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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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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엡 3:19
lhyunsik

성령의 열매(05) 윤 성목목사( LA말씀 침례교회) - 성경구절 :엡 3:19 말씀: 엡3:19 요절: 엡3:19 성령의 열매(fruit)를 맺는 일은 구호를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말 그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fruit)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영어로는 과일(fruit)과 같은 말입니다. 모든 과일은 그 열매 속에 씨가 있게 마련입니다. 씨가 없는 과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과일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창1:11).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그 안에 씨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8:11b).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 영적 생명의 씨(seed)입니다. 씨는 그 속에 모든 유전적 형질을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씨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씨는 작지만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믿는 일은 우리 마음속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안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육의 씨앗이 아니라 영의 씨앗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b)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숨이 담긴 말씀들을 마음에 받고 있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단지 씨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게 될 몸을 뿌리는 것입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앞으로 있게 될 몸을 뿌리는 것이 아니요,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는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알갱이에게 몸을 주시고 또 모든 씨에게 그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고전15:37-38).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몸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뿔면 그것이 자라서 몸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씨앗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새 몸, 하늘에 속한 몸, 영적인 몸을 입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일차적인 조건은 하나님의 씨인 말씀이 마음속에 뿌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씨앗이 믿음으로 결합되어 자라나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단수)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는 그 종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펴 놓으시고, 갈라디아서 5장을 펴 놓으시고 서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 한 가지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 9가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비교해 보면 서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속에 오래 참음이 있고, 사랑 속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와 견딤이 있습니다. 사랑 속에 기쁨이 있고, 사랑 속에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이 사랑의 속성에는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똑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예를 들어 성령의 열매에서 ‘희락’은 사랑의 속성 중에 “진리를 기뻐하며”에 해당합니다. 절제는 사랑의 속성 중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부드러움은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고”에 해당합니다. ‘선함’은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해당합니다. 믿음은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에 해당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장(고전13)에서 완벽하며 설명됩니다. 따로 사람의 주석이나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온유함이란 시기하지 않는 것,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 상황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여진 것일 뿐 속성에서는 완벽하게 하나입니다. 이 말인즉 “누구는 사랑은 많은데 인내심이 없다”라는 식의 말은 전혀 진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은 친절한데 성질이 불같다. 급하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전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과 인내, 절제, 친절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특징이 다를 뿐입니다. 성질을 못 참는 것은 인내심이나 절제의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분노, 조금함, 시기, 경쟁, 다툼과 같은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타고난 성격이나 성질의 문제가 아니며, 후천적 환경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선과 악을 두시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복과 저주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생명과 사망을 두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며](신30:19b).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순종도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순종하는가? 누구에게 자신의 지체를 드리는가?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선택할 것인지 성령을 선택할 것인지, 어디에 씨를 뿌리고, 무엇을 위하여 일할 것이며, 누구에게 자신에게 순종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인생이 걸린 중요한 선택이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거룩한 희생물로 드릴 것을 권면합니다(롬12:2).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십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부정함과 불법에 내어 주지 말고 의에게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관례(慣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함과 불법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동안 사소한 습관이나 죄악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성도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성질 하나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물며 생각이나 상상을 통제하는 일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고후10:5).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 성경 교사가 되었다 해도 주님께 자신의 몸을 내어 드리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음행에 내어주고 술에 내어주는 일은 너무나 자주 보는 일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여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6:15).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하나님께서 금지하셨다(직역). 문제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귀의 올무에 얽매이지 않고, 속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 한다면 그는 누구라도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이상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무슨 짓이든 하게 됩니다. 선택을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조금도 맺을 수도 없지만 열매를 맺고 싶은 소원은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 열매를 맺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고, 자신을 주님께 넘겨 드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죄가 나를 이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직접 죄를 선택한 결과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성령께 드리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죄에 주면 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동일한 혀로 주님을 찬양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혀를 누구에게 내어 주었느냐? 가 핵심입니다(롬6:12-13). 다른 모든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자극한다고 합시다. 어떤 사건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합시다.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로 인해 내 안에 증오, 불화, 경쟁, 진노, 다툼, 폭동, 이단파당, 시기, 살인, 술 취함 등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내 안에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 결과들이란 점을 말씀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증오나 미움, 분냄은 남이 나를 미워해서, 자극해서 생긴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행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즉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나와 뜻이 통하는 사람, 나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는 일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 육신도 넉넉히 그렇게 합니다. 마태복음 5:46-47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보상이 있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마5:46~47). 이런 사랑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형제 우애라고 한다면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으로 가 봅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려 주면 무슨 감사의 /말을/ 듣겠느냐? 죄인들도 준 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들에게 빌려 주느니라.] (눅6:32~34). 주고 받기식 사랑, 주고 받기식 선을 행하는 일들은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주님은 성도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식의 사랑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세리들이나 죄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오직 내가 너희 듣는 자들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눅6:27,31).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만약 누가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란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고, 사도나 선지자란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라면 같은 교회에서 얼굴 보기도 껄끄러운 사람이며,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 소화가 되지 않을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잘 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시고, 성령께 내 자신을 내어 드림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어떤 분들은 몇 십 년 교회를 다녔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성경 구절은 물론이요, 그런 찬송도 매일 불러 대면서도 아내를 조금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일도 사랑하고, 직장도 사랑하고, 심지어 남들이 꺼리는 일도 개의치 않고 하는 형제이지만 아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와는 달리 가족들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남편이요, 아버지이지만 교회 형제들을 위해서는 한 시간도 낼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선교사도 자원할 수 있는 형제가 같은 형제들을 위해서는 같은 식탁에도 앉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한 사랑은 그들이 나름대로 이름붙인 ‘사랑’이지 결코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은 육신은 어떤 일에서나 제한적입니다. 육신의 힘이 부족할 때면 말이나 소를 이용합니다. 이제는 기계를 이용합니다. 내 몸을 자동차에 맡기면 나는 100마일로 달릴 수 있고, 내 몸을 비행기에 맡기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배에 맡기면 물 위를 평지처럼 서서 건널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들이 만든 무엇에 자신의 몸을 맡김으로 육신의 힘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몸을 나를 지으시고, 빚으신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육신의 힘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 사실 뿐 아니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좋게 대해 줄 수 없고, 친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실 때 우리 안에 있는 인격이나 육신의 지혜나 힘으로 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맡김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써,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지하고 맡길 때 즉시 열매를 맺으실 수 있습니다. 즉시 평안과 기쁨으로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인생은 술이 문제예요, 저는 도박이 문제예요, 저는 여자가 문제예요, 저는 돈이 원수예요...” 참 다양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닐세.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네. 정말 이러고 싶지 않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아버지가 LA 에 사시는데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고, 전화조차 드리지 못했다네. 차라리 부모 없는 고아가 속 편해 보이고 부럽기까지 하다네.”라며 고통을 토로합니다. 문제는 술, 도박, 여자, 마약, 돈, 오락과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부모가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는 육신이 문제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분이 성령이 아니라 육신이란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고, 성가대에서 봉사를 하고, 교리 공부도 하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분이 성령이 아니라면 100년을 살아도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며, 성령을 달라고 천 번을 외쳐도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때로 자신의 영적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원을 가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철야 기도를 하면서 몸부림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기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매우 안타깝습니다. 성경은 고행이나 금욕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대로 방법을 강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을 강제적으로 통제해서 영적으로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기준과 규범, 규칙, 규례를 정합니다. 그리고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갑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의지 숭배라고 말합니다(골2). 우리가 행하는 기도회 역시 의지 숭배(금욕주의, 종교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해야지 자신의 의지를 경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한다면 잘 한 것이지만, “내가 기필코 기도로 이 일을 이루어 내고 말리라!”는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종교 행위에 불과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짓누르는 삶, 숨기는 삶, 피해 가는 삶을 살라는 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예 육신을 십자가에 처리해서 장사 지내 버린바 된 삶을 살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형제 관계는 지식으로 맺어지지 않습니다. [형제 사랑으로 서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롬12:10)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간청하는 일 역시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이 더 열심히 기도하자, 더 많이 성경을 공부하자, 묵상하자, 전도하자와 같은 영적이고 건전한 이야기일지라도 사랑으로 간청하지 않으면 결코 듣지 않습니다. 바울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사랑으로 간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나와 함께 힘쓰며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롬15:30). 이것이 가장 효과적이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이 아니라면 별 것 아닙니다. 말씀을 공부해서 믿음이 자란 것 같고, 강해지면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자신의 믿음 좋은 것은 자랑하고 형제들의 믿음 약한 것은 정죄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믿음”의 문제로 자신이 우쭐대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 결여된 믿음이며, 그 믿음은 내게 아무 유익도 없게 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뿐이기 때문이라.](갈5:6).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섬기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그 섬김 역시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으니 오직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갈5:13).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걷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적 생활을 완전히 헛발질을 한 것과 같습니다. 허공을 향해 치는 것이나 방향 없이 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하는 것을 받아 서로 꼭 맞게 결합되고 들어차서 각 부분의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주느니라.](엡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 이것이 성경 공부의 원칙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너무나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사랑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의 목적이 분명히 나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목적은 “모든 일에서 주님 안으로 자라나려 함(*성장)”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도들의 영적 성장, 열매 맺게 하는 성경 공부 방법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란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단순히 진리만을 가르쳐서 성장한다면 저는 교회 목사보다는 성경 학원을 차려서 성경 강사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성장과 열매 맺음, 자라게 하고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해도 문제입니다. 또 진리를 말하긴 하되 사랑이 없어도 문제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뼈저린 체험과 연단과 실패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주님은 제 안에 성경 지식을 뽐내며, 은근히 자부심을 가진 육신적인 목사란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사랑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매일 사랑타령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겸손히 배우고, 변화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판단을 일삼게 되자 주님은 제가 가르친 사람들이 전혀 변화 받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셨고, 교회와 성경 공부 모임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다 완전히 바닥을 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참으로 많은 성경 공부를 했고,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런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삶의 변화와 열매를 도모했지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몇 년을 공부해도 전혀 변화가 없고,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체험이며, 간증입니다. 저의 성품은 여전히 육신적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많이 안다, 잘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내면은 황량한 광야보다 메마르고, 저의 입에서는 찬양과 육신이 혈기가 번갈아 나오곤 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시험에 들었고, 넘어졌습니다. 어느덧 주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되었지만 변화된 것은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무대는 옮겨졌습니다. 저는 영적 지식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고 이루어내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 공부만으로 신앙적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추구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저의 이런 신앙관에 동조하지 않거나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성경적이거나 영적이지 못하다고 굳게 믿고 상대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주님은 제게 지식은 덕위에 절제 아래 놓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벧후1:5). 그래서 받은 말씀을 가지고 설교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겸손히 저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시 지식을 강조하고, 지식 본위의 영적 생활을 높이 외쳤습니다. 이 교회 성도들은 질릴 정도로 많은 양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십시오. 빈자리만 늘어났습니다. 주님은 제게 주님을 아는 지식, 진리의 지식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작은 교회에서 4년 동안 계속해서 아무리 가르쳐도 결코 성장과 변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저의 무지와 완악함을 부서뜨리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자세히, 많이 가르치는데 왜 성장이 없고, 헌신이 없고, 열매가 없고, 승리가 없는가? 주님의 대답은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함께 증가하지 않은 채 지식만 증가하는 경우, 모든 성경 공부와 영적 지식의 획득은 성도들의 영적 생활을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여러분은 더 비판적이고, 더 교만하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자기 의(義)에 가득 찬 고집쟁이 바리새인이 되어 버릴 것이며 결국은 죄를 짓는 능력만 늘어나는 셈이 됩니다. 남의 교회, 다른 성도들, 심지어 교회 목사들까지도 척척 비판할 수 있는 성경적 지식을 소유할 만큼 성경을 공부했고, 그 동안 잘못 알아왔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깨닫고 아는 희열을 맛보았다고 합시다. 그것이 사랑과 결합한 지식이 아니라면 개똥 철학 내지는 마귀의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사랑의 증가가 동반되지 않는 지식의 증가는 여러분을 더욱 사악하고 더러운 마귀의 종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이 기도 내용은 지식이 증가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에 상응하는 사랑이 증가해서 그 지식을 성령님의 통제 하에 둘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 교회에서 단순히 진리를 믿고 진리를 전파하는 목사였습니다.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저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선포만하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로운 사람이 되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영적 지식을 믿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유익보다는 해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성장이 필요한데 이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 사랑으로 전파하는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성장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하건, 제가 설교를 하건 만약 듣는 사람(청중이나 양들)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옳은 소리요, 성경에 근거한 진리요, 사실이라 할지라도 육신적 책망에 대한 육신적 반응만이 나올 뿐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왜 이렇게 성도들이 들을 귀가 없을까? 한탄한 적이 많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데 왜 듣는 이들은 이다지도 완악할꼬? 변화가 없고, 열매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들인데 영적으로는 불구자들이거나 자폐아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에게 진리를 말해주려고 애를 썼는데 듣지도 않고, 성질이나 내고, 완악하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진리를 말할 때 항상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롬5:5), 성령의 열매로 맺어진 사랑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사랑이 있어야 사랑으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마12:34). [선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나니 이는 /사람/의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라.](눅6:45).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사랑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랑스럽게 말하려고 하면 위선자로 드러나서 수치를 당하고, 욕을 먹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 한다면 곧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전부가 되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별 변화가 없고, 효과가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말씀하신 대로 내 안에 이루어 주시도록 자신을 주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내 안에 가득 부어지고, 그 사랑이 나의 성격이 되고, 특징이 되고, 인품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느냐? 이제는 좀 알겠느냐? 잘 깨달았느냐? 이런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지식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형제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는 사랑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죽어 주는 사랑은 상식이나 논리를 동원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논리와 지식에 인도를 받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크신 사랑입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사랑은 가장 크신 사랑입니다. *요15:13 참조. 주님께서는 자신이 보여주신 사랑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엡2:4). 저와 여러분이 받은 사랑은 큰 사랑입니다. 깊이나 너비나 높이와 무게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셋째, 영존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취소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영원한 그런 사랑입니다.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모두 그친다 해도 사랑은 영원합니다. [옛적에 [주]께서 내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참으로 내가 영존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하셨도다.](렘31:3). 넷째, 강한 사랑입니다. 아무도 끊을 수가 없고 떼어 놓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얼마나 강한 사랑이지 어떤 환경도 사건도 사람도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나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이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政事)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능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할 것임이니라.] (롬8:38~39). 다섯째, 강권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강권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고후5:14a).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여섯째,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증거나 보충해야 할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하거나 미완성의 사랑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다면 이제 사랑할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 안에 이 사랑이 더욱 크고 풍성하기만을 소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교회가 전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구령의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됩니다(요일4:12).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명령들을 지킵니다(요14:15). 말씀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사랑 타령을 하면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받게 되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요14:23).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안다고 하십니다(고전8:3).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