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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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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영에 속한 사람
lhyunsik

[도서] 영에 속한 사람 저자 : 워치만 니 베스트 셀러를 넘어선 세기의 고전(古典) 〈영에 속한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를 넘어 세기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미 십 수만 명이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영적 생명에 큰 유익을 얻었으며,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온전한 영적 노정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오해도 간혹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저자의 서문(재판을 내면서, 서문, 편집을 마치고서)을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간과한 데서 기인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A치만 니의 서문은 본문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것이 이 책을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매뉴얼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문의 안내를 받아가며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 우리는 이 책이 가져다 줄 크나큰 영적 축복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A치만 니의 사상과 의도에 더욱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투옥되기 전까지 30여년 동안 A치만 니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믿는 이들의 영적 생활을 온전케 하고 하나님의 중심 사상을 전달하는 수많은 말씀들을 해방해 냈으며, 그 메시지들은 현재 62권의 《A치만 니 전집》―한국복음서원 刊―으로 남겨져 있다. 가장 초기 저작인 이 책을 필두로 풍성하고 균형잡힌 A치만 니의 사역을 이해할 때, 독자들은 그의 사상과 위임에 더 깊은 공명(共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십 권에 이르는 A치만 니의 저술들은 많은 부분이 그가 구두로 전한 메시지들을 녹취하여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여 그가 얻은 영적 체험을 한 구절 한 구절 피땀을 쏟아가며 직접 집필한 대표적인 저서이다. 특별히 이 책에서 A치만 니는 단어 사용 하나 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영적인 고유 명사 하나가 믿는 이들의 체험을 크게 좌우할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가 쓴 서문들을 보라). 따라서 이제 독자들은 왜 우리에게 〈영에 속한 사람〉 중국어 원문 번역본이 절실히 필요한지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중문판 원서 번역본과 여타의 번역본의 차이는 확연하며, 사실 그것은 독자들의 추측을 훨씬 뛰어넘는다. 초판 번역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원문에 더욱 충실한 번역과 국어다운 문체로 개정하여 정확하고 이해하기 쉬운〈영에 속한 사람〉을 내놓게 되었다. 새롭게 선보이는 이 개정판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928년 가을에 이 책 전집(全集)이 출간된 후로 각지의 믿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이 책을 구독하자 얼마 안 되어 한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많은 분들은 이 책에 수록된 진리를 좇아 어떻게 해방을 얻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분들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임이 실로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같이 이 책을 환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년 전만 하더라도 이 책은 재고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천 부 이상이 이미 외부에서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본래 재판을 찍을 생각이 없었다. 동시에 나는 서둘러서 재판을 찍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책 속에 담겨진 진리가 밖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낳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년 동안 수백 곳에서 이 책을 요구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많은 간증을 통해 나는 이 책의 진리가 실행 가능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재판을 지연할 수 없었다. 재판은 가르침과 진리 면에서 초판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새로운 빛과 새로운 느낌, 그리고 초판을 찍을 때 분명치 않은 곳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여 초판을 수정했다. 이러한 수정 과정에서 나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가능한 한 성경에 일치되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알듯이 성경의 용어는 우리가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와는 좀 다르다. 가령 ‘속죄’라는 용어를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전체적인 일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속죄’는 다만 죄가 덮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에서 많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으나 성경에서 볼 때 그것들은 정확하지 않다. 예로 ‘죄를 이김’, ‘자아가 죽음’,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 ‘혼 생명을 못 박음’등 이러한 용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알지만, 이런 용어들은 성경에 없는 것들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다. 성경에는 ‘죄를 이긴다’는 말이 없고 ‘죄에서 벗어나서’, ‘죄에서 해방되어’라는 말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옛사람을 못 박음으로써 우리로 능히 죄와 죄의 권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에 죄를 이긴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체험적인 면을 말한 것임). 성경은 ‘자아를 죽인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다’, 더 낫게 번역하면 ‘자아를 거절하다’라고 말한다. 자아에 대하여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를 진다’고 말한다. 이는 자아가 우리의 인격이고 영원히 죽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자아가 죽으면 우리 자신은 즉시 끝나게 된다. 자아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거절하거나 십자가를 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죽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혼 생명을 못 박으라’고 말하지 않고 ‘혼 생명을 잃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못 박혀 죽는다면 우리 육신의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은 초판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때에는 영적인 사실과 원칙이 틀리지 않으면 외적인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번에 재수정을 할 때에도 나는 이러한 용어들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 최근 며칠에 들어서서야 주님은 나에게 이 일을 주의하게 하셨다. 주님은 나에게 정확하지 않은 용어는 정확하지 않은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용어의 정확성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용어보다 영적인 실재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적인 실재가 있을 때 정확한 용어를 쓸 수 있다면 더욱 귀한 것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빛을 주셨다. 그러므로 용어상 고친 몇몇 군데가 있다. 나는 장래 다른 출판물에서도 일률적으로 고쳐지기 바란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우리 안에서 진리의 주관적인 결과를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는 많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의 성질이다(나는 주관적인 방면의 가르침이 너무 적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언급된 각종 진리들에 대해, 이 모든 진리가 이 책에 언급된 것으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주관적인 방면에서 진리가 그렇다는 뜻이다. 얼마 안 되어서 이 책은 또 나의 주님께서 정하신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쓴 것이 너무나 완전하지 않고 사람을 거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가 손실을 입는다고 느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든 영광은 그분께, 모든 수치는 내게 돌려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만큼 이 책을 축복하시기 바란다. 1932년 5월 30일 상해에서 편집자가 서문 내가 섬기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는 그분이 나에게 이 책을 쓸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나보다 더 나은 필자가 이 책임을 지기를 바랐지만, 주님은 내가 이것을 담당하기를 기뻐하셨다. 나 개인의 선택에 의하면, 나는 이러한 책을 써야 할 마지막 사람이어야 하고 또한 그럴 것이다. 내가 이것을 쓰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소심함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할 때 주님을 믿은 지 십 년도 채 안 된 사람이 영적 생명의 노정과 영적 싸움의 전략을 말하는 이와 같은 책을 펴내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추구하는 믿는 이들 가운데 자주 발생하는 위험은 그들이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자기 분석은 자아의 생명을 키우는 것이고 또한 생각에 많은 망상이 가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은 본래 성경이 허락하는 바이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바이다. 그러나 ‘삼층천으로 들려지는’ 심오하고 높은 체험들은 ‘십사 년’ 후에 언급하는 편이 더욱 낫다. 체험을 중시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나 사상과 체험으로 충만할 때 오히려 자아의 생명을 더욱 버리기 어렵게 된다. 나는 삼층천의 체험과 큰 계시를 얻지도 못했다. 나는 다만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고 (불완전함 가운데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나는 단지 최근 몇 년 동안 주님에게서 얻은 것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해 줄 뿐이다. 내가 이 책을 써야 한다고 느낀 것은 약 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몸이 쇠약해져서 임강(臨江)의 작은 오두막 집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성도들이 어두움 속에서 헤매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영적 생명을 분명히 분석해 놓은, 성경 말씀과 영적 체험이 일치된 한 권의 책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이 일을 하도록 주님의 위임을 받은 것에 대해 나는 매우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작업을 시작했고, 영과 혼과 몸의 분별, 육신에 관한 두 편과 혼 생명의 전반부를 썼다. 그러나 한동안 쓰다가 나는 이 작업을 중단했다. 이렇게 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내가 다른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원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론 나를 멈추게 할 수 없었고, 여전히 집필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쓰지 않고 중단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쓰도록 주님께서 위탁하신 진리 중 당시 체험에서 완전히 확증할 수 없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써 나갈 때 이 책의 가치와 능력은 자연히 감소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쓴 것이 영적 이론이 아닌 영적 사실이 되도록 주님 앞에서 그분의 진리를 더 많이 배우고 확증하며 체험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중단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3년이 넘는 이 기간 동안 이 책을 완성하는 일을 하루도 내 마음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의 발행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주님의 손길을 분명히 보았다. 근 몇 년 사이에 이 책 안의 진리들(특히 하권)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영적인 실재를 보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주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로 나는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과 새 창조와 옛 창조를 구별하는 길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미한다. 근 몇 년 동안 주님은 나에게 각지의 가장 좋은 주님의 자녀들과 함께 모일 많은 기회를 갖도록 여행을 허락하셨다. 이러한 여행은 나의 관찰과 지식과 체험을 강화시켜 주었다.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족한 점이 무엇이고, 성경에서 그분이 계시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지시해 주셨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 책이 ‘영적 생명의 실험교본’이라고 말하겠다.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은 실제로 다 증명될 수 있다. 근래 나에게 육신의 특별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 면으로 나는 영원의 실재를 더욱 알게 되었고,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빚을 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이 책을 완성하기를 바랐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안의 몇몇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은 나를 위해 조용한 장소를 준비해 주었고, 내 건강 상태에 따라 1권에서 4권까지를 완성하도록 몇 개월의 여유를 주었다. 비록 현재 나머지 책들의 작업에 아직 착수하지 않았지만, 내게 은혜가 필요할 때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얼마 안 있으면 이 책이 곧 출판될 텐데, 솔직한 말 몇 마디를 하자면, 이 책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책의 진리를 써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 수개월 동안 나는 사탄의 틈바구니 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교전(交戰)이고 어떠한 저항이었던지! 영과 혼과 몸의 힘은 거의 음부로 쏠리는 듯했다. 이러한 씨름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나머지 책을 아직 완성하지는 않았다. 나는 산 위에서 모세를 위해 있는 여러분이 평지에 있는 여호수아를 잊어버리지 않기 바란다. 나는 깊은 속에서 대적이 이 책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사람들이 책을 구하지 못하도록 여러 모로 방해공작을 할 것을 안다. 설사 사람들이 이 책을 구했다 하더라도 읽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대적에게 이 점에서 이기지 못하게 하기 바란다. 이 책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상, 중, 하 세 권으로 나누었다. 어떤 것은 영적인 생명을 중요시했고 어떤 것은 영적인 전쟁을 중요시했다. 영적 전쟁을 말할 때 영적 생명도 말했고, 영적 생명을 말할 때 영적 전쟁도 언급했다. 그러나 각 부분마다 강조하는 바가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이 길을 걷도록 권면하기보다는 이 노정을 어떻게 걷는가의 면을 더욱 강조한다. 이 책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길을 추구하도록 권면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책은 도리어 영적인 길을 추구하나 그 길을 찾지 못한 자들을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갈망이 있는 사람들은 합당한 인도를 찾을 것이다. 이 책의 체계는 설교나 해석과 다르다. 많은 부분의 자세한 설명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을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영적인 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이 책의 앞뒤에서 말한 것의 영적 생명의 수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도 말고 억지로 머리로 연구하지도 않도록 부탁의 말을 드린다. 그 진리들은 당신보다 더욱 성숙한 생명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한동안 지난 후(보름이나 한 달 있다가) 다시 그 부분을 읽어본다면, 당신은 자신의 이해가 더 많아진 것을 발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영적 생명과 영적 생명의 체험에 관한 문제를 다룬 책이기 때문에 억지로 어떤 방법으로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가장 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던 것이 나중에는 가장 귀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행한 사람이 어디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까지 행해야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책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믿는 이의 영적 체험에서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어떤 믿는 이를 더 깊은 영적 생명 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실 때, 먼저 그분은 그 영적 생명의 단계에 있는 개략을 미리 맛보게 하시고 그런 다음 그 안으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들은 어떤 단계에 속한 것을 이미 맛보았다고 해서 자신이 그 단계에 이미 도달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주님에게 이것은 그분이 그들을 그 안으로 인도하는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단계의 맛을 보고 아직 그 안으로 충분히 들어가지 못한 믿는 이들은 이 책의 가르침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에서 얻은 지식을 자기 분석의 도구로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본다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동시에 주님 안에서 우리의 넓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온 종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분석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을 방해할 뿐이다. 만일 믿는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깊은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를 의식하는 것은 영적 생명을 해칠 뿐이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주신 새 생명에 의해 1) 죄악과 2) 천연적임(본성)과 3) 초자연적인 것(죄 된 방면)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다. 이 세 단계의 구원 중에 한 가지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제한하여 죄를 이기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천연적인 성품(선한 것)도 이겨야 하고 초자연적인 대적도 이겨야 한다. 죄를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비좁은 천연적임과 초자연적인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완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이러한 이김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이 몇 가지 요점을 주의했으며 이 점에서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바란다. 사람의 몸을 논하는 하권 제10부를 제외하고 이 책은 ‘성경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근거는 성경에 있고 또 그것은 영적 체험으로 증명된다. 성경을 조사해본 결과 우리는 모든 영적인 체험(예로 거듭남 등)은 다 우리 ‘속사람’ 안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성경을 상고해 본 후, 우리는 성경이 사람을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분석해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이 세 부분-특히 영과 혼-의 기능과 내용이 어떻게 다른가를 볼 것이다. 상권의 제1부에는 몇 마디 특별한 말이 필요하다. 영과 혼의 구분과 영과 혼의 각기 다른 기능은 영적 생명을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 결여되어서는 안 될 지식이다. 이는 오직 영이 무엇이고 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영을 좇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나라에 이런 가르침이 너무 결여되었기 때문에 나는 제1부에서 이 점을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지식이 있는 믿는 이는 이 점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결론만 기억해 두고 계속해서 2부를 읽어나가는 것이 낫다. 제1부는 영적 생명이 아닌 영적 생명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지식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끝부분까지 읽고서 시작부터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한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것이다. 이 책에 사용된 성경 본문의 번역에 대하여도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관방용(官方用) 중국어 화합본 성경-많은 부분에서 영어보다 번역이 낫다-을 주신 것으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중국어 문법과 관용법 때문에 원어의 번역이 약간 다른 것을 피할 수 없다. 영적 생명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단점이다. 이러한 부분을 만날 때 나는 내 방법대로 번역을 했다. 문장이 매끄러운가를 주의하기보다는 영적 생명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만을 관심했다. 영과 혼이 분리되었다는 가르침에 있어서 나는 창시자가 아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교회와 개인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혼의 의지와 지나친 생각의 활동이다.”라고 말했다. 마이어(F.B. Meyer)도 “만일 내가 영과 혼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오늘 나의 영적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오토 스토크 마이어(Otto Stock meyer), 펜 루이스(Jessi-Penn Lewis), 이반 로버츠(Evan Roberts), 귀용 여사(Madame Guyon) 등과 같은 분들도 동일한 간증을 했었다. 주 앞에서 우리가 동일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주 자유롭게 그들의 저술을 인용하였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에 나는 각 곳에서 특별히 누구의 말을 인용했다고 표방하지 않았다. 이 책은 일반적인 믿는 이만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서 나보다 더 어린 자를 돕기 위해 쓴 것이다. 사람의 영적 노정을 안내해 주는 일을 책임 맡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사람들을 무엇에서 나오게 하고 무엇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하는지-어디서 어디로 이끄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소극적인 면에서 사람들로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적극적인 면에서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 정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일인가? 아니면 이것보다 더 깊은 것이 있는 것인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이 점을 매우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자녀들을 온전히 옛 창조에서 나와 새 창조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옛 창조를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정죄된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의 일꾼들이 파괴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건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결코 사람들을 어리석은 길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이다. 거듭남, 즉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은 모든 영적인 생활의 시작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재촉하며 변론하고 설명하고 연구하여 그들 생각 속에 깨달음만을 갖게 하고 그들 의지 속에 결심만을 갖게 하며 그들 감정 속에 작용이 일어나는 결과만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거듭남 외에 사람으로 하여금 영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와 같이 전도의 책임을 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은 무익하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우리의 일에 어떠한 변혁이 있겠는가? 이것은 주 예수를 믿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참되게 믿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많은 눈물과 회개와 개선과 열심 그리고 많은 일들은 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책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초월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다룰 내용과 주제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중요한 진리들이 있지만 개략적으로 밖에 다룰 수가 없다. 만일 주님께서 더디 오시고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신다면, 나는 장래에 각 주제별로 책을 쓰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적이 내가 이 책(특히 하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저지한 것을 생각할 때, 설령 누가 이 책을 이미 구입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읽지 못하게 할 것이고, 읽는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잊어버리게 할 것임을 깊이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의 독자에게 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방해공작을 파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을 미리 알려 주고자 한다. 나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어가면서 기도하기를 바라며, 여러분이 읽은 것을 기도로 화하기 바란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투구를 씌워 주시기 바란다. 그렇지 않을 때 잊어버리거나 머리 속에 끝없는 이상(理想)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또 이 책의 진리를 이미 얻은 형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즉 만일 하나님께서 육체와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받는 은혜를 당신에게 주셨다면 당신은 마땅히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책을 숙독하고 그 안의 진리를 터득하였다면, 이 책을 교과서로 삼아 몇 명 혹은 몇 십 명의 믿는 이를 모아서 그 안의 진리로 그들을 가르칠 것을 부탁한다. 만일 전권의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면 한두 권만 가르쳐도 된다. 아무튼 이 책의 진리로 쉬게 하지 말라.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도 유익하다. 이제 이 작은 한 권의 책을 주님 손에 올려 놓는다. 그분이 기뻐하시면 축복하사 나와 함께 형제자매 된 자들로 하여금 영적 생명이 성장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대적의 뜻은 패배하기를 원한다. 주 예수님이 속히 오셔서 왕 노릇 하시기 원한다. 아멘. 1927년 6월 4일 상해에서 편집자 편집을 마치고서 오늘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마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서문을 쓸 때 제 4 부까지밖에 완성하지 못했었다. 마지막 4부를 완성하고 나서 나는 여전히 독자들에게 할 말이 많아서 이 두 번째 서문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를 돌이켜 볼 때 이미 1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16개월 동안 나는 이 책의 부담을 갖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전파되는 것을 사탄이 좋아할 리 없다. 그러므로 잇달아 오는 공격은 정말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분의 은혜가 오늘날까지 나를 부축하셨다. 많은 때에 나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영 안의 압력은 너무 무겁고 육신의 힘은 너무나 약하다고 느꼈다. 살 소망까지도 끊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속하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따라 많은 사람의 기도로 인하여 나를 강건케 하셨다. 이제 모든 문제가 지나갔고 나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내가 얻은 위로는 어떠한 위로인지! 오늘 나는 두 손으로 받들어 이 책을 나의 하나님께 드린다. 그분 앞에서 나는, 그분이 시작하신 선한 일이 이제 이루어졌은즉 이 책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도록 또 축복하도록 그분께 간구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님을 완전히 따르는 위치에 이르기까지 배울 수 있는 합당한 길을 얻으시도록 독자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간구한다. 나의 영과 나의 기도가 이제 이 책과 함께 나가니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뜻대로 이 책을 사용하시기 원한다. 형제들이여, 사람의 감정으로 말하면 작자는 자신의 저서에 대하여는 특별히 냉정해야 합당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을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내가 이 책을 썼다고 해서 이렇게 주의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를 위해 여기에 있다. 만일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나왔다면 나는 더 자유롭게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이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는 부득불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을 내가 썼다는 이유로 추천하기를 부끄러워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책에 내포된 진리들은 현시대에 긴급히 필요한 진리라는 것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본래 나에게는 이 책을 쓸 의도가 없었고 주님께서 위임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분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 안의 진리들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주신 것들이다. 내가 이 책을 쓸 때 그분은 내게 새로운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셨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은 절대로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전쟁에 대한 이론의 책이 아님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 자신은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진리들을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과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간증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진리 속에 불의 화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씀은 함부로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의 느낌에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은 이 진리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신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천연적으로 볼 때 이 책의 문장이 일반적인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또한 많은 특별한 용어들은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몇 마디 변명을 하겠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책을 쓰기 전에는 실지로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지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펜을 들 때 여러 가지 난제들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나라(중국) 문자는 본래 영적인 저서를 쓰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부득불 외국어 같기도 하고 중국어 같기도 한 말로 진리의 의미를 전달했다. 책 중에 내 자신이 만들어낸 용어도 적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진리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들이 영적인 고유 명사를 특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나중에 이런 용어들이 통용되면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근 몇 년 동안 중국의 믿는 이들 가운데 많은 영적인 용어들이 이미 통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용어에 어떤 해석을 가하지 않고서도 말하기만 하면 이제는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독자 여러분이 이와 같은 부류의 용어들에 대해 어려움이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쓸 때 나는 같은 부류의 진리를 한 군데 모아두지 않았다. 이것은 글을 써감에 따라 각기 다른 진리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진리가 같은 범주에 해당된다 할지라도 나중에 언급하도록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경우 어떤 것은 너무 중요하다 보니 여러 번 언급한 것이 있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것을 기억해 두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믿는 이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중요한 요점과 관련된 것을 다룰 때에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재삼 언급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반복해서 상기시켜 줘야만 비로소 진리를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사 28:13). 나도 이 책 안에 표면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읽을 때 사실상 상반된 것이 아니라 상반된 것 같을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은 영적인 영역의 일을 말하기 때문에 많은 이론이 상반된 것 같으나 체험에서는 완전히 부합된다. 영적인 일들 중 많은 것들은 모순된 것같이 보인다(고후 4:8-9). 나도 많은 부분이 도무지 말 같지 않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오해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만일 누가 의도적으로 오해하려 한다면, 그는 이 책에서 내가 말하지 않은 뜻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오직 한 부류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본래 많은 믿는 이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한 권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필요성이 없는 독자라면 이 안의 진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비판할 것이다. 필요의 정도가 이해의 정도를 결정한다. 독자들에게 체험의 필요가 없다면 이 책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판단할 기회만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점을 조심해야 한다. 높은 진리일수록 이상적인 것이 되기가 쉽다. 왜냐하면 진리가 높고 깊을수록 성령의 운행하심이 없다면 더욱 그것을 터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터득하지 못한 것을 이상(理想)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릿속에서 그 안의 가르침을 받고서 다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육체와 악한 영에게 날로 더 속임당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안의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도구로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매우 쉽게 어떤 것은 혼에 속한 것이고 어떤 것은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자신이 그런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진리는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책의 진리를 얻고서 행위의 변화도 없이 이 책의 진리를 빙자하여 그의 형제자매들을 비평할까 두렵다. 이 책은 본래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들보다 덜 혼에 속하거나 육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위험은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전에 쓴 서문에서 언급한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바로 결코 우리 자신을 분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을 읽은 후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지나치게 자신을 분석하게 된다. 내적인 생활을 주의하다보면,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속사람의 모든 움직임을 지나치게 분석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표면적으로 많이 진보하는 것 같으나 도리어 ‘자아’ 생명은 제거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우리 속을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평강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 성령께서 충만하시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상태가 우리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불안함을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성찰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영적 생명이 정체되는 이유이다. 우리의 안식은 오직 주님을 앙망하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데서 온다. 우리가 그분을 앙망한 만큼 자신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의 안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 위에 있지 순간순간 변하는 우리의 체험에 있지 않다. 진실한 영적 생명은 온 종일 자신의 느낌과 사상을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구주를 ‘바라보는 데’ 있다. 독자들은 결단코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그 진실성을 시험해 보라는 데 있다. 나는 많은 초자연적인 일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굳게 믿는 사람이고 또한 나는 이런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또한 부인 못할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께 속한 일 중에 위장된 초자연적인 일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다 거절해야 한다고 말할 의사가 없다. 나는 다만 이 책에서 이 두 가지가 나타날 때 원칙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했을 따름이다. 믿는 이들은 초자연적인 일을 만날 때 성경에 계시된 원칙에 따라 조심스럽게 시험한 다음에야 그것을 받을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나는 참으로 많은 믿는 이들이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휩쓸려가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평상시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을 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에 속한 것은 다 감정에 속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에 의해 쉽게 움직이고 자극을 받는 사람을 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다 영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인 생명을 영에 속한 생명으로 오인한다. 우리는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혼의 기능을 사망이나 무기력한 상태에 빠뜨려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단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다. 우리는 이쪽으로 치우치거나 다른 쪽으로 치우친다. 전에 우리는 혼에 속한 감정과 자극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 그것을 좇아 행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틀린 것을 알고는 그것을 억제하고 혼의 활동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우리의 신령함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이 점을 조금이라도 오해를 하고 있다면, 그의 생명은 극한 ‘사망’에 떨어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죽은 감정에 의해 영이 감금되어 표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이 영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어쨌든 믿는 이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다면,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닌, 이성적인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 마지막 권에 대하여 몇 마디 하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나의 몸의 약함 때문에 이것을 쓸 자격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나의 약함과 질병과 고통이 다른 사람보다 많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차례 나는 이 책을 쓸 담대함을 잃었었다. 그러나 이것을 완성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땅에 속한 장막 안에서 나와 동일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내가 쓴 것을 흑암에서 한 형제가 본 빛으로 여겨주기 바란다. 물론 오늘날 믿는 이들 가운데 신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이와 같이 원칙만을 가르치는 책에서 나는 자세한 것에 대해 다른 형제들과 변론하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이미 다 말하였다. 오늘 나는 다만 여러분에게 병중에서 여러분의 모든 거동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얼마나 되고 우리 자신으로 비롯된 것은 얼마나 되는지를 묻겠다. 다른 것에 대해 나는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이 책에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최선을 다했다. 나는 이미 나의 가장 좋은 것을 여러분에게 공헌했다. 이 책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장엄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다만 두렵고 떠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가 통과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이제 책을 완성했으니 이것을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양심으로 심사숙고하여 분별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와 같이 대적의 궤계를 꿰뚫는 책이 흑암의 세력을 거스르고 이로 인해 많은 반대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에는 사람의 환영을 받으려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또한 나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 중에서 이 책의 도움을 받음으로 나를 지나치게 높게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나는 나도 한 인간에 지나지 않고 거기다가 아주 연약한 자라고 말하겠다. 이 책의 가르침은 나의 연약한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만일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수중에 들어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일 당신에게 담대함과 오래 참음이 있어, 상권을 읽은 후 계속 나아갈 수 있다면 그분의 진리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전권을 다 읽어보았다면 나는 한동안 시간이 경과된 후에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겠다. 여기까지 읽을 때 다시 한 번 우리의 고개를 들어서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자! 다시 한 번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가슴에 기대면서 그분의 생명을 흡수하기 바란다. 다시 한 번 말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분은 풍성하며,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은혜로 우리를 대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충만케 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죄인에 불과하게 된다. 주 예수님이 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찬양하자. 거룩하신 아버지여, 당신이 내게 맡기신 것이 여기 있나이다. 만일 당신이 보기에 좋으시다면 축복하소서! 이 마지막 시대에 당신의 자녀들을 부패한 육체와 흉악한 악한 영에서부터 건져 내어 보호하소서!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의 몸을 건축하시고 당신의 아들의 대적을 멸하시며 아들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재촉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당신을 앙망합니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을 사모합니다! 당신을 의뢰합니다! 1928년 6월 25일 상해에서 편집자 1 장 영과 혼과 몸 일반적인 학설에 의하면, 사람은 ‘영혼’과 ‘몸’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영혼은 사람 속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이고 몸은 사람 밖에 보이는 신체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류의 사상이다. 비록 이것이 약간의 일리는 있지만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 외에 이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상이 없다. 몸을 밖의 신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영과 혼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거나 서로 섞어 놓지 않았다. 영과 혼은 단어가 다를 뿐 아니라 실질에 있어서도 같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영혼’과 ‘몸’ 두 부분으로 구분하지 않고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분명히 사람 전체를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사도는 여기에서 믿는 이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 즉 믿는 이의 온 존재가 전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사람이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곧 그의 영과 혼과 몸이 보존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이 온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영과 혼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영과 혼’이라 말하지 않고 ‘너희의 영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사람의 영과 혼은 확실히 구분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과 매우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 만일 믿는 이들이 영의 경계(境界)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영에 속한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어떻게 영적인 생활 가운데 자랄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이들이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또 어떻게 구분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 생명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때 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에 속한 생활에 거하고 영에 속한 것을 더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분리시켜 놓은 것을 우리가 섞어 버린다면 손실을 면할 수 없다. 영적인 지식은 영적인 생명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믿는 이가 기꺼이 겸손하여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가이다. 만일 원함이 있다면 성령은 믿는 이가 심지어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체험에서 그가 영과 혼의 구분을 갖게 할 것이다. 혼과 영의 구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믿는 이라 할지라도 이 두 가지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반면에 혼과 영이 다르다는 진리를 온전히 아는 믿는 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체험을 조금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지식과 체험 둘 다 갖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 대다수가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먼저 그들로 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 영에 속한 것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유독 데살로니가전서만 사람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구분을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도는 사람의 물질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두 부분 곧 ‘혼과 영’으로 나누었다. 또한 물질적인 부분에는 생각과 의지에 해당하는 관절과 골수를 포함시켰다. 제사장이 희생물 전체를 칼로 완전히 해부하고 분리시켜 그 속에 어떤 것도 숨겨진 것이 없게 했듯이,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분께 돌아온 사람을 완전히 분리하여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과 몸에 속한 것을 모두 일일이 찔러 쪼개기까지 하신다. 혼과 영이 쪼개어질 수 있다면 혼과 영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사람을 영과 혼과 몸의 세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로 여겼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영과 혼을 엄밀히 문자적으로 번역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많은 경우 원어의 ‘영’이 ‘영혼’으로 번역되고 원어의 ‘혼’도 ‘영혼’으로 번역되었다), 독자들이 문자적으로 영과 혼을 분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국어에서 ‘영’을 따로 말하는 것은 괜찮으나 ‘혼’을 따로 말하면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말의 이러한 약점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번역할 때 우리는 후세에 통용되도록 이 단어를 직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상적인 책을 번역할 때에도 많은 용어를 새로 창조해 내는데 가장 널리 보급되는 성경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없겠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계시해 주실 때 영과 혼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둘을 혼용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영이라는 단어가 상태를 가리킬 때 성경에서 ‘신령한’(고전 2:15, 3:1, 갈 6:1)으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혼의 상태를 말할 때에는 ‘혼적인’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의 원문은 ‘혼적인’인데 ‘육에 속한’으로 번역되었다. 야고보서 3장 15절의 ‘정욕적인’은 원문에서 ‘혼적인’으로 되어 있다. ‘혼에 속한’이라는 단어를 유다서 19절은 ‘육에 속한’으로 번역했다. 그 이유는 성경 번역자가 담대히 ‘혼에 속한’으로 직역하지 않고 혼의 상태를 말하는 동일한 단어를 여러 가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을 때 더욱 영과 혼의 분리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의 창조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된지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런 다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 이 생기가 사람의 몸과 접촉할 때 혼이 산출되었다. 이 혼은 사람의 몸과 영이 만나 최종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을 ‘산 혼’이라 불렀다. 이 ‘생기’는 바로 사람의 영이자 생명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 6:6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생기는 창조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 ‘생기’의 영을 하나님의 성령과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과 우리 사람의 영은 다르다. 로마서 8장 16절은 사람의 영이 성령과 다르고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생기’라는 말에서 ‘생명’이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chay’로서 복수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두 가지 곧 영에 속한 생명과 혼에 속한 생명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영이 되었고 동시에 이 영은 몸과 접촉하여 혼을 낳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두 생명 곧 영에 속한 생명과 혼에 속한 생명의 유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 속에 들어온 전능자의 기운이 내게 생명을 주시느니라”(욥 33:4, 원문 참조). 여기의 생명은 사람 속에 들어온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은 사람의 영은 거듭날 때 우리가 얻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거듭날 때 우리가 얻은 생명은 생명나무로 대표된 하나님의 생명이다. 사람의 영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것은 사람의 몸을 말한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그 사람은 ‘산 혼’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혼이다. 영이 사람의 몸을 살렸기 때문에 사람은 산 혼이 되었고 살아 있으며 자각(自覺)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온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 셋이 하나로 화합된 존재이다. 이 성경 구절로 볼 때 사람은 영과 몸의 두 가지 독립된 성질로 창조된 것이다. 영이 흙으로 만든 몸 안에 들어감으로 혼이 산출되었다. 혼은 영과 몸이 만나 산출된 것이다. 본래 몸은 죽은 것인데 생명의 영이 몸과 만남으로써 제3의 것인 혼이 나왔다. 영이 없으면 몸은 죽은 것이고, 영이 있을 때 사람은 살아나게 된다. 몸 안에 영이 있을 때 유기적인 것이 있게 되는데, 이러한 종류의 유기적인 것을 가리켜 혼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가 ‘산 혼’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영과 몸의 연합에 의해 혼이 생겨났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영과 몸이 연합되어 혼이 생겨난 후에 영과 몸이 다 혼으로 합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말로 하면, 혼과 몸이 온전히 영과 결합되었고 영과 몸이 혼으로 합병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그 당시에는 현재 우리의 영과 육체처럼 매일 교전(交戰)하지 않았다. 그의 온 존재의 세 요소는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서로 연합된 이 세 가지 중 중간에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인격체로서 혼은 사람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혼은 영과 몸의 결합체요 사람의 요소들의 최종 완성이다. 그러므로 영과 몸이 완전히 연합한 후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 이 혼은 다름이 아닌 두 요소가 상합한 총체요 사람의 인격이다. 이에 대해 완전하지는 않으나 한 가지 비유를 들겠다. 즉 한 잔의 물에 먹을 넣으면 ‘먹’과 ‘물’이 된다. 이것을 ‘먹’이라고 하면, 그 안에 ‘먹’이 있기 때문에 ‘먹’이라고 할 수 있고, 물이라고 하면, 그 안에 여전히 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먹과 물은 이미 융화되어 제 3의 물질인 먹물이 되었다(그러나 영과 몸이 연합함으로 생겨난 혼은 영과 몸과 같이 분해되지 않는 독립된 요소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과 몸은 본래 독립된 두 요소였지만, 이 둘이 합해질 때 산 혼이 되었다. 하나님은 혼을 사람의 온 존재의 특징으로 삼으셨다. 천사의 특징이 그의 영에 있는 것처럼, 그분의 창조에서 사람의 특징은 그의 혼에 있다. 사람은 생기가 있는 몸일 뿐 아니라 더욱 산 혼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후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수차 ‘혼’이라고 부르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혼’이라고 부른 이유는 사람의 어떠함을 보기 위해서는 그의 혼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은 사람의 대표로서 인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혼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는 기관이고 이 안에 영과 몸이 합병되었다. 혼에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때 혼은 하나님의 안배하심을 따르고 모든 것에서 영을 주로 삼게 된다. 그 반면에 혼은 영에 억압을 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主)로 삼을 권한도 갖고 있다. 영, 혼, 몸, 이 세 가지는 마치 빛을 내는 전구와도 같다. 전구에는 전기와 필라멘트와 빛이 있다. 사람의 몸은 필라멘트와 같고 영은 전기와 같으며 혼은 빛과 같다. 전기는 빛의 원인이고 빛은 전기의 결과이다. 필라멘트는 전기를 저장하고 빛을 내는 물질적인 몸이다. 영과 몸이 연합하여 혼을 낳았고 또한 혼에는 영과 몸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혼은 이 두 가지의 결합체이다. 전기가 빛의 근원이고 필라멘트는 빛의 매개체인 것처럼 영은 혼의 활동의 근원이고 몸은 혼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생에서는 혼이 사람의 총결이 되고 내세에 부활의 때에는 영이 사람의 총결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 15:44)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부활한 주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주님을 의지하고 영으로 우리 온 존재를 다스리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산 혼이 된 첫 사람 아담”과 연합한 것이 아니라 “생명 주는 영이 되신 마지막 아담”과 연합했다. 그러므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과 혼과 몸의 기능 몸은 ‘세상을 감지하는’ 매개체이고, 혼은 ‘자신을 감지하는’ 매개체이며, 영은 ‘하나님을 감지하는’ 매개체이다. 몸에는 다섯 가지 지각을 갖게 하는 오관(五官)이 있다. 물질적인 몸을 통해서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와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세상에 대한 지각’이라고 한다. 혼은 바로 사람이 존재하도록 도움을 주는 지력(智力)의 부분과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애정을 유발하는 사랑의 부분과 지각에서 산출된 자극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것들은 사람 자체와 그 인격에 속한 것이므로 ‘자아에 대한 지각’이라고 한다.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왕래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것인가를 알고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 안에 거하시고 자아는 혼 안에 거하며 지각은 몸 안에 거한다. 혼은 집결하는 곳으로서 영과 몸이 여기에서 연합된다. 사람은 영으로써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영과 왕래하고 또한 영적 세계를 표현하는 능력과 생명을 받아들인다. 사람은 몸을 통해서 밖의 지각의 세계와 접촉하고 서로 반향할 수 있다. 혼은 이 두 세계 사이에 거하고 이 두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한 면으로 영을 통해 영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과 교통하고, 또 한 면으로 몸을 통해 물질 세계와 상통한다. 혼은 환경 가운데서 자신과 관련된 사물에 대해 자의로 선택할 자주적 권한을 갖고 있다. 영이 몸을 직접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 가능한데, 그 매개체는 바로 영과 몸의 접촉으로 산출된 사람의 혼이다. 이 혼은 영과 몸 사이에서 영과 몸을 속박한다. 사람의 영은 몸이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도록 혼에 의해 몸을 다스릴 수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또한 몸은 혼을 통해 영을 끌어들여 세상을 사랑하게 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영과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몸이 물질과 연합하는 이것은 가장 천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있는 것은 혼이다. 이 혼은 영과 몸의 두 성질을 자기의 성질로 삼아 이 양자를 연결하는 존재이다. 혼은 이 둘로 혼을 통해 서로 교제하고 일하게 한다. 혼의 임무는 영과 몸을 각자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에서 보존되게 하고 그들 서로의 정상적인 관계를 잃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곧 가장 비천한 몸으로 영에 굴복되게 하고 가장 고상한 영으로 혼을 통해 몸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혼은 실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주축이 되는 요소이다. 혼은 영이 그에게 준 것과 영을 통해 성령으로부터 얻을 것을 앙망하는데, 이것은 혼의 온전케 됨을 위한 것이고 또한 혼이 얻은 것을 몸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몸은 성령의 온전함에 참여하여 영에 속한 몸이 된다. 사람의 영은 가장 존귀한 것으로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몸은 가장 비천한 것으로서 가장 밖에 자리잡고 있다. 혼은 영과 몸 사이에 거하면서 이 둘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몸은 혼의 외적 물체이고 혼은 영의 외적 물체이다. 영이 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혼을 힘입어야만 한다. 타락하기 전에 사람의 온 존재를―혼을 통해―다스렸던 것은 영이었다. 영의 어떤 움직임이 있을 때, 영은 그것을 혼에 전달하고 혼은 몸으로 영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몸을 다스린다. 이것이 바로 혼을 매개체로 삼는다는 뜻이다. 혼 안에 영과 몸이 합병되어 있고 또 이 두 가지가 다 혼을 인격으로 삼아 그것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혼은 가장 실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는 인간이 범죄하기 전으로서 혼의 실지적인 힘은 온전히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 혼의 실지적인 힘은 영의 실지적인 힘이었다. 영 자체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오직 혼을 통해서만이 이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누가복음 1장 46절과 47절에서 볼 수 있다. “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현재 시제)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과거 완료시제). 여기에서 시제가 바뀐 것은 영의 기쁨이 먼저이고 혼이 주를 찬양하는 것은 나중임을 보여 준다. 먼저는 영이 기쁨을 혼에 전달하는데, 이때 혼은 몸의 감각기관으로 이 기쁨을 나타낸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혼은 인격이 있는 곳이다. 사람의 의지와 지혜와 감정은 모두 혼 안에 있다. 영은 영적 세계와 왕래하는 부분이다. 몸은 자연계와 왕래하는 부분이다. 혼은 이 양자 중간에 서서 영적인 세계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세계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를 판단력을 사용하여 결정한다. 때로 혼은 자신의 지혜와 자극으로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리는데 이것은 이상(理想)적인 세계 안에서의 다스림이다. 혼이 영에게 다스리는 지위를 양보해 주지 않을 때에 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혼이 영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결정할 때 비로소 영은 혼과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혼이 인격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혼은 한 사람의 주인인데 이는 사람의 의지가 혼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영이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릴 때는 혼이 스스로 낮은 데 처하기 원할 때이다. 혼이 거스를 때 영은 다스릴 능력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자유의지”의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사람은 스스로 뜻을 전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할 원함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여 마귀의 뜻을 좇아 행할 원함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안배에 의하면 가장 높은 부분이 영이므로 이 부분이 응당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인격의 가장 주요한 부분인 사람의 의지는 혼에 속한다. 사람의 의지(혼)는 영으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몸 혹은 자아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를 선택할 힘을 가지고 있다. 혼이 이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격의 기관이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을 ‘산 혼’이라고 칭했다. 성전(聖殿)과 사람 고전도전서 3장 16절에서 사도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사도가 계시를 받아 사람을 성전에 비유한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신 것같이 지금 성령은 사람(믿는 이들) 안에 거하신다. 성경은 여기에서 사람을 성전으로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세 부분의 요소가 어떻게 분명히 나타났는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성전이 세 부분으로 된 것을 안다. 첫째 부분은 바깥뜰로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며, 모든 외적인 예배가 이곳에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더 들어가면 성소가 있다. 이 안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고, 피와 기름과 향과 떡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비록 이들이 깊이 들어 갔지만 아직 휘장 밖에 있고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가장 깊은 데 있는 자들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거하시면서 무한한 그분의 광채(본래 지성소 안은 어두움)를 발하신다. 어느 누구도 그분 앞에 나올 수 없다. 비록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이러한 행동은 휘장이 열리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지성소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殿)이다. 사람 속에도 이 세 부분이 있다. 몸은 마치 바깥뜰과 같고 밖의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생명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은 응당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해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더 들어가서 사람에게는 혼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내적인 생명으로서 사람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 등을 포함한다. 이 부분은 바로 거듭난 사람의 성소인 것이다. 그의 감정과 사상과 갈망이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과 왕래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그에게는 빛이 충만하고 깨달음이 있다. 더 나아가면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이 부분은 사람의 빛이 비칠 수 없는 곳이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장소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시 91:1)은 바로 하나님께서 휘장을 열어주지 않는 한, 사람이 이르지 못하는 지성소이다. 이것이 사람의 영이다. 사람에게는 몸과 혼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영이 있다. 이 영은 사람의 지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이곳은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곳이다. 영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통하는 기관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거처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빛이 없다. 성소 안에 빛이 있다면 그것은 일곱 등이 있기 때문이다. 바깥뜰은 해의 비춤 아래 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의 그림이다. 그의 영은 지성소와 같고 하나님께서 거하기 위한 곳이다. 이곳은 믿음으로 들어가며, 완전히 어두운 곳이다. 이곳이 믿는 이들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혼은 마치 성소와 같이 그 안에는 이상(理想)적인 세상과 물질적인 세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상과 지식과 원칙들이 있다. 이것은 등대의 비춤과 유사하다. 몸은 바깥뜰과 같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 무릇 몸의 모든 생활과 행동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서는 틀림이 없다. “너희의 영과 혼과 몸”(살전 5:23). “혼과 영과 몸”이 아니며 “몸과 혼과 영”도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이다. 영은 가장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말하고, 가장 비천한 존재인 몸을 맨 나중에 말하고, 혼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영과 몸을 말하는 사이에서 언급되었다. 하나님의 순서를 분명히 볼 때에 우리는 성경이 사람을 성전으로 비유한 지혜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지성소와 성소와 바깥뜰이 영과 혼과 몸의 순서와 중요도에 일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성전의 일은 지성소의 계시에 따라 바뀐다. 성소와 바깥뜰의 모든 행위는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결정된다. 성전의 가장 깨끗한 곳이요, 다른 장소가 굴복하고 의뢰하는 곳은 바로 지성소이다. 지성소 안에는 아무런 활동도 없고 어둡게 보인다. 모든 활동이 다 성소 안에 있고 바깥뜰의 움직임은 또한 성소 안의 제사장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 고요하고 아무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성소 안의 모든 활동은 지성소의 계시의 영향을 받는다. 이 영적인 이해는 깨닫기 어렵지 않다. 혼은 우리의 인격의 기관으로서 생각과 의지와 감정 등을 포함한다. 우리 전 존재의 모든 일은 혼이 주인이 되고 몸은 혼의 보내심을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사람의 혼에 많은 활동과 일이 있었겠지만 이것들은 영의 지배를 받았다. 하나님의 순서에서 첫째는 영이고, 둘째는 혼이고, 셋째는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