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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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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 2 부 ( 이진천 목사 )
lhyunsik

7.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셨습니다. 물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시대에는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지도자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도 회중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시대에도 지도자의 중요성은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시대에서의 지도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지도자는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거짓복음이 교회 안에 난무하고 마치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를 지키고, 거짓진리를 분별해 내며, 그리스도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까지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참된 지도자가 많이 나오길 바라며 또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딤후 2:21, 행 9:15)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울(삼상 15:17-23)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실패한 왕으로 취급되는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게 초대 왕으로 등극했지만 왕이 된 이후로 비참한 세월을 보낸 자였습니다. 악한 영에 의해 심한 고생을 하고(삼상 16:14), 평생을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다윗을 경계 대상으로 삼아 살해할 뜻을 품었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 행위를 서슴치 않는 범죄를 끊임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울이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낮출줄 아는 겸손한 자였습니다(삼상 9:21). 오히려 왕으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양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울이 왕이 되면서 무너지는데,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과 후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봅니다. 사울을 통하여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문제점들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울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22,23절).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서기 앞서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 시킬 것을 명령하셨으나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짐승들은 남겨두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 시키는 불순종을 했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부분에서 많은 실패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외형적인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과정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물질, 명예, 권세, 지식이 성도의 신앙 수준을 판가름하는 관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가령 물질에 대한 개념도 율법시대에는 십분의 일만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수 억원을 헌금했다 하더라도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차, 좋은 집, 그 외 각종 악세서리 등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이에 하나님의 것을 수없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많은 헌금과 봉사 활동이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삶의 전체가 하나님께 맡겨진 순종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외형적 삶의 모양보다는 내면의 성숙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외형적 삶의 성숙을 위해 노력한다면 점점 율법의 신앙에 사로잡혀 스스로 넘어지거나 한계에 부딪쳐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지만, 내면의 성숙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외적인 결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성숙을 위해 순종을 생활화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사울은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는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24절). 민주주의라는 말은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볼 때 백성을 두려워하는 사울 왕의 모습은 오히려 위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통치자가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독재권력을 휘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이 시대에도 매우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친히 통치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사는 동안에도 그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할 때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고,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대적할 때도 언어를 혼란케 함으로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갈 때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셔서 민족을 이루셨고, 친히 왕이 되셔서 그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들의 왕을 세우기를 열망함으로 사울 왕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가장 작고, 낮음을 주장하는(삼상 9:21) 한 청년 사울을 직접 선택함으로 통치권을 가지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뒤로하고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사망을 낳게 된 것입니다(약 1:15).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인정받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울을 존경했고, 따랐으며, 심지어 바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롬 16:3-4). 유대인이었던 그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 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율법주의 사상을 뒤로하고 복음 외에는 전하지 말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결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만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분명히 합니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율법시대에는 몇 명의 지도자, 선지자, 왕들에 의해 통치하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안에서 직접 통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나라의 시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빌 3:2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명령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셋째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버림받았습니다(26절) 사울이 말씀을 어긴 이유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청종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24절). 그러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곧 대적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이 주인의 말에 불순종한다면 도전의 행위로 간주하여 처벌을 하듯이 왕 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약 3:1-12).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행 11:1), '육체의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 하느니라'(살전 2:13) 복음 시대에도 말씀은 인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0:16-18). 우리가 단순히 말씀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는 사울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의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빌 2:5), 함께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빌 2:12).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행 13:21-23) 사도 바울이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부터 바나바와 함께 파송받아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그곳에 있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행 13:22)라고 소개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전반을 들여다보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살해의 위험 속에 평생을 보냈고, 넉넉하고 평안한 생활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언제나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시 23편). 과연 무엇이 다윗을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골리앗 앞에 담대히 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45-49).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누가 보아도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이 싸움에 끼어들어 싸울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삼상 17:26). 그는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하면서 물 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칼로 목을 베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때로는 타협을 요구하고, 때로는 행복을 요구합니다. 날과 절기를 지키게 함으로 복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갈 4:9-11),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복음을 변질시키기도 합니다(골 2:8). 그들은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마치 참인 것처럼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작고,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를 들고나서야 합니다. 다윗의 물 맷돌과 믿음이 무기였듯이 말씀과 믿음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살전 2:13). 말씀을 세상 속으로 던져 거짓 복음으로,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새로운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의 범죄함을 뉘우칠 줄 아는 자였습니다(삼하 12:13). 그는 한 때 방심함으로 강간과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삼하 11장). 이후 나단 선지자에 의해 그의 죄를 지적 받자, 그는 평생을 침상이 마를 날이 없도록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시 6편). 회개함의 의미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로 동일한 죄를 범치 않는 회개의 본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고백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복음 시대에 있어서 회개의 의미는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발길을 천국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발길을 생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뒤에는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행 2:38).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 짓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 속성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죄를 거듭하고 잇다면 회개의 여부를 다시 한 번 진단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어가지 못하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고 계심(요일 5:12)이 증거되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지금임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이 내 안에서 증거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바울은 이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 인격으로 다가옴을 재차 강조합니다. 구원의 증거가 없는 삶의 모습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삶으로 인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요나단과의 우정이 변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중요한 덕목은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입니다. 인간 관계가 완만하지 못해서는 결코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살아 있을 동안에도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지만, 요나단이 죽고, 사울마저 죽은 후 왕위에 오르자 그는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의 가족을 찾았고 결국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서 그를 돌보는 우정을 과시했습니다(삼하 9:9-13). 오히려 절뚝발이였던 므비보셋은 자신이 죽을 줄로만 생각했으나 다윗은 오히려 후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는 절뚝발이요 신분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므비보셋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다윗의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격 중에 변치 않는 우정은 단연 돋보이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전 생애 중단 한 번도 사람 관계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배반과 음모속에서도 끝까지 신뢰함으로 훌륭한 동지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지도자들의 향방 없는 모습에 비교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은 다 소중한 자들입니다. 미천한 자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사람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다윗은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결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최선의 사랑을 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원수까지 사랑할 것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마 5:44). 진정한 그리스도인, 더 나아가 진정한 지도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자임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내는 열매로 그들의 자질 내부를 볼 수는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그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부디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열매를 맺음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8. 초신자들을 대하는 자세 한 가정이 형성되면 아이가 생겨야 하듯이 교회는 초신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더욱 기쁨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으로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장성해서 또 다른 자녀를 양육할 때까지 교회는 그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면 자연히 교회는 성장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미 성숙한 성도들이 교회에 더해지는 것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경이 변하면 자연히 그곳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신자들은 그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을 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양육을 받은 교회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헌신할 것이며, 매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굳게 지키려 할 것입니다. 교회가 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초신자들을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성숙한 성도들이 초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 그들은 보호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대부분의 목양자들은 초신자들에 대하여 매우 성급하게 대합니다. 물론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들이 빨리 자라서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성숙하게 되는데 시간이 걸리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거듭났다 할지라도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이는 초신자라도 성경을 아는 지식이 많으면 그가 교회의 일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아는 것이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아이는 가끔 어른들의 눈에 버릇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성경 지식을 조금 안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려 한다면 자칫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신자들에게 목양의 일을 맡기지 말도록 권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딤전3:6). 그렇습니다. 초신자가 비록 많은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보호되어야할 대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서 자라야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초신자들 스스로 자라도록 방치해 둔다면 교회는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범위를 벗어나 이곳저곳에서 지식을 더하고 믿음을 더하려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참 된 양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변에서 무능한 부모를 둔 탓에 자녀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능하더라도 부모로서 자격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무능한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심정으로 초신자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초신자들이 교회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면 그들은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들을 보면서 결혼할 때는 철저하게 부부 중심의 생활을 하더라도 자녀가 생기게 되면 그 가정은 철저히 아이들 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역시 처음에 교회가 시작될 때 바른 진리 아래 바른 목회를 생각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교회가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새롭게 거듭난 자들이 교회에 더해지게 될 때 교회의 관심은 달라져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운영체계를 초신자 중심에 맞추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함으로서 믿음의 일꾼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 중심의 운영을 오해해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에 교회를 맞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초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건전한 교리 안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체질을 초신자들에게 맞추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언제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될 것이며, 성장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2. 초신자에게 장래 그들이 닥칠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 안에서 초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 어려운 생활을 경험하게 될 것은 당연한 것인자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경험하게 될 어려움들을 미리 말해준다면 이는 오히려 그의 성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이들은 아프면서 성장을 합니다. 그들이 한 번 아픔을 경험하고 나고 반드시 변해 있습니다. 키가 자라든지, 지혜가 자라든지 어느덧 자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적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역시 많은 아픔을 경험하면서 자라납니다. 그러나 부모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그들은 아이들이 아플 때에 "그래 너는 이 일로 해서 자랄거야"하고 말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은 대부분 어린 아이를 부둥켜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때로는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든 아이가 빨리 치료되기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어려움들을 당하고 있는 초신자들을 위로하게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남의 일들을 대하듯 "잘 될거야"하고 관망하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만일 초신자들을 그러한 방법으로 방치해 둔다면 그는 결코 교회의 지체로서 바르게 성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교회 안에서 자라게 되더라도 그는 다른 초신자들을 그러한 방법으로 대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환경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게 될 것은 분명하지만 초신자들에게 먼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속히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그것은 그들을 더욱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분별 없이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가령 부모보다 친구를 더 의지하고, 또한 선생님이나 연예인, 혹은 운동선수들을 좋아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가정을 뒤로하고 가출을 하여 그릇된 길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의지해야할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목사나 교사, 혹은 성도들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누가 가장 아이의 장래를 분명하게 책임을 져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부모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도 있을 것같이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녀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는 것은 부모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말뿐이며, 또한 책임을 질 만한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초신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사람을 보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사나 성도들을 모델로 삼고 그들의 행위를 신앙의 모델로 삼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지만, 때로는 의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존재한 이단들이 가장 즐겨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한 모임은 언제나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한 모임은 주님의 바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고 한다면 당연히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구원으로 만족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자매가 상담이 필요하다면서 찾아왔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은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교회는 그녀가 구원을 받는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스스로 자라도록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지쳐서 구원의 감격조차 잃어버리고 깊은 침체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가 이제는 한 인격체라고 알아서 살아가도록 만든다면 결국 그 아이는 죽든지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에 의해 키워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구원이 취소되느냐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논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가 목양자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면서 결국에는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가 될 것이고, 때로는 목양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거듭난 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가 구원을 얻는 것에 머무르게 된다면 그는 오랫동안 침체를 겪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지속적으로 젖을 아이의 입에 물리고 키웁니다. 그리고 점차로 단단한 식물을 먹게 하며, 심지어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어느정도 신앙이 자란 성도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게 되는 시기는 어린 아이 때가 아니라 소년기와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라는 사실을 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 중요한 시기를 잘 못 방치해 두면 오히려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각종 사고와 반항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결국에는 그들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많은 목양자들이 이러한 성도들로 인해서 매우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들의 책임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로 인한 문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목양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돌봐야만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차례에 걸쳐서 받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 이후에 주셨던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먹이라"(2번 반복)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양들의 상태로 있는 한 그들은 지속적으로 목양자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을 방치해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지속적으로 관리를 필요로 하는 성도입니다. 5. 비판하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초신자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판적인 시각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로 이단 종파들에서 흔히 쓰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기존의 교회들이나 바른 진리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내용을 가지고 초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성공적이어서 우리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초신자들에게 비판적인 눈을 갖도록 하는 것은 결국 그가 평생 바른 믿음 위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느 곳에 완전한 성도들만 모인 곳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수없이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초신자가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성도들의 작은 실수를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로 인하여 실족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정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많은 문제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신자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심어주는 것은 결국 교회에 큰 짐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초신자들이 성도들의 냉냉함이나 게으름에 대하여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로 하여금 비판하지 못하도록 잘 다스려 권면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생각도 그들이 실망스럽다고 해서 같이 그들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들을 하게 된다면 결국에는 성도들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인상을 갖게 될 것이고, 그는 교회 안에서 그들과 한 몸을 이루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생각을 바꾸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상대방이 비록 허물이 많고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초신자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초신자를 다루는 방법가운데 가장 우선이 되어야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초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계속되는 죄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초신자들에게 대하여 실망을 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결국 이 죄와의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하여 매우 안도하고 있지만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될 자들입니다. 주변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자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하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원을 받았느냐?" "육신을 멸망을 당해도 영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살해도 구원을 받는 것인가?" "단번 속죄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느냐?"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은 성경의 더 많은 부분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은 자가 죄와 더불어 살아서는 않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목양자들조차도 그들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신학적인 지식들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실이 있다면 그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자연히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목양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그들이 죄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목양자만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누구나에게 부여된 명령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들이 바른 믿음 안에서 본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바로 목양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목양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만일 목양자가 성도들의 건전하지 못한 삶을 보면서 수수방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신지들이 죄에 다시 빠지는 일이 없도록 가르치십시오. 그것은 목양자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그들을 교회 밖에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초신자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인색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혹시 일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실족하거나, 혹은 교회의 일을 그르치게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일을 하지 않은채로 오랫동안 구경꾼으로만 두게 된다면 오히려 나중에는 더욱 일을 하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를 다녀가는 신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초신자들에게 대하여 일을 시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더욱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함과 동시에 주님은 그에게 은사가 동시에 주어졌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목양자는 이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은사에 맞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를 위하여 목양자가 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을 맡김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너무 비중있는 일을 맡겨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초신자치고 매우 유능해 보인다 할지라도 비중 있는 일을 맡기다보면 자칫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재정이나, 운영과 관련하여 일을 맡기다 보면 실수 하나가 교회에는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전히 마귀의 정죄에 빠질 수 있는 대상임을 기억해야합니다(딤전3:6). 그 까닭에 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 주어지게 된다면 교회는 큰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청소하는 일, 예배 안내, 앰프 시설관리, 어린 아이 돌보기 등... 봉사의 일은 하지만 문제가 되더라도 교회가 치명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는 일들을 맡긴다면 그것은 초신자들에게 매우 큰 즐거움과 더불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체로서 하나의 몸이 되어가는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숙해서 가르칠 수 있는 자들이 될 때까지 지속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십시오. 그것은 성도와 교회를 위하여 반드시 유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 9. 목회의 도움을 위한 구조 정리 목회에 무슨 구조 정리가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구조 정리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성경에 기초하여 운영이 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성경대로 교회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당연히 구조조정을 해야만 합니다. 개 교회는 교회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운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적, 환경적, 그리고 모인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그 방법을 달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기본적인 골격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기본적인 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교회는 종국적으로 큰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교회는 이 기본 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성도들의 위치를 어떻게 둘 것인가?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성도들이 분명한 교회관을 가지지 못한 적이 있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때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관에 관하여 가장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의 구경꾼으로 앉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나 성도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여지없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을 통하여 자신의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교회라면 어느 교회를 가도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매우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주님의 교회를 판단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 성도들은 서로 연합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롬12:5) 이 말은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서로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2:20,엡4:4,골3:15). 이것은 성도들이 반드시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하며, 또한 몸의 일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두 가지 속성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와 지역 교회(Local church)로 구분합니다. 우주적인 교회는 성경에 주로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로 표현되어진 교회로서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로서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휴거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교회는 성경에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The churchs of Jesus Christ)로 표현되어진 교회들로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흩어진 교회들 각자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몸에 붙어 있을 때에 진정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만일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리된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이고, 몸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제가 있다면 치유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며, 능력 있는 성도들로 양육할 수 있는 매우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하나의 몸입니다. 2) 그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장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도 명백하게 성도들이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2:6,고전7:7,벧전4:10). 이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일만을 하도록 명령되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많은 기도를 하도록 훈련합니다. 또한 전도가 습관화 된 목회자는 전도훈련에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양육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는 모든 힘을 가르치는데 쏟아 놓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균형을 잃은 교회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몸의 모양은 다양하며, 각 지체가 하는 역할도 각각 다릅니다. 만일 모든 지체들에게 같은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눈에게 물건을 들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귀에게 말하도록 하겠습니까? 아니면 발에게 어떤 사물을 보도록 훈련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러한 방법으로 훈련하고 가르치려 한다면 힘이 들뿐만 아니라 몸의 기능이 마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도와 말씀묵상, 전도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생활 속에서 습관화 시켜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병자를 일으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말씀의 지식이 있어서 훌륭한 성경 교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거리 전도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똑 같은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가진 은사(恩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목회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보다도 더욱 뛰어난 영향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은사들은 분명히 교회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당연히 그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충분히 능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3) 그들은 성숙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장을 지속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성장이 멈추는 모습들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믿음의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찰수록 교회는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한 가정이 생활 능력이 없으면서 자녀를 계속 낳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결국 다른 가정으로 양자를 보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교회가 어린 아이들로만 가득 차게 된다면 결국 그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교회 안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부 교회는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성도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최고의 목적과 목표는 단순히 그들의 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단번에 해결 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혹은 거듭났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이제 갓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그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까? 아무도 "예!"라고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나중에는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 할 때까지 그는 성장해야만 합니다. 바로 목회자가 알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어린 성도들이 장성해서 스스로 묵상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낳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도의 살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자세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성도들을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가르침의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 시대가 바른 진리 안에 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성도들을 각종 쟁점(issue)이 될만한 주제를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교회들을 봅니다. 가령 바른 성경관의 문제라든지 교회관, 그리고 구원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이 시대의 교회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고를 심고, 자신의 교회만이 바른 교회라는 인식을 심는데 주력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것이 가르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성도들을 양육하는 최종적인 목표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방법은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 것인가요? 1) 하나님을 사랑(마음, 목숨, 뜻)하도록 가르치십시오. 매우 당연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평생 예배당 한번 짓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고는 합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이 목회 하는 교회가 성장해서 큰 건물을 가지는 것을 소원으로 삼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교회의 건물을 지으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까? 아마 그러한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는 그는 필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더욱 깊은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들을 소개함으로서 그들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설계해 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일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종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거짓 목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자신들의 교회가 더욱 많은 교인들로 넘치며, 더불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겠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진정 자신이 주님께서 종으로 세워주셨음을 믿는 참 목자라면 그는 사심을 버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대하여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성도들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 두셔야만 합니다. 2)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십시오(성도들간에, 그리고 불신자들을...)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성경에 "Charity"라고 기록된 단어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Love"와는 조금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사랑을 표현할 때 쓰여지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Charity"적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데는 조건이 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사랑을 했을 때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Charity"적인 사랑이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짝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하는 사랑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도록 독려하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도 흔히 봅니다. 그것은 때로는 성도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참 목자라면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3. 교회가 할 수 있는 방법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계획도 없이 목표를 향해 간다면 그는 거의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일단 아무 일이나 시작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미 교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제자훈련(마 28:19,20) 이것은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어진 방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했었지만 결국에는 이 방법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조직이 필요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조직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무리를 두고 목회를 하는 이들의 푸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조직은 만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성도수가 약150-200명 정도라고 해서 그 이상 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억지 주장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이 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건전한 주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은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자연스럽게 조직화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제자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질서 있게 움직여야만 합니다(고전14:40,골2:5,살후3:7). 그것은 먼저 교회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또한 그 일을 위임받은 목회자(고후5:20,엡6:20)의 지도에 따라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들을 양육하지 못했다면 교회는 목회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허둥지둥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제자들을 양육했다면 일사불란하게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자 양육은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만 하는 특별한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집회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말씀 선포, 찬양, 기도...).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담이나, 교육에서 한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집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는 매주 드리는 예배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목회자가 교회의 방향과 철학, 그리고 가장 필요한 성도의 생활을 말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러 차례의 상담이나, 권면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교회를 찾을 것이며, 설교자는 그들이 문제를 만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방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일 예배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적절한 기도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더욱 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기도 문제를 나눔으로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또한 공동의 문제를 놓고 기도함으로서 서로 협력하여 문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풀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각종 기도 모임을 통하여 배워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인기 있는 모임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모임입니다. 또 하나의 모임은 특별한 집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필요한 것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반드시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정체되어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특별한 집회를 갖는 것입니다. 외부의 강사를 섭외 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체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자주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의 안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절한 집회는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3) 역할과 책임의 분담(회중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교회 안에서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목회자가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목회자는 설교와 기도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사회 생활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성도들과의 교제를 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노출시키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경험 많은 성도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상담을 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때로는 교회 안에서 많은 물질이 소요되는 일이 추진이 되었을 때, 목사보다는 성도들로 하여금 일을 맡기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들의 역할과 책임 분담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도록 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회중교회의 형태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내심의 부족으로 그러한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는 많지 못합니다. 오히려 담임 목사가 전권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때로 성도들에게 많은 불만을 만들어 내는 요인들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목사가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결국 교회의 일을 등한시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일을 맡김에 있어서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시행착오와 많은 문제점이 있게 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장래에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목사의 지시만 받는 수동적인 형태로 움직이게 된다면 교회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새로운 목사가 부임을 하게 되면 혼란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행6:4). 그리고 집사들은 구제의 일들을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십시오(행6:1-3). 그렇다면 교회의 남은 일들은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다른 성도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일들을 하 줄 알았고, 교회는 날로 성장해 갈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있는 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의 연결이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생활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경건해 보인다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절반은 실패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생활을 통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1) 가정과 교회는 구별되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를 위하여 가정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대로 가정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역의 진행을 중단 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든 틀린 답입니다. 결코 교회의 운영을 위하여 가정이 희생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가정의 문제로 교회가 주님의 일들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교회와 가정 이 둘의 관계는 서로 보호를 받아야하며, 또한 서로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면서 질서 있게 운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교회 때문에 가정이 파경을 맞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주님께서 전혀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주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지켜야할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정의 안정이 없이 교회에서 헌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불안정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오히려 교회와 가정 모두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성도들이 건강한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권면하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주님 안에서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안정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뒤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회에 헌신할 방법을 찾아내고, 또한 교회의 필요에 따라 봉사할 준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가정이 적당한 조화와 질서를 유지했을 때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은사는 삶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고전12:1-12). 그것은 사역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결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마음 속에 품어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과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은사를 지닌 성도들로 하여금 삶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에 실패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서로가 가진 은사들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성도들이 지닌 은사들에 대하여 시기하는 일조차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신보다 조금 지혜로우면 비방을 일삼고,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면 오히려 사탄적이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자세가 더욱 사탄적이고, 마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은사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사는 모든 은사를 통달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많은 문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마다 가진 은사들이 있고, 그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그러한 은사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도들이 목회자보다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기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회자로 세움을 받은 것과 은사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가진 은사들을 최대한 사역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자신들의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과연 성도들이 자신들이 지닌 은사들을 충분히 삶에서 적용하고 있습니까? 3) 교회는 그들이 생활에서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가정을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성도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성도들의 가정이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지 방치해 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들은 엄격히 보면 목회자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 답은 간단하면서도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양은 끊임없이 목자의 인도를 따라 양식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목자가 양에게 양식을 직접 먹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양식, 즉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행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예!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직접 양식을 먹이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과다 섭취로 문제가 일어나고, 때로는 영양 실조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양식에 적당한 운동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배가 고프면 먹게 될 것이고, 배가 부르면 먹는 것을 멈추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또한 그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침으로서 마치 양들을 넓은 풀밭으로 인도하는 심정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명이 있는 자들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 없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하여도 그들은 말씀을 덮어두게 될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말씀을 직접 먹이는 것이 익숙한 성도들이라면 그들이 양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목회자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목회자가 문제를 만나 사역에 소홀히 하게 될 때 굶게 될 것입니다. 물론 훌륭한 목회자를 만나면 언제나 넉넉하고 배부르게 양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성도들이 스스로 양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 모든 면에 있어서 유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시오. 그것은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5. 교회는 결코 다른 종교 단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하나의 종교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분명히 구분된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 오셨고, 또한 피로 값을 치르고 사셨으며, 또한 친히 주인이 되셔서 관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고, 성도들은 각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일반적인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방법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 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워두셨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지하고자 하는데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장차 다가 올 세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장차 주님의 뜻 아래서 통치해야만 하며, 주님은 그것을 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이 시대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뜻입니까? 가장 우선시 할 수 있는 것은 "거룩히 구별되는 것"(살전4: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들이 기독교 문화, 혹은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세상의 문화와 다름이 없고, 또한 일반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심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주님의 뜻을 외면하는 사탄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에서도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5:16-18)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초적인 생활에 있어서 기쁨, 기도, 감사는 언제나 함께 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르침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벧전2:12-15)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이방인들이 교회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그들에 대하여 순종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진리에 대한 타협이나 교회의 폐쇄 같은 명령에 대하여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통치를 함에 있어서 그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교회가 들림을 받은 이후에 그 가운데 속한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통치자로 삼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또 하나의 가르침은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벧전3:17)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고난이 따른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1:6). 그렇다면 당연히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을 살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주님의 뜻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당연히 그분의 뜻에 따라 존재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주님의 뜻이 무시된 채 사람의 생각과 의지대로 운영이 된다면 그것은 일반 사교 모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의 최종 목표는 양적인 성장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성숙과 성장에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을 가져올 수도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양적인 성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가 성장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과 성장 없이 숫자만 늘어가고 있는 교회라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세상에 있는 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서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구원과 관계없이 구제와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하여 사람만 늘여가는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에 교회로 출석은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들만을 모아 놓고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장차 천국에서 통치할 자들을 훈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않됩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안전만을 믿고,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주님의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다스릴 자들입니다. 통치할 자는 당연히 더욱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숫자적인 성장이 훌륭한 통치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기초가 든든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실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는 장차 왕이 될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얼마나 있는지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0. 목회에 있어서의 교육 목회에서 교육 분야를 제외한다면 과연 그 목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오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양한 교육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더욱 효과적인 교육을 위하여 연구하고, 끊임없이 공부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교회 교육이 세상 교육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은 기독교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그렇다며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교회가 훨씬 앞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들이 교육을 통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교육에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환경과 분위기, 성도의 구성원, 그리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칙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원칙 아래서 현실의 상황을 잘 조화시켜 성도들을 교육한다면 매우 놀라운 결과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설교와 교육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와 교육을 혼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설교하는 강단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되어지는 것은 선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설교를 듣는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가르쳐지는 교육(성경공부)은 설교와는 차이를 가집니다. 그것은 철저히 지식 전달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충분히 지식을 얻게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교육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육은 결국 설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의 설교를 절제하는 대신에 부족한 부분들은 교육을 통하여 보충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만일 어려운 주제들을 강단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이해시키고자 한다면 자연히 설교는 길어지게 될 것이고, 인내심이 없는 성도들은 지루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면 굳이 설교를 길게 할 필요도 없으며, 복잡하게 이해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명한 설교자들이 매우 단순한 내용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강단을 내려와서 각종 교육을 할 때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적인 문제나 논쟁거리들을 성도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와 교육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설교를 할 때 매우 기초적인 것들을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자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심지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설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맞춰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중심을 두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려 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들을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또한 다른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강단에서 설교를 들을 때는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돌이킬 수 있는 시간으로 삼아야 하고, 또한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잘 돌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두고 하는 것이지만 교육은 모인 사람들의 특성과 성격에 따라 차별화 시킨다는 점을 인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교육은 목회의 한 수단이다. 간혹 교회를 돌아보면 모든 운영이 교육에 맞춰져 있는 교회를 보게 됩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을 제한하려 하는 이러한 모습은 때로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교육은 분명히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는 그 외에도 전도, 봉사, 상담, 기관운영, 기도회, 찬양 등 다양한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교육 이외에 어떠한 것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자칫 기형적인 교회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기능들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성경학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성경학교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효과적인 교육을 통하여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회의 운영과 관련한 지식과 방법들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단순한 지식으로만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십시오. 책상 앞에 사람들을 앉혀 두는 것만이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현장에서 직접 실천해 보이는 것이 더욱 효과를 높여 줄 것입니다. 가령 전도에 대한 교육을 함에 있어서 몇몇 성경구절과 영접시키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서 교육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서 직접 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형태가 지식의 전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교육의 형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교육은 더욱 많은 문제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보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하여 생활 속에서 교육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입니다(골1:10).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하여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으로 멈추게 된다면 그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지식이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3. 다른 분야보다 교육은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다른 분야들은 강단의 설교를 통하여 충분히 동기를 부여하고 행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만큼은 계획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식적으로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전도나 봉사, 헌금 등은 지식과는 관계없이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교육은 어린아이에게 단단한 식물을 먹일 수 없는 것처럼 계획 없이 진행이 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습니다. 1) 주기적으로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싸움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범사에 근신하여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지 않는다면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벧전4:7). 그 일을 위해 당연히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점검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많은 목회자들이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성도들로부터 배반을 당하는 장면들을 종종 목격합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기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일까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실제로 그는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교회와 목회자의 인도를 따랐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인 경험이 없는 자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이러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마치 장식품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목회자는 당연히 교회 안에 이러한 이들이 있는지를 주기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이 목회자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속임수는 의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귀찮아질 것을 우려해서 생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주범이 마귀라는 것은 언제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영적으로 이들보다 더 뛰어난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도들의 행동을 살피고,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이 있는 자인지를 돌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2) 때로는 생활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의 변화는 성도들의 믿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직장을 잃었거나, 옮겼을 때, 상급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실패했을 때, 집 안에서 누군가 태어나거나, 사망을 했을 때 등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작은 생활의 변화는 성도들에게 매우 민감하게 작용을 합니다. 그것은 때로 위협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활에 변화가 오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해서 실족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곧 목회자의 책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그들을 안전한 믿음의 삶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유는 다양한 교육의 내용들을 통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의 변화를 겪는 성도들은 매우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될 수 잇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보다 생활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들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교육을 위해서는 책상 앞에서 연구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의 생활 속에서 변화를 보고, 적절하게 지도하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가정의 안정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교육과 가정의 안정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있는 목회자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교육이 중단되는 이유들을 보면 가정에서 그 문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린이 교육을 함에 있어서 그 부모가 교육에 관심이 없고, 교회에 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어린이 교육은 할 수 없습니다. 중고등 학생에 대해서도 자녀들이 신앙 교육보다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면 역시 학생들의 교육은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장년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각종 성경 공부에 참석하여 교육을 받는 것은 서로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각 가정에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배우고 싶은 사람만 오라는 식의 교육 방식으로는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가정이 교육의 환경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며, 스스로 직접 방문하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경로들을 통하여 그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충분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 교육을 통해서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교육은 말 그대로 다양한 지식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전체 흐름을 주도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교육이 없다면 성도들은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 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교육은 성도들로 하여금 단단한 식물(말씀)을 먹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1) 강단에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가령 올바른 교회사, 바른 성경의 역사, 그리고 교파연구, 이단 종교, 상담, 전도의 방법적인 것들은 강단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효과적인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을 담임목회자의 설교 강단이 아닌 교육 현장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비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고 듣는 이들도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설교를 하는 중간에 다른 종교의 이단성에 대하여 설명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설교의 전체 주제보다는 그들의 이단성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많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고, 때로는 공격을 당한 종교 단체로부터 공식적인 항의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이단 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설교를 듣고 있다면 그들은 그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 교회를 떠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민한 문제를 한정된 시간 안에 마쳐야만 하는 설교를 통하여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들이 교육을 통하여 가르쳐진다면 그렇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시간의 제한을 두지 않고,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배우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육은 어려운 주제, 논쟁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다루어 주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성숙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다양한 운영 방법에 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운영은 목회자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일들을 감당할만한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준비되어진 일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훈련이 되어져야만 하고, 그 일들을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날 때부터 뛰어난 지도자는 없습니다. 날 때부터 뛰어난 교육자도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충분히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 일들을 위해 많은 시간도 투자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채 일을 시작하기를 원하고, 또한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나 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운영을 배움으로서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교육들을 통한 훈련은 반드시 교회가 견고하게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운영에 관한 것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교회 운영이 세상에서 운영하는 방법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일반적인 경영원리를 가지고 운영하지만 교회는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에 따라 운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사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담임 목회자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영은 장차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성경적인 원리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일꾼들을 양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목회자의 목회 방향을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목회자의 목회 방향과 관련하여 혼선을 빗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성도들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목회 방향을 잡아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담임 목회자의 비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비전이 성도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때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비전이 크지만 성도들의 비전은 작다면 목회자는 매우 답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눈에 욕심이 많은 목회자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흔치는 않지만 반대로 목회자의 비전은 작은데 성도들의 비전이 크다면 목회자는 때로 옹졸하게 보여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영향력과 비전에 따라서 무리를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부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계속해서 문제를 낳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교육은 바로 목회자의 비전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공부만을 교육의 범위로 한정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목회자의 간증과 더불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달하게 된다면 그들은 더욱 효과적으로 목회자의 사역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주님을 향한 계획들을 계속적으로 성도들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5. 교육을 위한 조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조직은 교육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직은 지도자를 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조직이 없다면 결코 지도자는 양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절한 조직은 성도들의 사역을 위해서도 엄청난 능력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한 곳에 모아 두고 교육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조직은 성도들이 단계를 밟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1) 조직은 좋은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교회 내에서 작은 조직들은 지도자 훈련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를 양성함에 있어서 경험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각 교육 기관들의 지도자들을 세움으로서 그들이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육할 대상들을 관리하고, 효과적인 운영 방법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을 키워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시행착오에 대하여 두려워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훌륭한 지도자는 시행착오 속에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혀 실패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다음 기회에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치명적인 실수가 없는 한 목회자는 그들을 잘 감싸주고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가장 큰 교육의 목표를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조직은 성도들이 단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는 다양한 모임들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성별, 신앙의 정도에 따라 모임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한 모임들은 결국 성도들이 단계적으로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하루 아침에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듯이 믿음도 거듭났다 할지라도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것이며, 이것은 조직은 그들이 적당한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대학원)를 거쳐 사회에 나가 스스로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결국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사회의 일원이 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조직은 이러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들을 공급하고, 후에 스스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조직은 단계적인 성장을 함에 있어서 매우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모아두고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듯이 교회에서도 모두를 모아두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3)조직은 교육이 균형 있게 가르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때 하는 고민거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적당한 조직을 갖게 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당연히 그들의 신앙의 수준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수준에 맞는 교육 과목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적절한 교육은 그들이 군형 있게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미적분과 같은 수학 과목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만 숫자의 개념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장성해서 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요구받게 되면 그들은 이보다 더 어려운 것들도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과외를 해서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은 그들이 더욱 훌륭한 지식을 얻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균형있는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을 위하여 조직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 11. 사역자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 대부분의 교회들은 사역자의 영향력에 의해 운영이 되고, 또한 움직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항들을 직접 결정하기도 하며, 재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들은 오히려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기형적인 교회의 형태를 갖추도록 한 것이 사실입니다. 회원이 많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교회 안에서 사역자가 이러한 모습을 가질 때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미자립 교회에서는 많은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도 바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자가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한다면 자연히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은 전임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기형적인 교회로 가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목회자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목회자가 교회의 도움 없이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사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어려워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분들은 이미 주님께 헌신을 했고, 또한 매우 유능한 목회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고,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많은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매우 한가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목양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보다는 각종 취미와 오락에 더 관심이 많은 자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목회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능히 목회자들이 매우 한가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한가한 시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던 목양의 일을 대신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는 말의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신32:10,시17:8) 아는 바와 같이 눈동자는 조금이라도 부주의하게 다루면 크게 손상을 입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되면 몸에 치명적인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소중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이와 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양의 일이 아닌 다른 일로 바쁘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돌아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의 사역에 협조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히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가 가르치는 것에 불만을 갖기도 합니다. 또한 목회자가 여유롭게 사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기도 하며, 가르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그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서 목회자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교회의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유능한 목회자의 힘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충분하게 사역의 모든 부분을 지원함으로서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2. 목회자의 설교가 날카롭다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회자의 설교가 날카롭다구요? 분명히 그 목회자는 유능한 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검(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엡6:17,히4:12) 만일 검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잇겠습니까? 검은 날카로웠을 때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향해 전해질 때 만일 아픔을 느끼고, 마음 곳곳이 말씀에 의하여 잘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그 목회자는 분명히 유능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갈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는 두 종류의 거짓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성도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계속 말함으로서 귀를 즐겁게 하는 자이며,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잣대를 사용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결국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여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역자라면 당연히 성도들이 듣기에 날카로운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이 설교자의 말씀이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분들에 대하여 나는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회중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질 만한 말씀이 주어졌다면 그는 매우 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자에게 제한을 두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성도들은 설교자에게 와서 이러이러한 설교는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자와 교회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에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기형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는 일은 당연히 사역자에게 일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신실한 사역자는 기도할 것이고,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교회에 유익한 것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전하는 진리가 변질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대 교회 안에서 변질된 많은 교회들을 봅니다. 그들은 매우 신실하게 시작을 했으며,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아닌 기업과 같은 집단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교회의 운영이 변하는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오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으므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진리가 변질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진리가 변해가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목회자에 의해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 진리의 변질은 성도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갑작스러운 교회의 성장은 성도들에 의해서 목회자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성경보다도 목회자를 더욱 신뢰하는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비 진리를 말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성도는 목회자에게 비 진리를 요구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가령 오늘날 교회들이 점차 카톨릭화 되어가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각종 의식을 교회 안에 정착시키고, 절기들을 지키고, 심지어 교회들이 교단화되면서 목회자로 하여금 명예를 얻도록 수십 억의 돈을 주면서 눈을 멀게하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일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회 단체에 기부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름을 높이려는 행동들이 누구에 의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오히려 목회자들이 한다고 말하더라도 말려야 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성도들은 목회자를 협박해서라도 그러한 변질된 진리들에 대하여 교회 안에 정착시키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목회자들이 바른 진리를 가르치려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들을 봅니다. 가령 종전의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웠는데(이것은 한국교회에서만 있는 것임), 목회자가 성경적으로 옳지 못함을 발견하고 외우지 말도록 가르쳤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많은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절반 이상의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항의를 하고 관철되지 않자 교회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한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까? 그들은 목회자가 전하는 진리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핍박을 면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목회자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고수하려는 소수의 무리들은 언제나 핍박을 받아왔지만 그들은 스스로 넓은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은 때때로 목회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결국 바른 진리를 교회 안에서 가르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예를 봅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는 약 100년 동안 개역 성경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내용상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한국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 성경에 기초해서 교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훌륭한 신학자들이 배출이 되고, 또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성경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급기야 바른 성경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성경을 쓰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다른 많은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바른 성경을 사용했을 때,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교리들이 많은 허점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혹시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겁 많은 목회자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그는 바른 진리를 가르쳐야할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이는 만일 잘 못된 진리를 가르쳤다면 바로 잡아야 할 책임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목회자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면 현재의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목회자가 계속해서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목회자를 겁쟁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진리를 말해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그 일을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막고 있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4. 성도들은 사역자의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과로로 인하여 병원에 누워 있는 목회자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유능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를 섬기는 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누워 있는 동안에는 성도들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종종 과로로 인하여 사역을 중단하는 목회자들도 봅니다. 물론 그들은 매우 유능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쓰러진 것은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주님 편에서도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당연히 성도들로 인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둔한 목회자라도 자신의 취미 생활과 오락을 하면서 피로해 하고 쓰러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잦은 심방과 상담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에게 많은 문제들이 발생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들을 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게 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목회자를 위하여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목회자의 시간을 빼앗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세월이 흐르면 영적으로 오히려 힘이 없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감당해 왔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요5:39), 기도할 시간(행6:4)을 가지지 못함으로서 자연히 자신의 경험에 설교를 의존하게 되고,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민감해 짐으로서 바른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만족할 만한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도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탓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바로 성도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시간들을 빼앗음으로서 목회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더욱 많은 시간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5. 사역자가 생계비로 인해 염려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목회자의 일을 했던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하고, 또한 많은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고후11:9).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하여 그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결코 자비량 목회를 권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고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이중의 부담을 지우는 것이므로 신실한 목회를 원하는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목회자의 생계 문제에 대하여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터로 나가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이 목양의 일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러한 것이 성도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발생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의 생계비가 자신들의 생활과 무관한 것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원리만을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비를 쪼개어 제사장 지파인 레위사람들의 생계를 뒷바라지 했습니다. 12지파가 1/10을 드렸고, 또한 각종 드려진 헌물들을 그들이 먹도록 배려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또한 섬기는 자들이 최소한 생계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입니다. 물론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목회하는 자들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집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가당치 않은 주장입니다. 주님은 분명하게도 교회 안에 섬기는 자들을 두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일에 전념하도록 그분의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도들은 그들의 생계를 뒷받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일에 대하여 성도들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고전9:4-12). 주님의 일을 맡은 목회자에게 책임이 부여된 것이라면 그가 섬기고 있는 성도들 역시 동일한 책임이 부여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목회자의 생계를 돌봐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이며, 또한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는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6. 교회는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를 존경하며 그들을 따릅니다. 그들이 목회자를 따르는 방법은 비록 다르지만 그들이 목회자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신앙적으로도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를 따름에 있어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것들을 선물하고, 그들의 생활을 도우며, 그들이 사역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잇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도움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행12:5).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잇는 유일한 것이자, 베드로를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천사의 손에 의하여 감옥에서 나왔고, 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각 교회를 향해 보내는 서신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왜 이처럼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먼저 목회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만일 그가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게 된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바로 영적 침체에서 건져낼 수 있는 중요한 무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매사에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도하는 자가 목회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목회자가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공급함으로서 사역의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역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전혀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 바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세워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임을 언제나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 12.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 - 헌신 나는 가끔 노련한 목회자나 선교사들에게 묻습니다. 목회자, 혹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나는 당연히 그분들을 통해서 어떠한 방법에 대하여 듣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모두 동일한 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환경, 물질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사가 반드시 뛰어난 언어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헌신이라는 무기의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많은 물질이 더욱 많은 이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고 그들을 복음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결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물질도 헌신하고자 하는 자의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헌신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 헌신은 단순히 전임사역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재 전임사역을 하고 있다고 진정 “헌신”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라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역을 하나의 직업으로서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에 대하여 삯군 목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참 목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요10:1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헌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양된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가장 모범적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을 목사, 혹은 목자(Pastor)로 호칭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예수님 사역의 뒤를 잇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목회자들도 성도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목사라는 명함을 들고, 전임사역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오직 목회만을 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이 엄청난 명예를 가진 것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명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헌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깨닫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안디옥으로부터 복음전도자로 파송이 된 후에 그는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고후11:23-27).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오히려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자신이 사역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또한 그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민을 보십시오. 그는 오히려 사역자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 앞에서 제대로 헌신된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목회자! 그는 주님 앞에서 아무런 오히려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역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헌신된 사역자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헌신은 결코 무작정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약을 제조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가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칭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헌신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의 부지런함과 열심만을 가지고 진정한 헌신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부지런하고 매우 성실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은 목양의 일을 하는 자로서 바르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세상적으로 무능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바른 진리 안에서 행동한다면 그는 분명히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열심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자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매우 게을러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무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분리주의자로 인식이 되어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헌신의 기준은 바른 진리 위에 있어서 그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무작정 씨를 뿌린다고 열매를 맺지는 않습니다. 헌신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일하는 것이 주님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미없는 헌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열심만으로 우리가 헌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진리 위에 우리의 헌신을 더 할 수 있는 자세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헌신의 의미는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주님의 일을 위해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신이라는 용어가 결코 목회자들에게만 국한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헌신할 수 있는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결코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교회의 지도자라면 결코 그렇게 되도록 힘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가 가진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 더욱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헌신을 매우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의 방향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가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유능한 성도가 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은 목회자가 얼마나 자신이 가진 은사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에 평가기준을 두신 것이지 자신이 가지지도 못한 것을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을 보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므나의 비유(눅19:13-24)와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몫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자신의 몫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제 것인 것처럼 사용하고 열매를 맺으려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헌신은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목회자로서 가진 은사가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주님께 드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교회 내에서 심각한 열등감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칫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한달란트 받은 자나 한 므나를 받은 자가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악한 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일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는 기준은 그들이 가진 것이 과연 주님께 과연 주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인가를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자가 많은 재물을 드리는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이 렙돈, 즉 한 고드란트 드리는 것을 더욱 가치 있게 생각하셨습니다(막12:42,눅21:2). 누가 헌신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몸이 약해도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를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4. 헌신은 흉내 내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목회자를 위한 많은 세미나들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그곳으로 가는 목적은 한가지 입니다. 보다 주님께 효과적인 헌신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사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헌신하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그들에게 동일한 방법의 헌신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기도, 말씀, 찬양, 봉사, 구제 등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며 목회자들로 하여금 만능이 되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목양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만능이 되고자 합니다. 그들은 성공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성공한 이를 만나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헌신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이 발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 물구나무 서서 걸어 다닌다고 합시다. 그는 분명히 많은 땀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지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동안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게 걸어다닌다 할지라도 두발로 걸어다니는 것보다 자연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 아무리 잘 연습을 해도 두 발로 열심히 뛰고 훈련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결코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바로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으로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치 두 손으로 걸어 다니려고 애쓰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반드시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은사(선물)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의 지체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덜 중요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기능들을 흉내내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왜냐하면 몸의 지체들이 자신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이상적인 몸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곳에서 능력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은사들을 흉내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몸, 즉 교회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작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분명히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작고 약한 부분일수록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고전12:22-23,약3:5). 그것은 때로 노력한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눈이 좋아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또한 입이 커집니까? 아니면 코가 커집니까? 물론 수술을 하면 좋아질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욱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될 것입니다. 헌신을 흉내 내는 것은 바로 이렇게 수술을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역할과 관계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드려져야 합니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그리고 남이 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가진 은사들을 주님을 위해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과 동일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전에 먼저 주님께서 내게 어떠한 은사(선물)들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어떻게 쓰셨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동일하게 쓰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흉내 내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그는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5. 헌신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소유의 개념부터 다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 문제에 스스로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헌신했다는 자들이 재산의 문제를 놓고 분쟁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물질을 보상하지 않으면 사역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들도 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을 진정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결코 헌신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소유의 개념부터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넘기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창14:22), 통치하시고 계십니다(계1:5). 이 세상에서는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을 만드신 후에 그들에게 모든 것들을 맡기셨습니다(창1:27-28). 그들은 모든 것을 다스렸고, 그 안에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넘겨주었습니다. 사탄의 일시적인 지배 아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다스려야 할 자리를 빼앗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값을 지불하심으로서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막10:45). 누구든지 그분을 믿지만 하면 그분으로부터 소유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이 땅의 것들을 우리의 소유로 삼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장차 불 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땅에 대 환난이 있은 후 천년 왕국 시대에 보상으로 이 땅을 통치하도록 할 것이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될 때에(계21:1)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상속으로 땅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14:8). 우리가 주님의 소유임을 보다 분명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유지시키고 계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그분이 처음 만드신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지금도 세상을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인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벧후3:9).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헌신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유를 주장하는 순간 주님은 그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헌신된 자들은 결코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아는 자이고, 또한 헌신한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의 소유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전히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헌신한 자가 아닙니다. 헌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소유는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6. 헌신의 동기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만일 사람을 보고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면 그는 곧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하는 대상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헌신의 동기 또한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각종 집회나, 담임 목회자의 상담 등을 통해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권유나 아니면 스스로 판단해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주님의 일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모든 민족마다 무속인(무당)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세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배워서 무속인인 된 학습무, 부모의 대를 이어 무속인이 된 세습무, 악한 영이 그 사람의 속에 들어가 무속인이 된 강신무가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무속인(무당)입니까? 당연히 강신무입니다. 사실상 학습무와 세습무는 가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세 종류의 목회자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에서 열심히 배워 목회자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버지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자신도 목회자가 되어 아버지의 목회를 세습합니다. 과연 이들을 진정한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정한 목회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주님에 의해 세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누가 부르셨습니까?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요? 물론 주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어떻습니까? 모세, 엘리야, 다윗...등 모든 자들이 주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헌신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배워서 목회의 일을 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목격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목회를 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것을 변론하려 한다면 그는 분명히 삯군 목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많은 것을 배웠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가짜 입니다. 헌신은 분명히 이러한 부르심으로부터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르심도 없는 자가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목회자로 헌신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연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헌신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당신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 13. 이방에 전해야할 복음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 그를 내 속에 나타내거늘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6-17)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변을 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혈육은 언제나 인정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의 일에 대하여 분별력을 잃게 되고,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가난하고, 병이 들 때도 있으며, 매맞을 때도 있고, 감옥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에 혈육과 의논해서 이 일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가족이 험한 길을 간다고 한다면 만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울은 혈육과의 의논을 피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대학)교에 입학해서 훌륭한 목회자들로부터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방식은 오히려 많은 분열을 낳았고, 많은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수없이 쏟아지는 신학(대학)생들을 통하여 복음이 확장 되어지기 보다는 더 많은 교회, 교파, 교단을 낳고 있으며 수많은 이단 종파의 교주들을 만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할지라도 훌륭한 전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요한 외에는 모두 달아났고 부인하기도 했으며, 바울 역시 감옥에 있을 때 많은 동역자들이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역은 아무런 의미기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지혜, 지식,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증거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고 그곳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그의 평생을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다가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오직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마음을 품고, 그의 능력을 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아 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