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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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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경건한 사역자
lhyunsik

임동선 [ E-mail ] 딤전4:7-13 그리스도 예수의 경건한 사역자 딤전4:7-13 그리스도 예수의 경건한 사역자 1.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 [딤전4:7] 오직 속되고 늙은 부녀들의 꾸며낸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위해 훈련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 다시 말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훈련이란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훈련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익숙해지기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훈련에는 땀이 들어갑니다. 훈련에는 노력이 담겨집니다. 훈련에는 정성이 기울여집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훈련받느냐에 따라 우리들은 경건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불경건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경배를 위해 모이는 것에 훈련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아이에게 젖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 때 엄마 젖을 잘 먹지 못했던 제 후배 중에 한 사람은 시력이 약해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녀야 했습니다. 공을 차다가 시신경이 자극 받아 떨어졌을 때, 그 후배는 거의 실명의 위기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지금은 안경을 쓰면서 활동하고 있지만 한 번 약화되었던 시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양분의 공급이 적절한 시기에 주어지지 않을 때, 그의 성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먹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영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후에 그것들로 인해 영적인 성장의 저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 성숙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때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까? 그 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히10:25).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입니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주님,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그분을 마침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의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양육을 받으며 경배의 훈련과 서로를 섬기는 삶에 익숙해 있는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히10:35). 기억합시다.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워 올수록 더 열심히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조금만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히10:37) 우리의 생각에 주님께서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더디 오실 것이다 생각하는 사이에, 그래서 우리의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이에, 주님은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시려는 태도로 갑자기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악한 행실로 인해 괴로워하는 신실한 성도들을 건시려고 찾아오실 것입니다. 저는 모이는 것에 있어서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읽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기도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전도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봉사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며 모든 영적 삶에 있어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력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거듭나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산모에 의해 아이가 결정되듯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여러분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을 살고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므로 해서 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아이는 덩치는 크지만 나이도 18세이지만 전혀 글을 읽을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글 읽는 훈련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셈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셈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에만 맡기만 자기의 신앙생활 햇수만 늘어갈 뿐 영적인 진보는 전혀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으면 다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 훈련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분이라면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어떤 복음교회들의 문제는 경건이 저절로 이루어질 줄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경건을 이르기 위한 훈련의 필요성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이런 훈련을 종교라고 매도해버렸습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거부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경건의 훈련이 구원을 얻는 것이나 그 구원을 지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보다 자기가 어떻게 훈련하느냐로 종국에 가서 하늘에 가거나 가지 못하는 것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경건이 구원된 사람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경건의 훈련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사함 받은 것으로만 좋아해 보십시오.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이 주어지는가?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또 우리가 죄를 대적하여 싸운 결과로 주어질 보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경건의 삶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죄사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의 삶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오늘 성경은 그것이 훈련 없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단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만일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진다면 우리는 전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가만히 있어도 기쁨으로 추수할 때가 있다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거두려 한다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힘든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땀흘리고 수고하며 고통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갈6:7)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할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심지 않고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유롭게 궁을 거닐다가 남의 집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음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음욕으로 인해 이웃집 아내를 데려다가 간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다윗이 행한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삼하11:27). 그것은 주님께서 보실 때, 주님의 명령들을 업신여긴 행동이었습니다(삼하12:9). 주님의 명령을 업신여긴 그것은 곧 주님을 업신여긴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삼하12:10). 그가 심었던 그 한가지 이 악한 씨가 어떻게 열매 맺을 지에 대해 주님께서 예고해주셨습니다. "내가 네 집에서 너를 대적하는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아내들을 네 눈 앞에서 가져다가 네 이웃에게 주리니 이 해가 보는데서 그가 네 아내들과 함께 누우리라"(삼하12:11) "너는 이 일을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앞에서, 해 앞에서 이 일을 행할 것임이라, 하셨나이다."(삼하12:12) 결국 이 일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그 집 안에서 아들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또한 압살롬은 다윗의 남겨둔 후궁들과 해 아래서 이스라엘이 보는 가운데 동침하므로 아버지를 욕되게 했습니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했을 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치우신다고 선언하셨지만(삼하12:13) 그 결말들을 혹독하게 맛보게 하셨습니다(삼하12:10). 밧세바가 나은 다윗의 첫 소생, 곧 간음의 열매가 죽고 말았습니다(삼하12:14). 그리스도인들의 범죄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서 깨끗이 치워질 수 있습니다. 무슨 죄라도 언제든 다 치워질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자백하는 혼은 자기 혼의 죄들을 용서받고 일한 것이 없이 용서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막힌 교제가 있을 때에라도 그것이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죄를 지은 혼에 대한 형벌은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지옥에 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보응이 있었습니다. "저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자입니까? 저런 흉한 죄를 지은 자가 당신의 자녀입니까?"라고 사탄이나 악한 영들이 주님을 모독할 기회를 갖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보응하심에 대해 거두시기까지, 후회하시며 철회하시기까지, 철저히 그것에 대한 매를 맞아야만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매맞는 것이 죄값을 대신하는 것으로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별개입니다. 신성모독을 당하도록 만든 그리스도인을 다시금 그런 일을 번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혹독한 회초리를 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님의 죄가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많은 성도가 모이는 대교회의 담임목사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교회에서 열심히 일한, 유능한 목사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의 이름을 듣고 많은 성도들이 계속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교회에서 매주일 열심히 설교해오던 그 분이 약 11년동안이나 사모님 외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서 은밀한 관계를 가지며 지내왔습니다. 이 사건이 성도들에게 알렸고 교회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참된 생명 얻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 명백했기 때문에 그 목사님은 자기의 범한 죄를 성도들에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여러분 그 목사님의 죄로 인한 파장이 거기서 종료될 거라고 생각됩니까? 그 보응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이 "그래, 목사도 인간이니까?"라고 측은히 여기는 반면 어떤 분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분개하게 여기고는 교회를 떠나갈 것입니다. 아예 신앙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여파가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로 끝날 문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범죄든지 그 여파라는 것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끝났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므로 인해서 범한 죄가 생길 때, 그 죄들로 인한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매를 맞아야만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적들에게 신성모독의 기회를 주고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 잡고자 우리에게 아픈 상처들을 내실 것입니다. 먼 훗날 여러분은 설마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께서는 엄한 사람이므로 내가 두려워하였음이니 주께서는 맡기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시나이다"(눅19:21)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대답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악한 종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자신이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주께서 저절로 나를 경건하게 만들어 주실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 사악한 종아!"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 종에게 이르되, 사악한 종아,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니 너는 내가 맡기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도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어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올 때에 이자와 함께 내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눅19:22,23) 주님께서 만일 여러분을 향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신다면 씨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보여주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의 생명을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심으시고 거두려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생각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라 한다면 우리는 부지런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해야 하며 그리고서 경건한 삶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 되어야 함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경건에 대한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는 세상과 큰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라."(딤전4:8)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생명으로 사는 날들이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담의 생명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올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에 대해 주어진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보상으로 사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건의 삶은 앞으로 올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많은 보상과 위로를 누리게 할 것입니다. 잘 훈련되어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살아간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적절하게, 그리고 드러나게, 공의롭게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2.경건(godliness)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분명한 자세는 경건에 이르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경건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신비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귈 수 있게 된 것은 신비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 실지로 있게 된 것은 신비입니다. 사악한 마귀를 따라 살던 죄인들이 마침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려고 변화되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제 그런 일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신비입니다. 이 경건의 신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데 있었습니다. 비록 사람이셨지만 죄를 짓지 않고 죄를 멀리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의 생명이 믿는 자들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분의 영이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인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새생명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죄에 익숙한 옛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멀리하는 새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씀들을 대할 때마다 당황해하곤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범죄하는 자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의로우며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죄를 지을 수 없나니 그 까닭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라."(요일3:5-9)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에 어떤 형제님은 주님을 영접하고도 죄를 범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로구나 생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그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멸망의 대상이라고 생각해서 괴로워 했습니다. [딤전4:10]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고하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니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요, 특히 믿는 자들의 구원자시라. 무엇이 경건의 삶인지를 생각해보셨습니까? 경건한 삶은 수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는 치욕이 따라옵니다.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참되게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그들은 놀고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 않고 거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한 종들이었습니다.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경건하게 살 때 받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핍박입니다. 치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부지런하지만 반대로 세상을 향해서는 비방과 조롱과 무시와, 핍박, 치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 경건한 삶입니다. 왜 경건한 삶에 보상이 있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대적하여 거짓되이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 보상이 크기 때문이라...."(마5:10-12a)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하늘의 왕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하늘의 왕국은 장차 올 세상을 말합니다. 오는 세상을 말합니다. 또 이들에게는 보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삶은 오히려 복된 삶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건한 삶은 이런 결말을 가져오기 때문에 잠깐 동안 수고와 치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들이 신뢰하는 구원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경건의 차이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위선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에만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경건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행동들은 위선으로 끝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에는 내 멋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속상한 적은 없습니까? 그것 때문에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생기며 원망과 시기하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경건한 능력으로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의 모습만 갖고 있었다든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경건한 삶은 한마디로 구원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특히 믿는 자들에게도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경건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들 경건한 생활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기 보다 우리에게 주어질 보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경건이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사람의 눈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삶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 경건한 삶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경건한 삶에 관한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이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딤전4:11)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먼저 경건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딤전4:12)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특히 목회자들은 어떤 것이 경건한 삶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경건에 관한 주님의 명령을 주어야 합니다. 또한 그 명령에 대해 스스로 지키며 본보이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형제님들은 그들이 속한 가정에서 자녀들에 경건에 관한 주님의 명령을 주어야 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그 명령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경건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입증해 주어야 합니다. 경건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으며 받은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가르침 받은 것을 따라 행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가만히 있다고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을 많이 말하지만 전혀 훈련이 되지 않는다면 경건의 모양만 알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딤후3:5)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꾸만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2002년 9월 8일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