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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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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lhyunsik

[도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이 책에 수록된 메시지들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 런던 및 유럽 대륙에서 전하신 주님의 종 웟치만 니 형제님의 설교 기록이다. 나중에 영국의 앵구스 키니어 형제 (Angus I. Kinnear)가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원본이 영어이다. 출판된 지 몇 년이 채 안 되어서 세계 각지에서 판매량이 오륙만 부에 달하였고 또한 이십여 가지에 달하는 언어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메시지들 속의 생명의 방면은 그리스도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준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메시지들로 인해 생명의 전기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단체 전체가 생명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오늘 형제들이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만복음서원을 통해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어를 아는 형제 자매에게 주는 도움이 영어판보다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배나 축복하사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더 진보된 체험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각지에서 더 자라고 확장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3년 3월 25일 뉴욕에서 윗트니스 리 1장 그리스도의 피 2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3장 성장하는 길-앎 4장 성장하는 길-여김 5장 십자가의 경계 6장 성장하는 길-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7장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8장 성령 9장 로마서 7장의 의미와 가치 10장 성장하는 길-영을 좇아 행함 11장 그리스도 안의 한 몸 12장 십자가와 혼 생명 13장 성장하는 길-십자가를 짊 14장 복음의 목적 제 1 장 그리스도의 피 시작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철저히 고려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우리는 주님의 산상 수훈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외에 이런 생활을 실지로 살아내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외에’라는 말이 바로 이 질문의 정답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는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일을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원칙을 말하였다고 믿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준다. 우리 몸에서 그분이 하신 모든 역사는 바로 우리를 제하고 그리스도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의 대치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이루신 대치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오직 하나, 즉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을 더욱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크나큰 도움을 받을 것이고 많은 혼란을 피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두 가지 문제-죄의 행위와 죄의 본성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점으로 삼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설명하고 또한 실제적이고 실험적인 각도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이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또 이 두 부분의 주제가 현저히 구분된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이런 지적만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은 독립된 하나의 단락이다. 1장 1절부터 5장 11절까지는 이 단락의 전반부이고 5장 12절부터 8장 39절까지의 세 장 반은 이 단락의 후반부이다. 이 여덟 장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전곂캣趺括?주제가 다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전반부의 논의 중에서 우리는 복수의 죄(sins)가 특별히 현저한 것을 발견한다. 그런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복수의 죄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단수의 죄(sin)가 여러 번 사용되며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이것은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이 죄들은 많을 뿐 아니라 일일이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죄의 본성이다. 이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일종의 원칙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든, 그것들은 다 이 죄의 원칙이 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행위를 용서받아야 하지만 더욱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 전자는 우리의 양심을 만지고 후자는 우리의 생명을 만진다. 만일 우리의 죄의 본성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설령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항구적인 평강이 없다.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내 마음을 비출 때, 그분 앞에서 나는 내 범죄로 인하여 용서해 달라고 그분께 부르짖었다. 죄 사함을 얻은 후, 나는 새로운 것, 즉 나의 죄의 본성을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 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나에게 범죄하는 본성이 있고 내 속에 범죄하려는 경향과 나를 유혹하며 범죄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힘이 내 속에서 발동할 때 나는 곧 죄를 범하게 된다. 내가 이것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사하심도 얻었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다시 범죄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는 악순환 속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 내 마음에는 감사가 넘친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함만이 아니라 또한 구원하심이다. 나의 모든 행함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고, 나의 모든 어떠함을 위해서는 죄의 본성에서 구출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두 방면의 구원-피와 십자가 그러므로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에서 우리는 구원의 두 방면을 본다. 첫째는 우리 죄들이 사함 받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는 것이다. 이 두 방면을 위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의 차이점에 주의해야 한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독립된 단락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주 예수의 피에 대해 두 차례 언급된 것을 본다. 즉 3장 25절과 5장 9절이다. 후반부의 6장 6절부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새로운 사상이 도입된다. 전반부의 논의의 중점은 주 예수의 역사, 즉 예수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논의 중에서는 피를 계속하여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로 대표되는 주님의 다른 면의 역사에 중점을 둔다.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은 매우 가치가 있다. 우리는 피가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가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는 우리의 죄들을 제거했고 십자가는 범죄하는 우리의 근본을 강타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우리는 두 번째 방면의 주님의 역사를 볼 것이다. 우리의 여러 죄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이 보혈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고 우리의 죄들을 처리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부터 말하기 시작하겠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이 문제를 연구하는 후반부에서 우리는 타락의 실상과 회복하는 길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 시점에서 먼저 나는 죄가 들어왔을 때 그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겠다(롬 5:19). 우리는 불순종이 발생할 때마다 뒤따라오는 것이 범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첫 번째 결과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그분은 더 이상 사람과 교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장애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첫 단계로 하나님은 그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이 다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신다(롬 3:9). 둘째 단계로 사람 속에서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통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죄는 범죄한 느낌-하나님과 격리된 느낌-을 갖게 하였다. 이 때문에 깨어난 양심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내가 …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죄는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근거를 주며, 우리 속의 범죄의 느낌은 우리 마음속에서 사탄에게 우리를 참소할 근거를 준다. 그러므로 세 번째 단계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10)가 “너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정죄받는 양심에 대하여,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 먼저 우리의 범죄가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 다음은 죄 있는 느낌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피의 가치를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써 정죄받는 양심으로 평강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마귀의 공격과 참소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리하고 해결해 주셔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사탄을 향하여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계속 전진하려면 절대적으로 주님의 피의 가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선적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피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아직 올바른 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피는 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 속죄를 위한 피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룬다. 우리가 범한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에 떨어지게 된다. 또 죄 사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소홀히 여기시거나 감찰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는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피의 가치를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내가 피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조금도 모른다면 나는 영영 나를 위한 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에게 피가 얼마나 귀한 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피의 첫 번째 방면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피라는 단어는 항상 속죄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피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속죄와 연관되어 백 번 이상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언급되는 곳마다 피가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구약 달력에는 우리의 죄와 매우 큰 관계가 있는 하루가 있는데 그날은 곧 속죄일이다. 죄 문제에 대하여 속죄일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것은 없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속죄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가 하나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고 말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해야 한다. 속죄의 날에 속죄 제물은 회막의 바깥뜰에서 회중 앞에서 드려졌다. 거기서의 모든 것은 완전히 노출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제사장 외에 누구도 지성소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명하셨다. 오직 피를 가진 대제사장만이 피를 거기에 뿌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도록 하셨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는 대제사장은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주 예수를 예표하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러므로 예표에 있어서 대제사장은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다.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뿐 아니라 대제사장이 들어갔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 피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신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역(交易)이다. 이 교역의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그 교역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초기의 예표는 출애굽기 12장과 13장에서 언급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피 흘린 유월절 어린양이다. 나는 이것이 구속에 관한 구약의 또 하나의 좋은 예표라고 생각한다.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발라진 집 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피가 사람에게 드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증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진 피를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음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는 우리 인류를 위해 드려질 수 있는 죄없는 한 생명을 요구하신다. 피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피는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부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킬 피를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하셨다. 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다! 여기서 나는 새로 믿은 형제들에게 몇 마디 하겠다. 이는 우리가 이 점에서 자주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보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실 때 비로소 양심이 살아난다. 본래 우리의 양심은 죽어 있었다. 양심이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 아무 쓸모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얼마 후,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깨어난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예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죄악의 느낌은 우리에게 크고 두려운 것이 되어 심지어 우리가 피의 참된 효능을 보지 못하게까지 한다. 결국은 우리가 길을 갈 힘을 잃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실제라고 느낀다. 어떤 특별한 죄들이 여러 차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크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피의 가치를 느껴 보려는 데서, 우리에 대한 피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평가해 보려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피의 가치는 우리가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피는 하나님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으로 평가해 보려고 할 때 아무런 수확이 없고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가 하나님께 귀하다고 그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벧전 1:18-19). 만일 하나님께서 죄의 값으로 피를 받으실 수 있고, 속죄의 대가로 피를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죄 빚을 갚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이미 이 피로 만족하셨다면, 이 피는 받으실 만한 것이다. 이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분의 평가를 따라야 한다. 더하거나 덜하지 말아야 한다. 이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결코 그분의 평가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분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심을 기억하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분 보시기에 이 피가 받을 만한 것이며 그분을 온전히 만족케 했다고 능히 말씀하실 수 있다. 믿는 이들을 하나님께 가까이하게 하는 보혈 이 피는 하나님을 만족케 했으므로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그러므로 피의 두 번째 방면의 가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이 방면에서의 피의 효능을 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들을 우리는 자세하게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피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피가 역사하는 범위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주여, 당신의 피로 내 마음을 죄에서 씻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씻음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하셔야 하는데, 이는 곧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곧 버릴 옷을 빨거나 다리미질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것을 보아야 한다. 육체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라고 말한다. 나는 성경에서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는 말씀을 보지 못했다. 피의 역사는 이렇게 주관적이지 않고 온전히 객관적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피의 씻음을 말할 때 마음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피와 양심과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분을 가까이하려고 할 때 거리끼는 양심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거리끼는 이 양심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준다. 이제 보혈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해지는 새로운 결과가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셨다. 내가 이 사실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내 양심은 즉시 깨끗케 되고 죄책감도 제거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나의 양심은 더 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게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고 있다. 믿는 마음과 아무런 참소가 없는 마음은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서로가 상호보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새어나가고 즉시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피의 가치를 새롭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기록하시기 때문에 오직 피로 말미암아야 매일, 매시간, 매분,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피를 의지하고 피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영원히 이 피의 효능은 상실되지 않는다. 보혈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내가 내 죄를 시인하고 정결케 함과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업적이 아닌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아침 특별히 인자했다거나 참을성 있었다거나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나는 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려고 할 때에 누구나 다음과 같은 유혹을 만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다루어오고 계시기 때문에-우리를 그분 앞으로 더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의 더 깊은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이미 여러 과정을 채택하셨다-우리 앞에 새로운 표준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표준들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결한 양심은 결코 우리의 업적에서가 아닌 오직 주 예수께서 피 흘리신 역사를 의지하는 데서 온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무거운 느낌이 있다. 즉 “오늘 내가 조금 조심하여 선하게 살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기도를 잘 할 수 있었다!” 혹은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나는 식구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아침부터 아주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지금도 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분명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하겠다.” 대체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느낌이나 오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는 느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가? 아니면 그보다 더 견고한 것, 곧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만족하시는 그분의 흘린 피를 의지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가? 만일 피가 변할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 것도 무가치할 것이다. 그러나 피는 한번도 변한 적이 없고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데, 이 두려움 없는 담대함은 당신 개인의 업적이 아닌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어제든, 당신이 어떤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일단 지성소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은 유일하게 믿을 만한 흘려진 피를 당신이 설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혹은 범죄했든간에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영원히 오직 하나, 즉 그리스도의 피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근거이다. 이것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많은 체험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에도 시작(초기)과 지속(진보)의 양면이 있다. 전자는 에베소서 2장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후자는 히브리서 10장이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시작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기”(엡 2:13) 때문이다. 이후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도 여전히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고 말했다. 시작할 때 나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하였고, 이후로 이 새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서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혹 당신은 “이것은 간단한 것이고 복음의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복음의 초보를 떠난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가 진보하였기 때문에 이 초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복음의 초보를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시작할 때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같이 이후에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는 동일하게 피로 말미암아야 한다.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근거는 오직 한 가지, 즉 이 피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멋대로 방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다른 방면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피로 만족하고, 피가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주의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애통해 하고 참회하려 한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우리의 성결함을 조금도 돕지 못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조금도 돕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하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제가 이 피의 가치를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피가 이미 당신을 만족케 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피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 이 피가 저의 유일한 의지입니다. 지금 저의 성장의 여부나 업적의 여부가 나의 근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언제든지 당신 앞에 나올 때 저는 당신의 보혈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참으로 깨끗케 된다. 이 피를 떠나서는 양심은 영영 깨끗케 될 수 없다. 오직 이 피만이 우리를 두려움 없고 담대하게 한다.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절에 있는 놀랄 만한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라는 바울의 말에 반향할 수 있다. 참소자를 이김 우리가 말한 바에 비추어, 이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대적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피에는 사탄을 향한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안에서 사탄의 가장 맹렬한 활동은 바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일이다(계 12:10). 그러나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의 특별한 직분 안에서 그분의 피(히 9:12)로 말미암아 사탄을 대적하신다. 이 피는 어떻게 사탄을 처리하는가? 이 피는 하나님을 능히 사람 편에 서시게 함으로써 사탄을 처리한다. 타락은 사람 속에 무언가를 가져와 사탄에게 사람 속에 설 발판을 갖게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동산 밖에 있다. 인간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사람 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에는 하나님은 이치에 맞게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드리자. 피가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했다.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 편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지금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탄을 대할 수 있다. 여러분은 요한일서 1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는 다비의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every sin)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요한은 총괄적으로 ‘모든 죄’라고 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죄, 모든 항목의 죄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것이 빛 아래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서 일목요연하게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지만 그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능히 깨끗케 할 수 있으시다. 아, 어떠한 씻음인지!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내가 어떤 것들을 숨기거나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소홀히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고 나도 빛 가운데 있을 때 보혈이 나의 모든 종류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피로 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억눌리거나 심지어 때로 시험을 받음으로 어떤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큰 죄, 작은 죄, 아주 검은 죄, 그렇게 검게 보이지 않는 죄, 우리 생각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 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의식하는 죄, 의식하지 못하는 죄, 기억하는 죄, 이미 잊어버린 죄, 모두가 ‘모든 종류의 죄’라는 구(句) 안에 포함된다. 할렐루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죄를 보셨고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는데 사탄이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참소할 수 있겠는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사탄에게 보여 준 이것이 가장 유력한 답변이기 때문에 사탄은 더 이상 고소할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혈이 절대적으로 만족시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그분은 오직 한 번 속죄자가 되셨지만, 그분이 대제사장과 중보가 되신 것은 거의 이천 년 동안이나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서신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요일 2:2)이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 못하겠느뇨”라는 말씀을 주의하라. 이 말씀은 그분의 사역의 부요함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 대해 그리스도의 피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태도로 사탄을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양심 안에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와 다투는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이미 범죄하였고 계속 죄를 범할 것이다. 너는 연약한 자이며 하나님은 더 이상 너에게 어떠한 것도 하실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을 살피게 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서나 느낌 안에서 혹은 자신의 행위에서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생각한다. 혹은 이와는 달리 우리는 유혹되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다른 극단에 빠져 침체와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소는 사탄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 있는 무기이다. 사탄은 우리 죄들을 지적해 내어 이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참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시 넘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가? 이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의(義)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램은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사탄은 항상 성공적으로 우리를 틀린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사탄은 승리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면, 육체의 본성은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육체의 참 본성을 모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때 우리는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 죄를 처리하여 주실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참소 아래 있는 사람을 처리하실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사람은 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피가 그를 위하여 유리한 말을 할지라도 그는 돌이켜 사탄의 말을 듣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자이시지만, 참소를 받는 우리들은 참소하는 자 편에 서 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죽는 것 외에 달리 쓸모가 없는 자임을 모른다.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직 십자가에서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소자에게 응수(應酬)하실 수 있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에게 응수하신 것을 아직 모른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 예수를 바라보고 어린양의 피가 각종 죄들로 조성된 상황에 응수하시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 죄들에 응수하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믿을 만한 기초이다. 절대로 우리의 선한 행실로 사탄에게 응수하지 말고 항상 보혈로 그에게 응수하라. 그렇다.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피가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피를 보셨고 그의 아들은 이 피로 말미암아 사탄의 참소에 응수하셨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할 근거가 없다. 오직 이 피를 신뢰하고 얻은 바 위치를 떠나지 않은 사람만이 사탄의 참소를 그치게 하고 그를 달아나게 한다(롬 8:33, 34). 이 체험은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계 12:11). 아!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보혈의 가치를 조금 더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해방을 받게 될지!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 『성장하는 길-앎』 -------------------------------------------------------------------------------- 우리의 옛 역사는 십자가에서 끝났고 우리의 새 역사는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는 첫번째 창조를 끝냈고 죽음에서 나온 것은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인 둘째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질을 내거나 다른 죄를 범하는 데는 결심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원함의 여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같은 원칙으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고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이 다만 믿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졌다는 말은 참되지만 좀 실제적이지 못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제가 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체험에서 참이 될 수 있는가? 로마서 6, 7, 8장을 읽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네 가지 조건을 발견할 것이다. (1)앎 (2)여김 (3)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4)영 안에서 행함이다. 이것이 네 가지 조건의 정확한 배열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려면 이 네 가지 절차를 완전히 취해야 한다. 한 가지나 두 세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를 모두 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절차를 자세히 보기로 하자.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첫 단계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제 우리 앞에 로마서 6장 1절부터 11절의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은 주 예수님의 죽음이 대표적이고 포괄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도 죽었다. 이 점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진보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 죄를 짊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만일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우리를 짊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린 결코 거룩케 될 수 없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돌아갔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분 안으로 넣어졌다. 당신은 어떻게 죄 사함을 얻었는가?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당신의 죄를 감당하시고 당신의 대치물이 되셨으며 당신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피흘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의 죄가 십자가로 가져가졌다는 것을 보았다면 또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은 『주 예수님,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십시오.』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다. 당신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이미 당신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께 당신을 위해 죽어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다. 죄 사함을 어떻게 받았으면 해방도 그러하다. 모든 역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고 다만 찬미하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나는 매우 사악한 사람이오니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죄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면 왜 또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는가? 당신의 죄가 이미 그분의 피로 처리되었고 당신 자신도 이미 그분의 십자가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만 주님을 찬양하면 된다. 이 일을 인하여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의 빛 안에 살아야 한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12).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가? 물론 당신은 믿을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6:6). 이것은 첫번째 설명으로서 매우 분명하다. 성경은 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롬 6:8)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우리 옛사람이 어느 날 못 박혔는가? 어제인가, 오늘인가? 아니면 내일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거꾸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모임에 참석할 때 나는 여러분이 둘씩 둘씩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이 같이 왔다면 『나의 친구가 나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내가 내 친구와 함께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 중 한 사람은 삼 일 전에 오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만일 여러분이 함께 왔다면 어떻게 말해도 옳다. 이는 두 가지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경하는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혹은 『제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도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정확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한 가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주: 로마서 6장 6절의 「예수와 함께」라는 어구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교리적인 의미도 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은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인용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어찌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는가? 그분이 약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나는 내일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과거의 사건이라면 내가 지금이나 장래에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가? 주님을 찬미하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죽었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었고 나도 죽은 것이다. 내가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나는 그분의 죽으신 것의 귀함을 믿는 것같이 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왜 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이 믿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분이 죽은 것을 느낄 수 있는가? 당신이 느껴보았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당신이 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해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 강도가 동시에 함께 못 박혔다.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해주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이 함께 못 박힌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주 예수님의 죽으신 것을 믿고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을 믿었다면, 당신 자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당신이 함께 못박힌 사실은 두 강도가 동시에 못 박힌 것보다 더욱 친밀하다. 그들은 주님과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다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당신은 주님과 함께 동일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는 그분이 죽으실 때 당신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느낌과 관계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같은 원칙으로 당신이 이미 죽은 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당신이 죽은 것도 확실하다. 이것들은 거룩한 사실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고 두 강도가 죽은 것도 사실이며 당신이 죽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은 이미 죽었다! 당신은 이미 제거되었다! 당신은 이미 버린 바 되었다. 당신이 싫어하는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위에 있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롬 6:7).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음이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서 결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효능있게 할 수 없다. 오직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유효하다. 우리 눈이 열려서 갈보리에서 주님이 완성하신 일들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기 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가고 구제한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의 눈이 열려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완전한 구속을 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럴 때 평강과 기쁨이 당신 마음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구속이 성화와 동일한 기초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죄에서 해방받는 길과 죄사함을 얻는 길은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사람의 방법은 죄를 이김으로써 죄를 억누르는 것이나 하나님의 방법은 죄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약함을 인해 비통해하고 그들이 조금 더 강하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다. 이것은 잘못된 관념이다. 만일 우리가 죄의 능력과 우리의 무력함을 이기려 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내가 조금 더 강하면 내 거친 성질을 극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케 하시어 더 자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점점 강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약하게 하심으로써 구출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기이한 승리의 방법이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다. 하나님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 옛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못 박는 것이다. 옛사람을 도와서 무엇을 하지 않고 도리어 옛사람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출하신다. 어쩌면 수년 동안 당신은 자신을 제어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런 결과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당신은 이런 노력 안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를 보았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완전히 한쪽에 제쳐 놓으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이런 계시는 사람의 노력을 멈추게 한다. 제 일보 : 「앎」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확실한 앎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에 관한 것을 알거나 중요한 교리를 깨닫는 것만이 아니다. 이 확실한 앎은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마음 눈이 밝아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죄가 사함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전도사가 이것을 당신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당신은 그냥 당신의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 뿐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냥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 곧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물론 죄 사함을 받는 이 일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쓰여진 그분의 말씀이 그분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 되게 하려고 당신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엡 1:17).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혜와 계시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되 항상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때가 바로 영 안에서 무언가를 볼 때이다. 빛이 당신의 마음을 비출 때 당신은 완전히 믿게 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죄 사함과 원칙상 완전히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빛이 당신의 마음에 비췰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것을 당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나 로마서 6장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영으로 당신에게 계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혹 당신이 그 일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고 이해가 안 될지라도 당신은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일단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면 어떤 일도 축복을 받은 사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요동케 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선 성도에게 어떻게 그런 체험에 들어 갔느냐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특이한 방법을 강조하고 또한 자기의 체험을 옹호할 성경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의 특별한 체험과 성경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강조하는 체험 혹은 진리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서로 보완된다고 말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체험은 주 예수의 인격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결정적이고도 안전한 시험인 것이다.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모든 일을 다음의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즉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앎의 요건인 하나님의 계시 그러므로 첫 단계로, 우리는 계시에서 비롯된 앎을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 계시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역사에 관한 것이다. 내지 선교회의 발기인인 허드슨 테일러 형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설 때 이런 것을 체험했다. 여러분은 그가 항상 한 가지 문제 즉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어떻게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흡수하느냐 하는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는 그의 안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얻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1896년, 그는 진강(鎭江)에서 누님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안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어느 날 빛과 계시가 그에게 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나는 비결이 여기 있다고 느꼈습니다! 즉 내가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내 안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주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심을 기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뿌리요 줄기요 작은 가지이며, 잎사귀요 꽃이요 과실이며 모든 것 되십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를 도와 주었던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자신을 지체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가지이고 그분의 한 부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그것을 읽었었지만 지금에서야 이것이 살아 있는 실제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래부터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개인에게 이것은 새로운 노정에서 참된 체험이 되었다. 다시 그는 누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가 얼마나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별 신기하거나 특이 한 것은 아니나 지금 나에게는 모두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에 나는 눈 먼 자였으나 이제는 친히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또한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도 이렇게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나를 제일 잘 아십니다. 아, 이 진리를 보는 것이 어떠한 기쁨인지!-주님이 누님의 마음 눈을 밝히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값없이 얻는 풍성을 얻고 누리기를 구합니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이미 방 안에 있는데 방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주님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많은 계시를 얻었다면 간구 대신 찬미를 더 많이 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간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완성하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해에 있을 때 어느 날 자기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한 형제와 대화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도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데 나는 정말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조금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과 이 부활의 생명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 때 어떤 형제가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우리 둘이서 거의 두 시간 가량을 소비하여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간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것을 주셨는데 어찌 달라고 간구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분이 아직 저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아직도 화를 내고 끊임없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많이 간구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우리는 묻기를, 『당신이 구한 것 중 얻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는 답변하기를, 『저는 참 괴롭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그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바로 그때 주님께 크게 쓰임받는 한 형제가 들어와 우리의 대화에 참예했다. 상 위에 보온병이 있었는데, 이 형제가 그 병을 들더니 그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보온병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보온병이 기도할 줄 알아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주여, 내게 은혜를 주사 나로 보온병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이런 기도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친구가 답하기를, 『제 생각에 보온병은 결코 그렇게 어리석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보온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보온병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당신도 죽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당신도 부활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부활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새 생명을 소유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간구는 마치 보온병의 기도처럼 우습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무엇을 구할 필요 없이 다만 눈을 떠서 그분께서 이미 이루신 모든 것을 보면 됩니다.』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우리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방법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고 죽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주님이 이미 이루신 일들을 알고 그분을 찬미하기만 하면 된다. 주님은 어두움을 드러내는 빛과 같이 이 말로 그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이 이미 나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시를 얻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 만일 이후로 그 형제를 만나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진 십자가 나는 당신에게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의 기본 성질을 일깨워 주겠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지나치게 말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겠다. 가령 우리 정부가 술 문제를 엄격히 처리하기 위해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하자. 내가 묻겠는데 이런 결정을 어떻게 집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각지로 가서 점포마다 수색하여 술병을 발견하는 즉시 깨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각지에 있는 술병 속의 술을 다 제거할 수 있지만 그 술병 뒤에는 술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있는 것이다. 만일 술병만 처리하고 술공장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술이 계속 생산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려면 전국에 있는 술공장의 문을 닫아야 한다.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는 공장이고 우리의 행위는 생산품이다. 주 예수님의 피는 생산품의 문제 곧 우리의 범죄를 처리한다. 그리하여 우리 행함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이 여기서 멈추시겠는가? 우리의 어떠함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죄의 행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죄들은 이미 처리되었지만 우리 자신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당신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범죄를 깨끗이 씻으셨는데 우리 스스로 범죄의 공장을 제거하라고 하신다고 믿는가? 그분이 산출된 생산품만 가져가시고 우리 스스로 생산품의 근원을 처리하라고 하시겠는가? 이런 질문은 이 문제에 대해 자동적으로 답이 되는 것 같다. 주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시고 나머지를 남겨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생산품들을 제거하셨고 또한 생산품을 산출하는 공장도 깨끗이 청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역사는 실로 우리 문제의 근원을 만지고 처리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일을 절반만 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고 말한다. 이것은 알아야 하는 사실이나, 당신은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래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느냐?』(롬 6:3)는 말씀을 주의하라. 우리의 눈이 열리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장하는 길-앎",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