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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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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외면적 그리스도인 내면적 그리스도인
lhyunsik

[도서] 외면적 그리스도인 내면적 그리스도인 저자 : 워치만 니 작성 자 : 이 현식형제 ( 토론토 은혜침례교회 )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릴 때 침례 받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고,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외울 줄 알고, 찬송도 부를 줄 알고, 다른 사람이 기도할 때 아멘도 하고, 성경도 한 권 가지고 있고,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에도 익숙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의 관점에서 제시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타고난 관념인지 일깨워 줍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누구든지 외면적으로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는 외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알 때,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내적인 계시로써 성령 안에서 주 예수님을 접촉하고 직접 관계를 맺고 대면하여 만나는 사람만이 내면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외면적 그리스도인’입니까, ‘내면적 그리스도인’입니까? 이것은 엄중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에 따라서 진리와 환경의 시험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외면적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환경의 시험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반면에 계시가 있는 내면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귀히 여기며 그 어떤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에, 많은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주님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적으로 알았던 제자들은 모두 도중에 물러가거나 심지어 주님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외면적인 것은 헛된 것이고, 내면적인 것만이 참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워치만 니는 이러한 내면적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생명 안에서 성숙하는 길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상과 그 실재를 보게 하며, 어떻게 주님과 동역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지에 대해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며 예비하는 생활을 하도록 사랑 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국복음서원은 워치만 니가 전한 메시지를 모아 〈열두 광주리〉라는 제목으로 12권의 책을 출판했었습니다. 이번에 그 책들 중 다섯 번째 책을 새롭게 개정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원문대조를 통하여 꼼꼼하게 부족한 부분을 바로 잡고,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수정되었기 때문에 이 책은 읽는 이에게 하늘에 속한 풍성한 양식으로 만족을 줄 것입니다. 한 메시지, 한 메시지가 다 밝은 빛을 내고 있어 열두 메시지가 반짝 반짝 빛나는 열두 개의 보석과 같습니다. 이 보석 같은 메시지 안으로 들어갈 때,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영을 공급받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 목 차 >------------------------------------ 1. 외면적 그리스도인과 내면적 그리스도인 2. 생명과 느낌 3. 그리스도의 몸의 느낌 4. 주님의 기쁨을 구하라 5.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 6. 하나님의 일[ 요 6:28,엡2:10, 갈 1:11-12,16,고전 3:9-15] 7. 섬기는 가운데 배우라 8. 기도와 하나님의 일 9. 깨어 근신하라 10. 기적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1.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12. 자기의 날들을 계수하라 ------------------------------------------------------------- 1 장 . 외면적 그리스도인과 내면적 그리스도인 성경 : 롬 2:28-29, 갈 1:11-16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에 있는 “표면적 … 아니요 … 이면적 … 이며”,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라고 쓰인 몇 구절의 말씀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몇 가지 대비, 곧 표면(외면)과 이면(내면), 의문과 영, 사람과 하나님이 있다. 성경은 이 몇 가지 대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는 외적인 규례, 의문(儀文), 예절을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인 생명을 주의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외적인 종교나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인 계시이며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 침례를 받았고, 자주 예배도 보러 가며, 성경도 한 권씩 갖고 있고, 주기도문도 외울 줄 알고, 십계명도 알며, 찬송도 부를 줄 알며, 다른 사람이 기도할 때 아멘도 하고,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에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외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외적인 가르침이나 배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내면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이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0:10, 원문 참조).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생명과 관계가 있으며, 반드시 외면적으로가 아닌 내면적으로 되는 것이다. 생명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생명은 곧 주님 자신이다.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은 주 예수님을 알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에 달려 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조상의 엄격한 율법으로 교육받은 것에 따라서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었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간증했다. 아, 어떤 사람이든지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없으면 그의 열심은 다 헛된 것이다. 그가 아무리 조상의 전통을 잘 지켰다 할지라도, 이러한 조상의 전통을 통해서 주님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그의 속에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어느 날,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주님은 즉시 그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6:13-17).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당신에게 계시가 있어야 하며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나는 예수님의 인품에 감탄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주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예수님에 대하여 감탄하며 예수님을 숭배하고 기독교에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까?”라고 다시 물을지도 모른다.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감탄하느냐 감탄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호감을 갖느냐 호감을 갖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당시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침례 요한이라고 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 했고, 또는 예레미야라고도 했다.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가 좋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다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이요, 사람의 의견이다. 기독교는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관점과 사람의 의견은 기독교를 대표할 수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계시를 받으면 성령 안에서 주 예수님을 접촉하고 주 예수님을 만난다. 그는 주 예수님과 직접 관계를 맺고 그 자신이 주님과 대면한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언젠가 어느 형제의 집에 전선이 고장 나서 사람이 감전되기 쉽게 놓여 있었다. 부주의하여 손이 그 선에 닿자, 그 형제는 짜릿하게 전율을 느꼈다. 그는 “아유 저려! 아유 저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손이 감전된 것을 보고 자기도 감전된 것처럼 흉내를 내며 아버지와 똑같이 “아유 저려! 아유 저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아들은 외면적으로 흉내 낸 것이고, 아버지는 참으로 감전되어 그 실재를 맛본 것을 안다. 형제자매여, 외면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거짓이다. 실제로 맛본 것만이 참이다. 당신은 반드시 이 형제가 감전된 것처럼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당신은 과연 오늘 이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당신 자신 속에서 어떻게 말하는가가 문제이다. 만일 당신 자신 속에서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밖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 당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것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회 개혁자라고 말하면 당신도 역시 예수님을 사회 개혁자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의 신앙은 밖의 사람들을 따라서 움직일 것이고, 당신 자신도 당신이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지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는 주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거듭남’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니고데모는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2-3절). 선생이 중시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요, 배우는 것이요, 외적인 것이지만 거듭남이 중시하는 것은 영이요, 생명이요, 내적인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라는 문을 통하여 들어온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다 알고, 세례를 받고, 심지어 성경 안의 예표와 예언을 다 해석하고, 또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행위, 즉 기도나 예배나 헌금 등을 다 배워서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줄로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은 기독교를 잘못 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반드시 거듭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거듭나지 못하고, 그 속에 주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기독교는 외적인 종교가 아니요, 오직 내적인 계시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면적으로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주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이 있다. 그 이튿날 사람들이 다시 주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26-27절)라고 밝히 말씀하시고,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다만 떡을 배불리 먹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밖에 있는 물질적인 떡만을 보았을 뿐, 안에 있는 생명의 귀함은 보지 못했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은 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감추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들을 향해 열어 놓으시고, 자신이 곧 생명의 떡이며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끝까지 밖에서 빙빙 돌 뿐이었다. 그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42절)라고 말했다. 그들은 다만 밖에서 주 예수님을 알 뿐이었다. 주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향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51절)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다만 외적인 것만을 보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밖에서만 알려 했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밖에서 깨달으려고 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성경에 곧 이어 기록된 말씀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 유대인들이 몰랐을 뿐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분명히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라고 말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의 여러 사람이 그에게서 물러갔고 그들은 다시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넘어졌고 더 이상 제자로 계속 남아 있지 않았다. 밖에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많은 사람을 주 예수님께로 이끌어 왔지만 내적인 생명의 양식을 내놓을 때에는 제자들조차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외적인 것은 쉽게 중시하면서 내적인 것은 그렇게도 쉽게 경시하는지! 형제자매여, 우리는 여기에서 경계를 받아야 한다! 제자라 칭함을 받은 사람도 많지만 도중에 물러간 사람도 많다. 외면적 그리스도인은 도중에 물러가게 된다. 내적인 생명을 만지지 못한 사람은 도중에 물러가게 된다.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단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계속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물러가는 이유는 어떤 고난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 아니요, 어떤 시험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물러간 이유는 다만 한 가지, 곧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진리 앞에서 넘어진 것이다! 아, 형제자매여! 외적인 것은 소용없다. 외면적 그리스도인은 진리 앞에 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받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의 참 진리에 부딪힐 때는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하고, 오해하고, 심지어 비웃고 반대까지 한다. 그들은 단지 기독교의 간판만을 원할 뿐 기독교의 진리는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신학’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주님의 말씀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3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면적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성경을 믿고, 성경을 존중하고, 성경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곧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으로 가져야 할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면서 성경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존중하지 않고, 비판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물러간 제자들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제자들이라고 불렸을지라도 실지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경은 여기에서 명백히 기록했다.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64절). 이러한 외면적 그리스도인은 도중에 물러가거나 아니면 제자들 중에 섞여 있다가 결국에는 주님을 팔 사람이다. 제자라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물러갈 때, 주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7-69)라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계시를 주시어 이 나사렛 예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주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의 시금석과 같아서 누가 그분을 참으로 믿는가 참으로 믿지 않는가, 누가 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외면적 그리스도인인가를 분별한다. 계시가 있는 그리스도인, 내면적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이길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귀히 여기며 그 어떤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핍박과 환난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 어느 날, 그는 가이사랴로 묶여 가서 베스도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했다(행 25:18-19). 형제자매여,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당신은 외면적 그리스도인인가, 내면적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바울 안에 계시해 주셨다.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었다고 해도 그는 예수님이 살았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감옥에 가두었어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했고, 사람들이 많은 죄명을 씌워 그를 고발했어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을 간증할 수 있었다. 아, 형제자매여! 외면적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환경의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철저히 해결해야 한다. 과연 당신이 아는 기독교는 외면적인가, 내면적인가? 과연 당신은 전통을 따라서 또는 배워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아니면 계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과연 당신이 아는 주 예수님은 두뇌로 안 것인가, 아니면 생명과 계시로 안 것인가? 과연 당신이 속한 기독교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마지막으로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데, 외면적인 것은 헛된 것이고, 내면적인 것만이 참된 것이다. ======================================================= 2장 . 생명과 느낌 생명은 느낌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더욱 느낌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생명은 만지기가 어렵고 매우 추상적이지만, 느낌은 감지할 수 있고 구체적이다.생명을 꺼내 놓고 볼 수는 없으나 느낌으로써 생명을 알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영적했을 때, 우리는 그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가 거듭났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부터 났고,하나님에게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있는 것을 어떻게 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 하나님의 생명의 존재여부는 이 생명의 느낌으로 증명된다. 만일 그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느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느낌이란 무엇인가 ?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할때 그는 반드시 괴로움을 느끼고,평강이 없어지는데 이것이 느낌이다,그가 죄를 범할때 즉시 하나님과 간격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그가 죄를 범할 때 즉시 속에서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악을 미워하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반드시 죄에 대한 느낌을 갖게된다. 그에게 생명의 느낌이 있는 이것이 바로 그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는대, 그에게 죄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그 사람은 과연 거듭난 사람일까 ?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 이 생명의 느낌이다, 단지 이론만 알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할뿐,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성령이 그의 영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지 않으며,그는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이런사람은 기도을 해도 그 기도 속에 죄를 멀리하는 느낌이 없고,하나님과 친밀한 느낌도 없다. 이런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이며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새 새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고,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신 것도 느껴지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느낌이 없다. 또한 ,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의 느낌을 갖고있다. 고전 12:26에서 고통은 일종의 느낌이고, 즐거움도 일종의 느낌이다. 지체가 많아도 생명은 서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느낌도 통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몸의 생명을 본 자에게는 반드시 느낌이 있고 ,반드시 다른지체와 서로 통하는 느낌이 있게 된다. 영적인 일에서 교리(지식)만 알고 느낌이 없어서는 안된다. 만일 거짓말한자가 그의 속에 죄의 느낌이 조금도 없다면 그가 입으로 이것이 죄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가 한 면으로 거짓말이 죄라고 말할지라도, 또 한면으로는 항상 거짓말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사람은 그가 거짓말을 하려 할때 그의 속에 고통을 느껴진다. 이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속에 생명이 있는 사람,속에 느낌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즉, 생명이 없고 느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를 듣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구속하셨는가를 아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의 속에 죄에 대한 느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느낌이 있고 없음은 그의 속이 진실인가,거짓된가를 나타내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명의 느낌은 다른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속에서 자연히 알게되는 특성이 있다. 다른사람이 말해야만 비로서 아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일이 죄인가 죄가 아닌가, 이 일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다른사람이 말해야지만 비로서 안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만일 다른사람이 당신에게 말하는것을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 그리스도인은 밖의 다른사람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듣고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속에서 가르치는 그 무엇, 즉 속에있는 생명과 느낌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마땅히 속의 느낌을 주의해야한다. 속의 느낌은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온 것이요,생명으로부터 온 것이요,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참된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참된 느낌이있다. 느낌이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능히 생명의 느낌을 만질 수 있고 생명의 느낌 안에서 살 수있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느낌을 주시어 모든 일에 있어서 느낌이 있기를 구한다. 죄에 대해 느끼고,하나님에 대해 느끼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느끼고,모든 영적 실재에 대해 느끼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시고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얻으시기를 원하신다. =============================================================== 3장 . 그리스도의 몸의 느낌 ( 롬 12:3-5, 고전 12:25-27, 엡 4:12-13, 15-16) 1. 형제를 사랑함 (요1 3:14)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자는 자연히 그와 함께 지체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속에 있는 느낌이요, 속에서 생겨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와같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피로 사셨으며, 그 동시에 그분의 생명을 얻고,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그들은 함께 지체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2. 분쟁이 없음 그리스도의 몸을 본사람, 곧 몸의 느낌을 가진 사람은 분쟁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자녀를 나누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의 속의 느낌이 허락하지 않는다.그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개인주의는 한 사람의 개인주의에서 몇 사람의 개인 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교회가운데서 우리는 때때로 그룹을 지어 오직 그들 몇사람만이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사랑하며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같이하지 않는 것을 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몬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몸을 본 사람은 어떠한 형식의 개인주의도 있을 수 없으며 파벌이나 작은 단체도 만들 수 없다. 3. 개인적인 일에서 벗어남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다 자신이 참여해야 하고 자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지 그는 자신이 한 것은 영적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은 영적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이것이 곧 일을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러나 어느때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몸이 하나임을 보게될때, 그들은 일이 하나라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이 일을 당신이 했느냐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 일을 했으면 , 족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일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하지만 영웅심이나 질투심을 가져서는 안된다.우리가 일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능히 할 수 있기를 바라며,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사람은 하기를 바라야 한다. 일에 있어서 나는 다만 하나의 그릇이 될 뿐, 일을 독점하거나 그 일의 결과를 모두 나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 언재든지 몸을 보았을때 나의 일과 그의 일이 다 머리(그리스도)로 부터 온 것이며,나의 일과 그의 일이 다 몸을 위해 있는 것이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모든 촉복을 다 교회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보게된다. 주님께서 그분의 일을 각 사람에게 각 사람의 몫에 따라 나눠주셔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내직분에 총성을 다하며, 주님께서 다른사람에게 준 그 직분을 존중해야한다. 3. 교통의 필요성을 발견함 그리스도의 몸을 본 사람은 자연히 교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자기 혼자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된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어려운 일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자신의 앞길이 막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던 중 분명하지 않을 때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교통이 의미는 곧 나 혼자의기도는 부족하므로 두 세 형제자매와 함께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고, 나 혼자서는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없으므로 함께 극복하기를 구하는 것이며, 나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 수 없으므로 함께 알기를 구하는 것이고, 나 혼자서로서는 내 앞길의 막막함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함께 교통하며 해결책을 구하는 것이다. 또 나 혼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닭을 수 없으므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교통이란 바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자신에게 몸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통의 의미는 곧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가 그릇될 수 있으므로 주님 앞에서 영적 빛이 있는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이며,이 생명의 느낌을 가진다, 당신 스스로 교통이 없이는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4. 지체가 됨 누구든지 몸의 느낌이 있는 사람는 몸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알게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몸 안에서 하나의 지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체는 특별히 정해진 기능이 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몸의 지체가 된다고 말하고,세포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가 지체가 되었으므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몸이 도움을 얻게 되고,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얻게 되며,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몸을 얻게 되는지를 구해야 한다. 나는 몸의 지체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할 말을 하고, 마땅히 기도해야 하며, 집회에서 하나님께 나에게 하시는 것을 하여,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 할 것이다. 5. 권위에 순복함.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본다면, 당신은 머리의 권위 아래 있다는 느낌이 있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느끼고, 분쟁이 그릇된 것임을 느끼며,교통의 필요함을 느끼고,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들이 다 몸의 느낌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안다면, 자신이 지체임을 느끼게 되며 머리의 권위를 느끼게 된다. 내손은 머리의 권위 아래 있을 뿐 아니라 어깨가 움직이게 되므로 말미암아 머리의 권위에 순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에 세운 권위에 그가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보게된다. 때로 어떤사람이 당신에게 "가서 이 일을 하십시요."라고 말하지만 당신이 기도할때 주님께서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시므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때 당신은 기쁨을 느끼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끼게된다. 그러나, 한번, 두번, 당신이 거듭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당신은 당신과 주님사이에 문제가 발생기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 당신이 몸을 본다면,머리의 권위를 본다면, 그 몸에서 당신이 순복해야 할 사람이 당신 앞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형제자매여, 주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신다면 몸이 무엇인지 보게되고, 권위가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몸의 각 부분이 그렇게 조화를 이룰 수있는가? 어떻게 온몸이 하나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몸에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몸에 권위가 있기때문이다. 몸에 권위가 없으면 온몸이 혼란스러워진다.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것은 병적인 상태이다. 권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알 수있겟는가 ? 몸을 안 사람들은 서너명이 함께 모였을 때에도 누가 나의 권위인지 알아서 그에게 순복한다. 각 사람에게는 다 순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손은 팔뚝에게 순복하고 팔뚝은 어께에게 순복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너 명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몸을 볼 수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위에 순복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자기가 가장 큰 사람처럼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며 다른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이것은 그가 몸의 제한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머리의 권위에 순복한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참으로 다루심을 받고,우리의 육체가 참으로 다루심을 받으며,타고난 생명의 등뼈가 주님에 의해 부러진다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손이 그렇게 자유럽지 않고 우리의 입도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는 곳을 볼것이다. 또한 우리의 몸이 우리를 제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리에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알도록 인도하시기를 구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느낌이 계속 있음으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지않고 ,어리석게 제멋대로 세월을 보내지 않기를 구한다. 이렇게 할때에 우리는 몸으로부터 풍성한 공급을 받게 되고 몸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증거가 이땅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 5 장 하나님의 사람과 늙은 선지자 ( 왕상 13:1-32 ) " 하나님의 사람"이란 바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교통이 있는 사람을 뜻 한다. 교통은 밝은 빛의 근거이다. 언제든지 교통이 그칠때 밝은 빛도 그친다. 이 늙은 선지자가 과거에 영적체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하나님과의 교통을 읽었고 늙은 선지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를 더 이상 쓰실 수 없었다. 많은 형제자매등의 영적 상태가 십년,혹은 팔 년전의 영적상태와 똑같다는 것은 하나님앞에 영적 진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에게는 단지 머리의 지식만 있을 뿐 참 빛은 없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이다. 늙은 선지자가 벧엘에서 경배하는 것이 죄인 것을 보지 못한 것은 그가 이미 병들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절대로 무엇이든지 좋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지말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늙은 선지자와 같이 그 눈이 혼미하고 병들어서 무엇이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인지 보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좋은 일이 때문에 어디서 경배하든 좋다고 생각하여, 밷엘에서 경배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형제자매여,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겠는가 ? 의사가 환자를 염려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환자에게 병이 있는데도 병이 없다고 말할 수는없다.만일 의사가 질병이 있는 환자에게 병이 없다고 말한자면 그것은 그 의사가 눈이 멀어 자격이 없는 의사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참한 것은 늙은 선지자뿐만이 아니었다. 더 비참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해 (害)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있은 후에는 아무리 노련한 선지자의 말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절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엄중한 교훈을 알려준다.(갈 1:8, 1:11-12, 고후 11:13-15) 미혹하는 사람들은 항상 교회 안에 들어와 사람의 믿음을 손상시키고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도록 유인한다. 그들은 영적인 것처럼 가장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꾸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하나님의 뜻"등의 말들을 운운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미혹을 받게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참으로 깨어있는 마음과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절대로 충성하여 우리가 받은 그 진리를 지켜야한다. 결론적으로 다시말하자면 , 어떤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오랜 경력"에 속아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 머무르지 않아야 할 곳에 머무르면 ,사망-영적죽음-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일에 관한 우리의 말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늙은선지자나 천사가 와서 말할지라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 6 장 하나님의 일[ 요 6:28,엡2:10, 갈 1:11-12,16,고전 3:9-15] * 성령의 일 * (1 ) 일의 시작 - 오순절 (2 ) 일 하는 것 - 사람의 영 성령은 거듭난 사람의 영안에 사신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직접적일 수도 있고 간접적일 수도있다. 직접적인 일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영 안에 계시하시고 ,사람 의 혼을 비추어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 후에, 그의 몸 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 할 수있게 하시는 것이다. 간접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사물을 이용하여 - 때로는 성경 말 씀으로, 천사, 어떤 사람이나 물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3) 일의 방향 - 중심에서 둘레로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인 영 안에 계시하시고, 그 다음 혼 안에 들어와 생각으로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나서 몸으로 그 분의 뜻을 수행하게 하 신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의 생각을 비추실 때, 우리의 생각은 깨닭 게된다.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는 것은 죽시 거절 당하게된다. 이러한 방 식으로 우리의 혼은 거룩하게된다. (4) 일의 방법 - 계시 계시는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이다. 계시는 영안에있다. 그러므로 영이 첫째요, 생각이 첫째가 아니다. 영과 생명이 먼저요,생각과 머리(두뇌)는 나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을때,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그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안에 계시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 후 빚을 우리의 생각에 비출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 (5) 일의 노선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안에 조성되게한다. 계시로 그리스도를 깨닭은 분량이 곧 영적 생명의 분량이다. (6) 일의 양식과 목표( 요일 3:3) 오늘 성령께서 우리안에 건축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라는 본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의 것은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성령님은 사람이 주님과 똑같이 순수해질 때까지 일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하실때 그가 가져야 할 합당한 태도 *** - 첫째, 시시때때로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경배하고, 끈임없이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그리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된다.(살전 5:17, 고후 3:18) - 둘째,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 밷전 5:5) - 셋째 , 산만한 생각과 바쁜사람은 계시를 받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형상을 그의 속에 새겨 주님의 형상이 되려면 반드시 주님 앞에서 잠잠한 것이 필요하다. - 넷째 , 주님의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님께 드린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설교 안에서 사람의 음성만 듣고, 그 음성 안에있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일것이다. *** 하나남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람 *** 1. 성령 안에서 말씀을 전해야한다. 영에 속한 것을 성령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들을때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잠 11:22) 2. 육체에 속한 분위기에서는 말씀을 전할 수없다.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들떠 있을때, 즉 영적분위기를 만질 수 없을때에는 말씀을 전할 수없다. 3. 사람에게 영적인 실재를 공급해야 한다. 어떤 이상이나 철학이 아니다. 4. 말씀을 전할때에는 영적인 것들을 전달하기 위해 주님께서 합당하고 영적인 구변을 주시기를 구해야한다.즉, 영적인것을 영적인말로 해석하는 것이다. ( 고전 2:13) 5.영적인 일은 영적인 사람만 깨닭을 수있다.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깨닭을 수 있다.(고전 2:14)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실재를 보여 준 후에 적절한 말로 설명하여 듣는 사람이 영적 실재를 얻을 뿐만 아니라 영적지식을 갖게 해야 한다. *** 말씀을 든는 사람 **** 1. 좋은 교리를 들으려는 생각으로 가지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마음으로 가야한다. 2. 영적인 것을 깨닭는 능력은 영적 연령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을 때 당신은 겸손히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된다. 3. 대치물을 주의하라 .(든는 사람이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말함) 우리가 말하는 실재는 성령깨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실행을 가지고 실재를 대치한다.(고전 13:3) 4.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듣는 성도들과 자신을 위해 기도을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야한다.이것이 바로 함께 동역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수 있으며,우리는 계시로 본것을 다만 말하는 것임을 깨닭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길 바란다.우리는 시시때때로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눅 17:10)라고 시인해야 한다. ================================================================ 7 장. 섬기는 가운데 배우라 ( 롬 7:6,12:1, 출 40:17-33) 교회 안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배울때,사무적인 일을 마땅히 충성스럽게 해야 하지만 영적 분량이 더해지는 것 또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여러가지 사무적인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목적은 영적인 공급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사무적인 방면만 있고 영적인 방면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근본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책임을 주셨는데 우리가 사무적인 방면만 주의하고 생명 방면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큰 손실을 빚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 방면에서 부족하다면 우리의 봉사는 하나의 활동에 불과하고 사무적인 것으로 떨어질 뿐이다. 우리가 생명 방면에서 부족하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았는 것은 생명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생명이 자라야지만 실제적인 일을 통해 형제자매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려 한다면 영적인 면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배우지 않고 일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시는 것은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죽시 우리의 성공을 치신다.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인 방면에만 주의하고 일하는 과정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은 성소에서 봉사하기 전에 먼저 제단을 거처야 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의 죄를 위해 제물을 드려야했다. 더 나가서 물두멍에 가서 물로 자기의 더러움을 씻어야 했다. 그 후에야 성소에 들어갔다. 성소안의 모든 것은 다 금으로 입혀졌고, 다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손이 닿는 즉시 손자국이 나게 된다.누구든지 성소에 들어와 봉사하면 즉시 그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성소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뜻대로 일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일 할 수 없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반드시 우리의 죄를 주님의 피로 씻고,물두멍에 가서 더러움을 씻으며,더욱이 자아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느낌이 사람이 비로서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사람이다.사람이 성소에 들어가면 즉시 그 자신이 드러난다. 이와깉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통해 당신은 자신의 참된 상태를 알 수있다. 하나님을 섬길때,당신은 자신의 죄를 보게 되므로 피로 깨끗하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고,자신의 더러움을 보게 되므로 물로 씻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자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 한다.영적 분량은 바로 하나님을 섬길때,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릐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형제자매들이 적어도 죄를 보게되고,더러움을 보게 되고,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느낌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증명하며,거룩한 곳임을 증명한다. 사람들이 그곳에 올 때,죄와 더러움과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낌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부른다. 이렇게 할때 당신은 자란다. 우리자신의 상태를 볼 수록 우리의 생명은 자란다. 우리가 거룩함을 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배우게 되고,유용하게 되고,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길을 얻게 되신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봉사가 영적 분량이 없이 사무적인 일 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바란다. ================================================================ 8 장 기도와 하나님의 일 (엡 6.:18, 겔 36:37, 사 62:6-7)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한 가지 종요한 원칙은 바로 사람미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기도함으로써 그분과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이 동의하기를 기다리신 다음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때, 먼저 그분의 뜻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넣어 주시고, 우리가 그 뜻을 기도로 반향한 후에야 비로서 그 일을 행하신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그러므로 자기뜻에서 나온 기도는 모두 무익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합심할 때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영적축복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 대하여 수시로 기도해야 하고(멥 6:18) 일반적인 기도를 해야 할 뿐 아니라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충분히 세밀하고 치밀하게 각 방면에 대해 기도한다면, 사탄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사탄에게서 온 모든 것을 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처리하시기를 원합니다,"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보혈)가 사탄을 대적하는 가장 좋은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고, 사람과 일을 위한 기도이고,마귀를 대적하는 기도이다. 우리에게 이 세방면의 기도가 이루워질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기도하도록 재촉하실 때 당신은 기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끼게되고 어떤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된다. 당신이 만일 끝까지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 당신의 기도의 영과 기도의 느낌은 점점 둔해져서 나중에는 이러한 느낌을 갖기가 어려워지며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기도할 마음을 우리 속에 넣으실 때마다,성령은 먼저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어떤 일에 대해 특별한 기도를 해야 할 부감을 갖게 하신다. 당신에게 이러한 느낌이 있을 때,당신은 즉시 기도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소멸시키고,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재촉하실 때, 그 느낌을 소멸시킨다. 그런면 후에는 이런느낌이 그에게 들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는 주님앞에서 쓸모없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도해 낼 수 없게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느낌을 상실한 정도까지 떨어졌다면,당신은 이미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었고,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통해서 그분의 일을 하실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 11장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 골 3: 16)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속이 매우 빈곤하다,왜냐하면 골로새서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말씀이 그들속에 풍성히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빈곤한 사람은 성경을 한 장 한장 ,한 메시지 읽고 해석한다 해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만지지 못하고,하나님을 접촉하지 못하며,말씀안에서 생명을 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한 것이다. 당신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성경을 읽는 것이 당신의 영적 생명의 가장 좋은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하며 기도해야한다 . 당신은 한 구절,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에는 평상시 기도 할때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당신을 읽기와 기도를 같이 해야한다. 당신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말해야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 놓고 읽으므로서 자신도 듣고 하나님께도 읽어 드리는 것이다. 당신은 빨리 읽지 말고 세세히 읽으면서 되씹어야 헌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 맑씀을 읽을때 기도하면서 읽고 ,성경을 쓴 사람의 영을 만진다면,당신의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면 생명의 양식이 충만한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떤 곳을 읽든지 묵상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묵상해야 한다. 어떤사람은 기도할 제목이 없다고 말하는데,성경 안에는 실제로 기도할 제목이 많다.당신이 읽은 그곳이 기도할 제목이 있는 것이다. 성경안에 있는 많은 것으로 당신은 기도하고,찬미하며,당신의 죄를 자백하고, 다른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있다. 또한 성경을 암송하는 것도 큰 유익이 된다. 당신이 모르는 구절을 다른사람이 암송할때 깨닭을 수있게된다.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한 사람이 읽고 다른사람이 듣거나, 돌아가면서 읽는 것도 좋다, 오늘 읽은 성경을 또다시 읽어도 좋다. 이렇게 읽을때 성경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 가운에 거하게된다. 성도여러분, 무엇 보다도 먼저 ,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는 습관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읽는 것이 생명이 자라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믿는다. =============================================================== 12장. 자기의 날들을 계수하라 (시 90:42),(엡 5:16-17), (욜2:25) 1. 우리의 영적인 날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에 따라 계수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을 때에는(엡 2:11)하나님 앞에서는 계수되지 않는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때 ,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날들은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라고 하셨다. 첫 달은 그 해의 시작이요.계수되는 날들의 시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달에 유월절 양을 잡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달을 첫 달로 삼게 하셧다.그 달부터 하나님앞에서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의 영적 역사는 얼마나 되는가 ? 어떤 사람은 나이가 50세,60세가 되었지만 영적 나이는 1년,혹은 1개월밖에 안 된다, 영적 나이는 당신이 거듭난 날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주님께 구원받은 그날이 바로 당신의 영적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믿은 후 일년이 지났다고 해서 반드시 일 년으로 계수될 수없다. 당신이 주님을 믿은 후 5년이 흘렀어도 , 하나님 보시기에 다섯 살 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있다.바꾸어 말해서 당신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도 어떤 날은 하나님 앞에서 있는 날로 계수될 수없다. 성경은 어떤 날들이 기록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 보시기에 허송세월한 날들이고 계수할 수없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두 계보가 나온다.가인의 계보는간단한 곳은 하나님께 득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교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의 계보가 세밀한 것은 아벨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이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간 노정을 볼때 우리는 시간의 낭비가 얼마나 엄중 한가를 알 수있다. 그들은 광야에서 2년이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는것을 38년이나 허비한 후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가데스 바데아에 와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긴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 한것이다.(신 1 :2) 우리는 영적 노정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낭비하는지 모른다. 닷새면 해결될 문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오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 광야에서 방황하여 많은 날들을 허비한 것과 같다. 이 손실은 참으로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온 때부터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할 때까지 몇년이 경과되었는가 ? 사도행전 13;18-22절 상반절까지에서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오십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라고 말한다.(다윗이 왕 노릇 한 것은 사십년 동안이다- 삼하 5:4). 이것은 계수하면 애굽에서 나온 때부터 솔로몬이 왕이 된지 사년째 되는 해,처음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 때까지는 몆 년인가 ? 40년에 450년을 더하면 490년이요. 490년에서 다시 40년을 두번 더하면 570년이 된다. 570년에서 다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의 3년을 더하면 모두 573년이된다. 그러나 열왕기상 6:1절에서는 "이스라엘자손이 애굽땅을 나온 지 사백팔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 년 시브월 곧 이 월에 솔로몬이 여홍하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더라"라고 했다. 여기에서 573년이라고 하지 않고 48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93년이나 차이가 난다. 햇수에 있어서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가? 이 두군데에서 햇수가 다르게 기록된 까닭은 그 가운데 영적 원칙이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사사기를 살펴볼때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이 햇수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족속에게 몇 차례 박해을 받은 것이다.(93년 동안에) (사도13:18-22)"가나안땅 알곱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450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앨 때가지 사사를 주셨더니 " 이 사사기의 450년기간 중에 아래와 같이 문제가 발생되었다. 1. 8년 박해 ( 사사기 3:8 ) "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라 " 2. 18년 박해 (사사기 3:14) "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왕 에글론을 18년을 섬기더라" 3. 20년 박해( 사사기 4:2,3) "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20년동안 그들을 파셨는데" 4. 7년 박해 (사사기 6:1) " 여호와께서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5. 40년 박해(사사기 13:1)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진노하시어 박해를 당한 햇수는 상기와 같이 정확하게 93년동안 이다. 이것이 열왕기상과 사도행전의 기록의 차이를 알려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역사를 말하고 있었으므로 93년을 계수해 넣었으나,열왕기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를 주의하였으므로 93년을 계수하지 않고 480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햇수는 유실된 햇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이방을 섬기고 사사가 없었을 때는 햇수를 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을 섬길 때는, 그들의 날들은 유실되고, 하나님께서 계수하시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구원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계수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가 ? 사람의 뜻대로 보낸 날들, 하나님을 떠난 날들,실패한 날들,타락된 날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계수될 수없는 날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이미 여러해가 되었는데 몇년동안 헛되이 보냈는지 !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은 시간은 모두 계수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로므로 형제자매여,우리는 모두 세월을 아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