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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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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동역의 자세 - 3 부 (이진천복사)
lhyunsik

14. 참된 동역의 자세 "내가 디모데를 속히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빌 2:11-24) 바울과 디모데는 땔래야 땔 수 없는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는 동역자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우정의 사람을 든다면 다윗과 요나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끈끈한 동역자의 자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디모데의 자세에 있습니다. 그는 매사에 바울과 '뜻을 같이하였다'고 했습니다.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역자의 자세는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이성과 감정의 분출을 억제하고 최대한 감추어서 상대방의 뜻을 간파하고 그 뜻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의 위대하고도 왕성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을 뒷바라지하는 디모데의 모습은 동역자의 전형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또한 디모데의 자세는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심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이 동역 할 수 없는 이유도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역을 위해서는 충분히 손해 볼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물질, 명예, 권세, 지식 등에 대한 열정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면 그는 동역할 수 없는 독불장군과 같은 존재로 남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의 자세 중 가장 주목할 수 있는 자세가 있다면 역시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디모데는 바울을 섬겼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디모데가 우상으로 바울을 섬겼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육신적으로 섬길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바울에게 보여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피차 섬기는 자세야말로 동역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한 가족과 같이 한 마음으로 같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피차 존경하며 사랑으로 뭉쳐 있습니다.부디 이 시대에 바울과 디모데 같은 위대한 사역자가 많이 나와서 아름다운 교회를 많이 세워 가야 할 것입니다. ================================================================ 15. 목양의 자세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들의 목양자에 대하여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성경 안에서는 목사라는 호칭이 단 한 번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감독이나 장로와 같은 성경에서 목양자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어를 뒤로하고 목사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양하는 사람의 자세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안에서는 목양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하여 매우 많은 권한을 가지고 교회가 운영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대부분의 목양자들은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감독의 기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목사로 하여금 본래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사역의 기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위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역시 세 번에 걸쳐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합니다(요21:15-17). 물론 개역 성경에서는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변개로 인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목양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목양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맡겨진 것은 바로 양들을 먹이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목양의 일에는 감독으로서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과, 장로로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포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기능에 앞서서 양들을 먹이는 일들을 주된 사역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사역해야만 합니다. 만일 이 일 외에 다른 모든 기능들을 앞세워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한다면 그는 목사로서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잘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이 있게 될 것입니다. ============================================================== 16. Shepherd & Pastor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이 두 단어를 연구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 안에서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들의 뜻은 동일하게 “목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쓰여진 것을 보면 신약성경 안에서 ”Shepherd(s)“는 예수님을 지칭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마9:36,25:32,26:31,막6:34,14:27,눅2:8,2:15,2:18,2:20,요10:2,10:11,10:12,10:14,10:16,히13:20,벧전2:25,5:4), ”Pastor“은 에베소서 단 한군데 쓰여져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각 사람에게 맡겨진 직분을 소개하는데 쓰여졌던 것입니다(엡4:11). 물론 우리는 구약 성경 안에서 이 두 단어가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pastor"이 오직 예레미야에서만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양자들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pastor"(목자,목사)의 기원에 대하여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베드로에게 위임한 사실을 들어 말합니다(요21:15-17). 주님 자신의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드로에게 위임한 사실을 통하여 성경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이 두 번째 고백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KJV성경은 여전히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KJV성경은 세 차례에 걸쳐 모두 ”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치는 일들에 대하여 위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은 사도행전에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권면하는 모습에서 개역성경이 “치라(Be shepherds)”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KJV성경은 “먹이라(feed)”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행20:28). 결국 어떤 성경을 쓰는가에 따라서 목회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들의 직분이 감독과 장로와 목사(목자)의 직분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 안에서 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왜 그들이 전통적으로 그 직분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용해 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비록 장로와 감독의 일도 더불어 감당하고 있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일이며, 만일 그들 스스로 성도들을 치리하고, 그들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주님의 권한에 대하여 월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들을 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거짓 진리와 분리되고, 교회 안에서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에 대하여 치리해야 하지만 신중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목사의 개인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KJV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라면 주님은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위임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감독이라는 직분에 대하여 오해를 합니다. 감독은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감독은 이미 설계되어 있는 것을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의 감독은 스스로 계획을 하고 추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성도들이 성경 안에서 제대로 생활하고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들을 바르게 권면하고 잡아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목사들이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조직을 위해서 있는 직분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모을 것을 제안했을 때, 주인은 혹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하지 말도록 합니다(마13:24-30). 만일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정죄한다면 결국 곡식이 뽑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목자(목사)의 자세는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는 심는 자로 표현을 하고 있고, 아볼로에 대하여는 물을 주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고전3:6). 그리고 디모데에게는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4:13). 결국 목자(목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역의 자세는 양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자(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양을 먹이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17. 지도자의 권위 많은 사람들이 이 지도자의 권위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말하기를 주저합니다. 권위가 세워지는가 하면 어느새 실추되어 있고, 또 완전히 권위가 바닥에 이르렀다 생각되면 상당한 권위를 가지기도 하고...도대체 진정한 권위는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작게는 한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한 민족을 지도할 만한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고 살겠다는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생각들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실제적으로 이 권위를 가지고 사는 자를 차아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대해서 생각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권위를 가지시겠다고 선언하신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스스로 낮아지셨고, 때로는 종의 모습으로, 때로는 죄인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오늘날 권위를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무능한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지도자의 모범이며,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결코 스스로 되겠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권위 있는 자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오히려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존경받는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높은 자리, 즉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의 자리에 앉으면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입니다. 모든 권위의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주어지며, 또한 사람들의 기대치는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권위는 권위의 자리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래서 올라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병 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권위 있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을 입고, 또한 더불어 살아가며, 삶을 인도하는 것은 바로 진정으로 권위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권위의 자리에 있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목사, 장로, 집사가 되면 권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결코 권위의 자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곧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볼 때 권위의 자리에 있다면 그는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섬길 책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권위!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섬기 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 18. 거짓 교사 "망령 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 데 그 중에 후매네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에 지나갔다하 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6) 거짓교사는 어느 시대에나 막론하고 존재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분명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동안을 교회 안에서 떠나지 않고 존재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 이처럼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거짓 교사가 있는 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중에 하나는 교회의 유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 은 유전을 지키라"(살후 2: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교회의 유전은 바로 사도와 전도자들에 의해 쓰여진 서신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른 유전에 대하여는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의 유전을 따르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실제로 교회안에는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삶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자들이 교회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려듭니다. 믿음에 따른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결코 흉내나 습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라면 그에 따른 열매는 반드시 따라 올 것입니다. 지금도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변질시키고 성령의 열매와는 상반된 결실을 맺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거짓 교사를 분별하기 위해 전해지는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를 상고하고(행 17:11). 또한 그가 삶속에서 열매를 맺어가는 온유 와 겸손함을 가진 자인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디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 19. 진정한 협력자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을 꿈 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공의 기준을 말한다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역의 효과는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역을 함에 있어서 환희와 좌절을 모두 겪었던 사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노력과 정열을 쏟아 부었지만 그는 실망을 하고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로 만일 아테네가 복음화 된다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으로 기대하고 열심히 증거를 하였지만 그는 몇 명의 사람들만을 얻었을 뿐이었습니다(행17:34). 그는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함에 대하여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의 아쉬운 사역을 뒤로하고 고린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역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귀중한 협력자를 얻게 되었으며, 후에는 초대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교회로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사역을 하는 중심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또한 협력자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고린도에서의 만남 이 일들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을 만나니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에게 명령하여 로마를 떠나라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더라. 바울이 그들에게로 가서 생업(生業)이 같으므로 그들과 함께 머물며 일하니 그들은 직업으로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이더라(행18:1-3)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 이른 것은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도록 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굴라 부부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울과 만나는 장면은 매우 흥미롭게 합니다. 그들 부부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사역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도시에서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지만 유독 고린도에서 만큼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아테네에서의 사역에서 모든 비용들을 탕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 직업을 통하여 아굴라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협력자를 얻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만 좋은 일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바울은 통해 보는 것과 같이 같은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과정에서도 좋은 협력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협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자였지만 결코 그가 말하는 복음을 들을 줄 알았고, 후에는 바울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현재 일하는 일터는 바로 사역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곳은 어느 곳보다도 훌륭한 사역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 와야만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또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가지고 또 다시 구원에 관하여 말할 수 없으며, 좋은 협력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장소로부터 좋은 협력자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정직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가진 신앙의 모습보다는 먼저 그의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땀 흘리는 모습을 통하여 다가 올 것이며, 그 가운데 전하는 복음은 그들의 마음 안에 심겨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을 나가면 사람들을 속이고, 남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가로막는 자들입니다. 2. 바울과 동행하는 아굴라 부부 이 일 후에도 바울은 거기서 꽤 오래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거기서 배타고 시리아로 들어가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와 함께하니라. 바울이 전에 서원한 것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18:18)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들어 갈 때에 아굴라 부부는 함께 동행합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동업자의 관계를 벗어나 동역자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처음 만남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했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돕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이미 주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바울과 동행함으로 결실을 얻고자 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세상에서의 소망을 뒤로 하고 오직 주를 위해 살기로 결정을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과감히 자신들이 가진 터전을 뒤로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결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분리되는 또 다른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안주하는 삶은 결코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 들인 아굴라 부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변화를 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 변화를 맛 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삶에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에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분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 생활의 변화도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 바울과의 만남을 통하여 복음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들은 이미 주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협력자가 되기 이전에 분명한 변화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변화된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경을 가르침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이 사람이 전에 {주}의 길을 배워 영이 뜨겁고 {주}에 관한 것들을 부지런히 말하고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더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 주니라(행18:24-26) 우리는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던 아볼로라는 사람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풀어주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굴라 부부가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오히려 당대에 유면했던 성경교사인 아볼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협력자가 되는 또 하나의 조건으로 성경을 아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울을 통하여 진리를 아는 지식을 분명하고도 확신 있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느덧 선생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사역자를 돕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처음에는 사역자를 잘 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사역을 방해하는 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진리를 알고 협력하면 서로가 하나가 되어 보다 능력있는 사역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바나 진리의 내용을 서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큰 싸움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굴라 부부는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서 바울을 충분하게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도 매우 큰 힘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굴라 부부에 대하여 고린도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보내면서 사역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역의 협력자가 되기를 기대한다면 성경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현대인들은 성경 지식을 대신하여, 물질과 헌신만을 가지고 사역을 대신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사역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분쟁과 분열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협력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되었다면 성경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사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역자이든 아니면 말씀을 듣는 성도이든 누구든지 성경을 알기 위해서 힘썼을 때에 모두에게 능력 있는 사역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십시오. 4. 바울의 협력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인사하라 그들은 내 생명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들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바울은 공식적으로 아굴라 부부를 자신의 협력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굴라 부부에게 있어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부부가 바울의 사역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더욱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바울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을 내놓았다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울을 위하여 죽기까지 작정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바울의 무리들은 이단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단들과 아굴라 부부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숨을 내놓은 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의 무리들은 사람을 추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주에 대하여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력에 대하여 굴복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마음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굴라 부부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바울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바울의 존재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과연 그것이 복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오는 것이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복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진정한 협력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분쟁과 분열의 원인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추종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만을 생각하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기로 한다면 결코 분쟁이나 분열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사역자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은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더욱 존경 하고 사랑하며,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 힘쓰십시오. 주님은 그로 인하여 더욱 사랑하실 것입니다. 5. 자기 집에 있는 교회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기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 안에서 너희에게 많이 문안하느니라(고전16:19) 현대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교회가 아닌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골4:15,몬1:2). 바로 아굴라 부부 역시 그의 집에 교회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종교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여 비밀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그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정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역의 효과를 증대시켜 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가정생활과 교회 생활을 구분 지으려 하는 모습들은 보입니다. 그들은 교회당에 와서는 매우 열심히 섬기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가정에서는 전혀 믿음과 관계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만 믿음의 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가정이 가족 모두가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가정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당시에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가정교회의 형태를 이룰 수 있었겠지만 아굴라의 가정이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부부가 모두 주님 앞에 헌신된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회라는 단위를 매우 크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더 이상 모이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생겼을 때에는 또 다른 가정에서 모임을 갖는 형태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방법입니다. 가정은 자체 내에서 헌금을 모아 두어서 다른 사역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필요하다면 아굴라의 가정과 같이 직접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로 다니면서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효과적이고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굴라의 가정을 보면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결론 그리스도인들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협력자가 되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으로 좋은 것만을 취하고 만일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역자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아굴라의 가정과 같은 협력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협력자 인지 아니면 영적 이기주의자는 아닌지를 돌아보고 주님 앞에 정직하고 합당한 자세로 믿음의 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 자비량 사역에 대한 소견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통하여 일을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후에 사도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을 정도로 훌륭한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직업을 통하여 물질을 얻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얻은 것은 더욱 큰 소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는 기록만을 근거로 자비량 선교, 혹은 목회를 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의 우려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서 자비량 선교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사역을 당연히 여기는 것에 대하여 권면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목회자의 생활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하여 연보와 목회자의 생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고린도에서 자비량 사역을 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비량 사역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사역자가 수고의 대가로 받는 돈이나 기타 물질들을 사례라는 이름으로 지불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감사의 표현을 담은 성도들의 정성으로 목회자를 예우하는 것으로 선한 의미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사역의 대가로 얻는 급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고정 급여가 아닌 사례를 고집한다면 성도들은 사역자에게 급여를 지불할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매월 사역자를 위해서 다소 무리가 되는 상황에서도 급여를 지불합니다. 그 속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역자나 성도들 모두에서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역을 하면 주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목회를 시작하고, 오직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공급하심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처럼 무모한 것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우심이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에게는 안정적인 상태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량 사역을 한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목회가 매우 전문적인 상황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비량 사역을 요구한다면 어찌보면 그것은 사역을 그만두도록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이 효과적인 사역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에 힘을 기울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만 합니다. 자비량 사역은 때로 사역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비량 사역 그 자체가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 한 생각이며, 성도들은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물질로 사역자를 돕고, 사역자는 영적인 풍성함을 성도들에게 공급함으로서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 21.좁은 문&좁은 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순례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향을 향하여 가면서 이 세상은 나그네로서 잠시 머문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할 때에 두려움 없이 맞이하고는 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인생과 일치하기 때문에 주저함이 없이 죽음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본향인 천국에 있으며, 속히 그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 왔지만 길을 걷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온 자가 생명으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되어지는 곳에는 좁은 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마태복음7:13-14)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른 교리들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에 실제로 성도들은 교리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들의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그것을 자신의 머리에 담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편견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안주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삶을 유익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을 확인하려는 자세보다는 경계하고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로역정이라는 훌륭한 책에서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은 새로운 도전과 유혹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통하여 성숙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체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마귀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생명의 좁은 문으로 들어 온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걸으라고 명령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곳들은 그로 하여금 정착하여 안주하며 사역을 할 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안디옥 교회와 같은 그의 모 교회는 그가 영원히 머물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앞에 죽음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순례자로서의 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머무르는 자들에게 생명의 풍성함은 없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좁은 길을 향해 가는 자에게 주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잘 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어서 분별력을 상실하고, 남을 정죄하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은 그를 보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온 자들에게는 좁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넓은 길을 찾는다면 그는 곧 실망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험난한 길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는 생애를 살기를 바랍니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