 초연한 지극한 평안 말입니다. "평안히 가라." 지금 이 시간부터 영원히, 그 거룩한 평안을 소유하시길!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짜증을 내곤 합니다. 저는 평소엔 늘 선하기만 한 형제들이 어느날 느닷없이 터무니없는 의심을 집어삼키고는 여기저기 그것들을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매우 선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예민합니다. "까다로운" 여인들로 소문난 사람들이죠. 아마 소문 대로인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더이상의 세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신경질이라는 질병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것도 많겠지만, 특히 이 부분에 관해서 '형제회'의 형제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은 굳건하고 자족할 줄 알며,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들은 다소 느릿하긴 하지만, 확신에 차 있고, 마음이 견고하며, 또한 늘 조용합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 중에는 너무 서두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한다면 일은 더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좀 더 하나님께 내맡긴다면, 평안은 우리 속에서 강같이 흘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끊이지 않는 기쁨을 가지려고 합니다.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를 심란하게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 거룩하신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험한 길을 걸을 때에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마음은 큰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이 말씀은 아름다운 음악과 같이 우리 생의 여정에 함께 할 것입니다.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선한 여인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