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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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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을 준비하며 - 모리스 샘(Morris Sam)
lhyunsik

재림을 준비하며 ▲ 모리스 샘(Morris Sam) 저는 제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어떤 모임도 갖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원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소리로 재림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누가복음 17장 후반부로 초대합니다. 『또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날들이 오리니 그때에는 너희가 인자의 날들 중 단 하루를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리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기를 보라.’ 또는 ‘저기를 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쫓아가지도 말고 그들을 따르지도 말라. 마치 번개가 하늘 이편에서 번쩍여 하늘 저편까지 비치는 것같이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렇게 되리라. 그러나 먼저 그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며, 이 세대에게는 버림을 받아야만 하리라. 노아의 날들에 일어났던 것같이 인자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시켰느니라. 그것은 또한 롯의 날들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라.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였으나,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 모두를 진멸시켰느니라』(눅 17:22-29). 저는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소돔과 고모라 위에 떨어져 모조리 태워 버렸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무서운 재앙들도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기에 우리가 거기서 피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상징과 비유 때문에 계시록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시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서 불과 유황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마지막 거처가 불과 유황이 타는 둘째 사망이 있는 곳이라고 할 때, 이 사실은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묘사된 일은 소돔 땅에 떨어져 그 도시를 파괴시켰던 불과 유황만큼이나 실제적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 낮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라.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애쓰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면 보존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 밤에는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어디니이까?”라고 하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함께 모이느니라.”고 하시더라』(눅 17:30-37). 이 구절을 통해서 재림에 대한 3개의 명확한 명제들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는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세상이 오염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재림 때 일어나게 될 분리입니다. 1. 주님께서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살았던 마을에 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자는 재림에 대해 설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부담조차 없음을 태연하게 드러내며 자랑했습니다. 그 설교자는 주님의 축복된 약속인 요한복음 14장에 관해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는 또한 마태복음 24,25장에 관해서도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예수님이 떠난 구름 속을 올려다보고 서 있는 제자들에게 두 명의 천사가 말한 것에 대해서도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올라 가신 바로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그가 재림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면 부활의 위대한 장인 고린도전서 15장도 결코 온전하게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전 15:23). 그렇다면 그는 바울이 놀라운 말들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했던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관해서도 결코 설교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3-17). 그는 또한 마지막 날들에 처한 히브리인들에게 권면하시는 말씀들에 관해서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그가 재림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면, 그는 베드로전서의 이 축복받은 구절에 관해서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송축하리로다. 그분은 그의 풍성하신 자비하심을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잔하지 않는 유업을 간직해 두셨으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벧전 1:3-5). 그것은 또한 다음과 같은 요한일서의 놀라운 구절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그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설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후서의 모든 장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해서 재림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베드로후서에서도 다음 구절을 전혀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오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 그의 위엄의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라』(벧후 1:16). 그렇다면 그는 야고보서의 다음 구절들도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이 문 앞에 서 계시니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약 5:8,9). 또한 유다서에서도 다음 구절을 설교하지 않은 것입니다.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유 14). 그것은 계시록의 첫장에 관해서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시리니,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것이요,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그대로 되리로다. 아멘』(계 1:7). 그것은 성경에서 마지막 약속에 관해서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마지막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계 22:20). 그것은 성경에서 마지막 기도에 관해서도 결코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계 22:20). 사도 바울은 젊은 설교자가 하나님께 신실할 것을 재림과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권면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가 나타나실 때와 그의 왕국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1-2). 그는 디도서의 위대한 구절 역시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가르치시되,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을 거부하고, 우리로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며,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오 이런! 그는 그의 사역중에 성경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빼먹어 버렸겠습니까? 그가 그런 태만한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14년 동안 사역자로서 일해 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의 특성에 대해 결코 설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셨고, 우리 가운데 선지자이셨으며, 지금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으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얼마나 귀한 약속입니까! 이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정결한 삶을 살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1-3). 2.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은 오염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세상은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세상은 썩어질대로 썩어질 것이라는 것이 성경적 견해입니다. 저를 쓴 웃음짖게 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설교단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이렇게 설교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모든 표적들이 이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큰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는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림 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노아의 날을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재림 때가 노아의 날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대부흥 시대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천 번이나 설교했겠지만, 우리가 아는 한 한 명의 혼도 구원받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영적 대각성의 시대에 살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노아는 죄악이 가득 찬, 범죄가 지배하고 육신적이고 사탄적인, 타락해 버린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고 싶으냐?” 하시며, 노아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 땅에 살았던 롯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순례했습니다. 그들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을 때, 롯은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요단 평원을 선택했는데, 그곳은 물이 풍부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롯은 소돔 앞에 자기 천막을 치고 소돔에 거주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아브라함은 소돔을 진멸한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조카 롯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기를 “오, 주님, 당신이 의인 50명을 찾으신다면 진멸하시지 않으시겠죠?” 하자, 주님은 “내가 진멸하지 않겠노라.” “20명은요?” “않겠노라.” “의인 10명을 찾으신다면 진멸하시겠나이까?” “그 도시에 의인이 10명뿐이라도 내가 진멸하지 않겠노라.” 그러나 소돔에서는 10명의 의인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롯의 가족이 의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받고 있는 의인은 롯 하나뿐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할 때, 그의 마음에 조카 롯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그의 기도를 통해서 롯과 롯의 가족을 이끌어 내고자 했습니다. “오 주님, 여기에 나의 조카가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알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롯은 도시로 들어가 결혼한 두 딸을 깨워 경고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을 때, 그의 사위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소돔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치고 있을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일하게 살아 남은 가족인 결혼하지 않은 두 딸마저도 동굴 저쪽에서, 그들의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음행하여 그와 동침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과 타락한 도시, 정욕, 폭력, 탐욕,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물건들을 사고 파는 데 분주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계획을 잠시동안이라도 생각해 볼 여유를 갖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영적 대각성과 영적 부흥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악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이 그가 다시오실 때 세상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 세상이 그 시대 보다 얼마나 더 악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혼이 성행하고 결혼서약은 아무 의미 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할 만큼 악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사람들은 아내가 있음에도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악한 일들을 즐기며, 자신들의 아이들이 그런 악한 일들을 답습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들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하시길 바랍니다. 저주받을 그림들과 TV는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다른 것보다 더 많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헌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장 안에서 발견될 것인지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들이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일간신문을 펼치면 전면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정욕, 범죄, 살인, 이혼, 왜 신문사는 전면을 그런 종류의 기사로 채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문사가 그러한 사건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한다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신문을 팔아치우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경건한 한 대학학장이 죽었다면 그들은 그가 죽은 날과, 그가 묻힌 날,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유산을 남겼는지에 대해 신문에 조그만 기사를 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이몬드 해밀턴이나 존 딜링거가 총에 맞으면 신문의 전면에 큰 제목과 사진으로 도배할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대중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 우리가 처할 상황입니다. 부흥이 아니고 영적 대각성도 아니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정확히 그 반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대홍수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돔은 정욕과 음욕과 죄들로 가득 찼고, 심지어 늙은 롯과 그 가족들조차 타락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부흥의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 전개될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입니다. 3. 휴거될 때 구원받지 못한 자는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 세상은 분리될 것입니다. 그 밤에는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입니다. 두 여인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분리는 그의 성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리에 오실 때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3-17). 성경이 한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도둑같이 오시는데 모든 눈이 그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휴거, 즉 공중 재림과 그분의 지상 재림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카랴 선지자는 말하기를 주님의 발이 올리브 산들 위에 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스카랴는 여기에서 주님께서 비밀리에 몰래 오시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오시는 한 사건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측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은밀한 오심과 대중 앞에 나타나심은 모두 그의 재림에 관한 사건입니다만, 주님께서는 먼저 자신의 성도들을 위해 은밀히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밀하게 오실 때 믿는 사람은 올라갈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셔서 없어진” 늙은 에녹과 같이 될 것입니다. 왜 에녹은 역사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입니까? 에녹이 어느 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에녹을 하늘로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아내는 일어나서 커피 포트를 올려 놓고, 베이컨과 달걀을 튀기고 빵을 굽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산책하러 나간 에녹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에녹씨를 보지 못했나요?” 상대방은 대답합니다. “아니오, 어디서도 그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 후 일간신문은 이 일을 머릿기사로 다룰 것입니다. “에녹씨 실종되다.” 그리고 수색대가 찾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세상에서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것에 대해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지 놀라울 정도지만, 영적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동정도 사랑도 결코 없습니다. 만일 오늘 밤 맨 앞줄에 있는 어린 아이들 중에 하나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찾을 것입니다. 이 캠프 전체는 한숨도 자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이고, 모든 캠프의 주위를 살피고, 호수를 파 볼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없이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한 어떤 열정도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색대는 에녹을 찾아다녔고, 그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 은밀한 오심은 내가 이 설교를 끝마치기 전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 일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기 전이나 내일 밤이 오기 전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몇 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딜지라도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오실 때 수색대를 파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엘리야와 에녹처럼 갑자기 낚아채여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 밤에는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밤에 오신다면, 여러분을 데려가시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나는 기분이 좋아. 나는 얼마 전에 신체검사를 했고, 의사는 내가 백퍼센트 건강하다고 말했어.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나는 죽어 가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 그러나 재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내 친구 가운데 바로 이 본문으로 주일 아침 11시 예배에서 설교를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한 여인과 그녀의 네 살짜리 어린 꼬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남편은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에는 절대로 참석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그 네 살짜리 꼬마가 말했습니다. “엄마, 만일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아빠는 뒤에 남아 있나요?” 엄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꼬마에게서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꼬마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 말했습니다. “엄마, 예수님이 오늘 오시면 아빠는 뒤에 남게 되나요?” 그러자 남편이 물었습니다. “이 애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목사님이 오늘 재림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예수님이 오실 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 애는 만일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우리는 떠나는데, 당신은 뒤에 남는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갈 것인지가 알고 싶은 거예요.” 그 남자는 화를 냈습니다. “도대체 거기서 내 아이에게 뭘 가르친 거야?” 남편은 그것에 대해 몹시 반박하며 화를 냈습니다. 아내는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남편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남편은 그 아이가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꼬마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불을 켠 후에 말했습니다. “엄마, 예수님이 오늘 밤에 오시면 우리는 아빠를 남겨 두고 떠날 거예요?” 아빠가 듣고는 “가만 누워 있어!” 하면서 그 꼬마를 야단쳤습니다. 아이는 자기의 작은 침대에 누웠지만, 다시 말했습니다. “엄마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아빠를 남겨두고 떠날 거예요?” 다음날 아침 남편은 텍사스, 산 안토니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했던 말이 그의 마음에서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오늘 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아빠를 남겨두고 떠날 거예요?” 그는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왔지만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새 이리저리 뒤척였습니다.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그의 어린 아들의 질문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무일도 할 수 없었고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에게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는지 말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께 전화를 했고, 남편과 함께 목사님을 만나러 가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께로 갔습니다. 남편은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나는 미칠 지경입니다!” 목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죄의 찔림 아래 있소.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는 그를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수요일 밤에 침례식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남자의 네 살짜리 작은 아들도 침례식에 왔습니다. 안내인이 아이를 내 보내려고 하자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 아이를 놔두세요.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목사는 주님께로 헌신한 그를 잡고 물 속에 그를 담갔다 일으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을 표현했습니다. 작은 꼬마는 돌아서서 회중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아빠와 함께 갈 수 있어요!” 나는 그 질문으로 오늘 밤 이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밤 오신다면 여러분은 함께 올라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남아있을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