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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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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사역 - 헤럴드 B. 사이틀러
lhyunsik

눈물의 사역 - 헤럴드 B. 사이틀러 ▲ 헤럴드 B. 사이틀러 요한계시록에는 복된 약속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계 21:4)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눈물어린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행할 때 우리의 마음은 상해왔고, 지금도 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혼은 “왜!”라고 외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울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때로 우리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깊이 상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눈물 뒤에 감추어진 원인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는 분명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의 눈물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1. 눈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어떤 사람들은 눈물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눈물이 개인적인 죄의 결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개인적인 죄를 짓지 않고서도 눈물을 흘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는 바로 욥입니다. 욥기 1장은 욥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는 의롭고 정직하고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악을 경멸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아는 한 최선을 다해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 욥만큼 마음이 상했던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욥의 인생을 강타했던 재앙 때문에 욥이 죄를 지었다고 감히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히스키야가 있습니다. 『그 무렵에 히스키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즈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주가 말하노니, 네 집을 치우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러자 히스키야가 자기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주께 기도하여 말하기를 “오 주여, 내가 간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리 안에서와 온전한 마음으로 어떻게 행하였으며, 또 주의 목전에서 어떻게 선한 일을 행하였는지 이제 기억하소서.”하고 히스키야가 통곡하더라』(사 38:1-3).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고난 당하고 통곡하는 예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죄를 지었다고는 감히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세 가지를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주 앞에서 진리 안에서 행했습니다. 내가 주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습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 선한 일을 행했습니다.” 히스키야가 주장한 이 세 가지를 하나님께서 부인하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진실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절에 나타난 기록을 보십시오. 『히스키야가 통곡하더라.』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 그 어떤 장에서도 여기처럼 많은 눈물을 기록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말씀하시기를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고 하시자 그들이 “주여, 와서 보소서.”라고 말씀드리니 예수께서 우시더라. 그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주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라!”고 하더라』(요 11:33-36). 이 네 구절은 주님 자신뿐만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다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를 포함해서 이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지은 죄 때문에 운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와는 무관하게 눈물을 흘리는 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는 눈물을 낳습니다. 죄는 항상 개인적으로 고난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며, 어떤 고난과 눈물은 죄와는 상관없는 이유로 인해 생긴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눈물을 흘리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라는 주장은 오늘날 소위 말하는 수많은 “치유자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메시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병들도록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방금 성경에 나오는 세 가지 눈물과 고난의 예를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이 중 단 하나라도 죄나 다른 신실치 못함의 결과로 생긴 고난과 눈물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경우 모두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결론이 합리적으로 도출됩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과 구원은 성도의 삶을 순탄하게 만들어 준다.”라는 것도 대단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경험에 대한 해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헐리우드식 복음”이 대중을 속여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편안한 꽃방석에 앉아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고, 우리의 경험으로 봐도 사실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기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이 기쁨과 더불어 가슴 아픈 일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결코 이 세상에 순응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세상에 정착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2:49-53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가지고 있는 안일한 삶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으나 만일 이미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그러나 나에게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답답함을 어찌 견디어 내리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라, 오히려 분쟁케 하러 왔노라. 이제부터는 한 집에 다섯이 있으면 갈라져서 셋은 둘에 대적하고 둘은 셋에 대적하리라. 아버지는 아들과 대적하고,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과, 딸은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대적하여 갈라지리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순탄한 삶만을 추구하는 죄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없다.”는 것 또한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시지만, 그분께서는 또한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잠시 바울을 보도록 합시다. 고린도후서 12:7-1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위대한 계시들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에 한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내게 주셨으니 그가 나를 쳐서 자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를 위하여 세 번이나 그것을 내게서 제거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였는데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를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매우 기쁘게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거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진리를 계시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개인에게 연약함과 시련이 없다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결코 온전하게 드러날 수 없습니다.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고개를 들어올리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다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2. 눈물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면, 눈물 너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현명한 사람은 “인생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은 비극이나 병이나 절망을 맞이하고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럴 때의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합니까?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원망해야겠습니까? 눈물과 낙담과 비극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우리가 간과해야 합니까? 인생은 물론 아름답고 고무적이고 훌륭합니다. 폭풍이 사그러들 때 그 주위를 에워싸는 무지개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뛰어넘는 용기와 기상을 보여 준 것으로 인해 대통령이 달아 준 훈장과 함께 전투에서 귀가하는 아들을 보는 것보다 부모의 마음을 자랑스럽게 하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선하며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생은 항상 햇빛 찬란하고 장미빛으로 물든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에는 먹구름도 있고 가시덤불도 있으며 불쾌한 상황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모든 빛이 꺼지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비애와 실망과 낙담으로 가득 차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때가 옵니다. 건강하던 자녀가 소아마비로 쓰러져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 놀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겠습니까? 술취한 운전자가 자신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아들을 차에 치어 죽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건강하게 살다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청년에게 의사가 “암”이라고 선언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일생 동안 힘들게 모은 저축을 사업실패로 잃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눈이 멀어서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볼 수도 없고,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암흑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밖에도 다른 셀 수도 없이 많은 비극들이 고난과 눈물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고난을 경험하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눈물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눈물 젖은 얼굴로 그 이유를 묻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전체 그림을 볼 수도 없고 그래서 온전한 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의아해하고 당황스러워하며, 낙담하려는 유혹을 받으며 패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비애를 겪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잘못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죄들로 인해 생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전혀 책임이 없는데도 재앙이 닥친 것은 어떻습니까? 가능한 해답은 세 가지뿐입니다. 첫째, 비극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특별히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악하며 우리는 그 악한 세상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탄이 비극을 야기시킵니다. 우리는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야기시키거나 아니면 최소한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비극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정의도 없고, 영원도 없다면, 우리는 짐승들이고 짐승들처럼 죽을 것이고, 실제로 비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극은 지상에 살면서 곧 다시 땅으로 돌아갈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가진 존재에게 닥치는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고난과 악의 문제를 하나님을 제외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선을 폐기시키고, 더 높은 가치들을 비난하고, 불멸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매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셈이 됩니다. 즉 모든 비극 역시 스쳐지나가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곧 끝나게 될 사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눈물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올바르거나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비극을 대하는 또 다른 태도가 있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고뇌를 겪는다. 나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한다. 단지 그 문제의 한 부분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전체를 볼 수 있기만 한다면 그 목적을 알 것이다. 비록 나의 판단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삶에는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선언한 그대로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믿고 신뢰할 수 있다.”라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후 4:17,18). “눈물 너머”에 대한 지고한 태도는 바울이 로마서 8:28에서 쓰고 있는 축복된 구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이 여러분을 더 훌륭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더 비통하게 만듭니까? 더 풍요롭게 해 줍니까,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합니까? 더 강하게 해 줍니까, 아니면 더 약하게 합니까? 더 높은 어떤 것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디딤돌입니까, 아니면 더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걸림돌입니까? 고난과 눈물과 비극 저 너머에서 여러분은 회의주의자나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비난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확고부동한 성도가 됩니까?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이 “눈물 저 너머”에서 도움과 위안과 만족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당하는 비극이 상처를 입히고 고통스럽다 해도, 고통과 눈물이 비애를 낳는다 해도, 의심을 던져버리고 회의적 태도와 냉소적 태도를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완벽하고 아름답게 처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카나다의 위대한 의의 전파자인 오스왈드 스미스 박사는 남미에 선교사로 나간 여동생에게 끔찍한 비극이 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생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그들의 모든 희망과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미스 박사는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비애를 이해하신다 그분은 흐르는 눈물을 보신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고 속삭이신다. 그렇다면 움추러들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쓰라린 고통을 아신다. 어둠 가운데서 그분을 신뢰하기 바란다. 너의 신뢰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눈물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울도록 허락하시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새들과 동물들은 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울도록 허락하십니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눈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난받는 성도가 이 진리를 배운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는 신학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경험의 골짜기에서만 획득됩니다. 나는 수년 간 목사로서 가족을 잃은 지체들을 동정하고자 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들 각자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동정을 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을 그 끔찍한 슬픔 속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말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신의 마음이 으깨지고 내 자신의 가정이 파괴될 때까지는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자신의 가정에 죽음이 찾아오고 내게 소중했던 존재가 죽게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이 동정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온 세상에 흩으셔서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 시련을 받게하셨고 이들의 슬픔의 골짜기를 밟았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희망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통해 이들은 성숙할 수 있었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준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로하기 위해 성별된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입을 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상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손을 꼭 쥐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말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눈물을 허락하심으로 여러분이 동작의 직무에 합당하도록 성별하신다면 그런 훌륭한 특권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고통을 인내한 그리스도인은 차원 높은 “동정의 직무”를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러한 직무를 숭고하고도 훌륭하게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씩 시련과 슬픔의 골짜기로 들어갈 때 그들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을 주께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높은 계획 속으로 여행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제자들의 핵심 부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선택된 그릇이며, 그 뒤를 따라 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트는 선각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차원 높은 동정의 직무로 성별된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하는 상태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신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연인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이 처한 어려운 처지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골짜기나 시련의 경험이 우리로 “그분을 의뢰하도록” 가르친다면 시련은 오히려 축복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합니다. 시편 18:1-6에서 시편 기자가 온전하게 주를 의지하는 것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 나의 힘이신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며 나의 구원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며 나의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니이다. 내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를 부르리니, 그리하여 내가 내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라. 죽음의 슬픔이 나를 에워싸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홍수가 나를 무섭게 하였도다. 지옥의 슬픔이 나를 에워쌌으며 죽음의 덫이 나를 막았도다.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고 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으며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앞에 이르러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그렇게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눈물과 고통만이 우리로 주님을 이렇듯 전적으로 신뢰하게 해 줍니다.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해 줍니다. 롯의 비극은 이 세상에 매력을 느끼면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 세상의 것들에 깊이 연루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흙에서 나온 피조물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실 주님을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두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보물을 위에 쌓아 두고, 위에서 나온 것들을 구하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고정시키고 순례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만드신 한 도성을 기대하며,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세상을 사랑하지도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들은 하늘나라와 영원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것에 대한 완벽한 본보기는 다윗일 것입니다. 그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한순간 그는 하나님을 잊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은 듯했습니다. 그는 이 커다란 유혹에 굴복함으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불법적인 관계에서 생긴 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치유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죽음 앞에서 다윗은 깊은 비애에 빠집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대할 때, 다윗의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갈갈이 찢깁니다. 그는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다윗은 더 이상 죄짓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경험하며 다윗은 그 아이를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니다. 눈물은 우리로 하늘나라 본향을 갈망하는 향수병에 걸리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여행할 때 생에 대한 만족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생에 만족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눈물이나 비통함이나 실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여기에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눈물로 인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바라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하늘나라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고통도 아픔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빈곤으로 인해 하늘나라의 부요함이 더욱더 소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낙담으로 인해 우리는 낙원의 축복을 더욱더 갈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하늘나라의 휴식을 더욱 거룩한 기대감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 여행의 슬픔은 하늘나라의 할렐루야를 더욱 축복되게 해 줍니다. 이생의 외로움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더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더욱 하늘나라 본향을 갈망하는 향수병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건너가고 곧 여기보다는 바다 저 너머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이런 이별이 계속됨에 따라 우리는 더욱 이 세상을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우리를 앞질러 하늘나라의 해변으로 먼저 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울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삶에 힘든 고난들이 있다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와 비애와 눈물은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공통된 것입니다. 죄인과 성도가 똑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죄인과 성도가 똑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죄인과 성도의 가정 모두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죽음은 죄인과 성도 모두에게 쏘는 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물과 고난과 슬픔이 죄인과 성도 모두가 겪는 공통된 몫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슬퍼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축복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바울이 한 말에 귀를 귀울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시련이 올 때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과 슬픔을 겪는 과정을 통해서 그분의 은혜가 드러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죽음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건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건강을 잃고 수술대를 직면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에게는 죽어가는 은혜, 위로하는 은혜, 이해하는 은혜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시련이 오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만한 은혜를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