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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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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원칙(고후 12:14-19)
lhyunsik

일산 갈보리 침례교회 최항/이재명 목사 [고린도후서 12장(2)] 사역의 원칙(고후 12:14-19) 사역의 원칙 본문 : 고후 12:14-19 사역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모든 민족들 중에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하나님에게 뽑힌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되어 그 귀한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새언약을 맺으심으로 신약시대가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레위 자파 가운데서도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지성소로 들어가는 거대한 휘장이 찢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신뢰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구호로 외치면서 구원받은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진리가 확실하게 드러난지 5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구약적인 관념 하에서 “사역”이라는 말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누가 섬겨야 합니까? 신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학위를 갖추고 안수를 받은 목사들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교회를 약하시키고 왜곡시킨 니골라파의 가르침입니다. 직분을 가진 집사들까지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헌신하고 열심히 있는 몇몇 형제들만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까?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형제, 자매들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인 이 신약 시대에 제사장들이며, 사역자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역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삶은 전적으로 주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사역의 실제적인 대상들은 사람들이었고 영혼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역의 원칙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원칙이 곧 교회를 세우고 형제들을 세우며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을 몇 구절 참조하기 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항상 성경은 이처럼 성경의 문맥 아래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사소로운 해석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실제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어떤 실족거리도 주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2,33) 이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야말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들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형제들, 즉 교회를 실족케 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주의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참되게 주를 위하는 법은 바로 형제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역을 하지만 정작 형제들을 판단하고 무시하며 그들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책망합니다. 롬 14:8,1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히여 살고 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다 설것임이라.』 이처럼 사역의 두 대상은 구원받지 못한 잃어버린 죄인들과 구원받은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구원간증을 통해 이 두 가지 사역의 방면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구원받은 목적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이 담긴 사도행전 22장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사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저 의로우신 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네가 보고 들을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행 22:14,15) 이와 같이 첫째로 믿지 않는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주 에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윈함입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행적들이 기록된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의 첫째되는 사명이 복음전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모든 사역의 기초가 되며 으뜸이 됩니다. 이 사역을 배제한 모든 사역은 결코 실제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좋은 전통을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에베소 교회의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사역이 복음을 전하는 일임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 20:24) 복음을 증언하는 이 사역은 결코 사도 바울에게만 위임된 사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당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임된 사역입니다. 이것은 목사나 선교사 복음전도자에게만 국한된 사역이 결코 아닙니다. 이 사역은 심지어 형제들에게만 위임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에 관하여 자매들은 아주 좋은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가 있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감옥에 넘겨지는 일로 인해 그들이 얼리 흩어져 피신하면서도 그들이 남녀 모두 복음을 전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구원간증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곳인 사도행전 26장에는 한가지 목적이 더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너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곧 네가 본 이 일들과 또 앞으로 내가 네게 나타낼 일들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라』(행 26:16). 여기에는 증인이라는 말 외에 또 다른 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역자라는 말과 관련하여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자신이 복음의 사역자이며 또한 교회의 사역자임을 고백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으며나 바울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내가 교회의 사역자가 된 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함이니』(골 1:23,25). 특히나 사역의 대상은 주 예수님의 양떼들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내 양떼를 먹이라』고 하시면서 맡기신 사역과 동일합니다. 많은 사역자들의 마음은 많은 섬길 대상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자신이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참된 목자의 마음과 삯꾼의 마음이 나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목자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채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들보다 그들을 탈취해 양젖과 양고기를 먹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의 순전하고 아버지같은 마음을 읽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적은 것이라도 오히려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길 원했으며,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취하려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왜곡시키려는 모든 악한 소문들을 잠재웠습니다. 참된 사역의 목적은 그들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얻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얻어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그들의 열심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이 오직 그들을 주님 안에서 온전히 세우고 또한 그들을 위해 자신을 허비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밝히 말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이는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모아두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하기 때문이니라. 너희를 더욱 넘치게 사랑할수록 내가 덜 사랑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위하여 가진 것을 기꺼이 쓰고 또 나 자신까지도 쓰리라.』(고후 12:14,15)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섬긴 대가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을 향한 오해와 비방 속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조차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돌리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표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2장에서 자신이 어리석게 보이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자랑들을 늘어놓는 것을 보더라도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잇습니다. 그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익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체험을 자랑해서라도 어리석은 고린도 상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바울의 간절한 태도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역의 원칙을 분명히 새기게 합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평판을 신경쓰기 보다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오해를 무릎쓰는 태도는 참된 선한 목자인 주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참된 사역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는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창녀와 세리들을 향해 사랑을 베푸신 것,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모두 다 자신의 개인적인 평판이나 의로움, 명분보다도 양들의 참된 필요를 돌보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큰 사역이든 작은 사역이든 눈 앞에 형제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 그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하고 순수해야 하며, 모든 사역이 원칙이 그들을 주 안에서 세우기 위함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의 주된 목적은 단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복음에 대한 강한 부담이 있었으며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곳에서나 복음을 최우선으로 전한 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또한 이미 구원받은 연약하고 어린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교회를 관심하였습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들은 다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이 교회들,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교회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그는 사역을 하고 그들을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실 그가 개인적으로 보낸 디모데서, 디도서 빌레몬서 또한 교회를 위한 그의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디모데서는 에베소 교회를 돌보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면서 그에게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돌볼지를 돕기 위해 기록한 것이며, 디도서 또한 크레테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 보낸 디도가 그 교회의 장로들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쓴 것입니다. 빌레몬서도 골로새 교회의 장로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 잠시 인디옥에서 쉬다가 다시 2차 선교여행을 갈 때에 그 목적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전에 주의 말씀을 선포한 각 도시로 가서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가 알아보자, 하니』(행 15:36) 형제들을 방문하는 일 이것을 하나님은 사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방문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행 15:41) 또 그의 3차 선교여행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합니다. 『안디옥으로 내려가 거기서 얼마를 지낸 뒤에 떠나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온 지방을 차례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강건하게 하니라』(행 18:23) 이처럼 그의 사역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교회를 향하였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거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 4:11,12) 여기서 섬기는 일은 ministry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성도들을 위함이며 또한 교회를 위함입니다. 심지어 복음전도자조차도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형제들을 교회를 관심하십니까? 형제들을 사랑하고 관심하여 그들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사역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관심하지 말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통해 실제로 형제들이 유익을 얻고 주 안에서 세워지고 있는가를 관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주님의 일이라 여기면서 하시는 그 일이 참으로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면서도 내내 이러한 사역의 원칙들을 인식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을 잊은 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고 자랑을 일삼을 때에 은사의 목적은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고전 14;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이처럼 모든 사역과 예배순서와 은사들은 모두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찬송을 부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교리와 계시와 모든 지식과 말하는 것이 모두 다 형제를 세우는 일이라야 합니다. 이것이 사역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을 세우기 위한 사역의 원칙을 따라 모든 일을 하였으며 반대로 형제를 실족시키는 일에 관하여는 결단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고후 8:13) 바울이 그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랑을 가장 뛰어난 은사와 덕목으로 꼽은 이유도 바로 가장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고후 12:19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13;10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능이 바로 무너뜨리지 말고 세우라고 주신 권능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동일한 말씀이 고린도후서 10장에도 반복된 것을 볼 때에 사역의 권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그 권위를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데 전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고후 10: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는 너희를 무너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라고 주신 것인즉 이 권위에 대하여 내가 조금 더 자랑해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만 교회를 섬기는 사역이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주님 앞에서 사역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두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허락하신 목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를 뽐내거나 자신의 지식이나 재능, 열심을 자랑하기 위해 사역에 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뛰어난 교회의 일꾼은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다른 형제들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마음으로부터 믿고 참되게 시인하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왕가에 속한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누가 교회의 일꾼이며, 사역자며 교회의 종입니까? 목사만입니까? 목사와 집사입니까? 형제들만 해당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할 때에 그가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자매였고 그녀의 이름은 뵈베였습니다. 그녀를 소개할 때 바울은 “교회이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바울이 사역한 동역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그들은 부부이지만 동일하게 이름이 언급되며 오히려 자매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 외에도 여러 자매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녀들의 이름은 “우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와 “주 안에서 수고하는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이며 또한 “주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버시”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서는 뵈베 자매를 통해 로마 교회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당시에도 실제로 예수님을 섬겼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있었고, 십자가 밑에까지 따랐던 대부분도 여인들이었으며, 예수님을 위해 몰약을 준비했던 여인은 심지어 부활이 첫 번째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역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은 철저히 권위를 여자에게 허락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만 한다면 자매들은 교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섬김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교회 안에서 목사나 집사의 직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혼란케하는 자들의 아버지인 마귀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고 평강과 질서를 위해 권위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몇의 형제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시고 직분을 주신것과는 별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서 분배하신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만 이러한 사역을 가지는데 중요한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은 전적으로 형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거니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하되 오직 너희를 세우기 위하여 하느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섬겨지는 모든 크고 작은 사역들이 모두 다 이러한 원칙 안에서 감당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