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45 전체: 178,687 )
항상 해야 하는 세 가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
lhyunsik

전주성경침례교회 1. 항상 해야 하는 세 가지 빌립보서 2장 12,13절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답게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간증을 잃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제시해 줄 수 없게 됩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생각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 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항상 해야 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해야 하고(마 6:33),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헌신해야 하고(롬 12:1),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갈 2:20).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것말고도 항상 해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과 영적인 것들에 자신의 생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잘 알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Ⅰ. 항상 복종하며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오늘 본문 빌립보서 2:12절을 보시면『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구원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통해 구원이 온전해지길 바라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은 완전한 사역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어떤 행위를 통해 구원이 온전해 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그 어떠한 간증도 내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우리 자신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영생은 결코 이론이나 어떤 사상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말 그대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실재하는 생명!"입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마귀의 성품을 물려받아 태어나서 마귀의 정욕(요 8:44)을 실행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을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성품은 악을 증오하는 성품이며, 선을 사랑하고 선과 연합하는 성품입니다(롬 12:9).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 새 성품을 따라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모두 마귀의 성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성품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반역하는 마음"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고 달려들다 파멸해 버린 자입니다. 그처럼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인 덮는 그룹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시도하다 결국 흉찍한 사탄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아담의 성품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반역하는 성품을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는 새 성품이 있음에도, 그 안에는 여전히 아담의 성품이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신과 손잡게 되면 그는 즉시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이미 반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종"이라는 단어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항상"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에 복종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탄으로부터 물려받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는데, 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부복할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낮추고 그 말씀을 두려워하여 엎드리는 자세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의 섬김을 결코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주께서 번제와 희생제를 주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만큼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삼상 15:22)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함이 없는 모든 형태의 예배는 실로 헛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로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고(벧전 1:23), 따라서 그 말씀이 우리의 모든 실행과 믿음에 있어 "최종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섬김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무시되는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계 3:2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요 1:14), "그 말씀"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요 1:29), "그 말씀"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다시 부활하셨고(롬 4:25), "그 말씀"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이제 곧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5). 우리가 정녕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엎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은 항상, 매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Ⅱ.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라 에베소서 5:18절 말씀을 다 함께 보겠습니다.『술 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구원받은 사람은 즉시 성령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또 다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비록 그 사람이 어떠한 느낌도 느끼지 못했다할지라도 구원받은 즉시 성령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구하는 어처구니없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우리 자신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충만 이라는 것은 넘쳐서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 안에 오신 것은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충만해 져서 그 사람을 관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이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서 역사하시고, 그 영은 혼에게 지시하고, 그 혼은 몸에게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또한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매일의 기도는 성령께서 자신을 매일 관장해 주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곧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생활은 활기가 있고, 윤택하며 진취적이고, 열정적입니다. 이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보이듯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역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길 원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는『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결코 육신적인 사람은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별의 별일이 다 있을 것인데, 어떻게 항상 기뻐한단 말인가?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한단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이러한 말씀이 전혀 어렵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지 않을 만큼 몰매를 받고 빌립보 감옥에 실라와 함께 갇혔는데도 기쁨과 감사 가운데 기도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행 16장). 과연 우리가 사도바울과 똑같은 형편과 처지에 있다면 바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낙심과 좌절 속에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쪽은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며, 다른 쪽은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마치 천사의 얼굴을 하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행 7장). 차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없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바퀴 없는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로 영적 생활을 하려면 그 자체가 매우 힘겨운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사람은 주일 날 교회에 가는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이 곤고하게 되는 원인은 그 사람이 항상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에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15분 이상은 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최소 단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반드시 영적으로 피폐해져 가며, 성령의 열매를 전해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절대 필요합니다. 구원받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자신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또한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기도가 멈춤 곳에는 성령님도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시인하고 성령의 충만을 간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Ⅲ. 부활의 소망 안에서 행하라 다 함께 고린도전서 15:5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5장만큼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는 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곧 바로 가져야 하는 믿음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많은 고난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신 것은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요 2:19). 주님은 죽음 뒤에 있을 부활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부활의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게 됩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6-19절에서 밝히기를『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한 것이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전 15:32)고 말하며 현실에 집착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신비"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을 입는다는 것은 실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줄곧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마지막 58절에 와서 결론짓기를『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다시 부활하기 때문에 그들의 섬김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슬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그런 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생에 가장 가치 있는 투자는 "영원"에 대한 투자입니다. 이것만큼 더 확실하고 더 분명한 투자는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지니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이후 결코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헌신의 의미도 모르며 썩어져 버리고 모두 다 타 버릴 것들을 향해 자신의 생을 낭비합니다(벧후 3장). 영원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상실해 버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먹고사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위해 먹고산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전처럼 단순히 먹고사는 데에만 우리의 생을 쓰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고 또한 그것에 자신의 생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한 행위들에 대해 결산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되는 대로 막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구원받고 난 후 "더 좋은 부활"(빌 3:11, 히 11:35)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은 그 어떤 행위도 없이 받았지만, 상급은 반드시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구원받고 난 후 주님을 위해 그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부끄러운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행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 현실 세계가 영원 세계와 곧 바로 직결된다면 이 현실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간증을 낳는 삶이 아니라면, 그 삶은 살아 있으나 실로 죽은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어와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군인은 적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그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과 매일 매 순간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하는 것과 영원을 위해 자신의 생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선행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간증을 잃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간증을 잃어버리는 일을 했습니까?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다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서 바른 믿음과 행위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사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 2.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58장 11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14절에서는『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마귀의 영에 인도함을 받았었습니다(엡 2: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고아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아란 부모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로 남겨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14:17,18)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관여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지, 하나님 따로 자신 따로 생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다 Ⅰ.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인도함에 있어 자신의 "음성"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음성에 대해 오해하는 개신교의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원에 가서 목이 터지라고 기도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뭔가 어떤 "느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소위 "환청"이라는 것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성이 그들의 귀에 들려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의 원장이 금식을 다 마치고 난 저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이유인즉, 하나님께서 저를 잘 해주라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무슨 환청 같은 것을 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렇게 썩어버린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버리고 무엇인가를 직접 듣고 싶거나, 직접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도 구약처럼 무슨 음성으로 각자를 인도하신다면 참으로 그 어떠한 기준도 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그분의 음성을 직접 사용하셨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방법을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분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 말씀이라는 "기록된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요한복음 10:25-27절에서는『...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분입니다(계 19:13).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가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의 오른 편으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눈으로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요 1:1). 하나님의 음성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들을 부르시는데, 그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양들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비 마귀의 음성에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엡 2:1-3)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의 양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이면 자신의 음성을 듣고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양이기 때문에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비춰보았을 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즉시 시정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첫 번째 증거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입술로는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생활이 따로 논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하는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믿음은 분명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인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들 간에 믿음의 차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은 믿음이든 큰 믿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크고 작고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그 목자를 따르는 우리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두려워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시편 119:105절은『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즉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등불"이고 "빛"이신데, 이러한 빛을 상실하고 어떻게 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이나 느낌은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의존하기 때문에 결국 길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이 가는 길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부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서 벗어난 자신의 양들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으로 "환경"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또한 우리에게 조성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이 잘못된 길을 갈 때 그 길을 환경을 통해 막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조성된 환경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놓으신 환경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에 자신의 생을 걸지만 그래서 로또복권을 사고, 경마장에 달려가고, 카지노에서 자신의 인생의 승부수를 걸지만, 그리스도인은 우연에 자신의 생을 맡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양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관장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우리는 어떤 문이 열리고, 어떤 문이 닫치고 있는 지를 잘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우연에다 자신을 맡기고 산다면 그는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조성된 환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것들입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내적인 확신까지 있다면 가장 잘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절에서는『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에게 조성된 환경과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확신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다 Ⅱ.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마귀도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 것인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또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그의 이름은 아폴루온이더라.』(계 9:11)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라는 말과 헬라어로 "아폴루온"이라는 말은 "멸망, 파멸,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아바돈이고 아폴루온입니다. 곧 "멸망의 아들"입니다(요 17:12). 마귀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결국 멸망과 파멸의 길로 가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바른 성경을 무시하고, 바른 지식을 무시하며 널따란 길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시도하는 모든 자들은 종국에 가서는 자신들이 마귀에 의해 멸망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길은 실로 좁은 길입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은 성경대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가끔 자신의 마음이 울적할 때 나타나서 위로나 해 주고 떠나는 그런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그런 하나님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성경대로 믿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잠언 14:12절에서는『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수가 따른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의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창 8:21). 타락한 성품을 지닌 사람은 선보다는 악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아무리 바르게 보이는 길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길이라면 그것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해 놓은 죽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지만, 마귀 따라가면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다함께 누가복음 1:78,79절을 보겠습니다.『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로 말미암아, 높은 데로부터 여명이 우리에게 임하여 흑암에 있는 자들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비치고 우리의 발걸음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리로다."라고 하더라.』침례요한의 아버지 사카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여명이 자신의 백성을 화평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놓여져 있습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교제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고, 양자 되는 영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종이나 원수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자녀로 대우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1절은『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자신의 "느낌"을 신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의 감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안정된 상태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고, 자신의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다가서는 모습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의지하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기분은 결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변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의 통치자시고(사 9:6), 그분을 통해 우리 또한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육신적으로 행동하게 될 때,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을 따라 살 때,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화평이 깨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자신의 육신적인 것들을 진솔하게 자백할 때 화평의 관계는 즉시 회복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유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자백할 때, 두루뭉실하게 자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형식적이거나 그냥 입술로만 하는 그런 "가짜 자백"에 대해서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 저는 너무나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제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두루뭉실하게 자백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제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려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이것에 있어서 죄를 지었고, 그리고 이것, 저것, 또한 다른 것에 있어서 죄지었습니다."라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자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육신적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롬 8:1). 마귀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다가와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다 이해하시고 봐주실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화평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른 관계에 놓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 가운데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고전 7:15).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화평하게 된 우리와 지속적으로 화평의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세상과 마귀의 손을 뿌리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 선행되지 않고는 구원받았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약 4:4).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다 Ⅲ.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동안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 안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8:11절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또 주는 너를 계속 인도하여 가뭄에서도 네 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살찌게 하리니 그러면 너는 물 댄 동산 같을 것이며 물이 끊기지 않는 샘물 같으리라.』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도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길 원하시는데 자신이 그분의 인도를 거부한다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인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때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 대해선 하나님의 인도는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를 언제까지 인도하시는가? 잠시 시편 48:14절을 보겠습니다.『이 하나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 그는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리라.』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참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며, 또한 우리의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찬송가 95장에 있는 "예수 인도하셨네"라는 찬송입니다. 그 찬송가의 가사는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님께서 인도해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의 매사를 인도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매사를 간섭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성경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결코 바른 길로 갈 수 없는 지극히 의존적인 동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매사를 인도하고 싶으신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결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여전히 "타락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지속적으로 받으려면 순종적인 자세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나침반이 있어야 길을 잃지 않고 등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이 그 다음 단계인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에베소서 5:18절에서『술 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5:19절에서는『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에 자신을 엎드리지 않을 때, 성령님은 즉시 소멸합니다! 불순종은 성령을 소멸하는 요인이 됩니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 안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요 16:13). 그러나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성령님을 그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은 그 사람 안에서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활동을 멈추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은 그 어떤 조명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자백하지 않는 이상, 성령님은 그를 인도할 수도 주관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멈춘 곳에는 마귀의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든 마귀의 영의 인도함을 받든 둘 중 하나의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음을 제가 저번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정해져 있는 이치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멈춘 곳에는 마귀의 인도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인도하기 원하시는 것처럼 마귀도 구원받은 사람을 틈만 있으면 지속적으로, 그리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영적 세계의 법칙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든 또는 마귀의 인도를 받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몫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인도하시기 원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조건은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어떠하였든지 이제 구원받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3:5,6절에서는 이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잠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들을 지도하시리라.』이 말씀이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대 원칙입니다. 이 말씀이 무시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인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신뢰했다면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든지 먼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우연에다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생을 맡길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잘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인도는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 3.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 사도행전 4:13-22절 세상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 종교들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에는 "거듭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사람들은 타락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 성품은 지옥에 떨어져도 절대 변화되지 않는 성품입니다. 사람에 따라 더러는 선한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도 죄를 지을 환경이 조성되면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한 성품은 어떤 방법을 써도 개조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영국사람으로 스로스츠라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무려 40년 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한 번 맞을 때마다 50대 씩, 여덟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들어갔다가 거기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것입니다. 그는 거듭난 이후 간증하기를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 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만에 변화되었습니다."라고 복음의 능력을 간증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분명 새로운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입술로는 떠들어대도 그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거듭나기 전에는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행전 2장에서 거듭나자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거듭난 사람의 정상적인 삶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Ⅰ.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오늘 본문 사도행전 4:18-20절을 보겠습니다.『그들을 불러서 명령하기를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더라.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경청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청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인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일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하더라.』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매우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의 눈치나 보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귀가 쳐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법칙입니다.『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안전하리라.』(잠 29:25) 호흡이 콧구멍에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는 거듭나기 전 매우 겁쟁이였습니다. 베드로는 거듭나기 전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무려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지만, 그는 아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사도행전 2장에서 거듭났을 때,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공회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지만, 그가 거듭난 이후에는 그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그들을 불러서 명령하기를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더라.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경청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청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인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일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하더라.』(행 4:18-20)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인데, 그들의 특징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늘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변모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쩌다 죄를 지으면 왜 즉시 자백하는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이실 정도로 죄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다는 사실을 구원받은 사람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악을 절대 수용하지 않으며, 그 악에 대해 반드시 응징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그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씀에서 벗어났으면 즉시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시키지 않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자신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자신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뻔히 알면서도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며 오히려 변명하려고나 한다면 그는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씀에서 벗어났으면, 즉시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시작할 때, 신앙의 침체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지를 늘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즉시 수정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면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던 삶에서, 오히려 반대가 되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춰주길 바라는 삶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냉랭한 믿음생활에서 절대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로 악을 택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할 수도 있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질펀한 믿음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도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비행기가 가야하는 정 방향에서 5°벗어났으면 그것을 정상 방향으로 돌이기 위해 10°를 돌이킵니다. 믿음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정상적인 믿음에서 벗어나게 되면 정상적인 믿음생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전보다 두 배 이상은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믿음의 퇴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터치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말씀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고 즉시 스스로 돌이키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면 그의 구원은 가짜이거나 아니면 마귀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Ⅱ.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 사도행전 4:29-31절을 보겠습니다.『이제 주여, 그들의 위협함을 살피시어 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시어 병을 낫게 하시며, 또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하더라.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베드로는 거듭난 후 매우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공회 앞에서 생명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는 전혀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누구보다도 육체의 피로를 느끼실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 때문에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질 정도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해야 된다는 "기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늘 깨어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셨지만, 그들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전혀 기도생활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거듭난 후에는 공회의 위협이 거세 지자 즉시 동료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 매우 겸손해 졌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주여, 그들의 위협함을 살피시어 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시어 병을 낫게 하시며, 또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하더라.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행 4:29-31)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자신의 무능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기도로 매달림으로써 그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교만한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기도의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잠시 잠언 3:5,6절을 보겠습니다.『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들을 지도하시리라.』주를 신뢰하는 사람!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로 다가서는 사람입니다.『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17절 말씀은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입니다. 매사에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교만인 것입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는 그 자체가 교만인 것입니다.『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벧전 5:5).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겠다는 교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대적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 없다고 기도로 매달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넘치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는 구원받고 난 후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기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시 베드로전서 5:6,7절을 보겠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심이니라.』베드로는 겸손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 다음절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면 모든 염려를 다 맡길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염려들을 다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염려가 있음에도 왜 기도로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면 일이 되겠지 라고 짐짓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Ⅲ.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 사도행전 2:36-38절을 보겠습니다.『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분명히 알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처형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베드로는 자신이 따랐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선지자정도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주와 그리스도라고 당당하게 설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은, 거듭나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된 구약성경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전적으로 깨달아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잠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마 16:17).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6:21-23절에서는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그 때로부터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야 될 것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될 것과 죽임을 당할 것과,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질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기 시작하시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주를 붙들고 말리기 시작하면서 말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런 일이 결코 주께 있어서는 아니되옵니다."라고 하니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함이라."고 하시더라.』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해 오히려 마귀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말리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받고 나자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또한 부활하셔야 했던 것을 정확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말씀의 본질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고전 2:14).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영에게는 그 어떠한 조명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육신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께서 그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느 날 육신으로 돌아가 버리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영적 조명을 꺼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육신과는 전혀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이 돼버리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즉시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그분의 영에 의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는데, 그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게 되면 성령님은 그 사람 안에서 즉시 소멸돼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일깨워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앉아 설교를 듣지만, 그 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마귀가 새처럼 날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마 13:19). 어느 날부터인가 설교가 자신의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조명을 꺼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육신이 되어버렸기에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일깨워주기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일주일 간 기도로 준비하여 가장 필요한 말씀을 전달했는데, 말씀을 안 먹는 사람은 영적으로 고사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나오기 전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집에서 기도하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1,2)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을 성별하고, 마치 갓난 아기가 어머니의 생명의 젖을 사모하듯이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말씀의 갈급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가짜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는 영적 생명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영적 양식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셰어(1909-)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캐나다의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였습니다. 그는 빌리그래엄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를 바로 이 셰어가 작곡한 것입니다. 그가 한참 복음성가를 부르며 활동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러자 셰어는 대답하기를 "저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가치관과 삶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실질적인 그 사람의 생명입니다! 한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은 실제로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며, 혈액이 온 몸에 도는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도 영적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생활방식대로 살지 않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된 새로운 생활방식에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다시 옛 생활방식을 고집할 때, 거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 때,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으려고 했다면, 옛날의 생활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의 자세와 각오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