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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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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십자가(빌 3:10-19)
lhyunsik

또 하나의 십자가(빌 3:10-19) 일산갈보리 침례교회 주일 설교 또 하나의 십자가 본문 : 빌립보서 3:10-19 우리는 이번 주까지 10주에 걸쳐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의 중심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이것은 복음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우리를 두시어 그분의 죽음에 우리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한 십자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고 죽으실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이천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을 때 이것은 우리에게 또한 실재가 됩니다. 성경의 믿음은 진리 즉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믿을만한 절대적인 진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판단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도 우리를 위함이며, 예수님의 다시사심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축복된 소식, 즉 복음입니다. 다같이 로마서 4:25을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넘겨지셨으며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다시 일으켜졌느니라.” 우리가 알고 믿는 바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간 첫 번째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고전 15:23). 다같이 로마서 6:8,9을 읽겠습니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았으므로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할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과 부활로 나아가는 축복된 입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생명,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성령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사형선고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축복된 진리를 알고 믿는 자들만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8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시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최고의 능력이며 최대의 지혜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한 예수님이나 갈릴리의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가장 완전하고 능력 있고 지혜로운 일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과 겸손과 순종을 가장 놀랍게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최고의 자랑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예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은혜요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작인 구원과 거듭남이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 내내 은혜와 믿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은혜와 믿음에서 떠나 행위와 율법 아래 종노릇하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종노릇하면 그는 살아계신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겉의 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생애입니다. 로마서 8장 14,15을 봅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이는 너희가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힘입어, 아바, 아버지, 라 부르짖느니라.” 질그릇을 깨뜨리는 십자가의 능력만이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의 역사를 자유롭고 활력 있게 합니다. 십자가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오직 우리의 구원과 생명과 축복과 은혜가 주 예수님이 이룩하신 일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주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그 모든 은혜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일 즉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육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내가 잘했든 내가 못했든 모든 일들이 의미가 없으며,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믿음은 “내가 할 것이다”(I will do it)라고 말하는 대신 “주 예수님께서 하셨다”(Jesus did it)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을 못하고 실패하는 육신도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일을 잘하고 성공하는 육신도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나의 잘하고 못하는 행동에 나의 인생이 달려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불안하고 안정이 없으며 피곤하고 지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 축복되고 능력 있는 분에게 내 인생에 달려있다면 나는 언제나 안심하고 평안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항상 우리의 육체와 자아가 완전하게 죽었고 철저하게 장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할 때마다 항상 첫 번째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가 짊어지는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에 대한 수많은 설교와 말씀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이 두개의 십자가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십자가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아무도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이미 2천년 전에 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들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일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이 홀로 행하신 일이며, 우리가 여기에 더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이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유일하며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매일 짊어져야 할 우리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을 하나의 장거리경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빌 3: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이 믿음의 경주는 분명히 출발점과 결승점이 있는 경주입니다. 누구든지 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경주에서 푯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푯대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달려야 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방향 없이 달리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코스대로 달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잘 달릴지라도 실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13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9,10장에서는 믿음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을,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믿음의 경주를 말씀하더니 여기 13장에서는 그 방향과 푯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 우리가 오늘 달려야 할 푯대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달려야 할 방향은 동일한 한 방향 즉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신 진영 밖, 성문 밖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에수님이 계신 진영 밖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그분의 치욕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만이 주 예수님의 치욕을 함께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주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지셨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체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가 질 수 없는 오직 유일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져야 하는 또 다른 십자가는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겪는 고난과 환경,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진리는 간단하게 두 가지 주제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오늘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체와 자아를 끝장내는 사형도구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이미 주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매일 날마다 자원하여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영 밖에 계신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다른 용어로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시겠습니다. 28-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과 여러 가지 힘든 환경들을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환경이나 고난이 모두 다 십자가가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유명한 말씀은 십자가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두 가지를 해야만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첫째 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주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은 채 배우려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고서는 주 예수님께 배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따르기 때문에 자원하여 택한 고난과 환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천연적으로 지고 있던 인생의 고난과 염려와 어려움들을 내려놓고 주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멍에는 동물의 머리나 목에 얹어짐을 끌도록 하는 나무틀을 의미하는 것인데, 두 짐승을 함께 멍에를 씌울 때는 평형을 이루어 두 동물이 같은 힘으로 쟁기를 끌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주 예수님과 함께 지는 것이기 때문에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푯대를 향해 달리는 바울을 본보기로 삼아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의 푯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0,11절을 참고해야 합니다. 바울이 참여하고자 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만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고난에도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 모두에 참여하기 위해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죽음에 이미 동참했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므로 다만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사실이며, 우리가 주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실재 가운데 일어나는 매일의 사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 중에는 빌립보 성도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눈물어린 권면을 단지 불신자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그것도 눈물로 권면하였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행하지 않고 그 반대 방향 즉, 진영 밖으로 가려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성문 안쪽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성령이 아닌 육신을 따르고 육신을 자랑하는 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19절 한 절에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9) 특히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라는 말씀과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는 말씀은 십자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무리, 군중이라고 말하며, 결코 제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과 육신의 만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위해 예수님을 따랐고 빵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을 하다가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언제든지 예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9:23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편하고 간단한 말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간단하고 명백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빵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다가 실망하여 떠날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그들은 빵이나 육신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로 인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부자관원이 어리석게 많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돌아갔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마 19:27). 우리가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는 십자가는 오히려 우리의 축복입니다. 다같이 디모데후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딤후 2:11,12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이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임이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으므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육신이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즉시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느니라. 두 번째 “고난을 당하면”은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시인하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님과 함께 지는 이 멍에가 우리의 축복임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함으로 주 예수님의 영광과 통치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들은 육신적인 생각과 아주 관련이 깊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한다고 말씀했습니다(롬 8:5). 육신의 일, 땅의 일과 반대되는 것은 하늘의 일, 성령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땅에 살지만 땅에 속한 우리의 지체를 십자가에 넘기는 것은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올려진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늘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하늘로부터 출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으로는 아직 한번도 하늘에 가본 적이 없지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의 백성이 되었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본향인 하늘을 향해 마음을 갖는 것은 마치 연어가 자기가 알에서 태어난 시냇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새 생명의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지는 또 하나의 십자가는 우리를 이 땅에 뿌리박고 살지 않고 우리의 본성을 일깨워 하늘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 나타는 주요한 몇 구절을 읽으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히 11:13-16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같이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기 때문이라..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친히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