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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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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verbs for the Familiy" 3 章 [Parents]
lhyunsik

부모(1) - 브루스 래키 / 임재영 역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머니의 법을 버리지 말라"(잠언 1:8)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녀들을 훈련시킬(train) 책임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한 장(章)과 어머니를 위한 장(章)을 별도로 갖는 대신에, 이 장(章)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위한 장(章)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의 양육 문제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견이 일치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훈계해야 하며, 어머니는 법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훈계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이미 배웠거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훈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은 본(本)입니다. 학생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서 더 배웁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훈계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 잠언서(Proverbs)에 있습니다. 이에는 본서(本書)에 수록된 총론적인 정리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부도덕성과 같은 몇몇 주제들은 여러 곳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반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없는 반복은 지루함을 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복과 흥미를 위해 사용하도록 별개의 방법을 여러 곳에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신앙적인 훈계를 교회나 기독교 학교에만 맡기는 것은 중대한 실수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관들이 많은 훈계를 주겠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인격적인 훈계를 대체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항상 동일한 과정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주제를 여러 곳에서 언급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다양한 훈계는 흥미를 더 주며, 따라서 더 효과적입니다.   가정 제단(family altar)이 강의 수업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훈계를 줄 수는 있지만, 항상 가정 제단은 경배의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어떠한 것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6:4은 아버지들에게 훈계하기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훈육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노력을 기울어야만 합니다. 위의 구절은 징계를 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논(論)하는 바는 '어떻게 자녀들을 주님의 훈육과 훈계로 양육하는가'입니다. 트렌치(Trench)의 "신약성경 동의어(Synonyms of the New Testament)"에 따르면, "훈육"은 말씀에 의한 훈련이고, "훈계"는 행위와 수련에 의한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식을 사용해야 하며, 고의로 자녀들로 하여금 주님께 속한 것들을 두려워하게 하는 방식으로 훈련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자라온 동안 유쾌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주제를 잘 알고 그 주제의 실용성을 증명해 주던 교사를 적어도 한 명은 만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교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주님의 방법으로 자녀들을 훈계할 때에도 당연히 그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훈계하지만, 어머니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실행의 책임은 어머니에게 주어집니다. 훈계와 책임은 절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훈계하고 함께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강조의 문제입니다. 성경적인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실행의 대부분은 어머니에게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罰)과 보상(報償) 뿐만 아니라 규칙에 있어서도 의견이 일치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서로 다른 어머니의 규칙과 아버지의 규칙에 따라 달리 놀아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의 법"은 확실히 "친절의 법"을 포함합니다(잠 31:26).   "자녀들아, 너희는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주의를 기울여 명철을 알지니라"(잠4:1)   아버지의 훈계는 모든 자녀들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코 편애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자식은 "주의 유산이요...그분의 보상"입니다(시 127:3). 모든 자녀들은 주님의 훈육과 훈계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편애를 하시지 않기 때문에(로마서 2:11과 기타 성경의 6 군데), 땅에 속한 아버지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선한 가르침을 주노니, 너희는 내 법을 버리지 말라"(잠 4:2). 훈계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아버지는 필히 개인적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와 성경공부반에서 잘 들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기본적인 가르침 - 창조, 성경의 영감 및 보전,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지역교회에 신실함 - 을 특별히 강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잠언은 죄인들로부터의 분리(1:10-19), 지혜(1:20-33), 하나님과의 관계(2:5; 3:5-12)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가요! 부디 주님께서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녀들을 훈육할 수 있는 아버지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훈계는 또한 법을 포함해야 합니다. 단어 "법(law)"은 어떤 사항이 요구되며, 그 법을 어기는 경우 벌(罰)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안이 아닌 요구사항을 주시며,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경우 중한 벌(罰)이 있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일깨워 줄 때, 그것은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1:24-32와 2:18-22에서 이러한 벌(罰)에 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다음의 두 구절이 보여주듯이, 아버지의 훈계는 경험에서 와야 합니다.   "나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의 눈 앞에서 연약하고 사랑을 받은 자였노라. 아버지도 나를 가르쳐 내게 이르기를, 내 말들을 네 마음에 간직하라. 내 명령들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4:3-4)   만약 아버지에게 그러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그는 경험으로부터 주님께 순종하는 것의 보상을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익을 자녀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성경적이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경험에 의해 죄의 비참함을 배웠을 것이며, 따라서 자녀들에게 불순종하지 않도록 엄하게 경고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가능한 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얻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 주제는 잠언서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주목할만한 예로서 4:7과 2장을 보십시오. ("지혜는 으뜸인즉 지혜를 구하라. 네가 얻은 모든 것으로 명철을 얻을지니라"). 오늘날 사탄이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모두를 완전히 침식시키는데 성공한 이 때에, 부모가 자기 자녀들이 지혜를 얻는 일에 우선권을 두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할 뿐 아니라, 집에서도 읽고 일정한 표준에 도달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읽을 수 있게 되면, 곧바로 도서관에 익숙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지식에 갈급해 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의 대화는 배우는 것을 격려하고 더 많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돋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지(無知)를 장려하지 않으십니다! 자녀 교육에 관한 부모의 책임의 대부분은 잘못된 류(類)의 교육으로부터 자녀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19:27은 이같이 경고합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들을 벗어나 잘못하게 하는 훈계 듣기를 그칠지어다". 분명히 "지식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앞의 1:7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 세상의 있는 모든 오류를 듣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게 자녀들을 가르칠 때, 그들이 오류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진리가 궁극적으로 오류를 이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8).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기쁘게 하거니와 어리석은 아들은 자기 어머니의 근심이라"(잠 10:1)   만약 부모가 자기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자녀들을 지혜로운 자로 키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1-9장은 어떻게 자녀들을 지혜롭게 키우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곧, 훈계하고 가르치고 서로 신실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잠언서에서 "지혜로운"과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를 연구하면, 지혜를 낳는 훈련에 관한 상세한 사항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   1:5 듣고 학식을 더한다(12:15과 13:1을 볼 것). 10:5 여름에 거둔다(게으름을 피지 않고 일한다). 10:19 자기 입술을 금한다(말을 제어한다. 29:11을 볼 것). 11:30 구령을 한다(혼들을 얻는다). 14:1 자기 집을 세운다. 14:16 악을 두려워하고 떠난다. 15:7 지식을 널리 퍼뜨린다. 15:24 지옥을 떠난다(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구원받도록 권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16:14 왕의 진노를 가라앉힌다. 16:23 자기 마음으로부터 배운다. 17:10 어리석은 자가 채찍질하는 것보다 더 꾸지람을 주의한다. 20:26 사악한 자를 흩는다. 23:23 진리를 산다 : 분명히 대가를 지불한다. 28:7 성경에 복종한다(명백하게 이 모든 것들의 요약이며 정점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대조되어, 어리석은 자는:   1:7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15:5을 볼 것). 1:22 지식을 미워한다. 9:13 시끄럽고 비도덕적이다. 10:18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헐뜯는다. 10:23 해악을 오락과 같이 행한다(현대의 야만 행위?). 12:15 항상 자신을 옳다고 생각한다(14:3,16; 18:2; 28:26을 볼 것). 12:16 공공연히 분노한다(14:16-17을 볼 것). 13:19 악에서 떠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26:11을 볼 것). 14:1 자기 집을 허문다. 14:3 교만하다(16절을 볼 것). 14:9 죄를 조롱한다(죄를 가볍게 여기며, 죄에 대하여 농담을 한다). 15:20 자기 어머니를 멸시한다. 17:10 채찍질을 주의하지 않는다(형벌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27:22을 볼 것). 17:16 지혜를 살만한 돈을 가졌을지라도, 지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17:24 땅 끝을 바라본다(항상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18:6 다툼을 일으키기를 좋아한다. 19:3 주(主)를 향해 안달한다. 20:1 포도주와 독주(毒酒)에 속는다. 20:3 참견한다(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한다). 21:20 모으기보다는 낭비한다. 22:15 명백히 바로잡기 위한 매를 충분히 맞지 않았거나(29:15) 바로잡지 않았다. 29:11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특성의 일부는 천연적으로 우리 모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특성의 몇 가지를 행하려는 욕망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천연적인 특성을 필히 이기기 위해서는 적절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훈련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9:7은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로운 자로 변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훈계(訓戒)와 본(本) 모두에서 성경을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몇몇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자녀 가운데서 어리석은 특성을 볼 것입니다. 18세가 되면 성인이 된다는 개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 시대에 성인(成人)은 여전히 부모의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에 대한 많은 예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근 때에 야곱이 이집트로 보낸 아들들을 들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도, 매일 훈계하지는 않지만 부지런히 간섭함으로, 계속해서 자녀들을 돕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도에 응답하고 계십니다! 많은 부모들은 하나님의 영께서 30 세인 아들의 마음에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22:6에 관해 논할 때, 더 논의될 것입니다. - "The Proverbs for the Familiy" 3 章 [Parents]에서 발췌 - 부모(2) - 브루스 래키 / 임재영 역 "사악한 자는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자의 씨는 건짐을 받으리라"(11:21) "...의로운 자의 집은 서리라"(12:7) "사악한 자의 집은 뒤엎어질 것이나 곧바른 자의 장막은 흥왕하리라"(14:11)   집(house)은 성경에서 흔히 가정(family)을 가리킵니다. 그 예로 디모데전서 3:4-5을 비교해 보십시오. 가족의 구원, 안전, 형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의로운 자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후 5:21) 그러나 신분적인 의(義)는 한 관점일 뿐입니다. 요한일서 3:7와 같은 구절들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실행적인 의(義)를 요구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심 같이 의롭고"). 가정을 위하여 이러한 약속을 요구하는 부모들은 반드시 자신들 앞에서 성경에 기술된 의를 실행해야만 합니다.   의(義)의 씨(자손)는 반드시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서실 때, 의로운 자의 집은 설 것입니다. 서지 못하는 자들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7:26-27과 시편 1:5을 비교하십시오. 사악한 자의 집은 뒤엎어질 것이나, 곧바른 자의 장막은 흥왕할 것이므로, 부모의 행위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죄의 형벌과 그 결과를 구별해야 합니다.   죄의 형벌은 지옥에서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련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그 죄를 용서받아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는 모두가 익히 아는 예(例)들을 생각하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생을 술주정꾼으로 지낸 사람은 비록 그가 술을 끊고 회심했을지라도 간경화증에 걸릴 것입니다. 도박꾼이 도박을 끊고 회심했을지라도 가족은 그의 낭비와 부채 때문에 가난하게 살 것입니다. 욕설로 인하여 어린아이가 얻은 정서적인 상처는 욕설을 퍼부은 사람이 회심했을지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형벌과 그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모순된 것 같은 성경구절을 이해하는 것을 돕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범죄하는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겔 18:2-4,20)   분명히 출이집트기는 죄의 결과에 대해 말하는 반면에, 에스겔서는 죄의 형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생각하십시오.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출 34:7)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라는 구절은 용서가 죄의 결과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은 시편 99:8에서 분명합니다. "...그들이 창안한 것들에 대하여 보복하셨을지라도 주는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죄의 결과는 또한 예레미아 17:2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높은 산들 위 푸른 나무들 곁에 있는 그들의 제단들과 그들의 작은 숲들을 기억하는도다." 부모의 죄는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어 다시 그 선례(先例)를 따르게 합니다.   예레미아 32:18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는 인자하심을 수천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그들 뒤에 오는 그들의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마지막 구절은 아버지의 죄가 자녀들의 마음("품")에 영향을 끼쳐 죄를 모방하도록 조장하거나 또는 절망하도록 낙담케 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잠언서 14:11은 죄의 결과에 대하여 말합니다. 죄를 범하는데 돈을 낭비한 악한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서 죄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집을 잃거나 성병이나 에이즈에 걸릴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과 수치를 겪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경건은 정직, 근면,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김, 성공을 돕는 기타 특성을 낳는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유사한 약속과 경고에 대해서는 14:26, 15:25, 15:27, 17:13을 비교하십시오.   "선한 사람은 자손의 자손에게 상속을 남기거니와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   장래를 위하여 계획하는 것, 곧 재정적인 안전을 계획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에 관한 성경적인 증거를 얻기 위하여 아내에 관한 장(章)에 있는 31:21을 보십시오.   물론 결코 돈을 상속하는 것이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5:16-17은 더 나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적게 가지고도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면서도 사랑이 있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그로 인해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떤 이가 돈과 사랑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선택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잠언서 전체를 고려할 때, 주님께서는 그분께 순종하는 자에게 물질적인 복과 땅에서의 이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상속의 의미를 물질적인 소유로만 제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속에는 박해로 인해 형통하지 못했던 실예(實例)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상속은 확실히 영적인 것입니다. 분명히 디모데는 아버지가 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큰 영적인 부를 상속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1:5와 3:15를 보십시오. 의심할 바 없이, 이 믿음의 영적인 상속은 그 어떤 물질적인 소유보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선한 사람"은 말할 나위 없이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이에 관해 기술하는 로마서 3:12는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하다고 하실 때, 그는 이미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의(義)가 전가된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그러한 경우에만 선한 자라고 칭하십니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나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제 때에 징계하느니라"(잠 13:24)   아마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가운데 자녀들의 징계보다 쟁점이 되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21은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감동되어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말하며, 단 번에 이 문제의 답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서의 이러한 구절은 어떤 이가 오늘날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솔로몬의 변론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6).   단어 "회초리"는 체벌(體罰)이나 구두(口頭)로 바로 잡음,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뜻이 다양하게 해석됨으로 인하여 논쟁의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쉐베이(shebei) (스트롱 색인사전 No. 7621)를 조사하면 이 단어가 다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강한 무기. 죽음을 부를 수 있음(출 21:20). 욥의 고통을 묘사하였음(욥 9:34). 메시아의 철장(鐵杖)을 가리킴(시 2:9). 이스라엘의 학대하는 자를 가리켰음(사 9:4). (2) 요압이 압살롬을 살해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작은 창 또는 화살(삼하 18:14) (3) 곡식을 떠는데 사용하는 막대기(사 28:27)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회초리가 체벌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초리는 아이들을 징계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잔인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1) 잠언 23:13-14는 "아이를 징계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성경적 용례에 따라 아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아이를 죽일 만큼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2) 또한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주로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지 고통을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잠언 23:13을 보십시오.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징계의 문제에서 주요한 본을 세우고 계십니다(히 12:6, 고전 10:13, 사 57:16). 그분께서는 결코 잔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고통을 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징계는 거룩함을 낳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는 결코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아이들을 난폭하게 다루는 것을 묵과하거나 제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중히 여기나 사악한 자의 긍휼히 여김은 잔인하니라"라는 사실을 인정하셨다면, 분명히 아이들에게 난폭하게 대하도록 조장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내 어머니의 눈 앞에서 연약하고 사랑을 받는 자였노라"고 말했습니다(잠 4:3).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에 비해서, 우리가 고려중인 구절은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제 때에 징계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반대자들이 비난하기를, 성경은 아이들을 잔혹하게 대하라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자녀들을 괴롭히는 근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어떠한 일그러진 마음도 명백히 아무런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회초리는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체벌을 가리킵니다. 회초리는 "제 때"에 대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 때"란 일찍(early)을 의미합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잠언서 1:28과 8:17에서 "일찍"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어릴 때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시 58:3; 사 48:8). 그러나 잠언 29:5은 회초리가 지혜를 준다고 말하기 때문에, "제 때"는 아이들이 지각을 갖기 전이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일어나는 일을 지각할 수 없으며, 그 상황으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 이릅니다. 동물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반응하는 것과는 달리, 회초리는 자녀들이 두려워하며 반응하기에 충분합니다. 자녀들은 적어도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고통을 야기시켰나에 관해 기본적인 지각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의 이러한 능력은 이사야서 7:17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징계를 위한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를 알기 위하여 주님에게 지혜를 구하는 부모는 야고보서 1:5을 요구하여 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 때"는 또한 잘못을 저지른 직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빨리 잊습니다. 너무나 많이 부모들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으며, 사소한 것들은 잊었습니다. 그러한 경우 지혜는 전해지지 않고 상처와 오해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부모들은 반드시 지혜로워야 하며, 자녀들이 감옥에 가기를 원치 않는 한, 그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공공장소나 적절히 않은 장소를 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아이들이 난폭한 때에, 많은 사람들이 각 가지 형태의 체벌에 대하여 과잉반응을 하였고, 무고한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함으로 인해 산만해지는 것을 피하면서 적절한 훈계를 주기 위해서, 징계의 장소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좋습니다.   왜 우리는 물리적 징계에 그렇게 엄격하지 못한가요? 차알스 브리즈(Chales Bridges)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방종의 뿌리는 제멋대로 구는데(self-indulgence)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징계하는 아픔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치료책은 징계를 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정으로 회초리를 대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찾는 것입니다. 부모(3) - 브루스 래키 / 임재영 역 "손자들은 노인들의 왕관이요, 아버지는 자식들의 영광이니라"(17:6)   이 구절은 "노인들"은 의롭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10:27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의 날들을 길게 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햇수는 짧게 되느니라"라고 배웠습니다. 노인들은 주를 두려워하였고, 주께서 그들의 날들을 연장시켜주셨기 때문에, 날들이 길어졌다고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으며, 그 결과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손자들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었던가요!   자식들의 영광인 아버지는 손자들을 즐길 것입니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후손이 자신들을 사랑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존경은 전해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낳는 자는 그 일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하나니 어리석은 자의 아버지는 기쁨이 없느니라"(17:21)   어리석은 자를 낳았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문제는 죄의 본성입니다.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어리석은 자의 아버지는 이 타고난 성향을 없애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는 이 장(章)에 있는 10:1의 주석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들에게서 상속받거니와 분별 있는 아내는 주께로부터 오느니라"(잠 19:14)   앞서 여러 번의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는 필히 훈계에 순종하는 것이 내포하는 바를 보아야 합니다. 잠언 1:5은 우리에게 원칙을 주었습니다. 잠언서에서 지혜는 점진적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을 더 할 것이요." 이 책의 중간부분으로 건너뛰어서 아무 구절이나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부(riches)는 분명히 올바른 류(類)의 부로서, 다음으로부터 얻어진 것들입니다.   3:9-10 재물과 소출의 첫열매를 드림(십일조) 3:18 지혜(24:3-4를 볼 것) 10:2 의(義) 10:22 하나님의 복 11:1 정직(21:6을 볼 것) 11:16 모아 둠 13:11, 14:23 수고 15:27 탐욕으로부터 오지 않음   뒤에서 부를 얻는 올바른 길에 관하여 더 배울 것입니다. 잠언19:17은 사랑에 의해, 20:21과 28:20,22은 인내에 의해, 그리고 22:4은 겸손과 주를 두려워함으로 부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성경적 방법으로 얻는 부는 아버지의 상속이 될 것입니다. 경건한 자녀와 손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의 후반부는 남편에 관한 장(章)에서 논의되었습니다.   "소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징계하되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용서하지 말지니라"(잠 19:18)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가 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징계의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3:24이 권면하듯이, 일찍 징계하십시오. 훈계가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징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인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바로 잡는 것입니다.   징계는 징계자가 고통을 주기 원하거나 이전에 난처한 경우를 당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항상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징계는 다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1) 벌(punishment)(레위 26:18, 23, 28) (2) 성경(신 4:36, 사 8:11) (3) 말씀들(잠 31:1)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성경을 생략합니다! 물론 징계는 반드시 자녀들이 성경을 미워하지 않도록 행해져야 합니다. 징계를 하는 이유로 성경을 인용하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하여, 고통이 끝나고 "다정한 때(loving period)"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순전하게 걷는 자가 의로운 자니, 그의 자녀들이 그를 따라 복을 받느니라"(20:7)   어떤 사람이 의롭다는 증거는 이중적 - 그의 순전한 행보(walk)와 자녀들에게 임하는 복 -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실제적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것에 의해 자신이 어떠한 류(類)의 사람인가를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의로운 자의 행보는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함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주지하십시오. 한 좋은 예가 다윗의 경우로서, 그는 사울을 죽이고 이미 예정된 왕좌에 않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해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울을 살해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제거하시고, 자신의 순전함을 세우고 자신의 행위를 진술한 왕좌에 앉히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스스로 의로운 자임을 입증하였으며, 특별히 사울과 사울의 병사와 다윗의 사람들에 의해 그와 같이 알려졌습니다.   또 다른 훌륭한 예는 요셉으로서, 그는 보디바르의 아내와 간음을 범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직접 요셉의 순전함을 보았습니다. 주께서도 역시 요셉의 순전함을 보셨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그같이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중히 여기셔서 그 사건을 영원한 말씀 안에 기록하셨습니다.   한나는 의로운 여인의 두드러진 예입니다. 그녀는 순전함으로 처음에 아이를 구할 때 약속한대로 외아들 사무엘을 주께 드렸습니다. 이 청원은 소리를 내지 않은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 들으셨습니다(사무엘상 1:11-13을 볼 것). 만약 한나가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명성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그녀는 편리하게 그 서원을 잊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가 이기적이었다면, 분명히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그녀의 대적 브닌나를 침묵시켰던 살아 있는 증거인 외아들을 주께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 대신에 그녀는 자신이 의롭고 순전한 여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서원을 지켰고,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성막에서 사무엘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그녀의 아들은 그녀를 따라 복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은 따라야 할 경건한 본을 가졌기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순전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지키게 합니다. 또한 순전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를 정직하게 만듭니다. 순전함은 뛰어나게 일하고, 모으며, 지혜롭게 쓰고, 후에 자녀들이 닮게 될 기타 많은 것들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낳습니다.   잠언에는 사람의 행함은 그의 어떠함으로 인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마땅히 갈 길로 아이를 훈련하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 구절은 부모, 예비 부모, 조부모, 친척, 그리고 자녀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얼마나 중대한 훈계와 약속인가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되고, 그분 안에서 아멘이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에(고후 1:20), 이 구절(22:6)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첫 번째 단어 "훈련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시키는 일을 착수하게 전에 반드시 "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몇몇 해석가들은 이 단어를 "그의 길" 곧 아이의 길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들은 부모들과 교사들이 반드시 아이들의 이러한 타고난 성향을 이해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설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단지 이사야서 53:6만 보면 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이 "우리는 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반드시 아이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을 이미 "자기 길"로 갔습니다. 그 길을 가도록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자기 길로 갔거늘"을 "우리 모두의 불법"으로 묘사하고 계시며,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짊어지신 것이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 불법의 무도(無道)함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기의 길, 곧 죄의 길로 아이를 훈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차알스 브리즈는 말하기를,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앞에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고 합니다. 곧 자기의 길과 "마땅히 갈 길"입니다. 얼마나 간명한 말입니까!   시편 58:3은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자기의 길, 곧 불법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고 가르칩니다. "사악한 자들은 모태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으니, 나면서부터 길을 잃고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성경은 얼마나 자주 가르치고 있나요! 아이가 마땅히 갈 길을 가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에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창세기 18:19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이 강조하는 바를 주지하십시오. "이는 내가 그를 앎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 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자기 길들을 가지 아니하고, 어떤 인도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세상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길"을 지킬 것을 아셨습니다.   이 구절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몇몇 아이들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잠언 22:6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잠언 22:6이 죄없는 완전함에 관한 약속이며, 따라서 만약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를 경우, 그것은 이 구절이 진실이 아니거나 아이의 훈련이 성경적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실수는 아이가 "마땅히 갈 길"이 "주의 길"이며, 그것이 죄없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길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고, 이삭과 이스마엘의 삶과 행함에 관하여 읽을 때, 그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구절들을 비교함으로, "마땅히 갈 길"이 "자기 길"이 아니라(사 53:6) "주의 길"(창 18:19)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길을 지킨다는 것은 죄없는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면 "주의 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 잘못을 저질렀지만(창 16:12과 26:7을 보십시오), 결코 거짓 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좋은 예는 다윗입니다. 성경이 다윗이 범한 몇 가지 죄를 기록하고 있지만(예를 들면 삼상 27:8-12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15:5에서 다윗의 전 생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이는 다윗이 헷 족속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토록 주 보시기에 정직한 것을 행하고 그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일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반드시 참된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길을 지킨 어떤 이나 혹은 그분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한 이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상들에 반대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그분의 명령을 그같이 간주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지키는 것"이 우상을 경배하는 것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단지 열왕기하 21:21-22에 있는 아몬에 관한 기술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몬이 자기 아버지 므낫세가 행한 것같이 주의 눈 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되 자기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들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주 곧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주의 길로 걷지 아니하니라". 분명히 "주의 길로 걷지 아니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되는 예로서, 열왕기하 22:2를 생각해 봅시다. 이 구절은 요시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요시야가 주의 눈 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여 자기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걷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잠언 22:6의 약속에 관하여 흔히 저지르는 또 다른 실수로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훈련하는 일에 있어서 100 % 성공하였거나 혹은 100 % 실패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의 이삭과 이스마엘과 다윗의 예에서, 하나님께서 그같이 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보았습니다. 약간의 상식과 관찰만으로도 우리는 부모가 자녀들이 올바른 교리를 믿도록 훈련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그들이 매일 기도하도록 가르치는데는 실패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몇몇 부모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신실하도록 가르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들이 구령(救靈)을 하도록 가르치는데는 실패합니다. 성공과 실패의 정도의 차(差)가 있습니다. 실제로 심지어 교회의 인도자 중에서 교회에는 신실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거룩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공과 실패의 정도의 차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부모들은 "주의 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에서 자녀들을 훈련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이 한 길은 많은 길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한 두 가지가 중요한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녀들은 구원을 받도록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영적인 자가 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자녀들이 성경을 알고, 기도에 응답을 받으며, 구령(救靈)을 하는 자가 되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 "The Proverbs for the Familiy" 3 章 [Parents]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