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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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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워즈의 신학과 설교
lhyunsik

에즈워즈의 신학과 설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의 내용과 방조법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비전의 확대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설교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그의 비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35년에 에드워즈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그는 이 본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리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복종은 우리의 이성(理性)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이유와 근거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항하는 온갖 거부와 반대를 잠재우는 데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단순한 생각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학
주권에의 부드러운 복종
조나단 에드워즈가 잠잠히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숙고했을 때, 그는 그 순수한 존재가 무한한 힘과 무한한 지식 그리고 무한한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는 존엄한 분임을 발견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지식과 힘이 무한하다는 것은 그의 사역에 의해 분명히 나타난다.… 이처럼 지식과 힘에 있어서 무한하기 때문에 그는 전적으로 거룩하다. 왜냐하면 비거룩성은 언제나 어떤 결점이나 맹목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힘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는 자족(自足)하고 완전한 충족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일을 그릇되게 행할 유혹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다. 하나님이 그릇되게 행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무한한 힘과 절대적 주권은 하나결의 완전성을 충족시키는 기반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충족성은 그의 완전한 거룩성의 근원이다. 에드워즈는「종교적 감정에 관한 협약」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의 모든 도덕적 우월성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그가 하나님에 관해서 믿던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26-27세 되던 해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에 매혹되었던 지난 구년간의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라는 관점에서 내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은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어떤 대상만큼이나 내 마음에 확실한 것이었다. 그 교리는 꽤, 자주, 대단히 즐겁고, 밝고,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절대적인 주권은 내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리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나에게 나타났고, 그것은 그의 영광의 한 부분이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을 경배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보고 그의 절대적 주권에 매료되었을 때, 그는 이 실제를 고립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에드워즈에게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엄청난 열정으로 사랑하던 무한히 영광스러운 한 인격의 위대하고 생명력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비전으로부터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은 그의 영광을 고양시키고 나타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결핍에서가 아니라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 인간의 행동은 부족한 부분을 메우거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공급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는 교정 행위를 하지 않으신다.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완전히 충족적인 근거로서 그의 모든 행동은 그의 충만의 넘침이다. 그는 자신의 영광에 무엇을 추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을 고양시키고 나타내기 위해서 행동하신다. (이것은「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논술」에서 훌륭하게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의무
하나님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추론은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기뻐한다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시대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은 잘 하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고 말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에드워즈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감정에 관한 협약’에서 한 요점을 확립했다. “진정한 종교는 상당 부분 거룩한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을 “영혼의 성향이나 의지의 보다 찰기차고 민감한 사용”이라고 정의했다. 증오, 욕망, 즐거움, 기쁨, 고뇌, 희망, 두려움, 감사, 동정, 그리고 질투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 마음의 활기찬 하나의 성향은 반드시 다른 성향도 포함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은 죄에 대한 미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만족, 최종적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욕구, 그가 이루어놓으신 구속에 대한 환희, 사랑하지 못했을 때의 비애와 뉘우침,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열심, 그리고 의에 대한 갈망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그의 실재에 걸맞게 우리의 감정이 반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써 그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 종교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종교적 감정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성령의 강하고 활기찬 영향력을 전적으로 결핍한 사람이다."
위의 것들 뿐만이 아니다. 즉 거룩한 감정 안에서의 인내(또는 견인) 없이는 참 종교(또는 참 성인)도 없다. 인내는 택함받은 표이며 최종적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택함받지 못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택함받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이신칭의를 믿으면서도, 이신칭의와 인내와의 관계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중요 이슈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였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의 결정적인 사실을 얘기했다. 첫째로는 구원얻는 믿음은 “진리에 대한 믿음과 마음의 책임성 있는 성향”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마음의 책임성 있는 성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위에서 감정이라고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믿음은 “영혼이 우리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적으로 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은 사랑의 포용이다. “믿음은 … 하나님의 사람의 원리로부터 생겨난다"(참조 고전13:7; 요 3:19; 5:4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구원얻는 믿음에 있어서 중심되는 요소이다." 바꾸어 말하면, “탁월하고 신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취향과 기호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믿음의 근원이며,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본질적인 표현이다. 현대의 많은 학설과는 반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구원얻는 믿음은 감정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의지의 결단이 결코 아니다.
둘째로, 구원얻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인내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신다. 사실상 이것은 첫 번째 행위(구원얻는 믿음)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의 속성인 것처럼 간주된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행위로서의 구원얻는 믿음은 그 속에 무성한 나무를 갖고 있는 씨앗과 같아서, 성경이 최종적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후속적인 인내까지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회심할 때 믿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회심 때에 씨앗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감정 안에서 인내해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회개와 회심을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인내에의 주의와 근면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설교 방법에 있어서 엄청난 함축성을 갖고 있다. 그는 설교를 성도의 인내를 돕기 위한 은총의 도구로 보았고, 그 인내는 최종적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구원 설교”이다. 그 설교가 죄인의 회심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목적 가운데 성도의 거룩한 감정을 보존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신토록 하며 마침내 구원 얻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에 포함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요약하자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되었을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비전은 절대적 주권의 하나님이었다. 그분은 자족하시며, 완전한 충족성과, 무한한 거룩성을 가지며, 따라서 완전히 영화로운 분이다. 하나님의 행동은 결코 그가 어떤 결핍에 봉착하는 것에 의해 촉발되지 않고(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충족성을(이것은 무한한 것이다)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을 동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동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와 특권은 이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함으로써 그 영광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스러운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요 우리의 기쁨이다.

하나님을 최고로 삼으라
에드워즈의 설교
하나님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에서 어떤 종류의 설교가 나왔는가?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사역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설교로 뉴잉글랜드의 대각성운동의 불을 점화하였는가? 분명히 영적 대각성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구를, 특별히 설교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다. “그가 …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하나님께서 전도의(여기서는 설교라는 뜻이다/역자 주)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에드워즈의 설교의 본질은 열 가지의 특징들로 정리될 수 있다. 이 특징들은 에드워즈에 관한 사실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적절한 도전을 줄 만큼의 가치를 갖는다. 이 특징들은 에드워즈가 설교를 했던 방식에서, 또 그가 여기저기에서 설교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들로부터 추출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감정을 일으키라
훌륭한 설교는 “거룩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감정은 죄에 대한 증오, 하나님을 기뻐함, 그의 약속에 대한 소망, 그의 자비에 대한 감사, 거룩함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온화한 동정심 등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거룩한 감정의 결여는 그 자체가 역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일들이란 워낙 거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가슴속의 행위들이 생생하고 강력하지 않다면 그 본성과 중요성에 있어서 종교적인 것에 비길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우리의 행동의 성향들 중 어떤 영역도 종교의 영역만큼 활기가 강하게 요구되는 곳은 없다. 즉 미지근한 것이 가장 역겨운 것은 바로 종교에서이다." 또 에드워즈는 “만약에 참 종교의 상당 부분이 감정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청중들의 가슴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경향을 띤 설교 방식이 훨씬 바람직한 방식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처럼 감정을 겨냥한 설교는 보스턴의 점잖은 성직자들에게 매우 위험하게 보였다. 한 예로 찰스 촌시(Charles Chauncy)는 “이 시대에는 마치 종교의 주요한 일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열정들이 그런 곳에 쓸려지는데 이는 명백히 답답한 사실이다"라고 비난했다. 에드워즈는 세련되고도 균형 잡힌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청중들이 영향 받는 것이 영향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영향이 그 중요성에 비해 적절한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목사들이 청중들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고양시킨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나는 청중들이 진리에 의해 영향 받기만 한다면, 또 그 감정이 그들이 영향받는 것들의 본성에 배치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한껏 내 청중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주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설교 방식을 경멸하는 풍조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설교에 있어서 광범위한 지식과, 이성의 힘, 방법과 언어에 있어서의 정확성을 나타내 보이는 설교자만이 설교자로서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교가 설교의 목적을 밝혀주는 가장 위대한 경향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나 그것에 대한 신중한 고려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 시대의 경험은 이것을 충분히 증명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사람들 중에는 에드워즈에게 왜 마음의 감정보다 사랑과 정의의 외적인 행동을 그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가 행동의 근원이 되는 감정의 변화를 통해서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전략을 썼다. 그 하나는 선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교적 감정에 판한 협약”의 가장 긴 부분이 이 명제를 증명하는 데 할애되었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에서 그 실행과 열매를 갖는다." 에드워즈는 감정이 모든 경건한 행동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감정을 목적으로 삼았다. 나무를 선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그 열매도 선할 것이다.
에드워즈가 거룩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러한 실행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어떤 외적인 열매도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외적인 선행이나 경건한 행동들도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가슴의 감정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라면, 또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율법주의일 뿐이며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네가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가슴을 겨냥한다.

마음(mind)을 밝혀라
에드워즈가 말했다. “우리들의 회중은 머리 속에 무엇을 저장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을 훨씬 더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것들을 해 줄 수 있는 경향의 설교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그의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했던 방식과 관계론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정향된 오늘의 설교자가 그의 청중들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는 방식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744년에 에드워즈는 세례요한에 관한 구절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 5:35)를 본문으로 임직식 설교를 했다. 그 요점은 설교자란 켜서 비취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가슴에는 열(熱)이 그리고 그 마음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사가 열이 없이 빛만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경건의 능력이나 영적인 열정의 나타남 없이, 또 하나님과 영혼의 유익에 대한 열심 없이 현학적인 강연으로 청중을 즐겁게 한다면, 그는 청중의 가려운 귀만 만족시키는 것이며, 그들의 머리를 공허한 개념으로 채우는 것이 된다. 그 설교가 그들의 가슴에 와 닿거나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할 것은 거의 분명하다. 반대로 목사에게 빛이 없고 강렬한 열만 있는 경우, 그래서 목사가 격렬하고 과도한 열심에 의해 주도될 때, 그는 그의 청중들 속에 신성하지 못한 불길을 붙일 수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타락한 열정과 감정을 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청중을 조금도 개선시키지 못하며, 천국을 향해 한 발짝도 전진하게 할 수 없다. 그들을 속히 다른 길로 내몰 뿐이다.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감정은 거룩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그는 “영적인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 그날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둠의 자녀들의 가정(假定)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빛이나 안목을 제공하지 않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둠의 왕의 기만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훨씬 더 강하게 “사람들의 종교적인 감정이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강한 설득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를 가정해보라. 그것이 합리적인 설득이나 확신이 아니라면 그들의 감정은 더 나은 것이 될 수 없다. 합리적인 확신이라고 할 때, 나는 실제적인 증거나 적합한 이유, 또는 확신의 정당한 근거에 기초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설교자는 그가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감정을 위해 청중들의 ‘적합한 이유’와 ‘정당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에드워즈는 감정을 조작하는 실례로 제시될 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는 그의 청중들을 이성을 가진 피조물로 여겼고, 그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춤으로써 그들의 가슴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설교를 함에 있어서 종교의 진리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청중들이 갖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밝혀주고, 이성과 논증의 힘으로 확신을 주고, 이해력과 기억력의 도움을 받아 쉽고 명백한 방법론들을 눈여겨보았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설교를 조직화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좋은 설교란 청중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로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250년 전에 뉴잉글랜드를 각성시키심에 있어서 열과 빛, 머리와 가슴, 심오한 교리와 깊은 기쁨을 같이 사용하신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마음을 밝히고, 가슴에 불을 붙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오늘 다시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시지 않겠는가?

성경에 흠뻑 적셔라
나는 좋은 설교는 ‘성경에 흠뻑 적셔진' 것이지 ‘성경에 기초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좋은 설교의 기초,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이하가 아니다).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선포하는 설교는 성경이 기초라고 하면서 성경에서 출발하여 종내는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는 그런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막 출발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하고 싫은 충고는 이것이다. “성경을 인용하라! 성경을 인용하라!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단어 그대로 말하고 또 말하라. 당신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청중들에게 보여주라." 대부분의 청중들이 설교자 자신이 본 대로의 설교와 본문과의 관련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 이 관련성은 끊임없이 성경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그의 설교 원고에 자신의 말을 지지해주는 성경 구절 전체를 써넣는데 대단히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의 주제에 빛을 던져주는 구절들을 차례로 다 인용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본문들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의로운 해의 비취는 광선, 그것들은 목사들을 비추는 빛이면서, 목사들이 청중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빛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설교자와 청중의 가슴을 불붙게 하는 불인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초기 목회 생활을 돌아보면서 다른 어떤 경험보다도 성경 연구의 즐거움을 회상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종종 각 단어들이 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가슴속에 있는 무엇과 그 부드럽고도 강력한 말씀이 조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종종 각각의 문장들에서 더 많은 빛들이 나타나고 마치 기운을 차리게 하는 음식처럼 말씀이 나에게서 소통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성경을 읽지 않고는 지낼 수 없었다. 종종 한 문장만을 오랫동안 되뇌이곤 했는데 그럼으로써 그 안에 있는 놀라운 것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거의 모든 문장들이 놀라움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성경지식에 통달하고 있음에, 특히 그가 당시대의 신학적, 윤리적, 철학적 지식에도 정통했음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학생 시절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결연하라. 꾸준히, 계속하여, 그리고 자주 성경을 연구하라. 내가 찾는 만큼, 그리고 명백하게 인지하는 만큼 나 자신은 지식에서 성장하게 된다." “꾸준히", “계속하여", “자주”라는 용어는 에드워즈의 설교가 풍부한 성경적 근원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 연구의 실행은 수백 권의 노트를 필요로 했고, 그는 가능한 모든 통찰력의 가닥들을 잡으려고 애썼다. “나의 목회생활 초기에서부터 나의 연구 방법은 쓰는 것이었다. 이 방법에 나를 적응시키면서 나는 중요한 힌트들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독서나 묵상, 또는 대화를 통해서 무슨 비중 있는 주제에 관해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들이 마음속에 떠오를 때, 그 실마리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무수한 주제들에 관하여 내 생각에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나 자신이 보기 위하여 기록한다." 그에게 있어서 펜은 주석의 도구였다. 존 칼빈처럼(그는「기독교강요」서론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쓴 것을 배웠고, 배운 것을 썼다. 이러한 방법을 살펴볼 때 우리들이 서둘러서 하는 성경 묵상은 아주 피상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의 글을 읽는 것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온 가슴으로 느낀 한 사람의 눈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성경에 흠뻑 젖어있었다. 우리의 설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에드워즈의 충고를 따라 “신성을 잘 연구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능력에 친숙해지도록 하자."

유비와 이미지를 활용하라
무언가가 우리의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추상적인 사고를 즐길 때가 아니라, 마음이 놀라운 실재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분명히 에드워즈는 높은 차원의 형이상학자요, 철학자였다. 그는 이론의 중요성을 믿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은 감정을 불붙이지 못한다는 것과, 설교의 목표는 새로운 감정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하늘의 영광을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지옥의 고통을 극도로 무서운 것으로 과도하게 표현했다. 추상적인 신학적 진리가 일상적인 사건과 경험이라는 모양이 되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세레노 드와이트(Sereno Dwight)는 “에드워즈의 저작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경우에 조차 예증이 풍부하며, 그의 설교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온갖 비유적 표현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에서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계 19:15)라는 구절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단어의 의미는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라고만 해도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두려움은 무한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격분! 여호와의 맹렬함! 오! 그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요? 이 같은 표현에 담겨있는 것을 과연 누가 제대로 말하거나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에드워즈의 도전이다. 우리가 지옥과 천국 같은 실재를 고려할 때 그에 걸맞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심오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미지와 유비를 설교의 어디에서나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가 성경 말씀에 흠을 잡을 수 없는 한 에드워즈가 표현한 지옥의 이미지에 대하여 함부로 흠잡아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 자신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와 같은 성경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두려운 실재를 보다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탐색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반대로 행하고 있다. 우리는 지옥을 완곡하게 표현해줄 말을 찾고 있고, 될 수 있으면 성경 구절의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 결과로 이제 천국을 매혹적으로 보게 하고, 또 은혜를 놀라운 것으로 인식시키게 하려는 우리의 시도가 극도로 한심스럽게 보이게까지 되었다. 우리는 에드워즈와 같이 우리의 청중들에게 실재에 필적할 만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이미지와 유비를 발견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유비와 이미지들을 찾게 된 것은 천국과 지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설교를 설명하기 위해 수술칼을 든 외과의사의 유비를 사용했다. 그는 사람이 회심할 때 새로운 감정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자들과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과 짐승이 뱃속에 있는 태아의 시절에는 차이 없이 비슷하다는 유비를 사용했다. 또 불순한 가운데 계속 머무르면서 순수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발효하는 액체의 통에서 침전물을 걷어내려는 노력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거룩성을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하나님의 정원으로 보았다. 그의 설교는 이해를 위한 빛을 던져주고 또 감정을 위한 열을 자아내는 이미지와 유비로 가득했다.

위협과 경고를 사용하라
에드워즈는 지옥을 알았다. 그러나 천국은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독일의 뮌헨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나의 아내 노엘과 함께 의자에 앉아 에드워즈의 설교를 같이 읽던 그 겨울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입니다'라는 설교였다. 얼마나 황홀한 비전이었던지! 만약 오늘의 회중들이 우리 설교자들로부터 그와 같은 영광의 묘사와 에드워즈가 했던 것 같은 하나님 묘사를 듣게 된다면 교회에서 새로운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천국을 향하여 가장 큰 기대를 가진 사람은 바로 지옥의 두려움을 향하여 가장 깊이 몸서리치는 사람이다. 에드워즈는 지옥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교리는 사실 두렵고 무시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리를 만든 이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기에 거친 말투로 위협하시는 예수님을 존경하였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불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에드워즈는 예수님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인 문제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었다. 지옥은 회개치 아니한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그들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그러신 것처럼 위협하여 경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에 대한 설교에서는 위협과 경고의 사용이 드물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위협과 경고는 죄의식과 두려움을 낳는데 그것은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또 성도들은 이미 안전하고 따라서 경고 받고 위협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설교는 신학적으로도 부적절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둘을 거절한다. 두려움과 죄의식이 실재적인 상태와 상응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꺼이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성경의 경고에 주의하여 경건하게 인내할 때에 한해서 안전한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교회의 사랑이 식을 때 … 두려움을 일으키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고 말했다. “교회는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이 필요하다. 또 그들의 영혼의 유익을 돌보기 위하여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 정연한 분이시기에 사랑이 일어나면 … 두려움은 사라진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래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미래의 형벌은 순종을 위한 동기로써 사악한 사람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까지 모든 종류의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거룩한 사랑과 소망을 통하여 마음을 유순하게 하고 그 속에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는 것이 지옥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을 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한다. 지옥에 대한 설교는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위협하여서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국은 단순히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결함을 사모하는 이들의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여서 천국에 가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서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놀라게 하여서라도 불타는 집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좋은 설교는 성도인 회중들에게 성경적인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일 것이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라고 했고, 또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고 했다. 베드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경고는 천국의 화려한 약속과 묘사를 풍부한 색깔로 나타내는 것과 함께 훌륭한 설교를 도울 수 있는 엄숙한 어조로 되어있다. 한 예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가올 시대에 하나님께서 베푸실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반응을 촉구하라
에드워즈와 같은 칼빈주의자가 사람들에게 지옥으로부터 벗어나서 천국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촉구할 수 있을까?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 선택, 그리고 불가항력적 은혜는 이러한 촉구를 모순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가?
에드워즈는 성경으로부터 칼빈주의를 배웠고, 그래서 그의 시대에 다른 설교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는 무조건적 선택이나 불가항력적 은혜, 초자연적 중생, 자연적 인간의 무능성 등의 교리에서부터 촉구의 사용이 부적절한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그는 말한다. “죄인들은 … 구주께로 와서 그를 영접하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구주께 드리도록, 복음이 허락하는 모든 결정적이고 고무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열렬히 초청되어져야 한다."
나는 개혁 전통에 속한 한 설교자가 고린도전서 16장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몇 해 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설교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22절)라는 무서운 위협으로 끝을 맺었다. 그는 지나가는 중에 이 말을 했고, 끔찍한 저주를 피하라는 갈망이나 촉구는 없었지만 그 설교는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여서 끔찍한 저주를 피하려는 마음이 생기도록 했다. 나는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이미 성령에 의해 살아났고, 이끌림을 받는다는 증거를 가진 사람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는 권리만을 설교자에게 주셨을 뿐이라고 말하는 과도한 칼빈주의 전통이 있다. 여기에서 알려주기만 하고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설교 경향이 생겨났다. 후에 찰스 스펄전이 그랬던 것처럼 에드워즈는 이것이 진정한 칼빈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며 개혁 전통에 있어서도 무가치한 것이었다.
사실, 에드워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관장, 또 그가 인류를 자신의 도덕적 대행자로 취급하시는 것, 그리고 인류를 그의 명령, 권고, 부르심, 경고, 설득, 약속, 위협, 보상과 형벌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이 모든 사건과 모든 종류에 대한 그리고 온 우주에 걸친 그의 결정적인 지배권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지의 자유'를 썼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청중들에게 우리의 설교에 반응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면에서 볼 때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설교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청중들에게 반응을 열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의 설명을 보자.

우리는 수동적이기만 한 것도, 또 하나님이 어떤 부분을 행하시고 나머지를 우리가 행하는 것도 아니다. 전부 하나님이 하시고, 또 전부를 우리가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한다. 그가 산출하시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권능자이시며 근원이시다. 우리만이 적절한 행위자들이다. 다른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또 전적으로 능동적이다.
성경을 보면 같은 일이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또 인간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회개시키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딤후 2:25),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킨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행 2:38). 하나님이 새 마음을 만드시고(겔 36:26), 또 우리도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받는다(겔 18:31). 하나님이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는데(신 30:6), 또 우리도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받는다(신 10:16). …이러한 것들은 성경 내에서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그래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촉구했다. “이제, 여러분이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성의가 있다면, 그리고 지옥 갈 마음이 없다면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 지난날에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마십시오." 거의 모든 에드워즈의 설교는 ‘적용’이라고 불리우는 긴 부분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의 교리를 함축해서 말하고, 반응을 요구한다. 그는 오늘날 “제단에의 초청"이라고 알려진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초청"하고 설득하고 하나님께 요구하라고 촉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의 사랑이 담긴 위협을 양보하지 않는 설교, 성도들에게 비교할 바 없는 은총의 약속들을 아낌없이 주는 설교,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듣지 말라는 열정적이고 애정 어린 촉구의 설교에 대각성의 능력을 부여하기를 기뻐하셨던 것 같다. 사실만을 말하고는 앉아버리는 설교자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좋은 설교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를 촉구한다.

마음의 작용을 탐구하라
훌륭한 설교는 외과 수술과 같다.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서 죄의 병원균을 찾아내고, 절개하여 제거한다. 초기 에드워즈의 전기를 쓴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세레노 드와이트는 그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과 그 수술에 대한 그의 지식은 영감 받지 못한 다른 어떤 설교자와도 좀처럼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환자로서 에드워즈의 수술 테이블에 누워본 나의 경험도 이 판단을 뒷받침한다.
에드워즈가 인간 영혼에 관한 이런 깊이 있는 지식들을 노샘프턴의 교구목사들과 어울리는 가운데서 얻은 것은 아니다. 드와이트는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도 세속으로부터 물러나서 독서하고 명상하는 일을 더 지속적으로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내적 성찰을 즐기는 전형적 청교도적 기질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19살 때인 1723년의 7월 23일의 일기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왜 그 일을 하지 않는가 하는데 대한 모든 실제적인 이유를 찾고 추적하는 것을 나 자신의 과제로 삼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좁게는 내 생각 속의 미묘한 구실들을 찾아보겠다." 일 주일후의 일기에서는 “나는 내 마음이 대단히 기만적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 욕망이 마음을 눈멀게 하고, 완전히 굴복하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 마음에 대한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그 자신의 마음과의 친교에서 왔다”고 한 드와이트의 판단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에드워즈가 마음의 작용에 대해 그처럼 깊이 있는 통찰을 가질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대각성운동 기간 중 그의 청중들의 강렬한 종교적 경험의 옥석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원래는 1742년과 1743년에 행했던 설교였던 ‘종교적 감정에 관한 협약’은 종교에서의 자기기만에 대한 무서운 폭로였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의 근원에 대해서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청중들의 종교경험에 대한 이런 종류의 지속적이고 주의 깊은 시험은 에드워즈에게 마음의 작용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주었다.
인간 마음에 대한 에드워즈의 지식의 세 번째 원인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비상한 통찰력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종교적인 경험이 아주 강렬하여서 그들이 눈이라도 때어서 바울에게 줄 수 있을 정도였다는 데에 주목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같은 장의 11절에서 바울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는 데에도 주목하였다. 명민하게도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의 높이와 강렬성이(눈이라도 기꺼이 뽑아줄 정도) 진정한 것이라는 확실한 표시는 아니라는 것을(바울의 수고가 헛된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추론해낸다. 해를 거듭하면서 계속된 이 연구는 영혼의 깊은 수술에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일을 들추어내는 설교를 가능케 했다. 그 설교는 또 다시 교회의 대 각성을 선도하게 된다.
에드워즈는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이 “경험적 종교에 익숙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영의 내적인 작용이나 사탄의 책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발가벗겨져 있는 것 같은 깊은 경험을 갖는다. 내 마음의 비밀은 드러나며, 내 마음의 기만적인 작용이 드러난다. 새로운 감정의 잠재적인 아름다움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설교를 읽는 가운데 그 감정들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에드워즈는 다시 설교자를 외과의사에 비교한다. “각성중인 사람들에게 목사가 진리를 선언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당장의 위안을 제공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목사를 비난하는 것은 절단을 막 시작해서 이미 환자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한 외과 의사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 그의 손은 멈추려하지 않고, 상처의 핵심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하여 절단해나간다. 환자가 고통으로 움찔하는 것을 보자마자 손을 거둘 정도의 동정심이 많은 의사라면 … 백성의 병을 심상히 고치고,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롭다! 평화롭다!"라고 외치는 선지자일 것이다. 외과의사와 수술칼의 이러한 유비는 사실 에드워즈 자신의 설교에 알맞는 것이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서 발가벗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단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암이 낫는 기쁨을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는 훌륭한 외과의사와도 같이 인간의 마음 작용을 탐구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성령께 복종하라
1735년에 에드워즈는 “지극히 높으시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를 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은 자비를 주시는 것보다 기도가 앞서도록 하는 구성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마치 자신이 기도에 압도당하신 것처럼 기도의 결과로서 자비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라고 했다. 설교의 목적은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기도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향 하에 자신의 설교를 위치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성령은 이러한 방법으로 설교자를 도우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령이 순간순간 무슨 말을 하라는 것까지 제안하면서 설교자를 돕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성령이 하는 일의 전부라면 설교자는 마귀가 될 수도 있고 또 마귀의 일을 할 수도 있다. 아니다. 성령은 가슴을 거룩한 감정으로 채우고 가슴은 입을 채운다. “어떤 사람이 은밀히 기도할 때 거룩하고 생동적인 기분이 된다면 그릿은 설교의 주제와 표현에 있어서 멋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기 시대의 젊은 목사들에게 충고한다. “켜서 비취는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여야 하고, 그리스도와 가까이 교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비췸을 받고 또 불붙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빛과 사랑의 근원이신 그 분과 대화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사역의 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해마다 나의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 사용했다. 종종 숲이나 한적한 곳을 홀로 산책하면서 묵상하고, 독백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이럴 때 언제나 나의 숙고한 바를 노래로 부르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다. 어디에서든지 대체로 나의 기도는 절규하는 듯한 기도였다. 내 가슴속의 내적인 불길이 고개를 내미는 호흡으로서의 기도는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기도 이외에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로부터 번져온, 좀 더 광범위한 그 시대의 기도 운동에도 헌신했다. 그는 “종교의 부흥과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진보를 위한 특별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백한 일치와 가시적인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한 작은 시도”라는 기술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을 썼다. 설교자의 은밀한 기도와 회중들 사이에서의 기도 합주회는 하나님의 자비가 내려와 성령으로 그리고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공모했다.
좋은 설교는 훌륭한 기도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기도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영향하에서 전달되어질 때,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신 그 능력과 함께 나아가는 설교가 될 것이다.

상한 심령과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라
좋은 설교는 상한 심령과 부드러운 성품으로부터 온다. 그의 권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매혹적이셨는데, 그것은 그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며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로 찾아와서 쉴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이었다."(마 11:28-29) “그가 무리를 보셨을 때, 그들을 향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마 9:36). 성령 충만한 설교자에게는 모든 약속을 달게 만들고 모든 경고와 꾸짖음도 부드럽게 만드는 부드러운 감정이 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
강단에서의 에드워드의 힘의 비결 중에 하나는 가장 무거운 문제들도 감당할 수 있었던 “상한 심령의" 부드러움이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행동의 향기를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아낼 수 있다. “모든 은혜로운 감정은 상한 심령의 감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은 겸손한 상한 심령의 사랑이다. 성도의 욕망은 아무리 열렬한 것이라도 겸손한 욕망이어야 한다. 그들의 소망은 겸손한 소망이며 그들의 기쁨이 말할 수 없는 정도이며 영광으로 가득찬 것일지라도 역시 겸손하고 상한 심령의 기쁨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심령이 가난한 자로, 더욱 어린애같이, 그리고 더욱 기꺼이 보편적인 외로운 행동을 할 마음이 있는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다."
강단에서의 진정한 영적인 힘은 큰 목소리에 비례하지 않는다. 시끄러운 목소리에 의해서 굳은 마음이 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에드워즈는 “은혜로운 감정은 사람을 무뚝뚝하게, 뻔뻔스럽게, 시끄럽게, 떠들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면서 이야기하게 만든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배웠다. 하나님의 축복의 눈은 온유하고 떠는 자 위에 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그래서 에드워즈는 목사들은 조용하고, 양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법을 용서하는 같은 성품, 강렬한 사랑과 많은 사람에 대해 자비로운 사랑의 같은 성품, 가련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재난당한 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궁핍한 자들의 요구를 관대하게 들어주며 고난받는 사람을 구해주는 같은 성품,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약한 자들에 대하여 부드럽고 친절하며, 원수들도 크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사랑하는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청중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기를 바라는 성품을 우리 안에서 먼저 이루어야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허함, 대책없음, 그리고 심각한 죄성을 알기 전에는 그 성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죄로 인한 비하와 구세주로 인한 기쁨 사이의 일종의 나선형 진동 속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이 마을에 산 이후로 종종, 나는 나 자신의 죄성과 사악성에 대해 매우 유효한 견해를 갖고 있게 되었다. 아주 빈번히 소리 내어 울고 싶을 정도였고, 때로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랬다. 그래서 나는 때로 나 자신을 닫아버리기도 했었다." 이런 종류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데 가져다 준 열심의 정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오로지 죄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절망의 벼랑에 서게 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목적하는 바도 아니었고, 그의 경험도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며, 심령이 가난하게 되며, 자신을 비우고 겸손히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또 그로부터 자라나기 위하여 나 자신의 뿌리로부터 난 것을 완전히 자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설교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최고가 되는 길이며, 이는 바로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이 최고이심과 연결이 된다.
분명히 에드워즈가 가진 강렬함은 거칠고 시끄럽고 호전적인 적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능력은 수사학적 화려함, 또는 귀를 울리는 듯한 천둥소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한 심령의 감정에서 나왔다.
에드워즈는 토마스 왕자에 의해 “낮고 온화한 목소리의 설교자,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설교자이다. 그리고 몸의 어떠한 동요나 주의를 끌기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이다. 그는 자신의 습관적이고 위대한 엄숙성만을 제외하면 하나님 면전에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묘사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최고로 삼는 설교는 상한 심령과 부드러운 성품으로부터 온다'고 하는 진리에 대한 보기 드문 증거로서 서 있다.

강렬하게 하라
강력한 설교는 무언가 대단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 그리고 삶에 있어서 거룩한 감정과 경건으로 인내할 필요성에 관한 에드워즈의 견해에 의하면 영원성이 매 주일의 문제이다. 이것이 그를 오늘 평범한 설교자들과 다르게 만드는 점이다. 지옥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인 거부, 회심에 대한 애매한 태도, 우리가 제공하는 풍성한 거짓 안전은 이제 설교에서 성경으로 크게 집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에드워즈는 그가 선포하는 진리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또 그의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할 실재를 간절히 열망했기 때문에, 조지 휫필드가 에드워즈의 강단에서 이 실재에 관하여 힘 있게 설교했을 때, 에드워즈는 예배 시간 내내 울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대하여 냉담하거나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한 또는 경솔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집이 불에 타 자신의 아이들 위에 무너지는 것에 대하여 냉정하게 토론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설교에 있어서 강렬함의 결여는 설교자가 믿지 않고 있거나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여 한번도 강하게 붙잡혀본 바 없다는 것으로, 아니면 그 주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에드워즈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가 선포해야 하는 진리의 비중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당 시대인 중의 한 명이 에드워즈의 웅변은 “논지의 압도적인 무게와 감정의 강렬함으로 중요한 진리를 청중들 앞에 보여주는 힘이었다. 말하는 이의 온 영혼이 개념과 전달의 모든 부분에 쏟아부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 회중의 엄숙한 주의가 못박은 듯이 고정되고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인상이 남는 것이었다"고 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1845년에 존 길리에스의「부흥운동 기사들의 역사적 수집」라는 책의 서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세기를 통하여서 그의 교회를 각성시키는데 즐겨 사용하셨던 설교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또 영혼들을 모으고 지키는 일을 목자장으로부터 부여받은 목자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술에 수천의 생명이 달려있는 것처럼 살고, 일하고 그리고 설교했다. 그들이 행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모두 열심의 도장을 팔 정도였고, 그들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냄받았다고 문제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들의 설교는 대개가 남성적이고 겁없는 것이었고, 청중들에게 엄청난 힘으로 와 닿는 것이었다. 그것은 열정적이지 않았고, 맹렬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이러한 것들로서는 너무 엄숙했다. 그것은 육중했고, 무거웠고, 예리했고, 통찰력 있는 것이었고, 양날의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꼭 250년 전에 그러했다. 교훈과 모범으로서의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종교의 위대한 점에 대한 감정적인 설교 방식'을 요구하고 또 ‘미지근하고 지루하고 무관심하게 말하는 것'에서부터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멜로 드라마적인 과장이나 허세 없이 우리의 메시지 뒤에 있는 실재들을 깜짝 놀랄만하게 나타내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그와 공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의 설교의 위대성에 근접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안에서 에드워즈의 비전에 맞도록 우리 눈을 여신다면, 또 우리가 에드워즈가 맛본 것과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맛볼 수 있도록 허락된다면, 우리 시대에 강단의 갱신이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존 파이퍼/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 | 199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