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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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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위기(The Crisis of Christianity)
lhyunsik

기독교 위기 - 이준승 목양자 기독교 위기(The Crisis of Christianity) <목 차> I. 기독교 위기의 본질적 원인(The Essential Roots of the Crisis of Christianity) 가. 성경 권위의 실추(The Downgrade of the Authority of the Authority of the Bible) 나. 돈을 사랑함(The Love of Money) 다. 세속화: 세상에 동화됨(Being Conformed to This World: Worldliness) II. 세속화와 배교를 가속화시킨 요인들(Factors That Have Accelerated the Crisis) 가. 실용주의(Pragmatism) 나. 다원주의(Pluralism) 1.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 2. 타종교와의 대화와 연합(Inter-Religious Dialogue) III. 끝맺는 말(Conclusion) ========================================================= I. 기독교 위기의 본질적 원인들 (The Essential Roots of the Crisis of Christianity) 이 논단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론되어져야 하고, 다루어져야 할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표출된 교회 세습, 교파주의, 은사주의, 다원주의 등 몇몇 부정적인 현상만을 보고서 ‘기독교의 위기’를 운운하지만, 저는 ‘기독교의 위기’라는 골리앗을 낳게 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원인들을 먼저 파악해야 하며, 그 후에 그 본질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먹고 자라나 기독교를 공격하고 병들게 하는 골리앗들을 성령의 검, 곧 말씀에 입각하여 다루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 성경 권위의 실추 (The Downgrade of the Authority of the Authority of the Bible)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 19:7).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 4:2). 오늘날 성경은 더 이상 신자들의 믿음과 생활을 위한 유일한 권위(the Sole Authority)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다른 부수적인 권위들이 그 권위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할 교회(딤전 3:15)의 강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유일한 권위에 두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입장에서 떠나 추측과 억측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 말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거의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성경 강연은 성경의 위대한 원리들을 선포하고 가르치기보다는 윤리적인 대강연이나 훈계, 도덕 정신을 함양하거나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로 전락함으로 그 말씀의 능력이 상실하게 된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건전한 교리의 가르침에는 흥미를 잃고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상황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스캔들, 부조리, 정치, 경제, 사회 상황 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따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는(딤후 4:2하) 하나님의 대변자적인 말씀 선포자(설교자, preacher)보다는 웅변과 쇼맨쉽에 뛰어난 설교꾼(pupiteer)이 강단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교회와 신자들까지도 설교자보다는 그런 설교꾼들을 더 선호하고 추앙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문화적 흐름과 새로운 방법론을 선호하는 대중들의 추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 선포는 외면당하거나 배척당하고 오히려 드라마나 음악이나 댄스나 레크리에이션이나 촌극이나 발표회 같은 내용으로 예배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사역 철학은 죄와 방종을 지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도록 도전하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활방식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의 죄와 안락함과 방종 가운데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종교 생활을 허용하고 보장해 줌으로 사람들도 이를 환영하고 그런 교회를 향해 떼 지어 몰려갑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설교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여 만족을 주지 못하고 사람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하므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유쾌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교회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추세(趨勢)는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 4:3-4). 로마서 1:16에서는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한 것”(고전 2:4)이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감의 상실은 표류하고 타협하는 교회, 세속적이거나 무능력한 신자들을 양산할 뿐입니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들 가운데 거하라. 이는 네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 말들을 듣는 자들을 구원할 것임이라”(딤전 4:16). 나. 돈을 사랑함(The Love of Money)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 6:10). 하나님의 말씀은 단언적으로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선언합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부패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사상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致富)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에 대해 폭로하시면서 그들의 탐욕에 대해서도 지적하셨습니다. 탐욕 때문에 멸망한 사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간(수 7장), 발람(민 22-24), 게하시(왕하 5), 유다(마 27:5, 행 1:18-19),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마술사 시몬(행 8:9-24)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된 목적도 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교회 목회자들에게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벧전 5:2)라고 권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허황된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한 오늘날 우리는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에 대해 광적(狂的)인 욕구를 가지고 있고 물질 체계의 엄청난 기만이라는 덫에 걸려 있습니다. 돈과 물질을 소유해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며, 매스 미디어들이 이런 사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와 신자들도 이런 배금주의 사상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진리와 생명의 유기적 집결체가 아닌 거대한 사업적 조직체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 향상을 추구하여 부유하고 명성 있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할 수 있는 사다리를 오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배금주의는 돈으로 유세를 부리고 교회를 좌지우지하려 하는 자들로 인해 더욱 가열되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맘몬(Mammon), 곧 돈의 세력(또는 신)을 힘입어 종교적 지위의 향상을 꾀하거나 다른 신자들과 차별화된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깁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분야 중에서 가장 순수해야만 할 출판 사업에 있어서도 순수한 문서 선교의 목적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대중적 인기를 위해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출판사들도 진리의 전달자로서 보다는 돈을 위해 대중들의 흥미를 돋우거나 감성만을 건드리는 그런 얄팍한 책들을 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음악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음악은 경배를 위한 일환이 아니라 경배를 빌미로 한 인기와 돈 장사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작곡가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보다는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곡을 써서 더 많은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곡을 쓰는가 하면, 세속적인 장르와 리듬의 음악들을 무분별하게 유입하여 대중들의 입맛을 골고루 맞춰주는 추세로 돌아섰습니다. 또 찬양하는 이들은 점점 순수한 찬양 목적보다는 돈과 인기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쪽으로 전향하면서 이제는 전문적인 가수들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 사역과 출판과 음악을 비롯한 기독교의 많은 분야들은 돈과 인기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돈과 인기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자들을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을 경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딤전 6:5)이라 칭하면서, 디모데에게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했습니다(딤전 6:5하). 또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고 말하면서 이에 대해 경고하면서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자 이들에 대해 잠언 29:25에서는 경고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부와 소유가 신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고 하나님께 드려지기보다는 오히려 안일과 방종과 유세를 부추기고 영적 능력을 상실케 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금의 교회 시대상을 잘 그려주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6-17). 다. 세속화: 세상에 동화됨(Being Conformed to This World: Worldliness)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상). 교회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따로 불러내어진 거룩한 자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거나 세상과 영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킨다는 구실 하에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고, 세상의 변화와 조류에 편승하고, 세상의 이슈에 뛰어들어 이를 해결하고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주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교회의 목적과는 상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신”의 지배 하에 있고(고후 4:4), 사악함 가운데 있으며(요일 5:19), 하나님의 엄청난 불로 심판받기로 작정되어 있음(벧후 3:7)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라고 디모데에게 상기시켜 주었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2상)고 권고했습니다. 야고보서 4:4에서도,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고 말하고 있고,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분명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과 벗하고 세상의 방법들을 원용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그 수단까지도 무조건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이 거룩하고 옳은 것이면, 그 수단도 거룩하고 옳은 것이어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타락하게 된 주된 요인은 이방인들과 분리되지 못하고 그들과 뒤섞여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리”(separation)는 혼탁하고 간음하는 세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견지해야 할 성경적 교리입니다. II. 세속화와 배교를 가속화시킨 요인들 (Factors That Have Accelerated the Crisis)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를 진리로부터 떠나가 세속화 하도록 만들고, 또 위기에 처하게 만든 몇 가지 대표적인 원인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그것은 실용주의와 다원주의입니다. 이 원인들 자체는 기독교를 위기로까지 몰고 갈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본질적인 요인들이 아래에 있는 외부적인 영향들과 합쳐져 기독교의 세속화와 배교를 가속화시킨 것입니다. 기독교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데 큰 영향력을 끼친 실용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가. 실용주의(Pragmatism) 인간 생활에서 실제적 유용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주의’(ism)로서 의의(意義)나 가치는 실용적인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이들에게는 종교도 인간의 마음에 안심을 주고, 인간 생활에 이익이 되는 한,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실용주의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와 그의 영향을 받은 죤 듀이(John Dewey)가 19세기 말에 널리 보급하고 발전시켰고, 20세기 초 미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철학 사조로서 영국의 경험론과 헤겔의 철학 사상에 그 기조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그 맥락을 같이하며, 본질상 상대주의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 철학이 인간 생활을 유용하게 하는 데 있어서 좋은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만일 이 사상이 진리를 규명하거나 선악을 판단하데 사용되거나 혹 신학 교리에 반영되거나 목회철학에 응용되거나 혹은 개인 신앙생활의 원리가 된다면 이것은 정면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믿음을 세워주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무너뜨리는 원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진리는 결코 유용성이나 효용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또한 상대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서 정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기독교 속의 실용주의가 성경의 원리에 상반되는 지 몇 가지 성경적인 예를 들어 입증해 봅시다. 먼저 주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으며(요 1:10-11),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그분을 처형했습니다. 또 지상의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분은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대받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언급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최후는 인간적으로 보면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므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그리고 누가복음 18:8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참으로 구원받아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을 것임을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둘째, 항상 복음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침례자 요한의 경우가 그러했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경우가 그러했고,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다수의 반대자나 대적자들을 만났고, 심한 핍박과 모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늘날 얄팍한 설교자들처럼 청중들의 구미를 돋우는 설교를 한다든지 입맛에 맞게 복음을 고친다든지 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대언자들의 임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을 빠짐없이 그대로 백성들에게 가서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배교할 위험에 처해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결코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수행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으로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 4:1-2). 셋째, 외적인 성공이 진리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성공증후군이라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려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눈길을 돌리거나 기존 사람들을 교회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청중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고, 죄와 책망보다는 복과 번영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을 유발시키려 하고, 나아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다양하고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시행하여 사람들의 머리수만 늘리는 데 급급합니다. 교회의 성공 여부를 예배 참석 인원수로 평가하거나 사람들을 교회에 끌어오기 위해서 혹은 사람들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이나 프로그램만 있다면 신중하고도 성경적인 분별 과정도 거치지 않고 그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용주의의 대표적인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속에서 수시로 바뀌고 있는 예배 양식이나 모임 방식 또한 많은 경우 이러한 실용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소위 ‘열린 예배’니, ‘경배와 찬양’이니 ‘빈야드 운동’이니, ‘스타나 연예인 간증과 찬양 콘서트들’이 그런 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유입된 실용주의는 말씀선포(설교)를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합니다. 말씀 강해나 교리 강론은 이젠 재미없고 따분한 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고, 교인수가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대단한 교회이고, 그 목회자는 유능하고, 성공적이며, 영적인 영웅으로서 추앙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이나 사람 수나 교회의 크기나 얼마나 많은 지성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많이 참석하는가 하는 그런 외적인 기준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한 사역의 척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된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번영이 하나님이 복을 나타내 주거나 크기와 인기가 성공의 지표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언급된 "형통"이나 "번영"은 반드시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다수라고 해서 그것이 타당성의 시금석도 될 수 없습니다(마 7:13, 14). 참 성공의 여부는 수적 우세나 교세나 건물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는가 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우승하려고 애쓰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월계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5)고 말한 바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공한 목회자나 교회, 혹은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복을 주시는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종이나 교회가 성공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을 쓰면서 외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래 참음과 건전한 교리로 인내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 4:4-5)고 말했습니다. 현대 교회는 진정한 영적 부흥을 외면하고 기독교의 대중화를 옹호하고 유도하는 사람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내적으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나 기법이라면 무엇이든지 도입하여 적용함으로써 양적 성장과 수적 성장을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 소위 교회성장 전문가들은 많은 경우 실용주의자들이다. 성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질적 성장보다 양적 성장에 주력하고, 수적 성장을 영적 성장보다 우위에 둠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에 보시기에는 무력하고, 나약한, 성도가 아닌 교인(敎人)만을 양산해내고, 성경적인 교회로부터는 벗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러한 기독교의 양적 확장은 복음의 순수성을 퇴색시키고, 교회와 신자의 순결성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지나친 양적 확장으로 말미암아 교회 내에는 이교적인 신앙과 세속적인 사상과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고, 건전한 교리는 힘을 잃고 혼합주의에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본 성공과 성경의 관점에서 본 성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는 민수기 20:1-13에 나타난 모세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임의대로 행했습니다. 바위에게 말하라(speak)는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 대신 바위를 두 번 내리쳤습니다. 이 불순종으로 인해 모세는 후에 자신이 누릴 큰 특권과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이 가진 명예와 부, 혹은 교세의 크기를 가지고 서로를 저울질합니다. 그 저울은 영점이 잘못 잡힌 저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바른 저울입니다. 이후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 때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완전하신 말씀의 저울로 모든 것을 측량해 보실 것입니다(요 12:48). 넷째,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고후 11:14), 사탄의 사역자들도 의의 사역자로 가장할 있으며(고후 11:13, 15), 크고 기이하며 효과적인 일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살후 2:9-10; 계 13:3, 13-15). 나. 다원주의(Pluralism) 다원주의란 용어는 말 그대로 “다양한 원리들(principles)이 있다고 믿는 사상이나 주장”을 의미합니다. 분야에 따라 인식론적 다원주의, 윤리적 다원주의, 미적 다원주의, 사회적 다원주의, 종교적 다원주의 등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표방하는 바는 다양한 원리와 이론이 존재하며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상대주의적인 관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유일한 절대 진리로 믿지 않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은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의 상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진리와 비진리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이성은 없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성들이 존재한다는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의 다원주의적 상대주의론이 정체로 고전(苦戰)하던 자유주의 신학의 사조에 불을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20세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큰 흐름을 주도하는 이 다원주의적인 신학 사조가 기독교에 끼친 대표적인 영향은 크게 두 가지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에큐메니컬(교회연합)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 시도와 연합 운동’입니다. 1.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 기독교 내의 교파들 간의 대화와 연합을 주창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1910년 Edinburgh에서 개최된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주창되고 개시되었습니다. 그런 후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하여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창설로 그 활로를 얻게 되었고, 나아가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와 로마 카톨릭 교회까지 가세함으로써 더욱 활발해졌으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Council II, 1962-65) 이후 엄청난 세력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운동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관용과 포용이라는 미명 하에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주창하므로 타당성 있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도와 교회의 경건과 순결, 구령과 선교보다는 사회, 정치적 이슈와 현안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사회의 개혁과 변혁을 부르짖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회는 개혁되거나 변혁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탄의 관장 하에 있으며, 심판과 멸망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말씀에 입각한 경건한 분리의 삶과 세상으로부터 불신자들을 불어내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파간의 교리적 불일치성입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담한 단체들 중에는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를 믿지 않는 단체들도 많습니다. 행위적 구원을 가르치고, 유일한 구원자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침례 또는 세례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이단적인 교리들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함께 가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교리적 이단성과 상이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하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창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기독교적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건전한 교리에 착념하지 않는 자들을 시험해 보고(요일 4:1), 지목하여 사귀지 말며(롬 16:17), 책망하고(딛 1:13), 어떤 교제도 하지 말며(엡 5:11), 그들로부터 물러서서는(살후 3:6), 영접하지 말 것이며(요이 10:11), 어떤 사귐도 갖지 말고(살후 3:14), 거절한 후(딛 3:10), 그들로부터 분리되라(고후 6:17)고 명령합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암 3:3).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후 6:15-17). 2. 타종교와의 대화와 연합(Inter-Religious Dialogue) 또 종교 다원주의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양상은 ‘타종교와의 대화 시도와 연합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제 2차 바티칸 공회의를 시발로 하여 전 세계 기독교 내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혼합주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John Hick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신학의 논점은 모든 역사적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역사적 상대주의와 타종교들 간의 대화와 연합, 그리고 인간 해방과 사회발전입니다. 이 운동은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을 오르는 길은 다양한 것처럼 종교마다 그 추구하는 길들은 달라도 최종적인 구원이라는 정상을 향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또 예수도 그리스도이고, 부처나 마호메트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며, 모두 다 공통적으로 부르는 하나님 또는 신에게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다 한 가지이므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발상은 본질상으로는 뉴 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관용’(Toleration)과 ‘포용’(Inclusiveness)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비난하고, 기독교의 선교의 철폐를 역설하면서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포기하고 하나가 될 것을 종용합니다. 타종교와의 대화와 연합을 시도하려는 종교 다원주의의 노력은 아주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종교적 다원주의는 공통적 신(하나님)과 구원이라는 공통분모를 빌미삼아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중 하나로 격하시키고, 성경의 권위와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과 본질을 뒤엎고자 하는 사탄의 전략에 지나지 않음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진리이고, 저것도 진리라면 그 어떤 것도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면 저것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고유성과 절대성과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의 중심에는 로마 카톨릭이 서 있으며, 모든 종교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 하나의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음흉한 저의가 숨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이르시되, 내가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행 4:12).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III. 끝맺는 말(Conclusion) 우리는 기독교 위기를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으려고 시도하기보다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먼저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죄와 타락의 원인을 이브에게 전가하고, 이브는 뱀에게 전가했던 것처럼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신들의 죄와 타락과 불순종의 원인을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고 그것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요인은 사실 내부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17:9은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deceitful above all) 심히 사악한 것(desperately wicked)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잠언 기자가,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니라”(잠 4:23)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사람의 거짓되고 사악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려면 먼저 다시 태어나야만(born again) 합니다.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엡 2:2)이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새 성품을 입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명의 씨이자 인도자인 성경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롬 12:2).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며 혼을 개심시키고 변화시키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시 19:7).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절대 권위인 성경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서는 기독교가 당면한 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말씀을 전하는 강단의 권위가 회복되어지고 그 권위에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기만 한다면 다른 영향이나 요인들은 저절로 순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실용주의, 다원주의와 같은 모더니즘의 거센 물결이 넘실된다 할지하도 우리는 확고하고 절대 무오한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의지만 있다면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해(害)할 수도 없고, 우리는 그런 것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타협하거나 배교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선과 악을 분별하는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히 5:14) 악으로부터 분리하여 거룩함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는 귀한 도구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딤후 3:19-21).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이는 네가 이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또 어린 아이 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만일 누가 다른 식으로 가르치고 온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아니하면...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딤전 6:3, 5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