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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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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도
lhyunsik

기도 저자 : 위트니스 리 이사야서 59장에서 이사야가 알린 끔찍한 상황을 보시고 하나님은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들과 그분의 손으로 한 일에 대해 그분께 명령할 사람들을 갈망하신다(사 45:ll).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하나님의 대표인 구속받은 사람은 기도로 이 지구의 역사를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기도의 학교에 있는 그리스도」, 103쪽). 그러나 그렇게 효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하나인 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머레이는 더 나아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연합은 실제로 기도의 연합이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곧 그분의 하늘에 속한 생명의 영광 안에 가장 축복되게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중재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같은 책, 177쪽)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 원한다면 가장 높은 기도의 의미가 다만 우리의 필요들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 성취되고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 성취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은 1959년 겨울에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 기도의 제목에 관해 주신 메시지들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메시지들은 기도의 가장 높은 의미를 밝히고 또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의한다. 이 메시지들을 편집하는 봉사로 인해 내 자신의 기도 생활에 상당한 개선이 있었다. 이 책에 주어진 원칙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우리의 생명 성장과 하나님과의 동역을 방해하는 우리 존재 안에 있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이 처리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교리적인 지식만 더 쌓는다면 그것은 실로 비극일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소지한 모든 사람들이 모든 페이지를 기도하고 필사적으로 여기에 밝혀진 기도의 체험 안으로 들어갈 것을 진지하게 권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알고 있던 것보다 하나님과 더 깊은 교통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드러나게 될 것이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속 사람 안으로 강건해질 것이며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의식적으로 삼일 하나님과 하나일 것이고 이 시대를 완성하시기 위한 그분의 움직이심에서 그분과 함께 협력하고 동역할 것이다. 제 1 장 기도의 의미 기도와 말씀 읽기의 조화 시편 119편 147절부터 148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요한복음 15장 7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의 의미에 관해 말하기 전에 기도와 말씀 읽기가 서로 어떻게 조화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위에 인용된 두 구절의 말씀은 기도와 말씀 읽기가 짝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시편 119편에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것을 그의 부르짖음, 즉 하나님 앞에서 하는 그의 기도와 조화시킨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겠다는 약속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말씀 읽기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를 다른 방면에서 보여 주신다. 주님의 말씀은 기도가 두 가지 근거에서 응답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는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님이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기도와 말씀 읽기가 조화되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이 두 가지, 곧 말씀 읽기와 기도는 그의 생활의 두 방면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심에 있어서 우주 가운데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양면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것과 아래의 것, 왼쪽과 오른쪽, 예와 아니오, 낮과 밤, 남성과 여성, 이 모든 것이 양면이다. 혹은 그것들은 완전하고 합당한 기능을 위한 한 쌍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실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를 들어 나의 두 다리는 내가 아주 편리하게 서거나 걷게 한다. 가령 나에게 하나의 다리만 있다고 가정 해보자. 나는 잘 설 수 없을 것이고, 걷는 데에 많은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손과 귀와 눈과 콧구멍도 한 쌍으로 되어 있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생활에도 두 면이 있다. 한 면은 말씀을 읽는 것이고, 또 다른 면은 기도하는 것이다. 길을 걸을 때 우리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두 다리를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이십 보는 오른쪽 다리로 걷고 이십 보는 왼쪽 다리로 걸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읽고 동시에 기도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님의 정하신 법이 일단 우리의 손에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자주 그것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말씀 읽기와 기도를 동등히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정하신다. 그럼에도 어떤 형제들과 자매들은 성경 읽기만을 즐겨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를 성경 속에 파묻는다. 그들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맛을 느낀다. 그들의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는 많은 줄들이 그어져 있다. 굵은 줄, 가는 줄, 붉은 줄, 청색 줄, 책 전체가 거의 줄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구원받은 지 겨우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세 권의 성경책에 줄들이 그어져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기도를 별로 하지 않으며 때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때라도 여전히 기도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누림이 한량없는 데 반하여 기도할 때에는 마치 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이와 반대로 오직 기도하는 것만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릎을 꿇자마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고 영적인 노래들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은 기도할 때에 아주 놀랍고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한다면 그들은 즉시 졸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읽는 것보다 매일 기도하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형제자매들여, 기도하는 것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는다면 문자와 규정들에 빠질 때가 많을 것이며, 그로 인해 영적 상태가 죽게 되고 메마를 것이다. 반면에 성경을 읽는 것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쪽으로 치우친다면 그는 영적으로 균형을 잃을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말씀 읽기와 기도에 동등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길을 걸을때 두 다리를 동등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읽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읽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해야 하며,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와 함께 조화시켜야 한다. 이 문제를 확인하는 예증을 살펴보자.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0절에서 우리가 그 영으로 충만되어야 한다고 말한 직후에 우리가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말하며 우리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고, 항상 범사에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다시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후 우리가 하나님께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을 은혜로 노래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한다. 이 두 부분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감사하는가에 관해 말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다. 하나는 그 영의 내적 충만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의 내적 충만 때문이다. 이 두 부분의 성경 말씀을 비교해 봄으로써 말씀 읽기와 기도가 사람들이 그 영 안에서 체험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당신은 결코 말씀을 그 영과 분리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말씀이 그 영의 체현이고, 그 영이 말씀 안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신이 성경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마다 그 영의 내적 충만을 갖게 된다. 당신이 그 영으로 충만될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의 형태들은 다양하다. 즉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 하나님을 축복하는 기도, 하나님께 찬미를 부르는 기도, 하나님 앞에서 울고 부르짖는 기도,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간구하는 기도 등이다. 이 모든 기도들은 사람 안에서 그 영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씀을 접촉할 때 분명히 당신 안에 있는 그 영의 임재를 알 것이다. 당신이 그 영의 임재를 깨달을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기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영을 소멸시키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 읽기와 기도를 조화시켜야 한다. 반대로 당신이 기도하지만 성경을 읽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접촉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기도는 필연적으로 당신 자신의 사상과 생각과 견해와 의견과 취향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당신 자신이 아닌 그 영으로부터 기도가 나오기 위해 당신에게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이제 당신은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왜 예수님이 먼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항상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 안에 살기를 배운다면, 그분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거할 것이다. 말씀을 합당하게 읽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주님 밖에 거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말씀을 영적으로 읽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이해하기 위해 그의 지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말씀을 접촉하기 위해 그의 영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 거하는 주님의 말씀을 쉽게 가질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그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는 그 영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영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님의 영으로 충만될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이 무엇을 구하든지 그 사람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 이유는 이 시점에서 그가 마음속에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인 주님의 말씀과 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기도를 하기 위해 당신은 먼저 합당한 말씀 읽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말씀을 합당하게 읽는 것은 분명히 기도에 의해 수반되며, 합당한 기도는 분명히 말씀을 읽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두 가지가 공히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먼저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두 가지는 함께 가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볼 때 우리는 먼저 말씀을 읽고, 그다음 기도를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편 119편에서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147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기도가 말씀 읽는 것 앞에 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일에 관하여 엄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단지 자연스럽게 그 둘이 이어지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형제님, 새벽 집회에서 성경을 먼저 읽은 다음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까, 아니면 기도를 먼저 한 다음 성경을 읽는 것이 더 좋습니까?”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살아왔지만, 내가 걸을 때마다 오른발을 먼저 내딛었는지 아니면 왼발을 먼저 내딛었는지가 오늘까지 분명하지 않다. 오늘 아침 당신이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오른발을 먼저 내딛었는가 아니면 왼발을 먼저 내딛었는가? 걸을 때마다 오른발로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왼발로 시작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마다 오른발이나 왼발 중 어느 것이 먼저 가는가를 주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한다. 당신이 매일 아침 주님 앞에서 먼저 읽은 다음 기도하는가, 아니면 기도를 먼저 한 다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다만 정상적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라. 때로 당신은 먼저 말씀을 읽은 다음 기도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기도를 먼저 한 다음,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당신은 죽은 규정을 세울 필요가 없다. 때로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간단히 기도를 몇 마디 하고 난 다음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또 어떤 때 당신에게 말씀을 펴서 볼 내적인 갈망이 있어서 몇 문장을 읽은 다음 느낌이 와서 기도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흔히 같은 횟수로 발생하며 같은 양의 시간을 차지한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영국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뮬러(Mueller)형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기도하고 말씀 읽고, 말씀 읽고 기도했던 마지막 세기의 사람이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매일 아침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얼마 동안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 시간 동안 오직 말씀만 읽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가 오직 기도만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매일 아침 주님 앞에 나올 때 말씀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동등한 주의를 했으며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세기 동안 말씀 읽는 것과 기도하는 실제적인 방면에 있어서 뮬러는 가장 정상적인 귀감이었다고 거의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에게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각을 사용했고, 말씀을 접촉하기 위해 그의 영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또한 말씀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 앞에서 생생하고 신선했을 뿐 아니라, 꾸준하고 견고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우리가 기도의 공과들을 다루기 전에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먼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 기도의 의미 이제 우리는 기도의 첫째 공과, 즉 기도의 의미에 올 수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도란 무엇인가를 묻고자 한다. 도대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기도라는 용어를 듣자마자 즉시 그것은 사람이 간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부족함이 있어서 물질적인 공급을 필요로 하거나, 병에 걸려서 치료를 필요로 하거나,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 어떤 해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의 필요를 공급받고, 그의 질병을 고침 받고, 그의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 하나님께 부탁하려고 그분 앞에 간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성경에서 그러한 기도의 실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그 과부는 계속해서 한 재판관에게 가서 그녀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성경에서 계시된 기도의 합당한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그러한 정의가 틀린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지만, 그것은 너무 피상적이고 깊이와 정확성을 결여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실제적인 기도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다만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진리를 단지 단일한 어귀나 방면을 근거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어떤 집에 대해 말할 때 그 집의 한구석이나 방 하나를 보고 그 집이 어떻게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은 그 집을 여러 방면에서 전체적으로 보고 나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으로 기도에 관한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기도가 단지 사람에게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부분적인 의미일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의미는 아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성경에서 기도에 관한 모든 구체적인 실례들을 모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과 느헤미야와 엘리야와 이사야와 다니엘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있고, 한편 신약에서 주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도가 있다. 이 기도들을 하나하나 연구하고 그 기도를 복합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도들을 그렇게 세밀하게 연구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는 아니다. 우리는 다만 간단한 말을 사용하여 기도의 의미에 관해 말할 것이다. Ⅰ. 기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상호 접촉이다 기도는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 접촉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접촉하는 이 문제는 성경에서 아주 큰 제목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존의 목적이 하나님의 그릇이 되는 것이라고 자주 말해 왔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사람의 내용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다.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둘 곳이 없다. 즉 그분은 집 없는 하나님이 된다. 나는 이것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가장 큰 필요는 사람이다. 그분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실체로서의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우주 가운데 그분의 운행에 관한 한 그분에게는 여전히 그 운행을 이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으로 당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곧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1장의 마지막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충만이라는 용어는 번역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면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이고, 다른 면으로 그리스도의 완전성이다. 바꿔 말해서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는 전혀 완전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격렬한 신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하여 그분이 자신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에 있어서 온전히 완전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그분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우주 가운데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 형제자매들이여, 이 문제는 너무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분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그릇, 혹은 바꿔 말해서 그분의 완전이 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에 관해 두 가지 준비를 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첫째 준비는 그분이 사람을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했고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한 것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에 따라 창조되었을 때 그는 여러 모로 하나님을 닮는다. 사람의 즐거움이나 노여움이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선호나 선택 등과 같은 사람의 다양한 표현은, 그것이 그의 감정이나 의지나 기질이든 간에 어느 정도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축소형들이다. 또 다른 준비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그의 존재의 깊은 곳에 영을 창조한 것이다. 우주 가운데 수없이 다양한 생물들 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영이 있다. 천사들은 영이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온 피조물 가운데 영이 아니면서 영이 있는 유일한 피조된 존재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그의 존재의 깊은 곳에 영을 창조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영이신 그분을 영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위장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음식을 섭취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위장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게 우리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에게 위장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소화할 수 있고, 우리 존재 안으로 동화되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조성이 되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안에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영접할 수 있고, 그분을 동화할 수 있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조성이 되게 할 수 있다. 창세기 처음 두 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의 그릇으로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두 단계의 준비를 하셨다. 한 단계는 사람을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창조하시는 것이었고, 다른 단계는 사람이 그분을 영접하기 위해 사람 안에 영을 넣는 것이었다. 그분이 이 두 단계의 준비를 하신 후, 사람이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생명으로 얻게 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나무의 형태로 사람 앞에 두셨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영 안에서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접촉이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어 사람의 내용이 되고, 사람은 하나님을 밖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가 사람 안에 성취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 접촉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기도는 다만 사람이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접촉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지거나 접촉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지거나 접촉하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합당한 표준 이하인 것이다. 표준에 맞는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호 흐름과 접촉이 있는 기도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마치 서로 안으로 흐르는 전류와 같다. 기도는 다만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이라거나 다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사실과 체험에 따르면,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흐름이다. 표준에 맞는 모든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 흐름을 가질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은 실제로 사람을 접촉하며,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가장 높고 가장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 접촉이다. Ⅱ.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호흡하고, 하나님을 얻고,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바 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또한 사람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당신이 공기를 들이마실 때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들이마시는 동안 자연히 하나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하나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은 당신의 누림이 된다. 그뿐 아니라 당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께 굴복되고, 하나님께 향하며,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다. 당신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으로 충만될 것이고, 더욱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킬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얻어질 것이다. 당신이 한주 동안, 혹은 한 달 동안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상당히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상당히 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당신을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기도하는 것이다. 겨우 이삼 분 동안 기도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당신이 실제로 하나님을 호흡하고, 실제로 하나님이 당신을 얻고, 당신이 하나님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진정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기도가 다만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예를 들어 당신에게 집 한 채가 필요해서 하나님께 집 한 채를 마련해 달라고 구한다고 하자. 당신이 기도한 후 주님으로부터 당신이 구한 것이 당신에게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을 받는다. 이튿날 어떤 형제가 와서 당신에게 “당신에게 집 한 채가 필요합니까? 내 이웃이 두 집을 세로 내놓았는데 위치가 편리하고 값도 쌉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당신은 즉시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할렐루야, 주님은 실로 진실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나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적절한 기도가 아니다.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이 진정으로 기도의 공과를 배웠다면, 사실상 당신이 집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둘째 문제이다. 당신이 주의해야 할 첫째 일은 당신이 하나님을 더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이고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더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이다. 기도의 결과가 다만 어떤 특별한 일의 성취일 뿐이고 하나님을 얻는 것이 없거나 하나님이 얻으시는 것이 없다면 그러한 기도는 실패이다. 기도의 최종적 결과는 비록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한 것이 성취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더 얻는 것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더 얻으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기도에 대한 체험이 이와 같은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많은 때에 우리는 그러한 기도의 의미를 모르고 여전히 어떤 일들에 관해 하나님께 기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러한 일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그분 자신 안으로 이끄신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된 어떤 자매가 그녀의 자녀를 몹시 사랑하지만 주님은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하자. 당신이 그녀를 아무리 돕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주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의 자녀가 병들게 된다. 여러 의사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 아이의 병이 낫지 않는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주님을 신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게 된다. 그녀는 기도할 때 오직 그녀의 자녀를 치료해 달라고 주님께 구한다. 그녀에게는 주님 자신을 찾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한 기도를 통해 그녀가 실제로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을 접촉할 수 있고, 주님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그러한 기도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주님에 의하여 얻어진 바 되기를 거절했던 이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바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흘 후에 그녀의 아이가 실제로 치료되었으므로 그녀는 교통 집회에 와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 하나님이 그녀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그녀의 아이가 어떻게 치료되었는가를 간증한다. 그녀는 기도에서 실제를 얻었겠지만 여전히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많은 때 우리는 그와 똑같다. 우리가 교회의 황폐함을 보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교회의 상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접촉하게 하고, 그분을 들이마시게 하고, 그분을 얻게 하고, 그분이 우리를 얻으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진정한 기도는 일들에 관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혹은 사람들을 위해 중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분의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더욱 분명해지도록 하시리라고 믿는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들이마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바 되는 것이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과 일들과 물건들을 위한 모든 기도는 기도의 본질이 아니라 다만 기도의 껍질이나 장식이다. 진정한 기도 곧 본질에 속한 기도는 당신이 실제로 하나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호흡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을 얻고, 그분으로 충만하고, 그분이 당신의 존재를 얻도록 허락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요점을 볼 수 있다면 기도의 참된 의미에 관해 더 나은 이해를 가질 것이다. Ⅲ.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고 동역하는 것이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과 그분의 갈망을 표현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앞에서 언급된 두 요점에서 다루어진 기도의 비결을 진정으로 배웠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즉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과 협력할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일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또한 그 사람을 통하여 그분 자신과 그분의 갈망을 표현하시도록 허락할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8장 26절부터 27절에 따른 것이다. 그 구절들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만 성령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우리 안에서 중재하신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른다.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기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처음 로마서 8장에 있는 이 두 구절들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궁금히 여겼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는가? 내가 부족함에 처했을 때 나에게 양식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성경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점차적으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그러한 기도에 관해서는 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수준 이하에 있는 그러한 기도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갈망을 접촉하고 표준에 맞는 기도들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약함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러한 우리의 약함에 있어서 성령 자신이 우리를 돕기 위해 동참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형제들이여, 진정한 기도는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진정한 기도는 양측을 포함하는 기도이다. 다만 사람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영이 기도 안에서 사람과 연합하고, 사람을 입고, 사람과 연결되는 것이다. 밖으로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속에서는 그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측이 같은 기도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오직 이것이 성경에서 언급된 기도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주 엘리야의 기도에 관해 말한다. 야고보서 5장 17절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헬라어로 ‘간절히 기도한즉’은 기도로 기도했음을 의미하거나 기도 안에서 기도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표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미하는 양측의 기도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엘리야가 기도하고 있었을 때 그는 기도로 혹은 기도 안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서 그는 그 안에 있는 그 영의 기도로 기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이 엘리야 안에서 자신에게 기도하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언젠가 참된 기도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이것은 진정 사실이다. 로마서 8장 27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 구절은 “그 영이 하나님의 뜻대로…중재하시니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에 따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심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통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의도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다. 이러한 예증들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기도는 확실히 우리 존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되게 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양측의 사람, 즉 하나님이 사람과 연합된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고, 그분이 기도하실 때 그것은 또한 당신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이 당신 안에서 기도하실 때 당신은 밖으로 그 기도를 표현한다. 그분과 당신은 안팎으로 완전히 하나이다. 즉 그분과 당신이 모두 동시에 기도하는 것이다. 그때 당신과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고 하나로 연합된다. 따라서 당신은 하나님과 협력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갈망이 당신을 통해 표현될 수 있고,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된 기도이다. 그러므로 유다서 20절은 “성령 안에 기도하며”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서 기도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서 그것은 당신의 기도가 당신과 성령이 하나로 기도하는 양측의 표현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6장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영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영은 반드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통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영이 다만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 사람의 영도 포함하는 것임을 시인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러한 연합된 영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 장에 있는 우리의 교통에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호흡해 내신 것이고, 한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들이마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 읽기와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호흡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만 읽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말씀만 읽는다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 자신을 호흡해 내시도록 허락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들이마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사람들과 일들과 물건들을 위해 간청하는 것은 밖의 껍질에 불과하다. 진정한 기도는 항상 성경과 조화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숨을 내쉬며 들이마시는 것이고, 우리와 하나님, 곧 하나님과 우리로 하여금 서로 접촉하고 서로 얻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과 협력하며 일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 자신과 그분의 갈망을 표현하시고, 최종적으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기도의 근본적인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