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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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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갈등
lhyunsik

믿음의 갈등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1996년 6월호 p92 / 통권 51호 우리가 보기에 안타까운 실상은 화목해야 할 가정이 신앙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을 때이다. 다른 사람들은 돈 문제로, 사업 문제로, 자녀 문제로, 건강 문제로,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직장 문제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심각하고, 분망하고, 어지럽기까지 하면서도 신앙문제에 대해서는 갈등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떤 가정은 신앙 문제로 갈등을 겪고, 그 정도도 심각하여 심지어는 파경의 직전까지 가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경우들을 본다. 어찌 생각하면 신앙 문제에 관한 한 쉽게 양보할 것 같은데도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그 중 한 편이 그 문제를 판결해 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성경의 권위를 내팽긴 채 남편의 권위, 아내의 권위, 고집, 독선, 지지 않으려는 성품, 이것을 양보하면 다른 것도 양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지금까지의 주장이 위선으로 드러날 것에 대한 우려, 교회를 옮겨야 하는 이유 등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타락한 아담의 성품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실행을 재는 최종권위이지만 사실 성경은 모든 것 즉 종교, 과학, 문학, 천문학, 미생물학, 재판, 행정 치리, 유산분배, 기업 설립 및 운영, 구제, 노동문제에 있어서까지도 최종권위가 되어야만 한다. 실제로 각 나라의 헌법부터 시작해서 각종 법률은 거의 성경에 기조를 두고 있다. 세상 종교 중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지 않은 법이 있는가 보라. 세상 종교들이 실행하고 있는 관습과 의례는 모두 성경에서 따온 것들이다. 이렇듯 성경은 살아 숨쉬는, 인간의 신념과 행동을 가늠하는 최종적인 잣대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최종적인 잣대라고 시인해야만 한다. 성경을 대적하고 인간의 발상으로 만들어 낸 진화론에 따르면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매사가 호전되어야 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모든 것은 퇴보해 가고 있다. 교육이 그렇고 도덕성이 그렇고 인간의 친화력이 그렇고 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그렇고 질병의 확산이 그렇다. 병원과 교도소는 지어도 지어도 모자라서 병실을 얻기 위해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고, 그래도 불치병은 더 늘어나며, 교도소도 사람이 많아 때로는 특사를 실행해야 할 형편이다. 나아진 것이라곤 통신과 교통인데 엄밀히 따지면 인간을 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진보인지 퇴보인지는 인간 스스로도 판단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한 가정은 갈등이 있고 불화가 있게 마련이다. 다른 문제들은 심각해도 해결이 되는데 신앙 문제만은 미봉한 채 함께 먹고, 함께 자며, 다른 일은 마지 못해 공유하고 협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그것은 외적 미봉이지 진실된 정감이 표현되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있어 단호하고 엄격한 말씀을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서로 대적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원수들은 그의 가족 중에 있으리라』(마 10:34-36). 자기 멋대로 믿는 사람들은 사랑과 구제, 세계 평화를 외치는 반면 예수님은 칼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선을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시며, 진리를 사랑하시고 비진리를 미워하시는 분이시다(시 10:15; 37:17, 잠 16:17; 25:26). 하나님은 과격한 분리주의자이시고 엄격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진리와 비진리를 뒤섞어 두리뭉실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고,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진리는 진리로 비진리는 비진리로, 의인은 의인의 편에 죄인은 죄인의 편에 서도록 갈라놓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칼을 주려고 세상에 오셨고 누가복음 22:36에서는 이 칼을 사라고 하셨다. 이 칼은 사람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실제적인 칼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으로서 교리적인 쟁점으로 가정들을 찢으시는 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곧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계 19:11-13). 한 가정의 신앙 문제에 갈등이 생기면 그것은 단순한 의견 대립이 아니라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진리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비진리도 진리라 하는 악령의 역사가 대립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길은 바른 성경을 고수하고 그 문제를 성경으로 가져와서 판결받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성경을 거부하는 한 쪽이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를 주장하고 수호하는 편에서는 성경을 제시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라고 하는 반면 상대편에서는 교단의 규모나 아무개 목사나 신학자 등을 들고 나오며 가정에서의 위치, 학력, 경력, 재정 능력 등으로 직간접적으로 이 일의 우위를 점유하려 한다. 진리를 수호한 편에서는 명확하고 분명하게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어도 상대편의 주장이 비성경적인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히 알기 때문에 양보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보충해 줄 성경 선생을 불러와 물으면 어떻겠느냐고 해도 상대는 그런 제안은 아예 처음부터 거절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가정의 신앙 문제는 해결이 안된 채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 생활은 지속된다. 이런 갈등이 부모와 자식간에 있을 때 그 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갈등이 부부간에 있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부간에, 형제간에 있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약 교회의 역사는 이런 갈등이 증폭되면서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편에서의 박해와, 억압을 견디며 진리를 수호하는 편의 순교와 성경적 성별이 이어져 온 것이며, 이로 인하여 피흘린 교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늘 소수였으며, 억압하는 세력들은 제도화된 교회들로서 정부와 세상과 타협하는 무리들이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일꾼들로 자처하여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소요와 수고와 자지 못함과 금식과 순결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성령과 가식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증거하였으며,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써, 영광과 오욕으로써, 또 악평과 호평으로써 증거하였고, 속이는 자들 같으나 진실하며,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느니라』(고후 6:4-10). 진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양보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인내하고, 지혜롭게 틈이 나는 대로 상대편에게 영적 지식을 일깨워 줄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주장을 펴는 것은 지기 싫어하고 주장을 양보하기 싫은 타락한 성품에 기인한 것뿐이며, 또 무지하기 때문이다. 영적 지식은 세상적인 지식처럼 열심히 연구한다고만 해서 얻어지고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적인 성향으로는 가장 기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이 무지한 것은 무지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배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진리를 제시하는 책들을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다. 상대를 원수같이 대하며 성경과 책들을 찢거나 불태워 버리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럴수록 이쪽은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인내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해야 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혼란케 하신 분으로 오셨다. 진리가 없이 오류로만 가득한 배교의 교계에 진리의 빛이 비치면 가증스런 모습들을 한 자들은 자기들의 추한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실상이다. 주님의 칼은 단순히 파괴의 칼이 아니라 진리로부터 비진리를 구분하는 칼이기도 하다. 진리도 아닌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는 주님을 우롱하는 자이다. 진리를 배격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관장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재산분배, 교통사고 처리 등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직접적인 이해에 관련된 문제들은 양해하고 양보하면서도 신앙 문제에 있어서만은 유난히 갈등이 오래가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더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마 10:37). 주님은 여기서 가족의 그 누구보다, 부모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형제나 그 누구보다 자신의 절대성을 강조하셨다. 교회나 목사나 부모에게 충실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믿음의 실체는 저버린 채 자기의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드러내는 것뿐이다. 자기 고집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성경적으로 확증받을 수도 없으며 오직 멸망받는 길뿐이다. 그의 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신 30:18, 잠 5:11; 29:18).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에게서 쟁취해 온 승리를 근거로 해서 사탄과 싸우는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인과 사탄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고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진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한 사람과 진리에 관해 논쟁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유념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다르게 가르치며 건전한 말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일치하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질문과 언쟁만을 좋아하는 자니, 거기서 시기와 다툼과 악담과 사악한 의심이 생겨나며 생각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나오라. 그러나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3-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