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72 전체: 178,866 )
주님의 교회 안에서 (집사 ,목사,여자)들의 처신
lhyunsik

임동선 목사 딤전3:8-13 주님의 교회 안에서 집사의 처신 디모데 전서는 교회 안에서의 처신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질서와 원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처신하게 될 경우, 교회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며 본래에 주님께서 의도하신 모습을 이루기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공부하는 이유들은 거기에 있습니다. 좀더 주님의 교회로서 바르고 질서있는 모습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무질서를 조장합니다.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돈된 것을 가져오시며 질서있고 품위있는 모습을 꾀하십니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라"(고전14:33)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있게 행할지니라"(고전14:40) 얼마 전 우리는 여자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여자는 교회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거나 남자들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사의 처신에 대해 배웠습니다. 목사는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양무리에게 귀감이 되는 장로이며, 그들의 삶을 살피는 감독이고, 생명을 내주기까지 하며 사랑해야 하는 목자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목사가 합당하게 처신할 때, 양떼는 흩어지지 않으며 살찌고 기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며 바른 목사가 되도록 세움을 입은 목양자 자신들도 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집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집사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읽어보면 교회 살림을 맡게 하기 위해 일곱명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들을 집사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집사라고 호칭이 붙여진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처럼 우리 교회 역시 집사라는 이름으로 세우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살림을 맡아 수고하는 몇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후에 집사(deacon)라고 하는 공식적인 직분을 가졌듯이 우리 교회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단계로서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1.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 중 누가 집사가 되는가? A.남자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 a.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딤전3:12) b.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딤전3:12)-남자가 자기 집을 잘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딤전3:5)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조금 불공평하다고 느낄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여자가 집사의 일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질서였습니다. 다른 많은 교회들이 여자를 집사로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것이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백 마리의 긴 꼬리 원숭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 꼬리가 긴 원숭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원숭이들이 모두 꼬리가 잘려나갔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가 정상적인 원숭이 한 마리를 놓고 "병신"이라고 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꼬리가 없다. 그런데 너는 뭐냐? 에그 병신!"이라고 놀려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정상적인 원숭이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다면 꼬리를 잘라버리든지, 말아서 뒤로 감추든지 할 것입니다. 아니면 끝까지 그 스스로가 옳다는 것을 보이며 살다가 다른 원숭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현재까지 개역성경을 보면서 지내왔습니다. 개역 성경을 보면 로마서 16장 1절에 뵈베를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일꾼이라는 말이 집사라는 직분을 말하는 헬라어와 동일한 말을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난 성도들은 "교회의 일꾼"이며 "교회의 종"(servant of church)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난외주에 "혹은 집사"라고 표기를 해두었는데, 그것은 이 말이 직분을 가리킬 때, 그런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직분에 대한 소개는 디모데 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절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입으로 두 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디모데 전서에서는 집사가 "한 아내의 남편"이거나 "자기 집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남자"라고 해놓고 로마서에서는 뵈베를 집사라고 하신다면 두 본문은 모순이 된단 말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흠정역은 보편적인 의미로서 "교회의 종"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선명하게 제시된 집사의 기준이 있는데도 오늘날 여집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교회의 종"인 그 말을 "교회의 집사"로까지 발전시켜 직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B.부부를 함께 살피고 세워야 하는 이유 a.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딤전3:11) 이 부분에 대해서 개역성경은 역시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개역)라고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여자집사의 존재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흠정역에서는 분명히 "그들의 아내들(there wives)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변개된 성경으로 유명한 NIV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NIV는 "여자들도"라고 독립적으로 쓰지 않았으며 "그들의 아내들도"라는 말로서 남편에게 예속된 채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집사라면 그들의 아내들도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b.집사의 선별 조건 중 아내가 차지하는 몫도 큽니다. 아내가 함께 헌신되지 않으면 남자가 집사의 일을 하기가 곤란합니다. 오늘날 우리 이웃 교회들 안에서는 남편이 믿지 않는데도 여자를 집사로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를 집사로 세운다는 것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지만 부부의 신앙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구원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각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기는 일, 교회의 종으로 일하는 문제는 부부가 함께 고려되는 것이 신약교회의 원리였습니다. C.현시대의 교회들 안에 있는 비성경적인 문제 a.그러므로 현재 많은 교회에서 여성도를 집사 직에 세우는 것은 성경 말씀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명하신 바가 없는데도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 모임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독 한국에는 그것이 더 강한 실정입니다. b.또 남편은 불신자인데 아내가 집사라고 한다든지, 아내가 불신자인데 남편이 집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의 경우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만 뛰어나다고 해서 그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c.만일 여러분들이 집사라는 직분이 명예나 어떤 감투가 아니고 한 지역교회의 필요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집사는 그가 한 지역교회를 옮길 때 포기되는 것입니다. 한 지역교회에서 안수받은 집사가 다른 교회로 옮겨진다고 해서 그대로 집사직분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집사의 직분은 그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충분히 검증된 후에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에 있던 교회에서 집사였다고 해서 옮겨온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집사직분을 승계해주는 태도들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2.집사와 집사의 아내들의 생활 딤전3:8은 집사로 세움을 입게 되는 형제들, 딤전3:11은 집사로 세움을 입은 그 형제들의 아내들의 모습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검증이 없이는 그 형제들이 집사로 세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먼저 시험해보고 그 뒤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집사의 직분을 수행하게 할지니라"(딤전3:10) A.신중하며(딤전3:8,11) a.이 말의 뜻은 "공경할 만하다" "정직하다"입니다. b.부부가 함께 신중하지 않다면 주님의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아 수고할 수가 없습니다. c.만일 여자들이 목회할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의 남편이 집사로 주님을 섬길 수 있을지에 대해 살펴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성도를 돌아볼 수 있는 재목인지를 보십시오. 그런 사람의 아내가 되어 그런 사람을 돕고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B.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아니하며-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딤전3:8,11) a.남자들에게 있어서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보기 흉합니다. 사람들이 히딩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몇가지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일꾼은 말한 것을 지킵니다.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b.여자들에게 있어서 헐뜯는 것은 항상 문제입니다. 물론 문제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말하는 것을 헐뜯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해 무절제하게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해대는 것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헐뜯는 아내를 둔 남편은 그 아내 때문에 고민을 해야만 합니다. "입이 왜 이렇게 거치냐?"고 괴로워해야 합니다. 그 아내의 입 때문에 조마조마하느라 주님의 일을 그르칩니다. c.남자나 여자에게 있어서 그들의 언어생활이 덕스럽지 못하다면 그들은 교회에 많은 상처를 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것입니다. C.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주지 아니하며-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딤전3:8,11) 두 사람이 함께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님의 교회를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술취하지 않는다"와 "맑은 정신을 가진다"는 말은 서로 표현이 다를 뿐이지 결국은 한가지를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sober"라고 하는 단어가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맑은 정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술을 즐기는 사람은 절대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는 집사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또 그것이 어찌 술뿐이겠습니까? 무엇인가 푹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집사의 직분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 빠져서 지낸다든지, 직장의 문제에만 빠져서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취미와 오락, 여흥에 빠져서 나날을 보낸다든지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로서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에 우선 순위가 교회가 아닌 사람들은 주님의 교회에서 집사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평범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모일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일들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맡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일 우선순위가 아니라면 교회에서 집사를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무언가에 빠져서 교회를 둘째나 셋째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집사로서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위한 맑은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D.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모든 일에 신실하며(딤전3:8,11) a.마치 목사가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집사들에게도 이런 자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의 돈주머니를 맡다가 그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사라져버리는 예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그 돈주머니를 움켜지고서 교회 안에서 세도가 행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적절하지 않은 집사들에 의해서 빚어졌습니다. b.어떤 사람에게 교회에서의 직분은 봉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체면과 자기의 위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뒷짐지는 집사, 고개 수그리지 못하는 집사, 그래서 목이나 허리가 뻗뻗한 사람은 집사로서 적격이 아닙니다. c.집사라는 직분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섬기기 위해서 주어진 위치입니다. 3.집사들의 신앙 A.물론 우리는 이것 역시 남편 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가 함께 그러해야 함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B.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딤전3:9) a.그들은 분명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믿음과 상관없이 교회에 다닌지 1년 되면 집사를 함부로 주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는 모든 사역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뜨거운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b.또한 그들은 다른 어떤 경우에라도 믿음에 의해서 소망을 갖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C.성령님,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행6:3-5) 4.집사직분을 잘 수행할 때 오는 유익. A.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수고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디그리라는 말은 보통 학위에 관계되어 사용됩니다. 적절한 학위는 그의 하는 일에 전문성을 줄 것이며 그의 일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있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집사라는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헌신하는 일이 석사나 박사 학위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사의 위치에서 그 일을 할 때, 그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있게 활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집사들의 제시와 수고에 대해 동참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도와서 교회의 살림을 해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면에 있어서 집사라는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B.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습니다. 또한 주님께 헌신을 했는데, 그 결말이 아무것도 돌아오는게 없겠습니까? 주님의 날을 기다리면서 더 큰 소망이 생겨날 것이고 믿음에 있어서도 큰 담대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형제님께서 교회의 리더로서 여러 주간을 예배에 빠지다가 모처럼 나올 때면 굉장히 쑥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직분을 맡은 자가 최선을 다할 때, 결코 그런 쑥스러움과 어려움은 없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큰 담대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5.결론 저는 집사를 선임하는 문제를 일방적으로 회중들에게만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자칫 그것은 인기 투표와 같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공개적인 그 방법이 어떤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다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생계를 위해 직업만 가지고 있다 뿐이지 거의 목사님과 같은 수준입니다. 교회를 생각하는 정도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정도는 목사님보다 결코 뒤쳐질 수 없습니다. 목사님들은 항상 교회가 우선입니다.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 우선시 되고, 가정이 우선시 되는 사람은 그냥 평범한 성도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집사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항상 교회의 종이기 때문에 교회가 우선시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가정을 등한히 하거나 직장을 등한히 하란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놓고 볼 때, 실질적으로 교회를 최우선되는 조직으로 헌신한 사람이 집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기도 후, 교회에 필요한 집사의 수를 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한 수대로 회중에게 기도를 요청할 것입니다. 금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책임감있게 그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경우, 그 사람은 그 일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명목상의 집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되었으니까 그 공로를 인정하는 포상형식의 집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소위 성전 건축을 위해 한 몫 단단히 한 사람에게 장로라는 직분을 떡하니 선사하는 것과 같은 형식의 직분 수여는 필요 없습니다. 이름뿐인 집사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자기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히3:6). 그분의 신실하심이 있었기에 오늘 여러분들은 구원되었으며 또한 성령 안에서 보호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집사로 자기를 부르실 때, 달려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을 위해 주님 자신이 수고하셨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주님의 집을 위해 수고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조만간 우리 교회에도 집사가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집사로 헌신하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 남편들 역시, 집사의 직분으로 헌신할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 수고는 결코 불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 올리실 때, 공중에서 신실한 집사들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이 수고한 헌신에 대해 철저히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남자들이 집사의 직분을 사모하시며, 아내들이여 남편이 집사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함께 헌신하십시오. 주님의 교회는 그렇게 헌신된 자들을 통해서 지켜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된 자들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였던 디모데에게 이 집사 직분의 중요성과 처신에 대해 소개했던 것은 그들이 그 교회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천생명침례교회 안에도 그처럼 중요한 직분을 소중히 여기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딤전3:1-8 교회 안에서 목사의 처신 딤전3:1-8 교회 안에서 목사의 처신에 대해 1.신약교회 안에 있는 두가지 직분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성도들 가운데는 오직 두 가지의 직분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독, 혹은 장로라고 불려지는 목사와 집사였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만일 여기에 감독과 목사, 혹은 장로가 다른 직분이라면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한 감독들과 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과 권사들과 권찰들과...."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목사, 장로, 감독의 의미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목사와 감독, 장로가 동일한 직분을 말하고 있음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말은 "목양하고 가르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베소 4장 11절이 말하는 "pastor and teacher"는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독이라는 말은 "위에서 보다(overseer)"라는 뜻이 있습니다. 일을 관리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을 총칭 "감독자(the bishops, overseer)"라고 합니다. 한 지역교회 안에는 여러 명의 감독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지역교회 안에서 교회의 전반적인 부분을 총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감독(A bishop)"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디모데에게 이런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의 첫 번째 감독이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연장자(elder)"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적인 개념에서의 나이에 따라 말하는 호칭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장로회에서 안수받은 장로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평가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런 본이 되는 사람을 목양을 위해 세울 수가 있습니다. 3.최초의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 신약교회에서 최초 목사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목양자이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poiman)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요10:11) 물론 여기서 "목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흠정역에 "shepherd"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말은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pastor"와 같은 헬라어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위대한 "pastor" 였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the chief Shepherd)"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5:4). 히브리서를 기록한 성도는 예수님을 가리켜 "양들의 큰 목자(great shepherd of the sheep)"라고 증거했습니다(히13:20).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혼의 목자와 감독"(the Shepherd and Bishop)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벧전2:25). 목사나 장로, 감독의 호칭이 다 한가지 직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목사의 호칭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목자의 자세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로 통일해서 그 호칭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감독으로 통일해서 그 호칭을 쓸 수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라는 것이 아주 영광스러운 호칭임을 확신합니다. 형제교회의 성격을 가진 그룹들 중에는 모두가 형제라는 생각만을 강조하다보니 "목사", "감독", "장로"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평신도 중에 어떤 사람이 장로로 피택되었던 장로교회의 영향을 따라,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성도가 교회의 리더가 될 때, "장로"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더 부담없어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직분에 대해서, 도대체 "목사"가 성경에 어디 있냐는 식으로까지 극단적으로 주장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신학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교회를 통해 훈련받고 성도들에 의해 목회적 직무로 세움을 입었다고 한다면 그는 목사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목사인 것입니다. 4.목사와 장로 감독은 하나의 직분 1)베드로의 경우에 의해서 주님은 주님의 어린양들을 베드로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요21:15). 또 "내 양들을 먹이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요21:16,17). 베드로가 맡게 된 양은 모두 주님의 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맡고 계셨던 양떼를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떼를 맡았던 목양자 베드로가 그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 역시 장로요"(벧전5:1)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들에게 권면하기를(벧전5:1)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할 때"(벧전5:2) 이리 이리 해야한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양떼를 치는 목자였으며 또한 장로였고, 감독의 일을 하였습니다. 목사, 장로, 감독은 모두 동일한 직분임을 알게 됩니다. 2)에베소 교회의 경우에 의해서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중 밀레도에 머물면서 에베소의 교회의 장로들을 청했습니다(행20:17). 그들은 분명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감독자로 세워진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행20:28). 장로인 그들은 교회의 감독자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양떼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 목양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떼를 먹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장로, 감독, 목사는 동일 직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디도의 경우에서 디도서에서도 장로의 자격을 말하며 그것이 감독과 같은 것임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딛1:5,7) 오늘날에는 목사와 장로가 서로 다른 것처럼 가르쳐지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직자로 분류하고 장로는 평신도 중에 수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은 신약성경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5.목사(牧師)의 처신에 대하여 목사는 이것저것 하다가 만사불통이기 때문에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쉽게, 또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일하기를 사모하는 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딤전3:1). 때문에 저는 인천생명침례교회 안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으로 바르게 훈련된, 유능한 일꾼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검증이 없이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자격조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으로서 성경이 제시하는 조건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조건 하나쯤은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자세입니다. 아래의 열 일곱 가지는 목사들의 자격을 말할 때 가장 많이 말해지는 내용들입니다. 또한 저는 이것이 처신 문제를 논할 때도 주지되어야 할 사항들임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목사는 이런 삶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목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1)blameless-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딤전3:2)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책망받을 것이 없다는 말은 "저지할 수 없는"이란 뜻입니다. "그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특히 윤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그런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의 사역에 방해가 될만한 책망거리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the husband of one wife-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딤전3:2). a.이 말은 장로의 직분이 여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휘오 여사의 장로직은 비성경적입니다. 더군다나 이휘오라는 분이 남자라고 할 때, 그리고 김대중이라는 분이 여자라고 할 때도 이휘오 여사의 장로직은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불신자인데 남편이 어떻게 장로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내가 믿지 않는데 남편 혼자 목사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존엄한 직분이 남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집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딤전3:12). b.이 말은 목사의 가정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가 이혼이나 재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c.이 말은 목사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직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습니다. 경건치 않은 부부생활, 몰몬교주의자들처럼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이미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목사가 어떤 여신도에게 자기 아내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행동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미 목사로서 처신하는데 빗나간 것이며 죄로 밝혀져야 합니다. d.또 이 말은 목사에게는 독신생활을 강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의 아내가 죽은 후라면 재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혼하지 아니한 자와 하든지, 사별 후 홀로 남게된 여자와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아내와 사별한 목사가 재혼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른 남자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돕는 배필이 필요하기 때문이고(창2:18) 혼인을 금하는 어떤 법령도 성경이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딤전4:3). 왜 이 같은 일이 조건, 혹은 처신이 필요했는가 하면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은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 아내나 남편을 잘 섬기지 못한 사람, 그래서 그 가정을 이혼이나 재혼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경우라면 주님의 교회를 깨뜨릴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3)vigilant - 깨어 있어야 합니다(딤전3:2). 그것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나치지 않으며 적당하게 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들에게는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4)sober-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딤전3:2). 맑은 정신을 가진다는 말은 "냉정하고 진지한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모든 사역을 진지하고 열심히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유모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근엄한 티를 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쨋든 그의 사역에 있어서 냉정하며 진지하고 열심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5)good behaviour-행실이 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딤전3:2). 모든 목사들은 그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바른 행실로 인정될 것입니다. 여기서 행실이 바르다는 말은 여자들이 단정한 것(딤전2:9)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풀이 죽은 눈"에서 유래한 말로서 "겸손하고 낮추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자신을 낮추는 행실들이 목사들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6)given to hospitality - 나그네를 대접하여야 합니다(딤전3:2). 이것은 낯선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믿는 자들이 핍박을 피해 종종 여행을 하며 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복음 전도를 위해 다니는 여행자들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초대교회 안에서는 손님 대접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는 이로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니라."(히13:2) "사랑하는 자여, 네가 형제들에게나 낯선 자들에게나 무엇을 행하든지 신실하게 행하니..."(요삼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다른 교회에서 방문한 성도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사정과 이유로 인해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방문자를 따뜻하게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개해야만 합니다. 7)apt to teach - 가르치는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딤전3:2) 가르치는 것은 장로의 주된 임무입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은 목양자들과 교사들을 하나로 묶어서 한 사람 장로 안에 있는 두 가지 기능으로 보았습니다(엡4:11). 목사는 자동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됩니다.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오직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딤후2:24) 그러므로 가르치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꼼꼼히 연구하는 자세와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만일 잘 알지 못한다면 바르게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목사가 되려 한다면 바르게 가르칠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8)not given to wine - 자기를 술에 내어주지 아니하여야 합니다(딤전3:3). 바울이 디모데의 질병을 위해 포도즙을 쓰라고 권한 것은 사실이지만(딤전5:23), 술을 즐기라고는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술은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는 것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만찬 때, 발효된 포도즙을 사용하므로서 술취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고전11:21). 바울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만찬을 잘못할 경우에 생기게 되는 결과들을 설명하면서 경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로마카톨릭의 사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만찬 때에 절대 포도주 잔을 교인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리고 만찬 때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에도 종종 그것을 즐깁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술에 자기를 내어주고 있는 것은 이미 익숙한 현실입니다. 챨스 치니키가 캐나다의 퀴벡 주에서 금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많은 로마 카톨릭 사제들과 그들의 종교가 술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로마 카톨릭마저 떠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no strike -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딤전3:3). 목사들이 제일 많이 싸우는 곳은 총회장입니다. 멱살을 움켜잡고 욕지걸이를 하고...목사의 구타에 맞는 사모도 있다고 합니다. 목사들을 구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런 일들이 목사의 생활 속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0)not greedy of filthy lucre-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않아야 합니다(딤전3:3) 왜 목회를 하는가? 그것은 어떤 감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인기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편한 생활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교회가 바르게 자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도 꿈꾸지 않습니다. 11)patient - 오직 인내해야 합니다(딤전3:3) 인내라는 말에는 "신사적(gentle)"이라고 번역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보복하지 않으면서 비평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독재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섬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12)not a brawler - 말다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딤전3:3) 목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논쟁이나 파당이나 싸움이 일어나는 것에 주동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목회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때, 오랫동안 사역을 하기 위해 다투지 않으면서 이해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의 종은....자기 자신을 대저하여 행동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딤후2:24,25) 13)not covetous -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딤전3:3) 만족할 줄 모르는 곳에서 탐욕이 생깁니다(히13:5). 돈이든, 집이든, 명예든, ...그러므로 목사가 총회장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애쓰는 것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목사가 좋은 집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14)ruleth well his own house -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딤전3:4)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나 가정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한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가장이 누구입니까? 남편이자 아버지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시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 구절의 첫단어가 무엇입니까? "남자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돌아볼 일들이 남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사회한다. 주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목소리가 커서 남편을 짓누르기 좋아하고 거역하기를 좋아하고 제 멋대로라고 한다면 그런 남편은 목회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가정에 본이 되지 않습니다. 15)having his children in subjection-자녀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하는 자이어야 합니다(딤전3:4) 물론 이 말은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본을 위해 자녀들이 순종하도록 양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벧전5:3). 하나님의 교회를 돌본다는 말은 선한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볼 때 쓰는 말과 같습니다. 16)Not a novice - 초신자는 안됩니다(딤전3:6) 초신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새롭게 심겨진"이란 뜻이 있습니다. 나이는 성숙함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많은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이 같은 중대한 임무, 즉 교회를 돌아보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치원생이 대학원생들을 돌보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17)a good report -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딤전3:7) 목사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깥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골4:5)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바깥 사람을 향하여 정직하게 걷게 하고 또 너희에게 아무 궁핍도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4:12). 6.왜 이런 권면이 필요했을까요? 첫번째로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으로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장로회의 안수를 통해 목사가 되었습니다(딤전4:14).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감독의 자격을 상기시키면서 디모데가 신실하게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래서 이런 권고를 하였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목사가 처신을 바로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혼란을 빗게 될 것입니다. 목사는 사탄의 공격목표가 됩니다. 사탄은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쓰러질 때, 양떼가 흩어진다는 것을...실지로 어떤 사탄 숭배자는 전세계의 목사들이 여자문제나 돈문제, 명예 등으로 인해 타락하기를 원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들의 모든 짐승에게 먹이가 되었도다."(겔34:5) "내가 보매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왕상22:17)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지치고 널리 흩어졌음이라"(마9:30) 주님의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사가 넘어진다면 교회가 위기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모든 종들은 계속 이 디모데전서 3장을 통해 그 자신이 바르게 사역하고 있는가를 비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번째로 디모데는 그 사역을 혼자서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다른 목사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동역자들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교회를 감독하는 한 사람은 안수받은 사역자들을 교회에서 활동하도록 임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목사는 모든 것을 감독하는 목사로부터 임명되었습니다. 이것은 니콜라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둔 목적은 너로 하여금 부족한 것을 바로잡고 또 내가 너를 세운 것 같이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게 하려 함이니"(딛3:5). 바울은 디도를 목사로 임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세웠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는 디도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세운 것 같이 너도 다른 사람을 세우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목사들을 임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디도가 크레테 교회에서 홀로 사역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디도를 도와 사역할 수 있는 사역자들을 임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사는 다른 감독하는 목사(디도:head pastor)로부터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 필요한 일꾼들이 아무렇게나 세울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제시된 자격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바른 처신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교회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입회할 때, 회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듯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 역시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여러 명의 일꾼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일꾼들을 신중하게 선임해서 교회를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사역하는 에베소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 딤전2:11-15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처신 딤전2:11-15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처신 1.내면과 일치하는 겉모습 속 중심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만 그런 것처럼 꾸미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외모로만 그 자신을 꾸미려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속 중심에 주님을 모셨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모신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주님을 모시기만 하면 되었지 생활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그래서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즐기든지, 어떤 옷을 입든지 큰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 행동이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며 다른 사람의 지각을 흐리는 것이 된다면 한번쯤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 문제는 많은 고민을 하는 부분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여자가 입어야 할 옷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디모데 전서 2장 9절이 말하는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스톨레라고 해서 "아래까지 길게 흐르듯이 드리워진 옷"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꼭 죄이는 청바지라면 그것은 카타스톨레가 아닙니다. 또 하체의 곡선을 그대로 부각시키는 스판이라면 역시 카타스톨레가 아닙니다. 미니스커트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역시 카타스톨레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미 여자들이 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시대의 남자들이 입는 옷을 스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브리치라고 하는 바지와 함께 위에 걸치는 스톨, 거들이라고 하는 벨트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허리를 동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 같은 형태로 옷을 입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에게 속한 옷을 입지 말고 여자가 남자에게 속한 옷을 입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22:5).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옷에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장실 안내 표지판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우리 조상들의 옷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에서도 치마가 여성을 위한 옷이며 바지가 남성을 위한 옷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디모데를 향해서 어떻게 여자가 그 자신을 꾸며야 하는지를 일러 준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혹은 라틴어로 "다이아나"라는 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창녀들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장식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그 자신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숭배하러 온 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하며 몸파는 일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만일 교회에 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옷차림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고 그녀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한다면 그 에베소 교회는 당장 그 곳에서 유행하는 여자들, 곧 창녀들이 즐겨하는 복장이라도 거침없이 들어올 판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며 "이 세상과 동화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 자체가 죄는 아니더라도 죄를 장려하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옷을 고르는 것에 대해 한번쯤 고민이 되었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여자의 처신에 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교회 안에 있는 여자에게 금해진 두 가지 교회 안에서 공중예배를 드리게 될 경우, 여자에게 금해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가르치는 것(to teach)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to usurp authority over the man)입니다. 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떤 교사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여권신장을 부르짖는데, 교회라고 그렇게 못하란 법있냐?"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활동했었던 예를 들어 말합니다. 특히 여자들도 대언자였다는 것입니다. 대언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하심 아래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경고, 책망, 위로, 예언 등이 있습니다. 복음전도자였던 빌립에게는 처녀 딸 넷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대언을 하였습니다(행21:9). 예수님께서 나실 즈음에 활동했던 아셀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 안나도 역시 대언자였습니다. 그녀는 구속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언하였습니다(눅2:36). 그런 관습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대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고전11:5). 고린도에는 델피라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에는 여자 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를 숭배하는 그 자리에서 여자들은 사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음란한 일들의 주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영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대언을 한다고 설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대언을 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결코 권장되거나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것 자체가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5).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11:3)라고 했습니다. 머리를 덮는다는 것은 남자의 권위에 순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는 자기들의 머리에 권능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전11:10). 만일 여자가 남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함부로 대언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더 정확하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써야했습니다.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이는 주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여자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음이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이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니라."(고전14:34,35)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자들을 향해 벙어리가 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교제를 위한 대화는 충분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자기 남편을 통해서 배워야 하지, 자기의 모르는 것을 정당화시키면서 교회 안을 어지럽히는 말들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에게 주는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님께서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3.여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된 부분 그러나 여자는 교회 안에서 전혀 가르칠 수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연로한 여자는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연로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거룩함에 합당하게 처신하도록 하며 거짓으로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주지 말며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맑은 정신을 가지며 자기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지키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3-5) 이 말씀에서 보듯이 연로한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로 하여금 가정에 충실하도록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연로한 자매님들이 가정이나 삶에 대해 가르칠 때, 젊으신 자매님들은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같은 자매라 하여 연로한 분들에 대해 함부로 행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인 여자는 그녀의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자가 가르칠 수 있는 경우는 자기의 어린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역할이 여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네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회상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이제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디모데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으로 세우심을 입기까지 그는 그의 가정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던 것입니다. 이 훌륭한 신앙 가르침이 있었기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사역자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디모데가 어린 아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딤후3:14,15). 나는 자매님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바르게 인도해줄 수 있는 성경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경험이 있는 자매님들이 교회 안에서 어린이 주일학교나 중고등부의 교사로는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닙니다. 3)그리스도인 여자는 아직 회심하지 않는 남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남자를 주관하려는 식의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예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직 제대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여자라도 그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복음을 전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일입니다. 요한의 침례만 받았던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준 사람은 아굴라와 그 아내 브리스 길라였습니다(행18:24-26). 그런 것들 외에 여자는 항상 교회 안에서 조용해야 했으며 교회가 요청하는 어떤 일들을 지키거나 돕는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4.그러면 왜 이같은 일들이 여자에게는 금해졌는가? 1)창조의 질서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뒤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으며"(딤전2:1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다음은 이브였습니다. 처음 여자를 이브라고 부른 것도 아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브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아담이란 뜻입니다(창3:20). 아담 시대에 아담과 이브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들 중에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이 첫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창3:20)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브는 모든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living)였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은 이브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브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브의 머리는 확실히 아담이었습니다.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껏 모든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해야만 하는 위치를 갖는 것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의 욕망이 네 남편에게 있으리니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he shall rule over thee)"(창3:16) 하나님은 이브에게 그 남편의 다스림 아래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온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submit yourselves unto your husbands)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submit yourselves unto your husbands).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골3:18)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being in subjection unto their husbands) 자기를 단장하였음이라"(벧전3:5) 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이 권위자로 세움을 입게 된 것입니다. 권위란 그것이 계급은 아니라 하더라도 존중되어야 하며 또한 권위자를 향해 복종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권위자는 그에게 주어진 권위로 권위에 순복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적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매들은 자기 남편을 권위자로 알고 존중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음이라"(고전11:8,9) 하나님께서는 이브를 만드실 때, 아담을 돕는 자로 만드셨습니다(창2:18).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형상이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에 라든지 대언을 할 때에 그 머리를 덮지 않습니다(고전11:7). 모든 남자들이 간혹 모자를 쓴다 하더라도 기도할 때는 벗어야 합니다. 그 자신의 머리를 덮는 것은 자기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고전11:4).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머리로 하고 그 남자를 드러내는 것이 주된 삶의 자세입니다.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는 그 머리인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고전11:5). 그러나 만일 여자에게 긴머리가 있다면 그것은 그 머리를 덮는 것 대신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남자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1:15). 만일 여자의 머리가 짧다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1:6).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남자와 같게 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권위 행사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있는 여자가 다른 권위자들, 곧 다른 여자들의 남편들을 주관하며 그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무질서입니다. 오직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배우며 조용하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분명히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습니다(딤전3:2). 그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남자이어야 합니다(딤전3:5). 집안을 다스리는 권한이 그 남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안을 잘 다스린 남자가 주님의 교회도 돌아볼 수 있다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선명하게 있는데 여자가 한 교회에서 권위자와 머리역할을 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무지이며 무질서를 조장하는 지름길입니다. 분명히 처음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서 남자는 권위자로 설정되었고 여자는 돕는 자로서 설정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죄 가운데 있었음이라."(딤전2:14) 왜 여자가 속아 범죄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했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산 나무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은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지 이것이 추측이 아닌 것이, 그녀는 뱀이 물었을 때, 몇 가지에 대해 대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관한 금령은 아담이 받았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창2:16,17) 우리가 이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처음에 그 말씀을 남자에게 주셨고 그 남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브였습니다. 3)여자는 더 약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여자는 마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유혹할 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뱀이 남자를 유혹하지 않고 여자를 유혹한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여자가 더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약하다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잔다르크도 있고, 엘리자베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보호아래 있게 했습니다. 여자는 그래서 약한 존재, 보호가 필요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이 남편으로부터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다른 이들를 지키며 그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특히 다른 사람의 아내인 여자가 그래서 한 남자의 보호 아래 있는 여자가 어떻게 다른 남자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양자는 성도들의 보호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서로 돕는 역할은 할 수 있다하더라도 책임과 보호를 하는 권위자의 위치에는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3:8) 성경은 알고 있습니다. 여자가 유혹받기 쉽다는 것을...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여도 자기 생각이나 어떤 의견들을 가감하므로 넘어지기 쉽다는 것을...그러한 연약한 그릇이 다른 남자들의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교회 안에서...? 뱀에게 속아 범죄한 것이 누구입니까? 여자입니다. 비록 여자가 이렇게 약하고 범죄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한다면 그녀들이 구원받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딤전3:15). 그러나 어쨌든 주님의 교회 안에서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었습니다. 4)여자 목사들에 대한 평가 그러므로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되어진 종"이 분명합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권위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가정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중적인 자와 같습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 상받을 수 없는 허망함 속에 빠져 있으면서 성도들에게 보상을 위해 달리라고 말하는 공허한 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 스스로 법대로 경주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법대로 경주하라고 주문할 수 있단 말입니까? 5. 바울은 왜 이런 권고를 디모데에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젊은 여자들이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고 가정을 지키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4)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 그리고 그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가정을 지켜가는 것,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며, 다른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려 들어서도 안되며, 조용히 자기 남편에게 배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것을 에베소 교회에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여자들에게 그들의 단정함과 교회 안에서의 처신에 대해 가르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의 교회인 우리 교회가 성경이 가르쳐주는 원리들을 무시하지 않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랍니다. 구약에 드보라가 여자 사사였고, 이따금씩 여 대언자들이 등장한다하더라도, 또 어떤 교회에서 대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여자가 말하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전에 활동하던 여대언자들은 특별한 경우였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행동한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