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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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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중요성(렘1:4)
lhyunsik

출처 : I will sing unto the Lord //www. alleluia.egloos.com 임 동선목사 0. 소명의 중요성(렘1:4)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1:4) 소명은 부르심(calling)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려고 할 때는 소명을 주신다. 소명 없이 일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다. 모세의 경우를 보자. 그가 자기 동족을 위해 일할 마음을 품었던 것은 40세 때였다(행7:22-29).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에게 소명(calling)을 주시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동족을 위해 일하려고 했다. 선한 의도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애국적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 동족을 위한 그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살인자가 되어 도망치는 사람이 되었다(출2:11-15). 그에게는 소명이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행7:30, 출3:1-6). 비로소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을 받게 된 것이다(출3:10). 그때 모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미 모세는 그가 가야할 이집트 사람들의 말을 잊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소명에 따라 순종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건져내는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소명은 그의 일의 성취를 가져온다. 소명으로 시작된 일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다. 소명 없이 일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다. 소명을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 요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하도록 소명을 받았다(욘1:1-2). 그러나 그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자기 몸을 맡겼다(욘1:3). 소명을 버리고 가는 자는 순탄하지 않다. 그가 만난 것은 풍랑과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었다(욘1:4-16). 마침내 그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가졌다. 소명에 충실한 사람은 자기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는 소명을 가지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위대한 본보기(빌2:5-8)가 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명은 이처럼 중요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소명을 받았다. 그는 그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행20:24). 소명이 있는 곳에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 1. 소명을 받드는 자에 대한 주의 약속 1. 내가 너를 통해 그들을 칠 것이다(렘1:18).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사람으로 세웠다. 결코 부드러운 말이나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그를 통해서 든든한 도시도 대적하실 것이다. 그를 통해서 왕들과 통치자들과 제사장들까지도 대적하게 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아이라고 느꼈지만 주께서는 그를 통해서 그 땅의 백성들을 대적하실 것이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1) 첫 번째, 대적하는 말의 기원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말들은 예레미야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예레미야를 부르신 것(소명을 주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 혼자 이스라엘을 대적했다면 그는 얼마 안가서 그의 사역을 끝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치는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예레미야는 거기에 쓰임 받을 뿐이었다. 2) 두 번째, 대적하는 말의 결말 예레미야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거기에 아무리 반대와 비난과 모함과 원망과 불평이 있더라도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성취된다. 예레미야가 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3) 세 번째, 대적하는 말을 다루는 자세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일들을 곧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생각과 통한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한 것이 하나님을 조롱한 것이라고 여겼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말씀이 또한 믿는 너희 안에서 효력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하)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하나님의 편으로 서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과 싸우는 일은 곧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담대해야할 것이며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렘1:19). 영리한 아이들은 종종 아버지가 사용하는 회초리를 감추어두려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을 매질해야 하는데 회초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찾아와라........아마도 예레미야를 통해 듣는 말들이 너무 힘들어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예레미야를 어디다 숨겨두려고 할 것이다. 격리시키고 멀리 보내고,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고........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매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대하기 싫은 존재가 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를 대적하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I am with thee, 렘1:19)라는 주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소명을 받드는 자들이 반대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고 건져주실 것이다. 소명 받은 자들이여 그들이 너와 싸우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너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2.소명 받은 자가 각오해야 할 것(렘1:17) 1. 소명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허리를 동이라”(렘1:17).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태도로서 다시 한 번 언급되는 이 표현들을 보자. 이 표현은 문어적인 표현이다.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허리를 동이는 일을 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겉옷으로는 달리기를 한다든지, 전쟁을 한다든지, 밭일을 하기가 곤란하다. 중대한 일, 힘을 써야 할 일의 경우에 이스라엘 남자들은 허리를 동이는 일을 했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어찌 보면 그 일은 입으로만 하는 일처럼 보인다. 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어떤 일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때문에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허리를 동이라고 했다. 각오하고 시작하라는 권면이다. 목회자가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것이 칼이나 총을 사용하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문제와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비난과 불평, 또는 원망을 듣게끔 되어 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야 한다면 허리를 동이는 자세로 각오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2. 소명을 받드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다. “일어나라”(렘1:17). 앉는다는 것은 쉰다는 의미가 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구속사역을 끝내시고 쉬고 계시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도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변호사역에 힘쓰고 계신다. 그러나 앉는다는 것은 고난이나 고통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처절한 고통을 맛보셨다. 그분께서 앉아 계신다는 것은 더이상 고난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영광중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 일어나라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예례미야가 하게 될 일이 편한 일이 아니며 고난과 고통, 많은 어려움과 힘든 순간들이 있다는 뜻이다. 일어나라는 것은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안일하게 이 일을 다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가하게 처리하거나 여유롭게 행할 일도 아니다. 취미생활 같은 것이 아니며 목숨이 오가는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 많은 어려운 일이 따르게 되어 있다. 3. 소명을 받드는 것은 내용이 있는 일이다. “말하라”(렘1:17). 궁극적으로 그는 곧바로 시행될 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는 회개를 촉구하거나 하나님의 평안한 약속을 선포하는 대언자가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앞날을 정하셨다.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는 그들이 왜 그러한 재앙 가운데 들어가야 하는지를 말해야 했다. 그것은 그 민족에게 올바르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추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의 들춤이 없다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주께서 그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더하거나 빼지도 말고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아무도 어떤 잘못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갑자기 망하게 될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쓴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비록 그들이 끓는 가마 앞에 놓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소명을 받은 사람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 하나 정확하게 가르쳐주실 것이다. 소명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예레미야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4. 소명을 받드는 일에는 반대가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렘1:17) 주의 말씀을 전할 때의 오는 반응들을 아는가? 이것은 주께서 예레미야를 격려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아가서는 말씀을 전한 사람들을 대적하고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고, 그들의 위선을 들추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언자는 전혀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기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도 생긴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분은 위선에 빠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했다(마23장). 그것은 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의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악한 것을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니라.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실로 주께서 명하신대로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많은 대적자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는 대언자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예레미야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을 신뢰할 때 결코 당혹스러워 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게 되는 이유는 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그 사람이 만든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은 죽이고 그 후에는 어찌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인 후에 혼과 몸을 함께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10:28). 만일 예레미야가 사람들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당혹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 이것은 만일 그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께서 명령하신 것만을 말한다면 결코 당혹스러워 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맺는 말과 적용: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든지 주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그것은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유원지에 놀러온 것과 같은 태도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소명을 받드는 것은 중대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그것은 어떤 직장에 스카웃되거나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직원으로 채용된 것보다도 중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겠다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허리를 동여야만 한다. 소명을 받드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같은 일이 아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편한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아서 그것을 할 수 없다. 일어서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또한 소명을 받드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 나를 부리시는 분의 일이므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분이 말하는 바대로 움직이려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여러번 거론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명을 받드는 일은 위협과 반대와 비난과 모함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분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신 분이다. 그분의 부르심에 충실하려는 사람마다 그분 외에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 3. 소명 받은 자가 본 것들 (렘1:11-16) 소명 받은 자로서 예레미야는 두가지를 보게 되었다. 첫째는 아몬드 나무이며 둘째는 끓는 가마였다. 주께서는 이 두가지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알려주셨다. 1. 아몬드 나무(렘1:11-12) 아몬드 나무라는 말은 히브리어(사케드, שקד)로 ‘지켜보다,’ 혹은 ‘깨우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되었다. 아몬드 나무는 “나무를 깨운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졌다. 왜냐하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그해에 싹이 트고 열매 맺는 나무 중에 가장 빠른 나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목련이 피면 봄이 온 것을 알듯이 아몬드 나무는 봄이 온 것을 말해주는 나무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Authentic Media p.556 참조).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몬드 나무를 보여주면서 “내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내 말을 재촉하리라.”(렘1:12)라고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급했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몇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알리시고 하시려는 일이 지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빠른 시일 내에 이루시겠다고 하는 표시이다. 둘째, 주께서 소명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소명을 갖게 된 자들에게 그분께서 주신 부르심이 헛되지 않음을 한 번 더 확신시키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어떤 통치자가 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보수 수구세력은 급진전 되는 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많은 국민들도 결국은 급속한 개혁에 대해 비난과 부정적인 말들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그러면서 교회나 하나님의 일들을 거기에다 비유하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 통치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지 못했다(사55:8-9). 성령님께서 사람을 바꾸실 때는 한 순간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구원받기 위해서 오랜 성경공부 과정을 거쳐야 했다든지, 또는 기초 성경공부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삭개오가 회개하는 데는 심사숙고의 기간을 갖는다든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절반을 내놓거나 누구의 토색한 물건을 네 배로 갚은 이후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서두르기를 원하신다. 소명을 받았지만 그 일을 나중에 하려고 하거나 혹은 천천히 하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지체할 필요가 없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까, 나중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하고 지금은 다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식의 신앙이라면 아몬드 나무가 말해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당장에 시작되어야 할 일이다. 지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아몬드 나무가 가진 이름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을 서두르신다. 주님은 “내 말을 재촉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읽었지만 서서히 순종하려고 하는 것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버티는 것들이 얼마나 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재촉하시지만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늑장을 부릴 때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부르심에 얼마나 충실하게 움직이는지를 지켜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신속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2. 끓는 가마솥(렘1:13-16) 끓는 가마솥은 재앙을 상징한다. 이 가마솥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가마솥의 열린 쪽이 남편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재앙이 북쪽에서부터 임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북쪽에서 재앙이 그 땅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임하리라.”(렘1:14) 주께서 부리시는 왕국들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의 성문어귀에 왕좌를 정하고 그곳의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의 모든 도시들을 칠 것이다(렘1:15). 이것은 유다의 상황이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은 상황이 된다(풍전등화, 風前燈火)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를 버린 것, 그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 그들이 사악한 것이 이 재앙의 이유였다(렘1:16). 이미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멸망을 담고 있다. 요시야 왕의 회개와 신앙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왕국은 재앙을 앞에 두고 있다. 예레미야의 임무는 무엇인가? 재앙에서 그들을 건져내는 것인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다. 왜 그 재앙이 임하게 되었는지, 왜 이제 그들이 멸망하게 되는지,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실 일들 가운데서 그들을 가르쳐 그들의 남은 자들이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철저히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누군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면 무지한 사람들은 멸망해가면서도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 4. 소명받은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렘1:9-10) 1.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다(렘1:9)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렘1:9)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 입에 대셨다는 표현은 그가 주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현이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였다(사6:5). 그러나 스랍들 중에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불타는 숯을 취해가 가지고 날아와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사6:7)라고 했다. 이어서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즉.......”(사6:8)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 되는 표시로서 이사야의 입술을 건드리셨다. 이것은 에스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겔2:8) 거기에도 입을 통해 받아먹으라고 한 것은 주의 두루마리로서 주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겔3:1 참조). 다니엘도 마찬가지다. 주께서 그에게 주의 말씀을 주시려 할 때에도 입을 어루만지셨다(단10:16). 이런 것을 보면 소명 받은 예레미야가 할 일은 명백하다. 주의 말씀을 가서 전하는 것이었다. 자기 계획이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술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 편에서 서술하는 게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그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소명 받은 자가 할 일이다.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며 소명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다. 2. 내가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웠다(렘1:10).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세자는 왕이며 가장 큰 권세는 왕국의 권세이다. 모든 이들은 왕께 복종해야만 한다. 침례성도들의 믿음 중에 하나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믿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의무까지도 면제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마땅히 바쳐야 할 것들(세금)이 있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와 그 자신을 위해 행하신 것처럼(마17:27) 정부를 위해서 해야만 한다(롬14:7). 그러나 이 소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이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그 어떤 권위보다 높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웠다. 그를 민족들과 왕국들을 초월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그 어떤 민족도 예레미야가 한 말씀대로 될 것이며 그 어떤 왕국도 예레미야가 한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 소명을 받은 자는 가장 높은 분의 말씀과 함께 귀한 권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소명받은 자는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 선포하라 하신 말씀에 대해 담대히 전해야만 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함께 눕기를 원했지만 요셉은 순종하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보다 큰 권위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 아내보다도 더 높은 주인이며 남편인 보디발에 의해서 권위를 임명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와 보디발의 권위 사이에서 더 높은 권위에 충실했던 것이다. 소명 받은 사람들은 최종 최고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권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소명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성경을 존중하고 거기에 충실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소명받은 자들을 향해서 모든 권위자들은 복종하고 두려워하며 존중해야만 할 것이다. 3. 내가 너를 통해서 하게 할 것이다(렘1:10) 소명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일을 긍정적인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이다. 다시 말해 세우고 심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세우고 심는 일이 있기 전에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고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 있다. 아마도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가 해야 할 이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고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놀라며 당황했을 것이다. 이런 예레미야를 놓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해야 할 일은 심판자와 복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일을 알리는 것이었다. 복을 주시려는 두 가지 일에 앞서 심판에 대한 네 가지의 언급이 있는 것에 주목하자. 한 개인이 구원받는 것도 생각해보자.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뿌리째 뽑히고 죄로 높아진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죄악 된 생각이 파멸되고 철저히 좋지 못한 습관이 파괴되는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너무 쉽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네 가지 일들에 대해 신중하지 않다. 그리고 세우며 심는 것만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회개하지도 않는 죄인들에게 값싸게 복음을 전해서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영접케 하려고 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삶에는 변화도 없고 열매도 없기 마련이다. 복음은 모든 것이 뿌리째 뽑히고 무너져 내리며 파멸하고 파괴되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자기 고집과 자기 세력과 자기의 애착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그는 뿌리째 뽑지 못한 애착으로 인해 자기 길을 가야만 했다. 주님은 뿌리째 뽑히지 않은 곳에 새로운 것을 심지 않으며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에 새 것을 세우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는 뿌리째 뽑는 일과 무너뜨리는 일, 파멸하는 일, 파괴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뿌리째 뽑아라(렘1:10). 뿌리째 뽑는다는 말은 다시 그것의 잔재가 남아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만큼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조금의 긍휼과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거기 거하는 이방인들을 그렇게 다루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훗날 그들에게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었다(민33:55, 삿2:2-3). 어떤 뿌리는 남아서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사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그 뿌리를 남겨두게 되면 무서운 쓴 뿌리가 된다. 쓴 뿌리는 숨어 있다가 적당한 환경만 만나면 다시 거세게 일어나 온 밭을 더럽힌다(히12:15)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뿌리째 뽑아야 한다. 주님이 하시려는 심판은 가지치기가 아니라 온전히 뽑아내는 것이다. 우리 개인이나 교회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엄중하게 뿌리째 뽑하내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하신 것은 뿌리째 뽑힐 터이니”(마15:13) 2) 무너뜨리라(렘1:10). 하나님의 종이 무너뜨리는 일을 한다? 아마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자. 주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거리나 시간 상으로도 충분히 살리실 수 있는 분이 나사로가 죽기까지 움직이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래야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 주님은 부활에 대해서 설교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죽지 않고 다시 살지 않는다. 무너뜨리지 않고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픔과 눈물과 괴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철저히 무너뜨려야만 한다. 그 웅장한 성전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마24:2)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심판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전도자는 이것을 잘 알았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무너뜨릴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3:3) 3) 파멸하라(렘1:10) 하나님께서 시간을 많이 주셨다. 하지만 그래도 돌이키지 않은 것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유다는 파멸했다. 그들은 70년 동안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성전도 잃고, 절기도 잃고, 왕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이교도의 나라에서 어둡게 살아가야 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날, 예루살렘을 등지고 끌려가는 날, 그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 개인이나 교회에도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주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주님께서 내버려두실 수 있다. 그리고 내버려둠을 당한다면 파멸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이것을 교회에게 적용한다면 사역자는 떠나게 하시고 성도들은 흩어지게 하신다. 무서운 일이다. 4) 파괴하라(렘1:10) 자랑하던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은 파괴되어질 것이다.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사람을 가리켜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 또는 처치 빌더(church builder)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했던 일이 이와 같은 일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냥 되지는 않는다. 세우고 심기 전에 먼저 뿌리째 뽑아야 하는 것, 무너뜨리는 것, 파멸하며 파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예레미야가 파괴하는 말씀을 선포하며 파괴하는 행위들을 할 때,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어떤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반대했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와 충돌했다(렘26장). 거짓 대언자들도 예레미야의 하는 일들에 대해서 반대했다(27-29장). 그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했던 사람들은 거짓 대언자들의 속임수에 빠져 평안을 믿고 따라갔다(렘6:13). 5) 세우라(렘1:10) 하나님께서 세우시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이며 왕국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돌이키심이 없다(롬11:29). 어떤 반대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고 있는 어리석음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식을 낳는다고 했을 때, 사라는 웃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웃음으로 그것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사라........하지만 그런 사라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얼마나 큰 긍휼과 사랑과 격려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려는 위대한 계획이 포기되어지지 않는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었던 약속도 결코 헛되지 않는다. 교회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간다. 떠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빠질 때 교회가 안될 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심어라(렘1:10) 만일 뿌리째 뽑혔다면, 무너뜨렸다면, 파멸하고 파괴했다면, 이제는 심어야 한다. “주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씨를 심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토양의 상태다. 가시덤불을 제거해야만 한다. 악기 연주를 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할 일은 튜닝이다. 줄이 맞지 않은 기타는 아무리 쳐도 소음이다. 왜 줄을 퉁기지 않느냐고 묻는 것처럼 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형제 사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형제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하모니는 교리적 일치, 정체성의 일치,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하모니이다. 적용과 맺는 말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 이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취미생활정도나 어떤 클럽활동의 회원이 된 것처럼 여기는 교인들이 있다. 이것은 소명을 망각하는 것이고 그 끝이 선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내려 하신다. 그것은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또 그것은 세우고 심는 일이다.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순종하며 가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하신다. 오해와 원망과 불편한 시선과 노기에 가득찬 눈빛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명에 대한 신실함 뿐이다. 세상은 어떤 것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또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세우고 심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몫이다. ============================================================== 5. 소명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렘1:6-8)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명받은 자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나는 아이이니이다. 하지 말라(렘1:6-7). 하나님으로부터 큰 소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렘1:6)라고 대답했다. 이 표현은 경험이 없다든지, 능숙하지 못하다든지, 무언가 한계와 제약을 갖고 있으며 미숙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아이이니이다, 하지 말고.......”(렘1:7)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런 능숙하지 못한 점들, 한계, 제약, 어려움들이 소명 받은 사람이 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우리의 나이가 문제가 된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많거나를 이유로 삼아 힘들다고 대답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에 대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던 스펄젼이나 70세에 복음전도자로 헌신한 죠지 뮬러를 생각해본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소명만 분명하다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을 이유로 삼아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말에 능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뒤로 빼고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윌리암 캐리를 하나님께서 인도 선교를 위해 사용하신 것을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펄젼 자신도 신학교를 나온 경험이 없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회당에서 말할 때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행3:13-14). 제자들이 배우지 못한 것을 아는데 너무도 유창하게 변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모든 어려움과 모자람과 방해를 초월한다. 장애와 문제들을 걱정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레미야는 이것저것, 자기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이유로 해서 그 소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모세의 경우도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그는 소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출4:10) 그러나 이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나 주가 아니냐? ”(출4:11).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러한 상태의 모세라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소명은 그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엘 무디가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줄은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조사의 사용이나 말투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에 의해 무려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말을 잘 못한다든지, 배움에 부족하다든지, 가난하다든지 하는 것들은 소명에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바울의 연설을 듣고서 “그의 말이 형편없다.”라고 했다(고후10:10). 그가 남긴 글들은 대단하지만 그의 연설이나 말은 별로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은 그런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늘날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자기의 머리를 굴려서 교회를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소명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마치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과 일치하는 방법 안에서의 소명이라면 그는 어떤 장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되어진 소명은 “나는 아이이니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삼상3:9중)라고 해야 한다. 겸손은 부르심에 여러 가지 이유로 못한다고 빼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은 자기의 약함을 초월해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에 못한다고 빼서 사람들에게 겸손해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겸손이 되는 것이다. 2. 내가 너를 보낼 모든 자에게 너는 가라.(렘1:7) 예레미야는 소명을 통해 보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가 갈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도록 한 그 대상에게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가서 전해야만 한다.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해주어야 한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거기에는 다가가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것은 소명 받은 자에게 권위가 있다는 뜻이다. 이 권위는 모든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 예를 들어보자. 비록 노예였지만 보디발의 눈에 들었던 요셉은 보디발로부터 가정 총무로서의 직무를 맡도록 소명 받았다. 그리고 이 소명은 보디발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파라오의 반지를 끼고 영예로운 총리로서 이집트를 호령할 때, 그를 거역하는 것은 이집트 왕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의 소명에 의해 총리가 된 요셉을 모든 이집트 사람은 따라야 했으며 요셉은 파라오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은 일꾼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도 보여준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명 받은 목사는 성도들에게 함부로 하거나 무례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소명을 주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을 느끼며 그 목회자의 다스림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를 존중해야만 한다. 예레미야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말 못할 대상은 없었다. 왕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하며, 백성들의 어른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또는 어떤 나라의 통치자라 할지라도 역시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지금 그 자신을 아이처럼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까지라도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소명을 받은 자는 들어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소명을 받은 자는 포고령을 읽는 자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전하는 것이 소명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것이다. 3.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렘1:8) 소명 받은 자는 각오해야 한다. 그가 하는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그가 하는 말들을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어떤 사람은 소명대로 일하는 사람에게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어디 너 잘 되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즐겁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얼굴이 아니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있다. 못마땅한 표정과 기분 내키지 않는 표정의 얼굴을 하고 소명 받은 자 앞에 설 수도 있다. 뭔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가? 잔뜩 긴장한 표정........이해가 안된다는 표정, 왜 그래야 되느냐는 식의 표정........여러 얼굴들이 소명 받은 자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소명 받은 자는 그 모든 얼굴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상처받는 얼굴들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상처받은 사람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다루어야 할 일도 덮어두기로 했고, 말해야 할 것도 참기로 했고, 해야 할 일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것이 교회를 위해 좋은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아마 예레미야에게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신상에도 좋으며 마음이 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회개했다. 주님께서는 소명을 받은 자에게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렘1:7)고 하신다. 마틴은 목사이고 고메즈는 선교사였다. 두 사람은 서로 함께 기도하는 친구지간이었다. 마틴은 새 사역지로 부임해 갔다. 그는 이것저것을 살핀 후에 새롭게 간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있었던 교회의 집사들이 그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마틴은 고민에 빠져서 기도하였고 이 문제를 고메즈에게 편지로 알렸다. 고메즈는 걱정에 빠진 그 마틴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첫째, 만일 자네가 걱정을 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열심히 걱정을 하게나. 그러나 걱정을 해서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일이라면 걱정을 중단하게. 오히려 걱정대신 자네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게. 둘째, 자네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는 일이라면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세. 자네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자네에게 올무가 될 걸세.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가 하나님의 편에 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골리앗 앞에 있었던 다윗에게 주신 결말을 생각하게........함께 기도하겠네.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명에는 하나님의 보호 하심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적용할 문제들 그리스도인 진영에는 특별한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 교회 세우는 사람(Church Planter or Church Builder), 교사......등등.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목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렇게 해서 된 목사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온 소명,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만이 참되게 사역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소명받은 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것과 같은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아이(나이 어림)라는 한계처럼 소명자들에게는 여러가지 한계와 부족함들이 있다. 그러나 살인자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가 전한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처럼(살전2:13) 소명받은 자들을 존중하는 영적 분위기가 교회와 그리스도인 진영에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삶으로의 소명이 있다(엡4:1, 4, 13, 빌3:14). 거룩한 삶의 추구를 방해하는 여러가지 것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불충할 필요가 없다.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와 보호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받은 이 부르심을 방해하려는 어떤 노력과 유혹과 세력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며 권위를 주시고 함께 하심으로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들로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1:6) 오늘날 사역자들이 자기의 소명을 소홀히 다루는 것은 큰 죄다. 유대인들이 멸망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왕으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대언자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백성의 장로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 조력자로서의 소명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더해지게 하셨는지, 그때의 소명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명을 잃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 6. 소명받은 대언자 예레미야(렘1:1-5) 1. 예레미야는 누구인가?(렘1:1) 예레미야는 본래 제사장 중에 하나이다(렘1:1). 그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이미 배워온 사람이다. 2. 예레미야의 활동시기(렘1:2-3) A. 왕국이 버림받는 시기에 활동한 사람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대 13년부터 예루살렘이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렘1:2) 활동했다고 알려준다. 이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해가는 때다. 요시야가 신앙부흥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대하 34,35장).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보수하며 절기를 지키도록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미 유다의 죄는 너무나 컸다.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에는 아주 심각하게 타락의 길로 달려왔던 것이다. 요시야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석달을 통치했다. 하지만 이집트 왕이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때 유대왕국은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집트인들이 세운 여호야김은 11년을 통치하다가 마침내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요시야의 손자이자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통치하게 되었다. 나이가 8살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은 석달 열흘, 곧 백일을 통치하고서는 느브갓네살이 보낸 군대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다시 요시야의 손자이자 여호야긴의 형님인 시드기야를 세워 통치하게 했다. 그때 유대왕국은 바빌론의 영향 아래 있었다. 시드기야는 11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해도 시드기야는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대하36:11-12). 느브갓네살을 배반하므로서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가 끌려갈 때 유다 왕국은 끝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가 그렇게 외쳤지만 왕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백성들은 타락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신 주의 말씀이 성취되어 그 땅이 자기 안식을 누리도록 허락하셨다(대하36:21). 비록 隔痼?한 민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 개인에게나 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한 개인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고를 받으면서도 돌이키지 않고 계속 악으로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잘못나가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은 권면하시는 것, 책망하시는 것,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렘2:30)에 대한 주님의 태도는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연합하였으니 그를 내버려둘지니라.”(호4:17). 하나님은 권면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책망하신다. 책망도 소용이 없으면 징계하신다.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버려두신다. 내버려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것은 사탄이다. 때문에 그런 자들을 가리켜 사탄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것이다. 주 예수의 날에 그의 영은 구원을 받겠지만 사탄에게 넘겨진 육체는 멸하게 될 것이다(고전5:5). 육체가 멸하여진다는 것은 더 이상 주님을 위해 살아갈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B.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에 활동한 사람 유다왕조의 멸망은 성전의 무너져 내림으로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성전(고전3:16, 6:19)이라면 그것이 더럽고 온전하지 않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권고하심과 책망,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의 몸을 멸하실 수밖에 없다. 질병이나 죽음이 그에게 엄습할 것이고 그는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의 삶을 끝내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지만 외면하고 거절하고 불순종하면, 마침내는 무너져 내리는 성전처럼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수없이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그 모임들이 지금은 그 지역에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만일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에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게 된다면 구약의 이 같은 일들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게 이런 유대의 멸망은 거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고전10:6,11). 3.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택하심(렘1:4-5)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려고 구별하셨다. 주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너를 뱃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렘1:5)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을 구별하신 것과 비슷하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소명에 대해 “.......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갈1:15)라고 말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모태에서부터 준비되었다. 나아가 뱃속에 짓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소명이 철저히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나 바울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나가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두었던(구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바리새인으로 충실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실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을 듣게 되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대언자로 세우셨다(렘1:5). 목회를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나 전임사역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 그 일은 필요한 것인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주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소명이 없는 경우는 자기 이름을 내놓는 것이며 자기의 일로 끝나는 것이다. 특히 이 소명에 있어서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1:4)라고 했던 것을 보자.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나는 때때로 여자 목사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교회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로 부르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스스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주님은 바울의 입을 통해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2)라고 했으며 고린도 교회에게 주님의 뜻을 주실 때에는 “너희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34)라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떠드는 어떤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게 그 말씀으로부터 온다. ============================================================== < 부르심과 확신 >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무책임하다고 할까?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교차하면서 나는 정작 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는 마음 쓰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게 주시려는 일에도 확신이 없었고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내야 했던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면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 언제고 부르심이 있을 때,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세리 마태도 세관을 버렸고(마9:9), 그물 깁던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다(마4:21,22). 그들 모두에게 그 일거리들은 이제까지 해왔던 중요한 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현재 하던 일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향한 체면이나 입장, 그런 것들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떤 부자청년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때,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붙잡지 않으셨다(마10:21,22).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으로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누가 제의했기 때문도 아니고 누가 좋다고 얘기했기 때문도 아니라 그 일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려는 일인가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세관의 후임자를 구하거나 아버지를 도와 그물 깁는 사람들을 뽑아놓고 가거나........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주님은 더 멀리 가셔서 또 다른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그 일을 주님으로부터 나로 하여금 하도록 허락된 일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가는 것이며 그런 확신이 없다면 아예 깨끗하게 잊는 것이 상책이다. 확신 없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며 확신이 있을 때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강한 확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가야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다. by 魚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