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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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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 안에서의 장로(목사)들
lhyunsik

임동선 [ E-mail ] 딤전5:17-25 주님의 교회 안에서의 장로(목사)들 장로들에 대한 처신(딤전5:17-25) 2002년 10월 20일 주일 오전 말씀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게 하려 하노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1. 장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 이미 우리는 장로들이 교회 안에서 목사와 감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한 직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직분을 가진 자들은 더 잘 섬기기 위하여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주님의 교회 안의 성도들은 권위를 인정해야 하며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에 대하여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딤전5:17) 교회 안에는 존경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과부도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딤전5:3).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형제라 할지라도 자기 주인들을 매우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딤전6:1-2). 지나치게 형제의식만 강조하다가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했습니다(벧전2:17). 교회 안에서는 서로가 존경해야 합니다. 업신여기는 언어나 태도 등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록 우리가 심각한 죄인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비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대는 일을 일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은 우리의 허물을 덮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분께서 지금, 대제사장으로 계신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해 변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설녕 우리 가운데 좀 모자라게 보이는 지체가 있다할 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하나만의 이유로도 그분을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체가 섬기기로 한 분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가 존경해야 합니다. 나아가 장로, 곧 목사님들에 대해서는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2.왜 바울이 이 부분을 디모데에게 말해야 했는가? 디모데가 사역할 교회에는 이미 여러 명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 어린 사람이었지만 그 곳의 감독이 되어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담임목사가 된다하더라도 다른 장로들을 향해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다는 뜻입니다. 그 장로들을 존경하고 최선을 다해 높여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그 자신이 그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성도들이 여러 명의 목사님들을 존경하며 섬기겠습니까? 디모데는 다른 목사님들을 존경해야 했습니다. 아니 목사님들을 서로를 대할 때, 그런 태도로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의 목사를 존경하도록 훈련하는 방법이었습니다. 3.예를 들어, 이 교회에서 자란 어떤 청년이 목사가 된다면?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기를, 대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 존경도 받지 못한다, 하셨음이라."(요4:44) 이 교회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회 안에 어떤 청년은 목회의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실지로 이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이 나중에 본교회의 목회자로 안수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런 분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만 합니까? 과거에 그가 나와 같은 형제였다고 함부로 대한다면 여러분은 장로를 존경할 자로 여기라는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내가 가르쳤던 제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한다면 여러분은 장로를 존경할 자로 여기라는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혹은 그가 나보다 경험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면 여러분은 장로를 존경할 자로 여기라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목사로 세움을 입은 사람은 마땅히 존경할 자로 알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는 자들"(행20:28)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떼인 주님의 교회에 주의를 기울이며 감독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만일 장로에게 순복하지 않는다면, 목사에게 순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한 증거입니다. 교만한 자는 주님께서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있으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이 있느니라"(잠16:18) 4.장로의 생활에 대한 자세 개인적으로 저는 목사님들의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염려하고 기도하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곡식 밟는 소의 입의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25:4) "이는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기록하셨음이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시는 것이냐?"(고전9:9) 이것은 단순히 소들을 위해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밭에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곡식을 밟는 소가 모형이라면 주님의 사역자는 실체에 해당합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종들은 마땅히 교회로부터 공급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레위지파를 보십시오. 성전의 직무를 전담하던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의무를 부과하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라든지 각종 희생물에서 어떤 몫을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취했던 것은 다 그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굶어가며 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도다"(신24:15)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10:10)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눅10:7)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겠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양떼를 먹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겠느냐?"(고전9:7) 사역자에게 자비량을 요청하는 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자비량은 사역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자기에게 공궤 받을 권한이 있지만 더 좋은 상을 바라보고 그 권한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역자가 결정하는 것이지 사역자를 모시는 성도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자비량한 것을 생각하고 서신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비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연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전도자로서 바울은 자비량을 택했지만 그러나 교회를 향해서 주는 편지 안에서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한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이 주님의 교회로부터 공급받아야 함을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조목사님의 자비량 사역을 당연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 사용할 권한을 포기하면서 교회를 위해 협동하는 목사님에 대해 존경하시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말씀을 가르침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눌지니라."(갈6:6) 5.장로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장로도 역시 인간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로의 실수들이 표면화된다면 그것은 교회에게 파장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내가 간음한 것이 남편에게 이혼사유를 줄 수 있다면 성경의 교리를 떠나 다른 이상한 가르침들을 추종하게 된 목사 역시 고발대상이 됩니다. 우리 교회는 헌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간의 약속입니다. 카리스마적인 사람이 담임목사로 부임할 수도 있고 회중의 의견을 잘 수렴하는 사람이 부임할 수도 있습니다. 키 큰 사람이 담임목사가 될 수도 있고 키 작은 사람이 담임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담임목사를 하게 될 경우도 있고 그저 순수하게 스스로 독학한 사람이 담임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양한 분들이 담임목사로서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담임목사에 따라 교회가 좌지우지되지 않으면서 본래의 취지대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헌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담임목사라고 해서 갑자기 어느날부터 "우리는 정통 칼빈주의 노선을 따라는 장로교회가 되겠습니다!"라고 선언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헌법입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취지와 방향을 설명하고 있는 서로간의 약속이란 말입니다. 참고적으로 저희 교회에서는 운영내규 제7항 수임자 조항 (나)목사의 자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본 교회의 목회자는 국내와 국외의 각종 교단(미국침례회, 남침례회, 북침례회, 보수침례회 등 미국을 비롯한 각종 침례교단 포함)과 교회 협의회(KNCC, NCC) 등 각종 종교단체, 그리고 종교통합 또는 교회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 or Ecumenism), 현대적 성령운동(Charismatic movement),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초교파 또는 무교파 주의(Interdenominationalism) 등 각종 비성경적인 운동이나 자유주의적(liberal)인 기독교나 종교단체 또는 조직을 지지, 옹호, 동참하거나 그 단체나 조직의 회원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본 조항의 위배는 본 교회의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 사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여러분 모두는 입회시 이런 조항을 읽었고 다 거기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교단이라고 해서 우리는 함부로 연합체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 성령운동의 일환인 빈야드, 더 콜, 방언집회, 입신과 성령 안에서의 웃음 등을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 등의 모임, 이런 것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초교파라는 것은 어느 교파를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무교파 라고 하는 것은 비슷한 말인데, 모든 교파를 다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의 안목을 자극하는 신복음주의적 자세, 말씀의 대언보다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해서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하는, 이전의 교회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들의 접근 방식에 대해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극을 사용하는 문제, 음악만으로 표현하는 문제...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위해서라면 다양한 이벤트와 행사들을 가져서 재미와 볼거리를 주려고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빠지게 된 목사는 그 스스로 인천생명침례교회의 목사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윤리적으로 부덕한 행위가 드러난다면 그는 고발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장로에 대한 고발이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세 증인이 있은 후에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 세 증인 앞에서가 아니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 목사의 잘못이 중대한 것이 되었을 때는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난 원리를 적용합니다. 그 잘못을 알거나 목격한 사람이 가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이 더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서 치리절차를 밟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에 대해 교회는 그를 매장시키려는 태도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짓는 자들은 반드시 꾸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을 가볍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낙태를 한 사람이 생긴다면 앞으로 이 교회는 그를 징계할 것입니다. 이혼을 한 경우는 근신하게 할 것입니다. 간음을 한 경우, 그는 징계대상이 될 것입니다. "죄짓는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만일 우리가 그 잘못을 알고 있는데 그냥 덮기로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들에 가담하는 것과 같습니다(딤전5:22). 침례성도는 벙어리가 아니었습니다. 핍박에 대해서는 달게 받았지만 비진리를 말할 때 입 다물고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 카톨릭이나 다른 교회들이 성경을 떠나 행동할 때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만일 입다물고 있었다면 그들은 순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과 공의, 여러분은 어느 한 극단으로 달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공의를 잃어버린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꾸짖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봐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상처가 날까봐 맹장 수술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단순히 모욕을 주고 분괴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것은 또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분의 잘못을 위해 눈물 흘리고 금식하며 나아가 돌이키기를 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목사님이든 아니면 성도이든, 선배이든,...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다 용서되었다며 걱정 말라고 위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자기의 잘못을 지적받기 전에 그 잘못을 안고 끙끙거리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적받을 때까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적받는 것이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 안해도 안다"라고 말하지만 "말 해야 아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성경말씀은 "죄짓는 자들은 모른척해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알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써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죽이는 일뿐입니다. 율법이 죽이는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어느 한 쪽에 서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말해야 하며 인간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도 촉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먼저이지만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더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한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도 살펴보라.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갈6:1). 진정으로 어떤 사람의 잘못에 대해 분괴함으로 대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온유한 영이 아니라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며 우리의 죄를 지적하실 때, 끝까지 온유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잘못이든, 어떤 성도의 잘못이든, 그것을 처리하는 자세는 항상 온유한 자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들은 장려하고 죄들을 꾸짖어서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6.목사들의 위치 목사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중보하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목사만이 제사장도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다 같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회 신앙은 매우 목사(성직자)에게 의존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복이 나오고 그들의 선언 속에서 축복과 저주가 오가는 무시무시한 존재들로 격상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목사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마십시오. 죄인인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분은 임동선 목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침례에 순종할 때, 조종형 목사님의 이름으로 침레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분은 이진천 목사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기 때문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7.목사들의 안수-함부로 안수하지 말라. 안수는 함부로 하지 말로 했습니다.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딤전5:22) 1)첫째, 함부로 사역자를 세우지 말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레위 사람들에게 안수했습니다(민8:10). 그 안수는 나머지와 지파와 레위지파를 구분하는 안수였습니다. 그 안수를 통해 레위지파는 나머지 열두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을 그 자신과 아론을 잇는 후계자로 세울 때, 안수했습니다(민27:22,23). 초대교회는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울 때 안수했습니다(행6:6). 디모데는 장로회의 안수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딤전4:14). 안수는 어떤 의미에서 일꾼을 세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교회의 직무를 맡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 와서 6개월 지나면 세례받고 일년 지나면 집사를 주는 식은 다 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년밖에 되지 않았어도 이미 다른 곳에서의 신앙연륜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도 못한 사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함부로 일꾼 삼지 말라는 뜻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2)이것은 그 자신에게 특별한 은사가 나가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이르렀을 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받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행8:17). 그때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오늘날 카리스마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예를 들어 지금도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가 갖는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주님을 영접했지만 오순절의 그 특별함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임한 은혜였습니다. 이것을 전체 교회를 향해 정석으로 풀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누구에게든지 안수하면 성령을 받게 되기를 바랬던 시몬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책망을 들어야만 합니다(행8:19). 오늘날 그 자신의 안수를 통해 무언가 특별함이 나타날 것이라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시몬과 같은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 운운하는 것... 3)이것은 그 자신이 모든 질병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디모데 그 자신도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포도즙을 쓰라고 권해야 했습니다(딤전5:23). 예수님은 안수하면서 병을 고치신 예들이 있습니다(눅4:40). 또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안수한즉 병을 나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막16:18). 아나니아는 늦게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울에게 안수해서 그의 눈을 떠 보게 했습니다(행9:17). 사울 자신도 많은 질병들을 고쳤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가시 같은 질병은 기도로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의사들을 능가하는 능력이 그 속에서 계속 나오는 것처럼 안수를 사용하지 말라. 4)복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안수했었습니다(창48:13). 그것은 복을 주는 의미였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구약의 아론이 그 백성에게 축복을 선언(레9:22)했던 부분을 예로 들면서 강복권한이 있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때 등장하는 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오늘날 아론의 대제사장직분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나 아론보다 더 더나은 대제사장 직분인 것입니다. 또 레위의 아들들이 축복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제사장들 말입니다(신21:5).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형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5)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보자로서 죄헌물에 안수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희생물에 안수했었습니다(레3:2,8,13). 그것은 죄를 넘기는 의식이었습니다. 아무도 죄인을 하나님께 연결시켜드리는 다리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뜻 안수하지 말라는 이 말에는 자칫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넘보지 말라는 주의입니다. 결론 1.목사는 교회 안에서 존경받아야 합니다. 2.목사는 교회 안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3.목사의 잘못은 신중히 처리 되어야 합니다. 4.목사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5.목사의 안수는 남발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