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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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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 - 탐 말론(Tom Malone)
lhyunsik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 ▲ 탐 말론(Tom Malone)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욥 15:11) 욥기는 사탄과 하나님, 하나님과 욥, 그리고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대화입니다. 욥기 전체는 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욥이 하나님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에게 찾아 온 네 친구가 있었는데, 세 명은 나이든 현명한 사람들이었고 한 사람은 젊었습니다. 그리고 이 네 사람은 모두 욥에게 할 말이 많았습니다. 욥기는 창세기보다 더 오래된 책이며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욥기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첫 번째 책이 성도의 시련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도 전에(그리고 창세기에 구속의 이야기가 있기도 전에 한 성도의 시련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이 기록되었습니다. 욥기 15장에 나온 한 가지 질문을 본문으로 채택하고자 합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나 욥이 한 질문이 아니라 욥의 네 친구 중 한 사람이 한 질문입니다. 욥과 연관해서 친구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옆에 물음표를 붙여 두고 싶습니다. 큰 시련을 당한 욥에게 위로와 힘과 용기가 필요할 때 이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을 보면 여러분도 친구라는 말에 물음표를 붙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진짜 욥의 친구들인지, 이들이 진정으로 욥의 마음과 혼의 고뇌에 대해 염려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여러분에게 이 말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여정 어디쯤에선가는 이 말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네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평을 합니다. “너희는 모두가 형편없는 위로자로다”(욥 16:2). 욥이 가장 큰 시련을 당할 때에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욥은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믿기로 성경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욥에게 더 많은 찬가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다니엘이나 예레미야나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에 대해서는 결코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욥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보내신 찬사와 같은 그런 찬사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임을 이 말씀은 보여 줍니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욥은 악을 증오한다. 그는 정직하게 행한다. 그는 그의 모든 길에서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욥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욥은 성숙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정직하게 행했으며, 주를 사랑하고 악을 증오했으며, 그의 모든 길에서 성숙했음을 의미합니다. 욥보다 하나님의 뜻 중심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욥은 한 날, 한 시, 한 무덤에 자신의 열 명의 자녀를 묻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과 자신의 전 가족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한 방의 강타에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욥은 한 날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물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보고도 『내가 내 어미의 태에서 맨몸으로 나왔으니 내가 맨몸으로 그리 돌아가리이다.』(욥 1:21)고 울부짖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자녀를 잃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물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까지 귀중한 소유물인 건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한 방의 강타로 그는 건강마저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그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욥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친구들도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 배후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가족을 주셨고 수천의 소떼와 양떼를 주셨고, 수천 에이커의 비옥한 들을 주셨고, 그가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가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너무도 선대해 오셨습니다. 그에게 울타리를 둘러 치셨습니다. 그 어떤 문제나 슬픔도 그에게 닥친 적이 없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도전하며 말했습니다. “진짜 시험과 시련이 닥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내 자녀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내가 너에게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의 자녀들이 취해졌고, 모든 재산도 취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의 건강이 제거됐습니다. 성경은 그가 재 가운데 앉아 깨진 질그릇 조각을 취해서 실제로 그의 몸을 긁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욥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위 말하는 그의 친구들이 왔습니다. 그들 중 하나인 엘리파스는 자신이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욥,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이 큰 고난이 네게 임한 것은 네가 악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본 바와 같이 죄악을 경작하는 자와 악을 심는 자는 같은 것을 거두나니』(욥 4:8). 소위 친구라고 하는 이 사람은 “욥, 너는 죄 가운데 살아 왔기 때문에 아프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최상의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빌닷이 8:1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길도 그러하며 위선자의 소망도 사라지리니』. 그는 “네가 위선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네게 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닷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욥만큼 위선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산 사람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인 소팔이 말합니다. 『네 거짓말이 사람들을 잠잠케 하겠느냐?』(욥 11:3). 소팔은 “욥, 너는 사방에서 거짓말을 했다. 너의 거짓된 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네게 임했구나.”하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정직하고 신실하며 충실하고 진실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팔도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엘리후라는 젋은이가 나와서 말합니다. 『내 말은 내 마음의 정직함이 될 것이며 내 입술이 지식을 분명히 발설하리라』(욥 33:3). 이 젊은 엘리후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 노친네들은 이런 일이 모두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성도가 이런 고난에 처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네 명 모두 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문제보다는 해답을 다룰 만한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합니다. 욥기 42장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장 중 하나입니다. 4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거두신 모든 축복을 두 배로 증가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열 명의 자녀를 더 주시고, 지상의 모든 소유물을 두 배로 증가시켜 주시고,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지금까지 그 어떤 성도도 향유하지 못한 축복의 절정에 욥을 앉히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중앙에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훌륭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인생의 서로 다른 다섯 가지 영역에서 이 질문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너무 작은 것입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뭔가를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갖고자 하는 뭔가 좋은 것을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어떤 좋은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들에게서 선한 것을 결코 거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네 오른손에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았습니까?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평화가 없으며,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6:24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부자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갖는 위로는 모두 이 세상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로는 히브리서 6: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또 다른 위로자를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든든한 위로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 이 순간 여러분이 받은 축복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단 한 가지의 좋은 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너무 작은 것입니까? 한 손에는 하늘 나라가 있고 다른 손에는 지옥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평화를 선택하느냐 비참함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늘 나라를 선택한 사람은 평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속박과 노예 상태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유를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너무 작은 것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모든 폭풍에서 피할 피난처와, 모든 악으로부터의 피난처와, 현재의 피난처와, 미래의 피난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히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독일 화가가 폭풍이 몰아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짙은 먹구름이 낮게 드리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번개의 섬광을 보고 있노라면 거의 천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휘어집니다. 폭풍이 금방이라도 거세게 몰려 올 것처럼 보입니다. 동물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는 작은 통나무 집과 통나무로 세운 작은 농장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모두 헛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폭풍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풍을 묘사한 그 예술가의 그림 아래 붙은 제목은 “피난처”였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 만한 분별력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자신들의 혼을 위한 피난처입니다. 그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2.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인간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너무 작은 것입니까? 잠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잃은 한 성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심지어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고난의 와중에 - 육체적인 고난 즉, 몸과 혼의 고뇌를 의미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네게 작은 것이냐?”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시련의 때에 하나님이 충분치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몸과 마음의 고난과 시련이 찾아 올 때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너무 작은 것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5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라.』 이 성경 구절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풍성하면 할수록 위로도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고난의 어두운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때에 고난이 넘칠수록 위로도 많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7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가 또한 위로에도 그러한 줄 우리가 앎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깨어나십시오! 예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그 누구도 여러분과 함께 동행해 줄 수 없는 때가 여러분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소유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너무 작은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충성스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꾸준한 사람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때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전투에서 기진맥진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9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장 중 하나는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거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몸에 대한 모든 국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장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우리에게는 수요일 밤에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주일 밤에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는 지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너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 작은 것입니까? 여러분은 부당하게 취급을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잘못된 대우를 받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롬 12:19)고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는 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신명기 32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이 이집트인들이 너의 백성을 수천 명씩 살해할 것이다. 그들은 계속 너희를 속박하고 채찍으로 때릴 것이다. 너희를 굶기고 너희 아기들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모세야, 복수는 내게 속한 것이니 내가 갚을 것이다.”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작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도록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크신 분이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까? 우리 교회 회원 중에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구원해 주신 에머릭 코키스라는 프로 골프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 교회에 참석했다가 우리 교회의 어떤 회원의 간증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에머릭은 몇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는 숲을 사랑하고 나무들과 풀들을 사랑합니다. 몇 주 전에 일단의 십대들이 맥주를 싣고 그의 소유지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몰아내려고 하자 십대들은 그를 공격하며 때렸습니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십대들의 무리는 사정없이 그를 두들겨 패고 발길질하고 짓밟았습니다. 그는 경찰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수사도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신문에 모터보트를 타고 있던 몇 명의 살인자들이 20살짜리 소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였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소년은 다름아닌 에머릭을 공격했던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일을 곧 시행하셨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내몰아 버립니다. 자신이 너무나 현명하고 너무나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내쫓습니다. 언젠가 지옥에서 불타게 될 때 이 설교자가 한 말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양심을 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고의로 다른 그리스도인을 상처 입히는 일입니다. 저는 고의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며 다른 성도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의 친구인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여러분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5. 죽음의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작은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1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같은 장 8절에서 사도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 차 있으니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오히려 더 원하노라.』 나는 어제 83세의 두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미 주와 함께 있기 위해 떠나갔습니다. 나는 주님의 품으로 가신 그 노인의 악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작은 신약 성경을 꺼냈습니다. 그 노인은 침대 끝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악수를 했습니다. 그는 세게 악수를 했으며, 내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의 가족이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 가기를 가슴벅차게 원합니다.” 사도가 한때 말한 바와 같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 육신에 남아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필요하리라.』 들어 보십시오! 죽음의 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너무 작은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덤을 내려다 보며 무덤에게 도전을 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이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에게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는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히 패배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꽃밭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돌아다닙니다. 어린 아이는 무서워합니다. 갑자기 벌이 어머니를 쏩니다. 어린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벌이 나도 쏠까봐 무서워요.”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니란다. 애야, 저 벌은 이제 너를 쏘지 않을 거야. 저 벌은 이제 너를 상처 입힐 수 없단다.” “그렇지만 엄마, 벌이 아직 가지 않고 저기 있잖아요.” 어머니가 말합니다. “저 벌은 결코 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단다.” “그렇지만 엄마,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왜냐하면 저 벌은 방금 나를 쐈는데, 그 침은 지금 내 팔에 꽂혀 있기 때문이란다.” 오 음부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갈보리에서 예수님의 몸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너무 작은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