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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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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주님만 두려워하라.(열왕기하 17장)
lhyunsik

1. 온전히 주님만 두려워하라.(열왕기하 17장) 임 동선목사 A.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버림받았던 이스라엘 구약의 많은 말씀들이 그러하지만 오늘 저희가 함께 살펴보려는 말씀 역시,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읽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무언가 중요한 삶의 원리를 발견하라는 의도가 그 기록에는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나아가야만 할 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는데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마침내 아시리아 왕이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포로로서 아시리아로 끌고 갔습니다(왕하17:6).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업으로 누리던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거기에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쫓김을 당하듯이 내몰렸습니다. 아시리아의 군대에 의해 강제로 내몰린 그들은 아시리아의 여러 도시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왕하17:7).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두려워한 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말에는 겁먹거나 겁내는 의미도 물론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섬김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잠14:2] 곧 바르게 걷는 자는 주를 두려워하여도 자기 길들이 비뚤어진 자는 그분을 멸시하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주님을 멸시한다는 것과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일 앞에 모시는 것입니다.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분을 둘째나 셋째자리에 모시지 않고 항상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남는 시간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가장 먼저 시간을 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약속들을 다 지키고서 나중에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약속을 폐하고서라도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먹다가 남는 것이 아니라 먹기 전에 그분께서 드시도록 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것에 관한 법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첫소산을 드리는 것이라든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절기를 존중하는 것이라든지...모든 것들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지켜가도록 제시된 것입니다. 주님을 존중하는 자세로부터 행해질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B.책망과 징계마저 외면하므로 버림받은 이스라엘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왕하17:20] 주께서 이스라엘의 온 씨를 버리사 그들을 괴롭게 하시며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시고 마침내 자신의 눈앞에서 쫓아내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단계를 알고 있습니다. 잘못 가고 있는 성도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자신의 성도들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성경기록이 가져다주는 책망은 그것을 듣고 돌이킨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합니다(딤후3:16,17). 어느 날 다윗은 다른 사람의 아내와 통간하는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과 거짓, 탐욕, 도둑질을 범했을 때, 주님의 대언자 나단이 와서 그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삼하12:7-9]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내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주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네게 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조금이었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주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족속 우리야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시편 23편의 고백을 할 정도의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때, 음욕이 일어났고 그 음욕은 범죄를 가져왔으며 그 죄들을 가리기 위해 거짓과 살인까지도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남의 아내를 탐냈으며 그 아내를 도둑질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겼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삶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생활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책망을 들었을 때, 그는 돌이켰습니다. 나단 대언자의 말을 듣고 다윗은 오리발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합리화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의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삼하12:13] 내가 주께 범죄하였노라...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시32:1,2] 자기의 범죄를 용서받고 자기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영 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처럼 책망 받을 때 돌이켰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또한 그의 왕좌가 사울처럼 남에게 넘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대로 유다는 그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그 왕국에는 다윗의 왕조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비하면 사울왕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는 변명했으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도 않아놓고 자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책망받을 때 돌이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책망받을 때 돌이키지 않는다면 징계가 주어집니다. 그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듯이 그런 버림받음이 생기는 것입니다(왕하17:20).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받듯이 그런 버림받음이 생기는 것입니다(삼상15:23). 바울이 남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그 자신이 버림받을 것을 염려했던 그 버림받음이 생기는 것입니다(고전9:27). 이스라엘 백성이나 사울왕이나 전도자 바울은 모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버림받는다는 말을 구원의 문제와 결부시키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특별한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더 이상 왕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일꾼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면 그는 주님을 위해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이며, 받은 것을 그대로 묻어두었던 한 므나 받은 종과 같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돌이켜야 한다면 책망을 받을 때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입니다. 아무리 제멋대로 가던 요나도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실 때 돌이켰습니다. 돌이킨 자들은 하나님께서 또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제멋대로 가는 것을 택해 나아간다면 그는 버림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그릇을 던져버리시고, 깨뜨리시고 다른 깨끗한 그릇, 준비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대부분 모든 책망이나 경고, 징계는 그들이 왜 이렇게 잘못 걸어왔는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호세아 왕이 살던 같은 시대 유다에는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대군이 몰려와 항복을 요구하며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이사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에게 주어진 아시리아 군대의 위협이 바로 "고난과 책망과 모독의 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왕하19:2).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건져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아시리아가 위협해올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이집트 사람들을 신뢰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왕하17:4). 그러나 히스기야는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유다민족을 아시리아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C.왜 그들이 버림받게 되었는가? 그러면 왜 그들이 버림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그들이 행하는 은밀한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왕하17:9] 이스라엘 자손이 은밀히 주 자기들의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을 행하며 파수꾼의 망대로부터 성벽을 두른 견고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시에 산당들을 건축하고.... 그들이 사람들에게는 화려하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엄숙한 사람들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어떠했느냐는 것입니다. 경건과 위선의 차이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위선자들은 사람의 보기에 그럴듯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은 곧 경건한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버림받게 된 첫 번째 원인은 그들이 은밀히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을 행한데 있습니다. 행하지 말라는 일을 계속 했으며(왕하17:12) 하나님보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데 정신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어찌 살까는 생각지도 않고 우상을 섬기는 일에만 골몰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탐욕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골3:5). 옛날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할 사람들이 집과 망대와 산 속에 신들의 형상을 뿌려놓았다면 오늘날의 사람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방해받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방해를 받았던 것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탐욕에 이끌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방해받는 것은 동일하게 경건치 아니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마음을 쓰지만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는 길을 간다면 그 마음은 경건한 마음이 아닙니다. 2.그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부하고 허무한 것을 따라갔습니다. [왕하17: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 목을 굳게 하되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던 자기 조상들의 목과 같이 하여 그분의 법규와 그분께서 자기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과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증거하신 증거를 거부하고 허무한 것을 따라가서 허무하게 되며 또 자기들 주변에 있는 이교도들을 따라갔더니 이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명하사 그들과 같이 행하지 말라 하신 자들이더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었지만 그 말씀하신 바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배우지 말라한 그 이방인들의 가증함을 그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그것 듣기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아주 빠르게 이 세상과 동화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들을 존중하지 아니하며 그것을 들으려고 열심히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 옆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세상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받는 시절이 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거부하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합니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하신다고 한다면 쟁기를 내려두고 수고하던 것을 멈추어두고 그 말씀을 듣고자 달려오는 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그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가장 존중하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습니다(눅14:16). 식사 시간에 그 초대받은 자들에게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나이다"라고 알렸습니다(눅14:17). 그러나 다들 사양하기 시작하여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해왔습니다(눅14:20). 이유인즉, 어떤 사람은 땅을 샀기 때문에 반드시 나가 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소 다섯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가야하고,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대답해왔습니다. 이것은 중요성의 문제였습니다. 가치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부자의 초청보다도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까지 초대쯤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을 영원히 놓치고 마는 후회막심한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존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먹이시려 할 때, 달려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동차의 주유등이 깜박이는데 그냥 지나갈 운전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대부분 기름을 넣고 갈 것입니다. 하지만 한 주간 살다가 달력이 빨갛게 껌벅이면 말씀을 건너 뛰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기름을 넣지 않고 가는 차가 얼마 안가서 퍼지듯, 말씀을 무시하고 가는 성도 역시 얼마 못가 영적으로 지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아내나 자져나 형제나 자매나 참으로 자기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고 했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상과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3. 자신을 팔아 엉뚱한 것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왕하17:17] 자기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점치는 일과 마술을 행하고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니라. 시간을 되찾으라(엡5:16)라는 이 말은 시간을 값주고 사라는 것입니다. 내게 돌아오는 쾌락과 여유를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것인 것을 잊고 주님의 허락하심도 없이 함부로 세상에 우리 자신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직장에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팔고 돈을 버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처럼 돌아올 어떤 이익을 위해 우리 몸을 맡긴다면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이 주어진다면, 위로가 온다면 어떤 유익을 얻기만 한다면 개의치 않고 그 자신을 점치는 일, 마술, 우상숭배 등에 내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소유였음에도 마치 그들 자신의 것인양 마음대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에게 돌아올 어떤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것이 된 사실들을 망각하고 우리가 주인행세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상사의 결제를 맡으려고 무척 애를 쓸 것입니다. 만일 함부로 하는 직원이 있다면 그는 얼마가지 못해 해고 당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 예배에 오기 위해 직장상사로부터 결제를 맡아야 할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잔치 시간에 오지 못한다면 주님에게 결제를 맡아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주님 하루 정도 직장에 가서 돌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가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당연히 예배드리러 가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오늘을 보내고 싶습니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예배당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에 가도록 제 마음에 강한 확신을 주신다면 오늘 하루 직장에 들렀다가 오후라도 예배당엘 가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드리신 적이 있습니까? 직장 상사에게는 엄격하게 허락 맡고 행동하려고 하면서 주님께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한다면 그 사람은 멸망한 이스라엘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예수님을 Saviour로 모신 사람은 또한 주님을 Lord로 따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구원자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다바쳐 따라야할 만한 주인으로 믿는 것입니다. 만일 Saviour만 알고 Lord 이심을 모른다면 그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D.온전한 두려움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이스라엘이었으나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눈 앞에서 제거되고 말았습니다(왕하17:23). 그들이 망하게 된 원인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두려워했던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존중한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신들을 놓아둔 데 있습니다. 그들이 내몰린 후에 거기에 거하게 된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 민족들의 풍속대로 자기 신도 섬겼습니다(왕하17:33). 그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에 대해 가르쳤으나(왕하17:27,28) 그들은 하나님도 두려워하며 그들이 섬기던 신들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직 주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왕하17:36) [왕하17:39] 오직 주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두려워하고 다른 신들도 두려워한 사마리아 거주민처럼 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두려워함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다른 것을 존중하고 앞에 둔다면 주님은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Saviour 이심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이유로 해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까? 온전히 주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신1: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주를 따랐은즉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온전히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인으로서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의 자리에 그분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고난당하셨습니다(행2:36). 그분의 고난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분을 통해 모든 죄가 용서되어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분을 죽기까지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분을 주로 인정한 것입니다. 나를 피로 사셔서 날 주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며 사시도록 말씀드립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2002년 3월 31일 아침 말씀 ============================================================ 2. 주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시128:1-6) 2002.3.24.주일 오전 A.주님을 향해 담대한 성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들을 용서받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담대함을 갖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무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정죄하시려고 율법을 준비하셨지만 성도들은 결코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인생들을 가두고자 지옥을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결코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흰보좌 심판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결코 그 자리에 불려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악한 존재들과 죄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영원한 불못을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 피흘려주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으며, 지옥이 없으며, 흰보좌 심판이 없고, 영원한 형벌도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는 데에 장애물과 같은 역할을 했던 죄들이 치워졌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죄들을 용서받게 하시고자 피흘리시며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중보하십니다.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의 변호자라고 하셨습니다(요일2:1). 모든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셨습니다(요일2:2). 그분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히7:25).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의는 없어지지 아니하는 의였습니다. [사51:6-8] 너희는 하늘들을 향하여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펴볼 지니 이는 하늘들이 연기같이 사라지며 땅이 옷같이 헤어지고 거기 거하는 자들도 그와 같이 죽을 것임이라. 그러할지라도 내 구원은 영원히 있겠고 내 의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험담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좀이 그들을 옷같이 먹을 것이며 벌레가 그들을 양털같이 먹을 것임이라. 그러나 내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내 구원은 대대에 있으리로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지옥에 들어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진노를 당할까봐 겁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주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들을 건져주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들의 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흑암의 장소로 끌려갈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안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B.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주님을 두려워하라. 1.두려워한다는 의미 [잠14:2] 곧바르게 걷는 자는 주를 두려워하여도 자기 길들이 비뚤어진 자는 그분을 멸시하느니라. 곧바르게 걷는 자들은 주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두려움은 비굴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으로 인해 갖게 되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사는 이 세상 죄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갖아야 하는 두려움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갖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에게 버릇없이 굴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분을 둘째나 셋째의 순서에 놓치 않는 두려움입니다. 만남 중에 가장 중요한 만남을 그분과의 만남이라고 여기는 두려움입니다. 들어야 할 말 중에 제일 중요한 말을 그분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두려움입니다. 어울려야 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관계들을 그분께서 맺어주신 성도들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두려움입니다. 성도들은 그야말로 그분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어울리게 된 무리입니다. 우리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하나의 교회로 모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엮어주신 만남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입니다. 해야할 일로 치자면 그분께서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했으니 그 일을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것이 성도가 갖는 진정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시34:9]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하나님 곧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시편 23편을 외워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공포영화에서는 괴물을 쫓는데 주문처럼 이 시편 23편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다"라는 시편 23편의 고백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진실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비로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시23:1)"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분의 성도들을 향해 두려워하라는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2.주님을 두려워하라고 유언했던 모세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신명기라는 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그 신명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를 두려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을 자자손손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 이집트로부터 구원된 백성이었는데도 하나님은 그 특별한 백성을 향해 주를 두려워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신6:1,2] 이제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신 명령과 법규와 법도가 이러하니라. 너희가 가서 소유할 땅에서 이것들을 행할지니 이것은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하여금 평생토록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이 모든 법규와 명령을 지키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하면 네 날들이 길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로부터 건져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지내게 될 때,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6:13).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명령이었습니다(신6:24). 명령이란 목숨이 걸린 것입니다. 이 명령에 신실한 자들은 주님께서 구원하신 의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신실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책망과 징계와 버림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명령을 지켜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기로 했던 복된 땅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강제로 그 땅에서 내쫓겨서 앗시리아와 바벨론으로 내 몰려야 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3.주님의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 이것은 오늘날 신약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분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시려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얻기로 되어있던 많은 유익들을 빼앗길 수가 있습니다. 상속과 보상은 틀립니다. 상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공동 상속자입니다(갈4:7,롬8:17).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죽은 후에는 낙원으로 들어가 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이 땅으로 와서 천년왕국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질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새하늘과 새땅, 곧 영원한 세상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상속은 모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상은 틀립니다. 보상은 손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손해본 일이 있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른 척 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대로 그것을 갚아주시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세에 당한 고난에 대해 영광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준비된 것입니다. 거기서 왕관을 받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왕관을 받고 왕으로 지목받은 자들이 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회복된 하늘의 왕국, 곧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속은 결코 빼앗기지 않습니다. 상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상속은 번복되는 일이 없습니다(시16:5). 그러나 보상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받기로 되어 있던 왕관을 빼앗기는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계3:11]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결코 왕관을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이런 경고는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교회에게 주시는 것은 끝까지 굳게 붙잡고 가지 못한다면 왕관을 빼앗기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완전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고는 무시하십시오. 절대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이런 경고는 찢어버리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시인한다면 밑줄을 그으십시오. 여러분도 실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읽고 또 읽어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께서 내가 받을 왕관을 빼앗기는 일이 없기를 바래서 써주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왕관을 지켜가기 위해 애쓰십시오. 모든 교회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계2:23]....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교회가 알아야 할 것이 반드시 이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에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옳지 않은 교리를 거부하던 두아디라 교회의 남아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계2:25-27] 다만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 이기고 나의 행위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리니 그가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요, 토기장이의 그릇같이 부수어 산산조각 내리라. 이것은 곧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과 같으니라. 주님은 어떤 성도들에게 민족들을 다스릴 권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처럼 큰 권능으로 민족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도전할 자가 없는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이런 것이 주어집니까? 주님이 올 때까지 이미 가지고 있는 바를 굳게 붙잡은 사람들에게 입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부여하신 행위들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에게 입니다. 중간에 빼앗기거나 넘어지거나 뒤로 물러가거나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린 사람들입니다. 낙오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원하신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형제들 간에 "네가 잘났냐? 내가 잘났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판단해주실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롬14:10-12]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 그 까닭은 기록된 바, 내가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보고를 하리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에 관하여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들 그것을 어떻게 선용했는지...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를 위해 어떻게 섬겼는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남편이나 아내에게 어떻게 신실했는지,...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녀들에게 어떻게 성실했는지,...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어떻게 선용했는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알려주시고자 마련해주신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회계보고를 앞둔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께서 부여하신 모든 은혜들을 어떻게 누렸는지에 대해 보고해야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 D.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 저는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그 사람의 가야할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시25:12] 주를 두려워하는 자가 누구냐? 주께서 친히 택하실 길로 그들을 가르치시리로다. 주께서 어떤 길로 인도하실 지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주님 앞에 그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의 눈에 함부로 행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거짓말을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내 갈길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기 이전에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 여러분, 주님을 두려워하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112:1-3]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주를 두려워하며 그분의 명령들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씨가 땅에서 강성하며 곧바른 자의 세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의 그의 집에 있으리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리로다.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부유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풍요는 오히려 여러분에게 덫이 될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풍요는 그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할 때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풍요로움을 만나더라도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풍요로움이 주어지더라도 청지기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입니까? [시128:1] 주를 두려워하며 그분의 길들 안에서 걷는 자마다 복이 있나니 [시128:4] 보라,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이와 같이 복을 받으리로다. [시115:11,13]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주를 신뢰하라. 그분은 그들의 도움이시오, 그들의 방패시로다...큰 자든 작은 자든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많은 사람들이 이삭이 백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그 백배의 축복을 사모합니다. 그 같은 백배의 축복이 그 자신에게도 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삭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 야곱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 아버지 이삭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었습니다. [창31:42]...내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두려워하는 분 3.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두 아들을 둔 과부의 어려움 중에서 피할 방도를 주셨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일찍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과부가 되었으며 진 빚으로 인하여 두 아들을 노예로 넘겨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녀의 집에 기름을 부어줌으로서 빚을 청산하고 아들들을 건져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했던 하소연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종 내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주를 두려워한 줄은 당신이 아시나이다..."(왕하4:1)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사람이 이미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유족들의 어려움을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그 사람의 가족들을 살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가족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성경을 통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4.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과연 건방진 성도보다는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성도의 목소리에 주님께서는 귀기울이십니다. 제멋대로 하는 성도보다는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을 우선시하며 사는 자들의 간청을 들으십니다. 히스기야와 유다에 선포된 재앙이라도 히스기야가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께 간청했을 때, 주께서는 그들을 치시려고 했던 재앙에서 그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렘26:19). 5.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났어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요1:9).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갈 때,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처해지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고 마침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셨고 마침내 니느웨로 보내셔서 그가 그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하심에 대해 알리도록 하셨습니다. 6.형제들이 아내를 고를 때,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가를 보십시오. 자매들은 칭찬받는 여자가 되기를 구하는데 오직 주를 두려워하십시오. [잠31:30] 호의를 베푸는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 E.결론 제가 이제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드린 말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에 대해 겁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피해 숨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달아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분의 말씀을 높히고, 그분의 뜻을 받들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소중히 여기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계속 몇 가지 말씀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며 더 확인시켜드리기를 원합니다. [잠3:7] 네 눈으로 보기에 지혜롭게 되지 말지어다. 주를 두려워하며 악에서 떠날 지어다. [시33:8] 온 땅은 주를 두려워하고 세상의 모든 거주민은 서서 그분을 두려워할지어다. [시118:4] 이제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다 할지어다. [시135:20] 오, 레위의 집이여, 주를 찬송하라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아, 너희는 주를 찬송하라. 찬송한다는 것은 높인다는 의미입니다. 진실로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드리는 노래야말로 주님을 높이는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신실합니다. [시15:4] 비열한 자는 자기 눈으로 멸시하되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존경하며 맹세한 것은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바꾸지 아니하며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두려워했던 것을 아십니까? [히5:7]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했다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분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고 오셨습니다(히2:15). 그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는 뜻입니까?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거나 숨으려 했다는 뜻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를 두려워하신 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하시려 했던 것이고 비록 그것이 죽음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일지라도 그분의 뜻에 순복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로 나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했던 열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는 것, 무시당하는 것, 매맞는 것, 침뱉음을 당하는 것, 창으로 찔림을 당하는 것, 손과 발에 못이 밖히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인해 마침내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분의 생명을 대신 사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져야만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3.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마7:13-23) 2002.3.17 주일 오전 A.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들의 시절에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시14:1)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써있는데도 그들은 겁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은 마침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심판으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이 입을 넓게 벌릴 때, 그들은 그 안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불타오르는 그 지옥을 만날 때, 그들이 영원토록 보내야 할 그 거처를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확신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람들 속에 주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를 보십시오. 그의 이름은 고넬료였습니다. 그는 비록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0:2). B.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a.그리스도의 종이냐, 사람의 종이냐? 그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사람의 종으로서의 위치를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하지만 우리들 중에 어떤 분들은 막상 중대한 일을 놓고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느라고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받은 위대한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느라고 하나님께서 시키는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몰라서 그런지,....주님의 일군으로서 어떤 사역에 쓰임 받다가 해고당하는 것보다도 사람의 종으로 지내다가 해고당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고전9: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 바울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해고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겁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억제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b.그리스도의 부요냐, 세상에서의 영화냐?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요함이 되신다고 고백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라는 말씀을 믿습니까? 하지만 정작 주님의 공급을 믿지 못하며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손실을 두려워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질 하나님의 공급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못합니다. c.하나님의 인정하심이냐, 사람의 인정함이냐? 우리는 늘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1:10)라는 말씀을 믿습니까?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기쁘게 못할까봐 걱정합니다. 자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우습게 알며 사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공경하지 않는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도 공경하지 않습니다. 내가 존중하지 않는 가족은 다른 사람들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만나자고 요청해왔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만나자고 제안한 시간이 갖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만일 나중에 만나자고 제안한 사람이 더 중요한 분이라면 우리들은 먼저 했던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일이 이렇게 되어서 당신과의 만남을 다른 시간으로 변경해야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만들어주신 이 일요일을 함부로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이 모이기에 힘쓰라고 한 명령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주일을 예배드리며 보내지 않으려 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여기 예배드리는 곳에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어렵고 힘든 문제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는 비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는 부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그 교회가 부흥할 때 나타났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에 두려움이 임했습니다(행5:11). 정말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시절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일을 하며 복음 전하기 원하는 주님의 종들이 하늘의 권능으로 기름부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역에, 가장 효과적인 열매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열심이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지쳐버립니다.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열매 없이 끝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제일 앞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함부로 한 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품은 생각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 행동들, 우리는 모두 버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C.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었던 우리들은 소생함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백성들에게 복된 소나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겔34:26-31).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들이 될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소출을 내는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안전한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를 얽어매던 모든 멍에가 끊어질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들로부터 섬김받던 모든 자들에게서 우리가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이교도들의 먹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땅의 짐승들에게 삼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를 두렵게 할 자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기근이 사라진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복된 소나기가 임할 때,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복된 소나기를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 복된 소나기는 하나님의 부흥을 말합니다. 권능의 기름부으심으로 찾아오는 부흥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a.그리스도의 심판석에 관한 망각 왜 우리들은 때때로 우리 멋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룻강아지가 범무서운 것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대면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엄중하신 분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서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회계보고 하게 될 것입니다. [롬14:10하-12]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 그 까닭은 기록된바, 내가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보고를 하리라. 마치 우리가 한달에 한 번, 우리가 가진 재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회계보고를 하듯이, 우리가 받은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우리에게 주신 일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우리에게 보내어진 사람들을 어떻게 구령했는지, 우리는 모두 주님께 보고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을 어떻게 지냈느냐에 따라 여러분은 분명히 회계보고를 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이것도 보고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시간들을 어떻게 지냈느냐? 이것도 보고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만나게 한 그 사람들, 또 성도들과 어떤 관계로 지냈느냐? 이것도 보고해야할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갖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때, 어떤 마음을 품었으며, 어떤 말을 했느냐? 이것들을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수고를 할 기회들을 주셨을 때, 어떤 의도로 했느냐를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벧전4:4). b.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망각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그대로 우리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사람에게 베푼다."(렘17:10). 우리들이 주님에 대해 신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중해지시기를 바랍니까? 우리들은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들어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모든 지식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잠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만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완수하라"(빌2:12)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벧전1: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흰왕좌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의 판결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 중요한 사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혹시나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인생을 살지 않는가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D.Many(13절: 많은 사람과 함께 간다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행위의 끝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단지, 현재 자기 주위에 함께 가고 있는 동지가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그 동지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그들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7:13,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니라.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서, 안전하게 생각하다가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비록 함께 가는 동지가 적다고 해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마침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a.다수에 대한 회의 회중교회의 지체된 여러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많은 수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개념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55:8).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고전10:5). 많은 수(數)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b.겨우 여덟 명 지금부터 약 4,500여년 전, 약 1억명 이상의 인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였습니다. 사람의 사악함은 땅에서 커지고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으셨음에 대해 후회하셨고,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심판계획을 알려주셨으며 구원되는 길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으로부터 피할 길을 준비하던 사람은 겨우 8명뿐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하던 시절에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길을 준비하는 이 여덟 명이 미련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쓸 데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100년이 지나가는 동안 계속되는 맑은 하늘 아래서, 노아는 사람들에게 홍수가 날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노아는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다가올 심판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노아네 가족 여덟 명만 빼고는 모두 심판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은 불로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건져지십시오. c.겨우 두명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땅의 이름은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에 대해 확신한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과 싸워야 할텐데, 키가 크고 건장하다는 이유로 싸움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불평했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래도 그 "가나안 땅이 우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니 취하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는 그 누구도 가나안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육십만 명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게 된 사람은 겨우 두명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출애굽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습니다. 감사하며 믿음으로 가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과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누가 더 많겠습니까?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역시 그 다수 속에 포함되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과 그런 것에 열정이 없는 그리스도인 중에 누가 더 많겠습니까? 복음 전하는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 열정을 갖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당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것....왜 남들은 그렇게 안하는데 자기가 뭐라고 유난을 떤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를 감추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가는 주님을 대할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사2:22).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마10:28). 많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거짓말이 하나님의 눈 앞에 가볍게 취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한 약속에 대해 신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약속들을 잘 지키지 않는 것까지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험담과 헐뜯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산다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이외의 사람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역시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혼전 순결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까지도 그런 것에 대해 세태로서 관대하게 대한다는 것은 미덕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음행과 부정한 일들을 즐기고 있고 또 즐기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죄짓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끼여서 안전하게 생각하다가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도들도 신뢰하지 않습니다(욥15;15). 많은 성도들이 대충대충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스스로 비참해지기로 한 것과 같습니다. E.sheep's clothing(양의 옷에 속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옷에 속기 때문입니다. 양의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은 거짓 대언자들입니다. 얼마 전 저는 우리들 스스로가 거짓 대언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 왜냐하면 거짓 대언자는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대언자를 눈먼 자에 비유했습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마15:14). a.눈에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의 위험성 거짓 대언자의 특징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양의 옷을 입은 것에 속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당장 눈에 보인 그 현상들에 무언가 있다고 속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한다"(고후5;7)는 말씀을 믿습니까?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직도 믿음보다는 보는 것으로 걸으려고 합니다. 때문에 그 보는 것에 의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은커녕, 미혹에 빠져 허덕이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감탄합니다. 우리의 눈은 성령세례인 방언이 쏟아지는 것에 흥분합니다. 우리의 눈은 그 자리에서 치료받는 병자를 보고 놀랍니다. 우리의 눈은 사람이 우짖고 짐승의 소리가 나타나는 대에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눈은 성령의 웃음이라는 것으로 낄낄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영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우리의 눈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과연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쫓아 구경하고 다니느라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두려움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의 두려우심을 아는 것(고후5:11)이 아니라 능력과 표적과 이적일 뿐입니다. b.거짓된 능력의 가능성 여러분은 사탄이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고후11:14) 사탄의 사역자들이 의의 사역자로 가장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고후11:15). 거짓 사도와 속이는 일꾼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고후11:13).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고후11:3). 주님께서 영들을 다 믿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요일4:1). 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모든 영들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사탄과 그 천사들에게도, 그의 사역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신비한 능력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살후2:9,10) 진리의 영이 있으며 오류의 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요일4:6). 양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란 말입니다. 어떤 종교가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해서 그것은 옳을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놀랍고 굉장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모임이라고 해서 그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c.보호막이 될 수 없는 것들에 속지 말 것 사람들은 그런 것에 속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나는 이런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걱정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카톨릭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장로교나 감리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복음교회 안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본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독립침례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다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울러 우리가 복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교회에서 가르침 받은대로 살아갈 때, 그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떠들어 본다고 해서 왕관을 받아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 기록된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때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인 지역교회를 추구하는 모임에 속해 있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인 지역교회의 회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에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d.양의 옷이 아니라 양이 되기를... 양의 옷을 걸친 것만으로는 안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진실로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거듭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며, 우리들을 통해 세움을 받는 성도들도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외모와 같은 것들에 치중하느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충 그렇게 보이려고만 노력할 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보이려고 하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로 그러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처럼 보이려고 양의 옷을 걸치지 말고 정말 양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 말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고 열심인 성도말입니다. 진실한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고 진실한 성도 말입니다. 성숙한 것처럼 보이려 하지 않고 정말 성숙한 성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F.many wonderful works(많은 아름다운 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a.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일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해 온 일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제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커녕, 하나님을 만났을 때, 큰 상을 받을 것처럼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어떤 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엡2:8-9). b.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만이.. 이제 주님께서 임하시는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무언가 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대언했던 사실을,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 쫓았던 사실을, 또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했던 일들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7:23)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마7:20).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고 말았다면 그 타협 중에서 한 일은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위해 한다고 해도 인간의 방법으로 해나가려는 것은 부끄러울뿐입니다. d.아무도 꺽을 수 없었던 다니엘의 정한 마음 느부갓네살은 왕의 수하에서 자라나는 총명한 아이들에게 우상에게 바쳐졌을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자라도록 했습니다. 거기에 왕의 수하에서 자라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작정하였습니다(단1:8). 그리고 왕이 먹이려 했던 그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였습니다. 비록 왕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작정된 다니엘의 마음을 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작정을 꺽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꺽이는 데도 가만히 서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주님을 대할 때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타협하고 만 여러분 자신은 주님을 뵐 때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e.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는 자들을 용광로 불에 던져 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때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이라도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불타는 용광로조차도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불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자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했으며 오직 하나님을 섬길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단3:18). 하나님께서 그들을 외면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을 보내셔서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f.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킬 것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려는 권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방해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할 수 있도록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또한 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모든 권위들에 가만히 굴복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우리는 주님을 뵐 때 두려워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직장 상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들을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G.결론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복잡한 문제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코너에 몰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만 때때로 주를 위해 수고한다고 하는 어떤 아름다운 일들로 인해 그 자신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중요한 순간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나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 중요하게 대우하지 않으실 겁니다. [딤후2:12]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임이라. [막10:29,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자는 지금 이 시대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되 핍박과 함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을 제일 우선 순위로 둔 사람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핍박받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손가락질 받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따돌림당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주시고자 십자가에서 많은 손해를 보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우리들이 그분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겁내고, 그분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분을 위해 손가락지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리고 그분을 위해 손해보는 일들을 걱정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위협에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을 두 번째나 세 번째에 놓치 마십시오. 먹고 살기 위해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해 부르심 받은 것을 두 번째나 세 번째 위치에 놓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 여러분을 사용하시려는데 그런 막중한 일을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위치에 놓치 마십시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제일 우선 순위에 오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어떤 보상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핍박은 없습니다. 편할 것입니다. 여유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상해주시리라는 것은 포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