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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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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들이 고난받는 이유 - 바스콤 레이 라킨
lhyunsik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는 이유 ▲ 고난의 파도 덮쳐 와도... 바스콤 레이 라킨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괴롭혀 왔습니다. 인간의 원수가 “왜?” “어떻게?” “언제?”라는 질문을 하며 하나님의 지혜에 의심을 집어넣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입니다. 의인들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의 일부임을 성경적으로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허용하신 모든 것에 계획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히 12:6). 하나님께 때로 불순종한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자녀로서 징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징계가 항상 육체적인 고통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때로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로서 우리에게 닥치는 그러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아들들로서 이 징계를 견뎌내기를 바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손길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왜?”라고 묻게 만듭니다. “왜”라는 질문은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알지 못함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칠흑같이 어두운 깊음을 들여다보고,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찌끼를 정화하시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계를 통해 우리 삶이 놀랍도록 발전한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징계를 겪을 때, 대부분의 자녀들은 바로잡아 주는 것에 결코 감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게 되면 자신들의 아버지가 해 준 징계를 바로 평가하게 되고, 훌륭하고 강한 인격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베풀어주신 훈련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영들의 아버지께는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히 12:9). 고난을 주께서 주시는 징계로 인식하고 조용하게 고난의 날들을 영적인 자기반성과 정리의 시간으로 삼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고산지대 목동이 있었는데 그는 양들을 위험스럽고 가파른 경사지로 인도하는 “방울을 단 양”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목동은 할 수 없이 고의적으로 그 양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다리가 치료된 이후 그 양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질병과 고통은 때로 선하신 목자께서 그분의 양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시는 과정입니다. 음악가가 바이올린의 현을 거의 끊어질 정도까지 단단히 죄어서 무한의 화음에 맞춰 조율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에게 맞추셔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며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또 우리로 그분의 거룩하심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하시느니라』(히 12:10).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지팡이”는 일반적으로 양들이 “금지된 길들”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목자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막대기”는 양이 무리와 떨어져서 헤맬 때 양을 채찍질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은 현명하게도 지팡이와 막대기 안에서 위로를 찾았습니다. 성장하는 아이의 생에서 징계는 훈계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인격 발달에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나쁜 일을 하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고통의 형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다른 식의 고뇌든지 징계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과정이며, 우리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더 훌륭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농부가 포도 넝쿨을 자르듯이 하늘들의 선하신 농부께서도 때로 고통의 칼이 우리에게 떨어지게 하셔서 더 풍성한 의의 열매들을 맺도록 하십니다. 2. 때로 고난은 사역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께서, 너희가 잠깐 고난을 받은 후에 너희를 온전케 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힘을 주시고, 확고히 하시느니라』(벧전 5:10). 욥은 고난의 사역으로 부름 받았고, 고난 속에서 그의 보여준 인내는 수세기 동안 모범이 되었습니다. 유물론적 철학을 가진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인 한 가지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합니다. 욥의 고소자인 사탄은 사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너의 하나님을 섬기지! 네가 소유한 엄청나게 많은 비옥한 땅들을 보라구. 너의 살진 가축들과 튼튼한 집과 헛간들을 보라구.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의 사역으로 부르셨고, 사탄이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욥에게서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네 권세에 있으나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라”』(욥 1:12). 사탄은 욥의 가축, 욥의 양떼들, 욥의 종들, 욥의 자녀들과 집들을 다 취해 갔지만, 욥은 일어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신 분도 주시요,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욥 1:21). 사탄은 다시 주께 접근해서 말합니다. 『사람의 피부로 사람의 피부를 바꾸오니 정녕 사람이 자기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밀어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정면으로 주를 저주하리이다』(욥 2:4,5). 그런 다음에 사탄은 정수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종기로 욥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욥은 질그릇 조각을 주워서 자신의 몸을 긁었고, 재 가운데 앉았지만 『이 모든 일에도 욥은 자기 입술로 죄를 짓지 아니하더라』(욥 2: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고난의 사역자였고, 고난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인내는 옛날 선지자들의 유창한 말보다 그 당대에 반박하던 자들에게 훌륭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깨진 향수병은 깨지지 않은 병보다 더 많은 향기를 발합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은, 석고 상자처럼, 고통으로 산산이 부수어져서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어렸을 때 시력을 잃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운인 것 같은 이런 일에도 그녀는 냉소적이 되지 않았고, 암울한 어둠 가운데서 나이팅게일처럼 마음을 들어 올려 찬양함으로써 불후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고난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 광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다이아몬드는 국가의 최정상에서 빛나도록 하기 위해 영국 왕에게 바쳐졌습니다. 그 다음 그 다이아몬드는 세계 다이아몬드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다듬기 위해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을 자르기 위해 가장 훌륭한 보석 세공인을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다이아몬드에 눈금을 새긴 다음에 끌을 가져다가 강하게 두들겨서 두 조각을 냈습니다. “저런 부주의하게도”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를 두 조각 내기 위해 여러 주 동안의 조사와 계획이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 도표가 만들어졌고, 전문가들은 어떻게 자르는 것이 가장 유익이 되는지 의논했습니다. 두 조각을 낸 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를 자르는 기술에 있어서 최고봉을 이루는 업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이아몬드 원석에서 잘려진 두 개의 보석은 오늘날 영국 여왕의 자존심이며 보석계의 경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강한 타격을 허용하실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런 타격은 소름끼치는 실수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손길 가운데”있다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불로써 단련된 금”처럼 연단된 여러분을 꺼내실 것입니다. 설교 사역이나 찬송이나 가르치는 사역보다 더 강한 설교는 바로 고난의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고난의 용광로” 속에 있다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렇듯 힘든 사역을 참아낼 만큼 강하고 신실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아시고 기뻐하십시오. 3. 고난은 때로 시험입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거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고난은 도덕적인 체육관으로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의 경주”를 하는 데 알맞게 변화됩니다. 현명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는데, 이는 약함 가운데에서 그분의 힘이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때 내가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갔더니, 보라, 그가 물레들 위에서 한 작품을 만들었더라. 그가 진흙으로 만든 그 그릇이 그 토기장이의 손에서 손상을 입었으니 그 토기장이가 그것을 만들기에 좋게 보이는 대로 그것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만들더라』(렘 18:3,4).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주조하시고 형성시키시고 부수기도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형체가 없는 덩어리인 무가치한 진흙으로부터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십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대부분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정련되고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손과 발을 차꼬에 묶인 채 등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의 그런 경험은 그들을 좌절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밤중에 찬송”했고, 그들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는 가장 처참한 패배인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등이 벽에 딱 붙을” 만큼 뒤로 물러난 상황은 인생에서 다시 반격할 절호의 위치입니다. 승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서 고난의 시련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주는 아름다운 보석이며, 다른 보석들이 능가하지 못하는 부드럽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진주는 유일하게 동물에게서 나온 값비싼 보석입니다. 이 보석을 솜씨좋게 만드는 것은 바로 보잘 것 없는 조개입니다. 이물질(아마도 날카로운 모래 조각)이 조개 껍질 안에서 고통 가운데 이 물질을 감싸는 액을 분비시킴으로 결국 진주가 형성됩니다. 진주는 고통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고난이라는 이물질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때에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칩니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새로운 찬란함으로 그분의 아름다움을 반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고통의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눈먼 젊은이를 보고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습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께서는 “둘 다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시키는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치유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었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바울에게는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으로써 치유의 기적만큼이나 위대한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치유시켜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자애로운 보살핌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보살핌 덕택에 그분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미숙한 사람의 눈에는 합성 다이아몬드도 진짜처럼 빛나 보입니다. 그러나 물 속에 넣어보면 합성 다이아몬드는 그 빛을 잃는데 반해 진짜 다이아몬드는 더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자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고난의 물들”을 통과하게 하셔서, 고난의 때에 세상이 우리의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통과하고, 어떤 사람은 불을 통과하지만, 이들 모두는 피를 통과한다네. 어떤 사람은 커다란 슬픔을 겪지만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또 하루 종일 노래를 주신다네. 그렇습니다. 우리 운명의 건축가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 외에는 우리의 삶에 그 어떤 것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에서 그분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주님을 완전히 봤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내가 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신뢰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폭풍이 휘몰아칠 때 우리는 “평화가 있으라”는 그분의 축복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별이나 고통, 박해를 통과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시고 위로하시고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온전하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꼭대기에서보다는 골짜기에 있는 영혼에게 훨씬 더 가까이 오십니다. 번영의 정원에서보다는 고난의 광야를 지날 때 그분의 임재가 더욱더 가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타는 덤불 속에서 말씀하셨고, “잠시 동안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히 11:25) 택하는 위대한 결정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고난의 광야에서 였습니다. 고난의 밤이 오면 우리의 영적 시각은 증가되어서 참된 관점에서 인생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밤보다는 낮에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밤에만 볼 수 있는 별들은 가장 가까운 별도 실제로는 수백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혼에 밤의 장막을 쳐야할 때를 아시며, 암울한 고난의 때에 우리의 영적 시각이 증가하여 우리 인생의 가치가 고양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은 것은 함께 영광도 받게 하려 함이니라』(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특권입니까!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 그들을 주님과 일치시킨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그리스도께서는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일치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그리고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여행하는 도중에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목적지에 도달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타국에서 본향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이방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선한 이름을 찢어 없애버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분께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려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신비를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을 우리는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꾸며 갖은 악한 말로 너희를 거슬러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세상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며 세상적인 번영을 향유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냉소적으로 만들수록 이런 고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증오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맞으셨습니다. 우리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셨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조롱과 비방에 대해 주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응수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예하기를 원하고 그분과 일치하기 원한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박해와 고난과 고통에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4:11). 인생은 고난과 고통과 죽음으로 더욱 밝게 빛을 발합니다. 상한 마음을 가진 가수는 고통을 맛보지 못한 가수보다 더 풍부한 감정으로 깊이 있는 노래를 합니다. 장미 덤불이 더 아름답게 꽃피도록 하기 위해서는 “잘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고,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될 수 있습니다. 좌절은 때로 그분이 정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의인이 왜 고난을 받습니까?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허용하심이 없이는 그분의 자녀들 중 단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어떠한 상심이나 좌절이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한 석공이 이상하게 생긴 돌을 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그걸로 뭘 할 건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이 돌을 잘라서 저쪽으로 가져가서 끼워 맞출 겁니다.” 훌륭한 건물의 높이 솟은 탑을 가리키며 석공이 대답했습니다. 여기 아래서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주께서는 그분의 전지하신 계획에 따라 우리를 다듬으시고 형성시키셔서 우리로 저 위에 맞게 만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