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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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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사역자
lhyunsik

임동선 [ E-mail ] 달아나는 사역자(욘1:1-16) . 하나님의 진실한 종 요나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대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언한 것들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을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요나는 하나님께서 북쪽 이스라엘의 지경을 회복하실 것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에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 여로보암 왕을 북 이스라엘 왕국의 창시자인 여로보암과 혼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한 참 후에 등장한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예언이 진실한 것으로 판명 났다는 점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가드 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손으로 하신 말씀대로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입구에서부터 평야의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14:25). 이 성경 말씀이 무어라 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그 자신의 종이라고 선포합니다. 2. 하나님의 진실한 종 요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진실한 종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명령의 내용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이는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음이라."(욘1:2) 니느웨라는 도성의 사악함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외치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악함이 하나님 앞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써 태워버리셨습니다. 요나에게 내려진 이 명령은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요나는 결국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가서 이 놀라운 사실을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진실한 종 요나의 반응?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실한 종, 요나의 태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그가 만일 하나님의 진실한 종이라면 니느웨를 향해서 가야할 텐데 그는 욥바라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타 니느웨와는 정반대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1) 니느웨 우리는 잠깐 여기서 니느웨는 어떤 곳이며 다시스는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니느웨입니다. 니느웨는 지금 미국과 전쟁 중인 이라크의 북쪽 모술 근처의 티크리스 강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의 인구는 요나서를 잘 읽어보면 12만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욘4:11). 당시로서 그 만한 인구는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저 큰 도시(욘4:11)라는 수식어를 니느웨 앞에 붙였습니다. 니느웨는 역사적으로도 아주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창세기 10장 11절에서 니므롯이 바벨론을 떠나 세운 북쪽 도성들 중에 하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니느웨 성에는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이쉬타르(Ishtar)라고 하는 여신에 대한 숭배였습니다. 그 여신은 그 도시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이쉬타르는 이집트에서 이시스라고 불려지며 이스라엘에서는 아스다롯 혹은 아세라 라고 불려지는 여신입니다. 왜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를 꺼려했습니까?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던 도시였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중심으로 앗수르의 군대들이 수차례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가시처럼 찔렀고 불편하게 했습니다. 또 앞에서도 설명했던 대로 니느웨는 이쉬타르 여신을 숭배하는 본거지였는데, 요나의 눈에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북쪽 이스라엘 왕조에게 있어서 우상 숭배의 핵심은 바로 그 이쉬타르 숭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아스다롯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스라엘이 영적 음란의 길로 걸을 수 있도록 사악한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바로 니느웨의 이쉬타르였습니다. 점점 패망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니느웨로부터 수입된 이쉬타르 숭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는 마땅히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같은 성읍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려고 하실 때, 니느웨는 이 점을 알고 주께 간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리라 말씀드리지 아니아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이 말씀에 의하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했던 이유들을 그려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외칠 때,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다시스로 향해 달아나야 했던 것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어차피 사악한 니느웨 성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요나의 자세였습니다. 2) 다시스 그러면 요나가 도망치려고 했었던 다시스는 어떤 곳입니까?(욘1:3) 주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던 다시스 말입니다. 요나는 지중해 동편에 있는 가나안의 항구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지중에 서안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스페인 남단과 아프리카 북단이 만나는 지브로울터 해협 부근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시스라는 말은 말은 마치 수원이 "물근원"의 의미가 있다든지 대전이 "큰 밭"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제련 시설" 혹은 "제련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먼 곳을 표현할 때 "이억만리"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다시스는 통상적으로 "먼 지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해 먼 곳으로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가급적 멀리 멀리 가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로부터도 멀리 달아나고 싶었고, 주님께서 가서 돌보라고 한 사람들로부터도 멀리 멀리 달아나고자 했습니다. 4. 달아나는 사역자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요나처럼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달아나도록 충동질하는 이유들은 많습니다. 1)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한 니느웨 성 사람들이 그 꼴을 당하는 것 당연한 일 아닙니까? 주님 나는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맛보게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요나가 그렇게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려는 일로부터 달아나면서 그런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나를 몰라보는 이들, 나를 피곤하게 하는 이들, 나를 괴롭게 하는 이들이 그 문제로 어려움 겪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나를 무시한 사람들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나를 무시한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온갖 주님의 일로부터 피해 도망치기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처럼 되는 것입니다. 2) "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이 니느웨 성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이 이런 꼴로 지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입니까? 얼마나 오래 전부터 가증한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습니까? 이들이 고치려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제대로 걸어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을 계획하실 정도라면 이들이 얼마나 가증하게 걸어온 것입니까? 이들에게 정당한 결과를 맛보게 하십시오. 이들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아마도 요나는 그렇게 호소했을 것입니다. 요나서 4장 2절을 읽어보면 그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이 주님의 교회를 돌보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이상 이 일을 하기 싫습니다. 이 사람들을 좀 보십시오. 개선되는 것이 있습니까? 여전히 그 모습이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교회를 시작한 이래로 늘 그 모습이 아닙니까? 말씀을 듣고 아멘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나는 더 이상 이들을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저는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선되지 않는 형제나 자매를 보고 그를 섬기려던 일로부터 물러선다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입니다. 3) "더 이상 피곤한 일에 시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어떤 사람이 바른 길로 인도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달아나는 것을 택합니다. 차라리 그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며 힘든 일인가를 말합니다. "오, 주님 그 피곤한 일을 나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그 곤란에 빠진 것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당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까?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위로하라구요? 그 사람을 위로했을 때, 그 사람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설령 돌아온다면 또 나아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치 요나가 자기의 주님에게 항변했던 것처럼 그렇게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복음적으로 하려 하지 않았고 온갖 자기 생각들만 높아서 말씀 앞에 굽힐줄도 모르고...왜 당연한 결과를 이곳에 주시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 앞에서 여러분은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5. 주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달아날 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달아난다면 우리는 위험한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피해서 결정하여 선택한 길에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태로워졌습니다. 요나로 인해 거기 함께 있던 선원들과 여행자들이 곤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숨이 시간을 다투는 위기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등지고 여리고 성의 물건들을 가져다 자기 집에 감추어두었던 아간을 기억해봅시다. "여리고 성의 저주 받은 물건을 취하지 말라"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의 물건을 훔쳐두었던 아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작은 아이 성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회중에게도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범죄는 당장 이스라엘 회중을 위태롭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역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루 중에 7만명이나 죽었습니다. 이 수는 이스라엘의 초기로 말하면 한 지파가 멸망한 수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해 달아나는 요나로 인해 배가 부서질 정도의 큰 폭풍이 그들에게 들이닥쳤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 그들에게 닥쳤는지 다시스로 가는 배의 선원들은 자기 신들을 부르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때 요나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그때 요나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깊이 잠들었습니다. "오, 잠자는 자여, 어찌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욘1:6) 오 잠자는 자여....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별칭이 그게 되고 말았습니다. 잠꾸러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상황파악 못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잠잘 때입니까? 사방에 죽음의 위협이 가득합니다. 선상의 사람들은 야단입니다. 그런데도 그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등지고 달아난 종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상황파악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주님의 명령을 등지고 내 멋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 방식대로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더 이상 주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내 스타일로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흐름을 읽지 못합니다. 주의 인도하심과 뜻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됩니다. 선장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오, 잠자는 자여, 어찌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욘1:6) 잠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엡5:14-16) 만일 주님의 명령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로 피해 멀리 달아나고자 했었다면, 다시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면 "오 잠자는 자여,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여 돌아오라고 하나님께서 거센 풍랑을 일으켜 잠을 깨울 때, 일어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니느웨 성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구원받아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사람 구원받지 못하는 거 당연한 일이지...라고 외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 그렇게 인생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 마땅한 일이지...라고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다시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주님의 명령에 의해 나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이 내 위로 받지 못하는 것 당연한 일이지...나를 얼마나 괴롭게 했는데...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무시했으니 그런 결말 당하는 것도 마땅하다라고 생각하며 방관하기로 한 게 있습니까? 그게 바로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다시스로 달아나는 많은 이유들을 들이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다시스는 다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좀더 주님의 명령으로부터 멀어질 수만 있다면 그런 온갖 종류의 이유들을 둘러댈 수 있습니다. "주님 나는 가족을 지키러 가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내게 주문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 시키십시오...." "주님 나는 빚을 갚으러 가야겠습니다. 돈을 벌어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 명령들을 내게 내리지 마십시오. 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주님 나는 조용히 지내려는 침묵의 방으로 가겠습니다. 더 이상 나서지도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피곤한 일 아닙니까? 나는 좀 쉬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을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 일어나십시오. 요나처럼 내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을 고백하십시오. 주의 눈 앞을 떠나 도망했던 것을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처음 약속했던 것들에 대해 신실하십시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며 내가 서원한 것을 갚겠나이다. 구원은 주께 속하였나이다."(욘2:9). 주님의 종으로서 살기로 한 서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다 그 서원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면 다 그 서원을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내 멋대로 가고 있었습니까? 다시스를 향해 줄기차게 가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니느웨로 가십시오.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니느웨를 바라보던 요나와 같이 죄로 인하여 정당하게 멸망당할 사람들이라 간주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려 하셨다면 여기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계획 앞에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하신 분이시며 은혜로운 분이시며 진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심과 큰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