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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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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양 , 목마른 양
lhyunsik

상처입은 양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1997년 1월호 p64 / 통권 58호 시편 23편에서 양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말씀의 정확하고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나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그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양의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은 외부의 공격에 대처하는 능력이 가장 약한 동물이며, 공격당했을 때 쉽게 좌절한다. 양은 맹수의 공격이나 환경이 주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 피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심약하다. 양만큼 쉽게 좌절하는 동물도 없다. 상처를 입었거나 고통을 당했을 때 양만큼 완전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동물도 없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강한 자기 보호 본능을 가졌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하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고통과 싸우고 견디려는 강한 의지와 삶에 대한 놀라운 집착을 가졌다. 동물들은 사냥꾼에 의해 다리를 다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도 살기 위해서 엄청난 아픔을 참으면서 인간에게 반격한다. 덫에 걸렸다가도 아픔을 참으며 며칠 동안 자기 발을 이빨로 물어 끊고 결국에는 탈출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동물은 죽음 앞에서는 강한 생존본능을 보인다. 그러나 그 유일한 예외는 바로 힘없는 양이다. 양은 쉽게 포기하고 죽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맹수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양떼를 보는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광경도 없다. 놀라고 당황한 양들은 아무 힘도 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목자의 마음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죽은 양들의 시체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상처입은 양들이다. 여기저기 다치고 뜯기고 부러진 양들이 힘없이 절망에 빠져 쓰러져 있는 것처럼 비극적인 광경도 없다. 양들은 상처를 딛고 일어설 의지를 잃는다. 살아 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상처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양들은 너무 흥분하고 겁에 질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린다. 몸을 일으켜 일어서려고조차 하질 않는다. 그냥 죽음이 와서 자기를 데려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넘어진 양도 양이 얼마나 심약한 동물인지를 보여준다. 양은 구덩이에 빠지면 벌렁 뒤집어진 채로 누워 있는다. 털이 완전히 자라 있을 때는 몸을 옆으로 굴려 발을 딛고 일어서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양이 일어서려고 노력만 하면 일어설 수가 있다. 그러나 양은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포기해 버리고 대책 없이 누워만 있는다. 양이 오랫동안 넘어진 채로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다. 그러면 금새 위에는 가스가 찬다. 위로 노출된 배는 축구공 가죽처럼 바짝 마르고 땅에 닿은 등 쪽은 눌리고 습기 차고 차거워지게 된다. 얼마 안있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고 몇 시간 후면 몸을 움직이거나 일어설 수 없게 된다. 날씨가 추우면 이삼 일은 버틸 수 있지만 덥고 습한 날이면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안에 죽게 된다. 그래서 목자는 목장 안에 넘어져 있는 양이 있는지를 열심히 살핀다. 노련한 목자의 눈은 초장 위에 부자연스럽게 누워서 난감한 모양을 하고 있는 하얀 물체를 쉽게 찾아낸다. 그리고 목자는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급히 달려간다. 수 년 간 방목한 경험이 있는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들판에 넘어져 누워 있는 양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면 늘 차를 세우고 도로변에 세워진 울타리를 넘어가서 양을 일으켜 세워준다. 양이 너무 오랫동안 넘어져 있지 않았으면 부드럽게 몸을 굴려서 자기 다리로 서게 하면 된다. 그러면 꼭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금새 양떼에게 돌아가서 함께 풀을 뜯거나 우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양이 오랫동안 넘어져 있었을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목자는 인내를 가지고 오랫동안 양을 보살펴야 한다. 양의 몸을 굴려 주고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게 한 다음 다리가 다시 힘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양을 조심스럽게 일으키며 부축해서 세워 주어야 한다. 양이 부자연스럽게라도 걸을 수 있으려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양은 목자의 든든한 다리에 기대다가 마침내 자기 다리로 천천히 어정쩡하게 원을 그리며 걷는다. 목자는 양이 혼자 힘으로 걸어서 양떼에게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준다. 양이 가진 무력한 기질에 대한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들도 너무나 쉽게 낙심하고 용기를 잃는다는 것이다. 작은 상처, 작은 고통, 작은 불편이 우리 눈에는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눈물을 흘리며 싸울 의지를 잃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슬픔을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싸워야 할 시험과, 인내해야 할 시련과, 대처해야 할 고난과, 직면해야 할 위기와, 견뎌 내야 할 상처를 갖고 있다. 인생은 물론 힘든 것이다. 인생에는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두운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다. 그러나 문제 자체는 진짜 문제가 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 문제들을 우리 목자의 도움 없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아니 “약함”으로 해결하려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제들은 단지 상상과 허상에 불과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확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한다. 작은 언덕도 큰 산처럼 보인다. 디딤돌에 불과한 것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로 착각한다. 궁극적으로는 승리가 기다리고 있는 일에서도 처참한 비극만을 본다. 우리가 가진 문제들 대부분의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만들어 내고, 우리가 상상해 냈으며, 우리의 믿음 없음이 가져온 문제들이다. 그것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내세울 뿐, 목자이신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 해 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다. 이렇게 야기된 문제들은 실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과 근심과 믿음 없음과 뒤섞여 있고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들은 그들의 목자께서 곁에 계시기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 목자에게 맡기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포기한다. 그러한 우리는 목자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그분의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가. 그때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한다. 삶이 어려워지면 넘어져서 죽은 듯이 드러누워 있고 싶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혼을 소생케 해주셔야 한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생각이 우리를 엄습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는 전능하시다는 것과 “나 + 하나님 =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맹수가 공격해 올 위험을 느낄 때, 구덩이에 빠져 누워 있을 때 포기하고 두 손 들려는 유혹에 굴복하기 전에 잠깐 멈추고 여러분의 목자께서 어디 계신지 둘러보지 않겠는가. 의심만 하지 말고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들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대로 하지 않겠는가. 목자이신 주님을 늘 기억하고 그분께 의지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의의 길들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혼을 소생케 해 주실 것이다 ============================================================== 2. 목마른 양 1996년 9월호 p76 / 통권 54호 조회수 : 3 저자 소개 - 뉴질랜드 태생인 저자는 목양 및 양모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전문가이며, 양털깎기 세계신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인 그는 목양의 경험을 통해 왜 주님을 목자에 비유하셨는지를 말한다. 사람들은 양이 일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마시는 일에 쓴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그들은 자주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낀다. 목자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양에게는 갈증을 식혀 줄 물과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먹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은 스스로는 물과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동물이다. 양은 물을 필요로 한다. 깨끗한 물, 순수한 물, 그리고 마시기에 적합한 물을 필요로 한다. 오염되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물이라야 한다. 너무 차도 안되고 너무 더워도 안된다. 또 그 물은 양에게 위험한 물이 되어서도 안된다. 너무 빠르게 흐르는 물은 양에게 적합지 않다. 양들은 선천적으로 ‘잔잔한 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물은 또 정체되어 있어 알칼리성을 띤다든지 해로운 화학성분이 함유된 물이어도 안된다. 양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해충이 알을 낳기 쉬운 늪이나 고여 있는 물이어도 안된다. 물은 양에게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을 찾아 양떼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먼 거리에서도 바람을 따라 물 냄새를 맡을 줄 안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먹이와 물을 찾아낸다. 인간의 도움을 거부하고도 불가사의한 감각으로 철을 따라 먹이를 찾아낸다. 아프리카의 ‘누’라는 동물은 먹이와 물을 찾아 수천 마일을 이동한다. 북반구의 광활한 오지에서 서식하는 북유럽산 큰사슴과 순록도 비슷한 거리를 이동해 먹이를 찾는다. 버팔로도 먹이를 찾아 광야를 가로질러 수백 마일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존 본능으로 인간의 어떠한 도움 없이도 긴 이동과 가뭄, 홍수, 전염병, 추위, 열기를 이겨 낸다. 그러나 오직 양만은 다른 동물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했다. 양은 있던 곳에서 풀을 다 먹어치우면 스스로 다른 초장을 찾을 줄 모른다. 그냥 정처 없이 헤매다가 맨땅이 드러날 때까지 그루터기까지 먹어치운다.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아니면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푸른 초장이 있는데도 양들은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감지해 낼 줄도 찾을 줄도 모른다. 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단 물이 떨어지면 양들은 속수무책이다. 양들이 물 있는 곳에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10내지 15마일, 이것은 그들이 이동했다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물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그 샘이 마르면 양들은 말라가는 진흙 땅을 서서 쳐다보면서 목말라 죽어 가게 된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리오 네그로에 서식하는 양은 자갈 밭에서 자라는 키 작은 수풀을 먹고 산다. 거기서 양들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표면 바로 아래에는 안데스 산맥을 타고 내려온 풍부한 물이 있는데, 10마일 간격으로 세워진 풍차가 양이 마실 물을 끌어올려 물통을 가득 채운다. 양들을 씻기고 털을 깎기 위해 양들을 모아야 할 때면 목자는 일시적으로 물통의 물을 끊는다. 그러면 며칠 못 가서 10마일 반경에 있는 양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물통 주위로 모여서 갈증 어린 눈으로 빈 물통만 바라보고 서 있게 된다. 그러면 목자는 물길을 터서 양떼에게 물을 준 뒤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양들을 모을 수가 없다. 양들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다. 3에서 6피트 높이의 수풀은 양들이 단지 20야드만 떨어져 있어도 목자나 양치는 개를 볼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양치는 개는 양떼를 찾아내거나 그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해 올 수가 없다. 양들은 물을 이용해서만 한데 모을 수가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양치기를 들라면 스페인의 바스크 목동들을 말할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바스크 목동들은 엄청난 수의 양떼를 이끌고 스페인 북부나 프랑스 남부, 그리고 미국의 록키산맥 서부 지역의 높은 산을 오르내렸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려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고산 지대의 초장을 적셔 주면, 녹색의 풀과 꽃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곳에서 4,5개월을 보낸 양들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내려오게 된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 러시아, 카자흐, 시베리아, 이란 등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목동들은 매일같이 양떼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리튼,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 기름진 초원의 나라들에서 목동들은 계획을 세워서 수백만 마리의 양들에게 꼴과 물을 공급한다. 양들은 종종 너무 많이 먹기도 한다. 양들은 과식으로 괴로워하거나 인간들처럼 몸이 비대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양들은 언제 먹을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만큼 먹어야 할지까지 보살펴 주어야 한다. 양들은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기도 한다. 인간처럼 그들도 먹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또 영양가 있는 것을 골라서 먹지도 않는다. 양들의 주인이 부주의해서 양들의 먹이에 소홀해지면 양떼는 영양가나 비타민, 미네랄이 매우 적은 좋지 못한 초장에서 꼴을 먹게 된다. 양을 먹이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적절한 먹이를 공급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새끼를 뱄을 때나 새끼양에게 젖을 먹일 때는 더욱 그렇다. 양들은 세심하게 돌봐 주지 않으면 독 있는 풀을 먹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독으로 알려진 것들 중 대다수가 초원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발견된다. 양들은 영양가 있는 풀과 그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풀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들은 독초를 알아보고 피할 줄 모른다. 이같이 상존하는 위험 때문에 양들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 목자는 치명적인 독초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서 양떼를 독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목자는 양떼를 초장으로 인도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초장을 점검해야 한다. 독초를 제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풀에 독이 제일 없을 때만 양떼를 초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목자가 계획을 세우고 꼴을 먹이고 양떼를 돌보고 먹이와 물에 대한 양떼의 끊임없는 필요를 채워 주지 않으면 양떼는 분명히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게 된다. 목자가 풀 뜯는 곳의 위험한 식물들을 인지하고 그것들로부터 양떼를 지키지 않으면 양떼는 독에 감염되어 고통을 당하거나 죽게 된다. 양들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될 때, 영양가 있는 먹이와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때, 양의 먹이를 세심하게 점검해 줄 때 최상의 상태에 있게 된다. 양들은 목자가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먹이와 물을 공급해 줄 때, 즉 그들의 물리적 필요가 잘 충족될 때 가장 건강하고 잘 발육하며 성장한다. 양들은 그들의 물리적 필요가 잘 충족될 때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을 띠고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된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자기들끼리 내버려진 양떼는 스스로 먹이와 물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주위에 널린 독초의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양떼를 오랫 동안 방치해 두면 그들은 분명히 죽게 된다. 목자만이 열쇠요 해답이며, 목자만이 양떼의 생명과 양식과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메마른 풀과 영양가 없는 잡초, 심지어는 독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뿐이다. 오늘날 영적인 영역에서, 세상에는 많은 거짓 목자들과 삯꾼이 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들로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그들은 양을 구원하고 인도해 주며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만이 양들의 유익을 구하시고 진심으로 양들의 필요를 채우기 원하신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만이 말할 수 없는 혼의 갈급함과 배고픔을 채워 주실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안에 영적 배고픔이 있는가? 우리 혼에 타는 듯한 목마름이 있는가? 우리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우리는 어디서 찾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메마른 땅에서 메마른 땅으로, 잡초 밭에서 잡초 밭으로, 텅 빈 초장에서 텅 빈 초장으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몇 분 동안의 강단의 설교와 라디오 방송 또는 TV 메시지를 통해 채우려 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서적과 이따금씩 열리는 교회 행사에서 갈급함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이 여러분의 매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수 있다. 이것이 시편에 나오는 진리이다.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고 영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