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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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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회복을 위해 필요한 자세(대하6:26-31)
lhyunsik

임동선 [ E-mail ] 영적회복을 위해 필요한 자세(대하6:26-31) 대하6:26-31 영적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 1.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범죄할 수 있다. 최초의 건물성전이 봉헌되는 엄숙한 순간, 솔로몬의 기도는 내내 한 주제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후대에 있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범죄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솔로몬은 내내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만일, 만일, 만일..."이라며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범죄하였으므로..."(대하6:22)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원수 앞에 패하게 되므로..."(대하6:24)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하여 하늘이 닫히고..."(대하6:26) "주는 하늘들 곧 주의 거처에서 그들이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사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시옵소서."(대하6:39)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범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함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성전을 봉헌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선택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러할 지라도 그들에게는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했던 순간이 있다 하더라도 범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의 생활 속에 주님과 늘 교제한다고 하더라도 범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맘으로 살기로 했다 하더라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기쁨과 영광을 드린 그리스도인들도 범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범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순간순간 충분히 범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범죄하는 시간을 맞이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들 스스로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계속적으로 주님께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오늘 솔로몬이 드린 기도를 보면 범죄의 결과들이 심각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2.하나님의 백성의 범죄에는 끔찍한 결과들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범죄가 그 거듭난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모든 죄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결코 지옥의 형벌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죄들을 회개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책망이 따르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경우에는 징계가 내려지기도 합니다. 징계, 그것은 매우 아픈 일입니다. 징계, 그것은 큰 상처가 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죄들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인 우리들이 우리의 자녀들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그들이 택한 백성이라는 관계는 계속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과 함께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가만 있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가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1)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 만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죄들을 회개하기까지 하나님과의 교제는 막히며 더 이상 어떤 혜택을 누릴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가뭄이 온다는 것입니다. 가뭄은 땅을 말라비틀어지게 합니다. 수분이 바닥 났을 때, 식물들이 죽어갑니다. 물을 구하다 지친 가축 떼가 쓰러집니다. 가뭄이 든 땅에서는 향긋한 꽃 내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새들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서 그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천년 왕국시절에 모든 백성들은 장막절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장막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슥14:17).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영적 가뭄이 찾아옵니다. 하늘 문이 닫히듯 하나님과의 교제가 차단됩니다. 저는 관계가 끊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 사실들이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것이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다정한 부부라도 한때 가정을 차갑게 만들고 자녀들을 얼게 만드는 냉각기를 보낼 수가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자식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말하기를 싫어하고 불편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그런 때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며 영적 가뭄이 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읽더라도 반응할 수 없습니다. 감동이 사라졌습니다. 기도를 드려도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한다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섬긴다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영은 시들어버리고, 곤고한 순간들을 맞이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표현했습니다. 가뭄이 든 땅에서 씨가 자랄 수 없듯이 말씀을 받았다 하더라도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가뭄의 땅에서는 열매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돌이키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대신 미움만 가득하게 됩니다. 희락 대신 걱정만 가득합니다. 화평 대신 불편한 관계만 생기게 됩니다. 오래 참음 대신 혈기와 증오의 표현만 나오게 됩니다. 부드러움 대신 강팍함과 분노만 드러나게 됩니다. 선함 대신 악함을 생각하게 되고 믿음 대신 게으름과 불신만 가득하게 됩니다. 온유 대신 공격적인 언어와 거친 표현들만 가득하게 됩니다. 절제 대신 말과 행동, 모든 것에 있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가게 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의 땅에는 꽃도 피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좋은 향을 줄 수 있는 영적 꽃도 피지 않습니다. 메마른 땅에 짐승도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결국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가고, 고립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끼칠 수도 없게 느껴지는 비참한 상황들이 연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돌아보려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2)주께서 괴롭게 하실 때에 사실, 하나님은 죄짓는 하나님의 백성에게조차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들을 괴롭게 하십니다. 그 죄짓는 자를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내리시는 괴로움들은 하나님께서 관심 갖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것마저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철저히 버리신 줄로 착각하고 달아나 버립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짓고 회개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을 아프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주님께서 그 죄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괴로움을 주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것은 잘못 행한 자녀에게 아픔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제 자녀가 잘못 했을 때 매를 듭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러시겠지요? 경고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따끔하게 매질을 합니다. 28절부터 나열되는 기근, 역병, 마름병, 곰팡이, 메뚜기, 쐐기벌레, 원수들의 침입, 무슨 아픔, 무슨 질병이든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을 치시기 위한 징계의 수단들이었습니다. 매였습니다. 기근이 왔습니다. 소출을 얻을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수고했지만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역병, 마름병, 무슨 질병들이 생깁니다. 또는 곰팡이가 몸에 생기거나 갖가지 벌레들로 시달리게 됩니다. 원수로부터 쫓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 그것은 곧 사랑하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히12:6).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괴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점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비록 괴롭게 하실지라도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불쌍히 여기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고의로 사람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애3:32,33) 3.회개하는 자를 지켜달라는 호소 그런데 오늘 본문에 아주 특별한 요청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솔로몬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범죄하여 그릇 간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그들이 이곳을 향해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키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또 주의 백성에게 상속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대하6:26b,27)라고 하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였습니다. 1)그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며...(대하6:26)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피흘리는 곳입니다. 죄 값을 지불하는 곳입니다. 대속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십시오.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변호자이십니다. 중보자는 모든 세상 죄인들을 향해서 쓰는 그리스도의 호칭이지만 변호자라는 말은 믿게 되는 모든 자를 위해서 쓰는 그리스도의 호칭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믿지 않는 자들의 죄에 대해서까지 변호하시지 않습니다. 믿어야지만 그분께서 그 자신의 변호자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법궤룰 모셔둔 곳입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명령의 돌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 곳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시고 죽으신 분이며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분을 의지해서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십니다.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곳이 지극히 거룩한 곳이기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의미로서의 집이었습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십시오. 성전보다 더 크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기도하십시오. 이분은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호칭이 또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기 위해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은 오늘날 범죄한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의 이 기도는 오늘날 영적침체를 만나게 된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할 때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소유에는 그 주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랑이의 장난감에도 이랑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며 내가 그분의 피 값으로 인해 그분의 소유가 된 자임을 분명히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이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고전7:23)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행20:2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인 것을 확고히 받아들였으며 믿는다면 분명히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정상적인 태도는 그 자신을 구원하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영적인 부흥을 가져옵니다. 3)자기 죄에서 돌이키거든 아무리 기도를 유창하게 한다하더라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하늘은 열리지 않습니다. 다시 비가 오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시는 것이 떠나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자녀가 그 좋지 못한 습관을 버릴 때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벌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1)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할 죄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적으로 훼방하는 좋지 못한 습관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반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악습은 어떤 것입니까?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사왕이 하나님께 겸비할 때에는 그 온 땅에서 가증한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대하15:8). 심지어 자기 어머니 마아가가 우상숭배에 빠져 돌이키려 하지 않을 때,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하고 그녀가 섬기는 우상을 베어버렸으며 그것을 짓밟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태웠습니다(대하15:17). 여호사밧은 많은 부와 명예를 소유한 왕이었습니다(대하17:5). 주의 길들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마음이 위로 치솟아 유다에서 작은 산당들을 제거하였습니다(대하17:8). 또 그 백성에게 주의 율법책을 가르치는데 주력했습니다(대하17:9). 주의 두려움이 유다의 사방 땅 모든 왕국에 임하였습니다. 그는 백만 대군을 자랑하는 왕이었으나 모압과 암몬 자손이 쳐들어왔을 때, "오 우리 하나님여, 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는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오니 우리가 어떻게 할 줄도 모르며 우리 눈이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라고 하면서 그 백성에 "너희는 너희 주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굳게 서리라"(대하20:20)라고 권고했던 것을 봅니다. 여호사밧의 시대에 부흥이 왔습니다. 왕은 아니었지만 요아스 왕의 매형이었던 제사장 여호야다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온 백생이 바알의 집으로 가서 그 집을 허물고 그의 제단들과 형상들을 산산조각 내고 제단들 앞에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습니다"(대하24:17). 여호야다가 사는 날동안 주께서 유다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은 죽어서도 왕과 함께 묻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대하24:16). 죄를 미워하지 않는 곳에서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회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가증한 일들에 대해 혐오하지 않고는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행하는 험담이나, 내가 행하는 불평이나, 내가 행하는 시기나, 내가 행하는 질투나, 내가 행하는 음란한 생각이나, 내가 행하는 게으름이나, 내가 행하는 모든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이 미워지지 않고는 부흥이란 기대하기 곤란합니다. 4.하나님의 응답 솔로몬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성전에 바쳐진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웠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대하7:14) 이 중요한 말씀은 솔로몬이 드렸던 기도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26절과 비교하여 생각해봅시다.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자기 죄에서 돌이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이곳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고"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소생함을 얻는 가장 큰 첫단추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이 좋은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풍부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아무리 기도를 한다할지라도 자기를 낮추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며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리새인이 기도했다하더라도 자기를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치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임을 고백했던 세리는 의롭다함을 얻고 그 곳을 내려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향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낮추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왜 거절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거절된 자로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봅시다. 그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2:6-8). 하늘의 지극히 높은 영광 중에 계셨던 그분께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지옥이라는 그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오셔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주로 모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가 그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닮은 모습인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높이려는 모든 자세는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나 자매들에게도 상처를 안겨다 줍니다. 낮출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낮출 때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낮출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며 그 자신이 자기를 위해 피흘려 구원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관계를 유지해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모두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영접했다 하지만 자기를 낮추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경험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배운 것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내 성향이나 추구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기준이 내가 되어 있습니다. 내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다 문제 투성이로 보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려하지 않습니다. 내 좁은 소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니 불평과 원망과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일들만 눈 앞에 벌어집니다. 내 입장에 맞추어주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미워집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것은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고 생명을 주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분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세로 가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어갈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탄 앞에서야 강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우리를 낮추어 엎드리는 자세, 기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사탄에게는 겁을 먹고 있으며 성도들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겁없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5.자기를 낮추지 않는 자의 최후 많은 영적 어려움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보다 높아진데 있습니다. 웃시야는 암몬족속에게 조공을 거두어 드렸습니다(대하26:8). 농사를 좋아하였고(대하26:10)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강하게 되었습니다(대하26:15). 52년간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대하26:3). 그러나 그에게 어두운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죽는날까지 나병환자로 지내야만 했습니다(대하26:21). 그리고 그 어두운 시기를 시작하는 기록에서 첫대목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하게 되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파멸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께 범죄하되 곧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제단에 분향하려 하였음이더라"(대하26:16) 그의 교만이 곧 그를 파멸에 이르게 했습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잠16:18) 무엇이 교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한다하더라도 나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더라도 "난 못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면 바꾸었지 나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웃시야의 교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성소에서 향단으로 주를 섬기는 것은 제사장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소에서 향단으로 주를 섬기는 것은 기도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그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기도보다도, 섬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자가 되어 나머지 인생 내내 뒷방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소생은 자기를 낮추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b, 6) 교만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막7:22,23). 지혜이신 주님께서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과 거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입니다(잠8:13).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히스기야는 유월절을 회복시켜습니다(대하30:1). 히스기야는 레위사람들과 제사장 직분을 챙겼으며 첫열매와 십일조를 바치도록 했습니다(대하31:2-10). 성경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보시기야 선한 것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대하31:20,21). 죽을 뻔한 생명도 15년이나 연장받았고, 이스라엘의 멸망기에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마음이 교만해졌다고 했습니다(대하32:25).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시대에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자기 마음의 교만에 대하여 자기를 낮추고 또 예루살렘 거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주의 진노가 히스기야 시대에는 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대하32:26). 멸망의 위급한 순간에 자기를 낮춘 히스기야를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셨습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신대로 기억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주 앞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 자기를 낮추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무엇이 자기를 높이는 것이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자기 입장으로 보는 사람은 다 교만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은 자기 느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어떤 내적끌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이Ts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객관적이며 명백하고 성경기록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들은 그리스도의 판단 아래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판단자의 위치에 앉아 높아지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교만해지면 사랑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 성경지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행할 수 있게 준비시켜줍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나 경험, 관념, 앎, 이런 것들이 지식이 될 때, 그는 타인에게 돌질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기어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엎드려서 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세로 살려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소생의 첫단추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뻣뻣하게 든 내 고개를 수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출 때에만 영적인 소생이 오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고...그런 징계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주인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낮추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자기를 낮추십시오. 성경 기록 앞에서 자기를 낮추십시오. 이 말씀들은 모두 주님의 인격 그대로입니다. 비록 범죄한다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은 아닙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낮추고 기도하여,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