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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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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역할 것인가 - 1 부 (이진천 목사)
lhyunsik

1.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서론] 나는 자주 사역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어떻게 사역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 때마다 많은 대답들을 해 주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그들은 또 다시 물어오곤 합니다. 사실상 사역의 주체이자 주관자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사소한 것까지 "이것만이 정석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분의 사역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목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 고침과 각종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이 주를 이루었던 초대교회의 모습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변론으로 교회를 세워갔던 바울의 초기 전도여행 때를 돌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각종 이단들에 대하여 경계하고 싸울 것을 권면했던 초대교회의 말기 상황의 모습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 당시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 의외로 많은 이들은 복음의 다양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병 고치는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 변론하는 것을 죄악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스스로 지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 온 각종 누룩들에 대하여 둔감하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사역자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해 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들은 때때로 주님의 일들을 방해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성경보다 칼빈이나 웨슬레의 신학적 사고를 더욱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건전한 신앙을 보장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건전한 교회관, 성경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언제(날짜와 시간) 구원받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변화시킨 말씀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의 시간과 성경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고정관념은 결국 구원의 시간과 성경을 기억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교리까지 만들어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베드로처럼 닭이 울 때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바울과 같이 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디오피아의 내시와 같이 성경을 읽다가 깨닫지 못할 때 빌립과 같은 이들이 와서 성경을 풀어 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을 하다가 주님을 영접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다가, 또 어떤 이들은 무심코 걸어가다가 주님을 영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이 같은 다양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사역자가 스스로 이 같은 복음의 다양한 사역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스스로 큰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오히려 큰 저해요인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보편적인 사역의 기준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역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다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준들을 무시하고 사역을 시작한다면 그분 분명히 많은 난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올바르게 목양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많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위하여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바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펼쳐질 내용들을 통하여 사역에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지도자의 기본적 자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음이니(디모데전서1:12) 한 해에도 수천, 혹은 수만의 사역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학교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사역자들을 배출해 내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광고를 하고 자신들의 신학교로 와 줄 것을 홍보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름에 화답하듯이 입학을 하고 열심히 사역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모두 사역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역자가 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은 직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앞으로의 사역들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들이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를 종교라는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오히려 복음의 빛을 가리우는 일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결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잘 못된 소명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1. 지도자의 소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오늘날의 사역자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은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역자의 자격을 논함에 있어서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어느 교단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사람들은 자신의 지명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해서 가짜 학위라도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신학교를 대상으로 돈을 주고 사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과연 사역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이처럼 명문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교단에 속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사역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이러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선지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왕하9:1). 그리고 엘리야가 그의 생도였던 엘리사에게 그 사역을 위임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지도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을 전혀 부인할 수만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훈련도 필요하고, 자질도 있어야 하고, 많은 지식과 경험도 필요하겠지만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적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사역자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관한 말씀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합니다. 분명히 그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과거에 지도자로서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고, 자신들의 민족의 문제에 관여하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집트로부터 도망을 해야했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목자로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가 이집트의 왕궁에서 최고의 학문과 지도력을 훈련받았다 할지라도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했을 때에 그를 쓰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그가 목자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이집트에서의 일들을 거의 잊어갈 무렵 80이라는 나이에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늙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주님에게 항변을 해보지만 주님은 그를 쓰셨고, 그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건져내는 위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일컬음을 얻었던 "다윗"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버린 사울을 대신하여 왕을 세울 자를 기름을 붓는다고 그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분명히 그 집에는 훌륭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매우 늠름하고 용모가 수려했던 엘리압, 그리고 아비나답, 삼마 등 일곱 아들이 모두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름을 붓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지도 않고 양을 지키고 있었던 다윗을 불러 기름을 붓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았던 것입니다(삼상16:7). 그렇다면 신약시대에는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스스로 제자가 되기를 원해서 제자가 된 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에게 얼마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했고, 수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신앙을 보이려고 했으며, 심지어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면 자신도 따라 죽겠다고 말했던 자였습니다(마26:35).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조차도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를 하면서 배반하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오랜 시간동안 주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은 쓰임을 받을 수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 앞에 회개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자 오순절날 성령이 그에게 임했을 때 비로소 그는 사역자로서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사역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곁에 있었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비록 3년 반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사역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역자는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소명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을 만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음이니"(디모데전서1:1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서신서들의 첫 머리에 그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가 사역자의 조건을 세상 학문의 배경에 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답해 주어야만 합니다. "소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역대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았던 자들 가운데 과연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킬만한 자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아마도 우리의 기준에서 사역자를 평가하려 한다면 우리는 스펄젼, 무디, 존 번연과 같은 분들의 책을 버리고, 또한 사역자로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단 한번도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2. 지도자는 성도의 인격에 대하여 간섭이 아닌 인도를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개역 성경에서 "양무리를 치라"(벧전5:2, 요21:16)는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한국 교회 안에서 무서운 누룩으로 발전되어진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지도자가 군림하는, 즉 다스리는 형태로 발전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먹이라"(feed)는 말씀으로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지도자들이 양무리들을 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무리를 치는 것은 오직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의 역할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목자였던 아벨과 다윗, 그리고 모세에 대하여 양을 지키는 자(keeper)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목자는 예수님이시고(요10:11,14), 지도자라는 것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는 자 즉 청지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위임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소유인 성도들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까? 마치 교회의 소유가 목사나 성도들의 것이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 서로 다스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 못된 성경이 가져다 준 누룩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행동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성도들에 대하여 결코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본을 보이고 앞서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벧전5:3). 이러한 지도자가 되어 있을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지도자는 거짓 진리에 대하여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사역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역시 거짓진리를 분별해 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나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여전히 교회를 위협하고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에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이 참된 것처럼, 참된 것이 거짓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수많은 증거들을 통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전통과 유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지극히 사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교묘하게도 사탄적인 전통과 유전들을 참된 것으로 위장하고 오히려 참 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태양신 바알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둔갑시키고, 이집트 여신 이스터의 축제일을 부활절로 둔갑시켜 숭배하도록 만들고, 바벨탑의 영향을 받아 세운 종탑들을 교회마다 세우게 하고, 고대로부터 저주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십자가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들이 바뀌어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지도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거짓 진리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지도자가 우유부단한 자세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가운데 성도들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결국 사탄의 노리개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주는 자입니다(요10:11). 물론 이것이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목양을 일을 하는 지도자들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짓 진리에 대하여 관용을 베푼다면 우리의 양들은 모두 이리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도자는 거짓진리에 대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가지 방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지도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더욱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구경꾼 신자들을 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에 나와 말씀을 듣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지도자는 그들이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격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히5:13,14),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서게 될 날들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만 받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도자라고 말하는 이들조차도 이러한 방법으로 가르침으로서 그들이 더 이상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의 필요에 의해 움직일 것만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성도들을 더 이상 꼭뚜각시가 되도록 해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하는 브끄러움과 수치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선물 gift)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가 주어졌다고 말하고 교회 안에 누구도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역할은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분별하여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획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도들을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교회는 모두가 같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자들이 모여서 서로 함 몸을 이루는 것이 참다운 교회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입니다. 지도자는 이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지도자의 지도력(영향력)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이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본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을 통하여 실패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그 중에 대표적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였지만 결국 왕이 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자입니다. 기드온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어 용사 300명으로 십 삼만 오 천명을 이긴 자였지만 그의 나태함(삿8:27)은 결국 그의 아들 70명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상황으로 치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결코 나태한 마음을 가져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결국 패망으로 치닫게 만들 것입니다. 나의 행동 하나가 곧 교회와 성도들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언제나 근신하는 자세가 없다면 그는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6. 지도자에게 있어서 고난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겪어지는 일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훌륭한 지도자가 된 자가 있을까요? 저는 주저 없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지도자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상황을 넘겨보지 않은 사람이 위기의 상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건져낼 수 있을까요? 어찌 병들어 보지도 않은 사람이 병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비록 인생에 있어서 매우 쓴 것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40년의 미디안 광야에서의 세월이 없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다윗에게 사울의 의해 쫓겨다니던 시절이 없이 그의 위대함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통곡이 없이 그가 주님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매와 투옥을 경험했다는 바울이 그러한 과정 없이 그의 위대한 서신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밧모 섬에 유배되어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보내진 요한의 서신은 어떤가요? 우리는 지도자가 당하는 고난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에 의해 의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고전10:13).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과정에 차여할 준비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 된 지도자는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저마다 자신이야말로 참된 지도자라고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 된 지도자는 오직 주님에게 속한 자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충성스러운 자가 참 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의 의해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 교회를 세우기 위한 준비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 1:23) 오늘날 우리는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있는 교회당의 종탑들을 보면서 과연 모든 교회들이 주님의 교회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 주님의 교회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토록 교회가 많은데 과연 또 다시 교회를 시작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세상의 사람들이 남녀가 만나 모두 결혼을 하는데 나도 결혼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다양한 형태의 교회를 세우심으로서 그분의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교회 안에 거대한 집단으로 모여서 예배한 흔적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령 베드로가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3,000 혹은 5,000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침례를 받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그 장소에서 말씀을 들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흩어져서 가정의 형태를 이루었고, 그 교회들은 소수의 집단 형태로 발전해 나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모습은 오래 전부터 카톨릭이 사용한 방법들로서 교회가 성전, 즉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예배당을 지어 많은 이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이 루터 이후 개신교에서도 그대로 답습하여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순수한 교회들은 그들만의 예배당을 가졌던 흔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지하 무덤(카타콤)에서, 혹은 핍박을 피해 산 속에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결코 외형적으로 드러난 교회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주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가령 성도의 수가 많아지면 가정에서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빌딩을 얻어 모이게 되는 것이고, 더 많아지면 땅을 사서 넉넉한 공간을 가짐으로서 모임을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적당한 수준에서 지역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들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에서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자. 1. 교회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필요에 따라 세워집니다. 우리는 이미 앞서서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필요에 의해 사역자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갈망하면서도 아직 마땅히 예배할 처소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교회를 세우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상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분의 결정에 따라 세우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교회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파에 속한 교회들은 그들에게 목사 안수의 조건으로 교회 개척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는 시작했지만 전혀 주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이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에는 사역을 포기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것같이 하라(에베소서5:24,25)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편이 아내 될 자를 선택할 때 아무런 기준도 없이 여자이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아내를 고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자신을 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으로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시작되고 또한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 교회의 형태는 완전한 몸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집단 공동체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며 교제하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교회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가 곧 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2:12-21). 이 말은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시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나신 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친히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골로새서1:18) 성경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구조가 몸의 일부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팔, 다리, 때로는 전신마비이거나 혹은 식물인간의 상태에서도 사람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머리가 죽으면 몸도 자연히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관련하여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곳을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머리가 없는 사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저마다 모인 사람의 수를 자랑하고, 헌금액수를 뽐내며, 교회의 규모들을 드러내려 하지만 실상 그것들은 자랑할만한 것들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몸의 모든 요소들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교회의 규모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모두 동일한 기준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단 두 사람이 모여 예배를 하든지, 아니면 수십만 명이 모여 예배를 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성공적인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로 분류되는 것이지 주님은 결코 그러한 생각조차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의 공급하는 것을 받아 서로 꼭 맞게 결합되고 들어차서 각 부분의 분량대로 효력 있게 일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주느니라(에베소서4:16) 또 우리가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이기 때문이라(에베소서5:30) 주님은 교회를 설명하심에 있어서 사람의 몸으로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몸은 독립적디면서도 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한 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같은 교리, 같은 성경,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교제를 하고 정다운 친구가 되어도 우리는 그들을 같은 몸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전도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졌으니 한 교회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바벨탑도 바로 이러한 거짓 교리의 바탕 위에 지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은 종교인들을 모아 두고 다시 바벨탑을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몸의 역할이 모두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몸이 모두 동일한 기능만을 가지고 일한다면 몸으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 손이면 어떻겠습니까? 모두 발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눈, 아니면 입...아마도 모두가 같다면 그는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고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ㅇ든 교회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 개개인이 주어진 은사에 따라 적절하게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목회자의 특성에 맞게 교회를 운영해 가려는 것을 볼 수 잇습니다. 다시 말하면 획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교회를 기형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특성은 다양성에 있습니다. 몸의 지체가 각기 다른 기능들을 수행하듯이 교회는 성도들 개개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다양함을 놓치고 만다면 결국 정상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매우 조급하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른이 되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잉태되어 세상에 나와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과제는 얼마나 신실한 교회로 성장해 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빨리 성장해서 비대해 지는 것이 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많이 앓아가면서 성장해 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앓아가면서 자라듯이 교회는 많은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주변의 신실한 교회를 보십시오. 힘겨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교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많은 핍박과 환난, 그리고 스스로의 아픔들을 이겨내면서 정금 같이 단련된 모습으로 성장을 거듭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충분한 기도의 시간은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 그 준비과정이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를 들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과연 주님의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행 1:14).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시작과 관련하여 빌립보 교회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기도 처소를 찾다가 기도하는 여인들을 만나게 됩니다(행16:13). 그곳에서 바울은 전도를 하게 되고 루디아라는 여인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도 신실한 교회로 인식이 될 만큼 아름답게 성장해 갔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작업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서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좋은 지역은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복음만 전할 수 있다면 지역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분들을 통하여 같은 복음을 전하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왔던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언제나 효과적인 사역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누구보다도 실패를 많이 했던 전도자라고 할 수 잇습니다. 특히 아테네에서의 전도는 그를 매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행17;32,33). 그는 당시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던 아테네에서 많은 사람들과 변론을 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또한 많은 이들이 믿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다른 신들 가운데 한 분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결국 물질은 다 탕진하고, 육신은 지쳐서 고린도로 내려갔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자비량 사역에 대하여 말하면서 고린도에서의 일들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가 아테네에서 모든 여비를 소비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머물고 있었던 고린도는 사실상 매우 부패되고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어찌보면 바울의 인격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놀라운 결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전도 방법을 말하는 이유는 실제로 좋은 장소라고 하는 것은 좋은 문화 배경이나 위치를 말하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좋은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많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이 교회를 개척하는 장소로 신도시를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초신자들이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볼 때 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님 앞에서 얼마나 큰 상을 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교회를 시작하려 한다면 좀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6. 지역 교회로서의 특성을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역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그 지역의 특성을 잘 파악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교회가 해야할 일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효과적으로 접근함으로서 복음의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복음적인 교회들이 세상 종교보다 성장을 하지 못하는 요인은 바로 이러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 차원에서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라 보다 지혜로운 복음 전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이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교회가 가진 특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한다고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마다 독특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은사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모든 지혜를 모아야만 합니다. 7. 협력을 얻을 자들과 교회들을 파악하고 협조를 구하십시오 대부분의 독립교회들은 다른 교회들과 협력을 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교회가 변질이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감독하는 목양자가 배도하는 일이 없다면 교회는 안전합니다. 어차피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주는 양식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간에 협력은 사실상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회를 진리 안에서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모델을 삼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주님은 모델을 삼은 교회와 동일한 교회를 세우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도 자녀가 똑같이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비슷하게는 자라겠지만... 서로 협력을 하는 교회가 있다면 다양한 방면에서 서로의 교회가 부족한 것들을 보충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해 가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를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면 동역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사역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고 당장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내가 사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그 때부터 동역자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어떠한 교회를 시작하게 될지를 의논하십시오. 그렇다면 반드시 훌륭한 모델이 될만한 교회로 성장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결코 이론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어떠한 틀에 맞추어 운영하려 한다면 혼란만이 가중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주님의 소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그분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 3. 목회자와 가정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한 가족의 모습은 교회의 미래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를 다룸에 있어서 가정의 위치를 따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는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금도 많은 목회자들의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고 있으며, 심지어 목회를 중단해야만 하는 사태에 놓이게 된 가정이 부지기수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 것이며,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디모데전서 3:2-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에 관한 서신을 쓰면서 가정과 관련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디모데는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둔 목회자인 것이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에베소 사람들의 교회에 첫 감독으로 부임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감독이 되기 위한 가정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한 아내의 남편 바울은 첫 번째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규칙을 무시하고 사역을 합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 안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생활을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한 생활의 모습들은 때때로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일들이 사라졌고, 바울이 디모데를 통하여 감독의 직분, 혹은 집사의 직분을 맡은 사역자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왜 바울은 이처럼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가정의 안정만을 생각해서 써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남편을 예수님으로 비유합니다. 더불어 아내는 교회로 비유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듯이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회자(감독)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은 상징적으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11:3)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기 때문이니 그분은 그 몸의 구원자시니라(에베소서5:23) 이것은 목회자의 또 다른 사역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목회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 사역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사역자가 하는 일들이 결코 그러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사역자의 자질은 결코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베드로전서5:1-3) 목회자의 삶이 본이 될 수 없다면 그가 전하는 말씀이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탁월한 모습만큼이나 가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아내와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과 같은 이치로 설명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버리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심으로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배반하시지 않습니다. 영원히 안전하게 신부가 될 주님의 교회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과 관련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의 아내가 될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들과 매우 관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이 되어야 할 목회자가 이러한 기본적인 간증이 포함된 가정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성도들을 인도할 명분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들이 이혼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 동성연애자까지도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누구에게나 맡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계획과 뜻을 알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온전한 가정은 필수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2.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 왜 이러한 조건들을 바울은 목회자(감독)의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목사는 많은 영적 자녀들을 낳는 자들입니다. 자녀에게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곧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가정의 자녀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많은 영적 자녀로부터도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존경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자라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능력 있게 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누가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할까요? 가정의 자녀들은 목회자의 생활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이미 한 몸으로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자녀는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그가 부모를 보는 입장은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부모가 자녀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항을 하고 불만을 털어놓는 일이 허다한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을까요? 그것은 자녀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녀들에게 목양하는 일을 이해시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대답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목양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녀들로부터 협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변의 많은 분들이 목양의 일들을 자녀들에게 숨기려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것은 대부분 가난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환경이 좋아져서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목회자의 가정은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일 부모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난과 수치스러운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자녀들 역시 그 일들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주님으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자녀들에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로 인하여 교회의 재산을 가로채는 목회자들의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이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를 남들보다 더 낫게 키우려다 보니 많은 돈이 들어가고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어쩔 수 없이 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존경을 받는 목회자의 자녀들은 결코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보내고, 유학까지 시킨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자녀를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성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없이는 결코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3. 교회인가? 가정인가?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언젠가 저의 동료 목사 한 분이 이러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언변은 많은 회중들을 사로잡았고, 그의 지식 또한 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약 5년이라는 기간에 걸쳐서 목회를 시작하여 약 300명의 교인과 120평의 대지 위에 4층 짜리 건물을 건축하는 기적 같은 일들을 일구어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바쁜 일정은 가정을 소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정에 있는 날이라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한 토요일 하루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설교를 준비하느라 밤을 지새우다 보면 가족과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많은 집회와 심방으로 보내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어린 자녀를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집회를 다니던 도중 그는 이성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찬양, 화사한 몸짓, 품위 있는 자태와 예절바른 행동은 분명히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미 망가지다시피 한 자신의 아내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고 결국에는 은밀하게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가 지나가 이러한 사실이 아내에게 들려졌고, 아내는 이 문제를 교인들에게 이야기함으로서 교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때쯤 그는 저에게 찾아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바로 "교회인가? 가정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대답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가정입니다!" 이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인들 앞에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목사의 욕을 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모습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밀한 교제를 해오던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혼을 결심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도 이일에 동의를 했고, 그 자신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목회자는 그 지역에서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었고, 제 앞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종종 신문에도 장식이 될 정도의 유망한 목회자였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명해 질 필요는 없습니다. 훌륭한 목회를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기에 충분하지 못한 그릇이 된다면 그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거짓 전도자들이 교회를 위해 가정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자격을 잃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로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4. 목사를 보는 기준, 무엇으로 볼 것인가? 가정적으로 온전치 못하지만 능력 있고, 탁월하며, 지혜로운 목사와 다소 부족하더라도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자녀로부터 존경받는 목사 중에 누구에게 더 점수를 후하게 줄 수 있는가? 저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 분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비록 가정이 불완전하더라도 그의 능력이 탁월하기만 하다면 그를 훌륭한 목회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건강한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양의 일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별로 신통치 않은 목회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큰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가정이 안정되지 못할 때 생기는 아픔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의 문제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 결국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삭부부도 역시 자식들을 편애함으로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요셉을 사랑함으로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의 종으로 팔아 넘겼으니까요? 우리는 이외에도 성경의 많은 곳에서 가정의 불화가 가져다 주는 아픔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치스러운 모습들을 드러내 주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을 이끄는 자야말로 건강한 교회를 목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숫자나 물질로 평가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매우 어려운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이 시대에만 존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보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염려는 주님께 맡기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는 자이지 주인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가정을 뒤로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말한다면 그는 지금 일을 거꾸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5. 이는 비단 목사(감독)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딤전 3:21) 교회 안에서 진정 존경을 받아야 할 자들은 결코 잘 가르치거나 헌금을 많이 하거나 찬양이나 봉사를 잘하는 자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같이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정을 가지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 안에 파괴된 가정에서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들의 영적 정서는 결코 안정되지 못한 모습들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욱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모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 가정은 목회자 자질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앞서서 하는 자는 먼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 4.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침례를 주라 하심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됨이라(고린도전서 1:17,18) 감히 설교에 대하여 논한다는 사실이 쑥스럽습니다. 그것은 사실 나 자신조차도 설교에 대하여는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매끄럽고 부드러운 말과 회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논리와 웅변을 겸비할 수만 있다면 보다 자신 있게 설교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제가 설교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고 결심한데는 설교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 11:6) "그들이 말하되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고후 10:10) 우리는 설교가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말씀들을 보면 결코 설교가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바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대변인 격인 아론을 내세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는 그로서도 보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주께 아뢰되 오 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니"(출 4:10) 저는 설교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논리나 매끄러운 표현들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속여 장사를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말과 행동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참말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교회 안에도 거짓 진리들을 참인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이 시대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의 말을 듣고 설교를 평가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사실들을 먼저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권능을 알아 보겠노니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4:19,20) 설교를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그의 말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설교와 성경공부는 다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포(preach)하여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teaching)은 가가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골로새서1:28)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와 성경공부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가 굳이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동일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을 향해 좀 더 유익한 말씀들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준비를 한 내용을 들고 말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설교를 하는 강단이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자리일까요? 저는 이 대답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강단은 너무도 많은 지식들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그 주일에는 성도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설교는 선포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설교에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설교들은 대부분 듣는 자들에 대하여 설득하거나 이해를 시키려는 의도로 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과 징계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설교다운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들은 대부분 지옥에 대하여 말해야 하고, 심판에 관하여 설명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도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이 자기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들을 너무도 싫어하기 때문에 설교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선포를 중단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말씀은 복음 선포(Preaching)를 통하여 정하신 때에 드러내셨으니 이 복음 선포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졌느니라(디도서1:3)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대신했던 바울도 역시 많은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성경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분들이 선포의 일들을 중단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힘썼다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선포에 비하여 가르치는 일들은 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는 말 그대로 공부를 통해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해시킬 수도 있으며, 꾸준히 가르침으로서 생명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냐? 영벌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접이냐? 불신이냐? 하는 결단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주 이러한 설교들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주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다짐을 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빵을 나누었습니다(행2:46).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복음의 대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채 설교를 마쳤다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교의 주제가 무엇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 안에는 반드시 복음을 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성도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죄로 인하여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매주 강단에서 설교를 해야하는 이유는 단 한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십시오. 아직도 교회 안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당연히 그들을 향해 말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얻어 구원받으십시오" 2. 설교는 상담이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는 말합니다. "나는 강단에서 심방과 상담을 모두 한다" 이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상담은 상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상담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위로자가 되시는 성령님이 아니십니까?(요14:16) 만일 설교를 통하여 상담을 하려 한다면 이는 성령님의 활동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도들을 향해 언제나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 자신들이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어떤 위로를 받기를 소원하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역할은 매우 달라집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일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기 원한다면 그는 차라리 설교를 듣기보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다가 확신을 잃어 가는 성도가 있다면 복음에 관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설교가 결코 상담을 위해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설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자들이 은혜가 충만하여 전할 때마다 마치 자신을 향해 설교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설교자가 같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듣는 이들은 각기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고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가진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브리서4:12) 설교를 듣는 이들은 당연히 자신을 향한 경고를 듣는다는 자세로 임해야만 합니다. 만일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자가 사소한 감정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시험에 들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 그 자체로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무너지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교회들을 향하여 말씀하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설교는 결코 상담일 수 없습니다." 3. 설교는 회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금기시 되는 몇 가지의 설교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에 관한 설교라든지, 단정한 옷차림, 경건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행동들, 즉 술과 담배 도박, 영화관 출입 등과 같은 것들은 교회를 고리타분하고 숨막히게 만든다는 이유로 설교하기를 꺼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가 성도들의 죄 문제를 지적해 줄 수 없다면 무엇으로 그들에게 경고할 수 있습니까? 만일 설교가 성도들의 생활과 관련이 없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설교일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적인 교회들에 대하여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개인의 생활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방탕한 생활이 허용되고 또한 그것들을 적당히 눈감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죄에 대하여 지적을 하는 것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교회에서나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 설교는 결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대상을 바라보고 계셨고, 그들의 죄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매우 심한 말로 책망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가령 "독사의 자식들아"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즐겨 사용하시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에 사도들의 모습을 볼까요. 베드로는 성령이 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2:14)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혼자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상을 놓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행17:22)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미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대상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당연히 회중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가 회중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자들과는 관계없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을 했지만 회중과 관계없는 설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전달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할지라도 회중과 관계 있는 설교라야 만이 참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회중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는 결코 자리에 없는 회중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4. 설교가 결코 신비적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유명한 설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높은 톤으로 혹은 지나치게 낮은 톤으로 설교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신비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좀 더 근엄하고 은혜스럽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약간 쉰 목소리로 설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에야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아직도 그것을 은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설교자의 목소리가 쉰 상태이거나 지나치게 높은 톤으로 사람들의 귀에 거슬린다면 말씀의 전달에 많은 문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 복음의 전달 효과를 줄임으로서 설교자가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문제를 드러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설교를 함에 있어서 웅변조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평상시 자신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으로 말하십시오. 우리는 위대한 설교가라고 생각되는 바울이 그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 11:6) "그들이 말하되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 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고후 10:10) 우리는 성경에 기록한 사실을 봐서도 바울이 말을 유창하게 하거나 근엄한 모습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는 결코 신비적인 말투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면 연악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통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도 설교를 훈련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구를 쓰셔서 전달하시는 이는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설교는 결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매우 탁월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매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설교에 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던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그것을 듣는 순간 우리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설교는 불신자들이나 경건치 못한 자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많은 지식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간단하고 쉬운 말로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자들이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전하는 자가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자칫 엉뚱한 설교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들은 전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중들에게 전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사용함으로서 듣기에 거북하게 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은 다양합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까지, 무식한 자로부터 지식이 있는 자까지 교회는 고르게 사람이 분포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어려운 말을 씀으로서 듣는 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것보다 큰 손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다 쉬운 설교를 하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더욱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설교가 반드시 성경 본문만을 이용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의 기본 뼈대는 반드시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진행해 감에 있어서 반드시 성경에 있는 것만을 예로 들어가면서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불신자들이나 경건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성경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아예 귀를 막아버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성경 말씀이 살아있고 권능이 있는 것(히4:12)이기 때문에 성경만을 말한다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저도 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마음이 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설교를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바로 설교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시대가 많이 변해 있어서 우리가 이제는 논과 밭을 예화로 들기에는 너무도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설교의 재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는 과거보다 더욱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화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화가 성도들과의 생활과는 무관한 내용으로 진행되어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교의 재료로 삼으십시오. 보다 현장감이 있는 설교의 재료들은 성도들의 마음을 쉽게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설교 중에 예화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책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유나 예화들이 설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 비유를 들만한 사건들이 없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함에 있어서 보다 폭넓게 다양한 내용들을 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설교의 집중력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강단에 서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교회 밖을 나가면 방금 들었던 설교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예화들은 자칫 설교의 주제를 혼돈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예화를 드는 것을 삼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단순하면서도 그 날 설교의 주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예화를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이러한 식으로 설교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번 기도해 봅시다. 그렇다면 반드시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만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7.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설교에 방법은 없습니다.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듣는 이들이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하여 연극적인 요소, 예화, 비유, 시청각 등 자료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 보다 열정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이 들은 말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열린 예배를 지향하여 예배에 연극적인 요소들과 뮤지컬 공연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설교의 가장 기본 원칙인 선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기억에 남는 예배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설교에 이러한 연극적인 요소들과 뮤지컬을 비롯한 각종 시청각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설교가 성도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수록 좋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선포자가 어느 정도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원고만을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가서 주어진 원고의 내용을 읽어 가는 정도의 설교라면 듣는 이들은 매우 지루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설교라도 큰 은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믿음이 좋은 성도들만 앉아서 듣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고 계획된 설교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시간들을 가리켜서 Worship service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듣는 회중에게 맞추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결론 설교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날에 주어진 말씀에 따라 그 능력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지식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가에 따라서 설교자의 능력이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설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이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 5. 훌륭한 상담자가 되어주십시오. 만일 저에게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상담이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목양자로서 사역을 함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도 교회를 떠나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목회자가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고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 5:29하)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10) 우리가 상담을 함에 있어서 위의 성경 구절을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담자가 결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 혹은 종으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목양자들이 상담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상담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담은 결코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상담자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를 생각하지 않고 감정만 교류하게 된다면 그 상담은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상담 원칙에 관한 것들입니다. 1. 상담을 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상담은 결코 사람들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상담의 최종적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상담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그 안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면 그 상담은 그리스도인의 상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상담의 결과는 믿음의 성숙을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상담자는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고,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한 단계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담자는 상담에 임하기 전에 분명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담자는 반드시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담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가 피상담자로부터 불쾌한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는 신뢰를 더해 갈 것입니다. 오히려 상담자가 순간적인 반응에 의해 임기웅변으로 일관한다면 그는 잠시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를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상담의 결론이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행이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상담자와 피상담자 둘이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더라도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중간중간에 언제나 인식시키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그들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18:20). 만일 그러한 자세로 상담에 임하게 된다면 반드시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자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대화 도중에 절대 흥분하지 마십시오. 만일 대화 가운데 흥분을 하게 된다면 그는 이성을 잃고 제대로 상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흥분함으로 두 가지의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는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는 것이고(출32:19), 또 하나는 가데스에서 반석을 두 번 치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민20:7-11). 특히 반석을 두 번 친 후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던져주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는 그의 누이 미리암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모세의 기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감정이 매우 상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흥분하기에 충분한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분해서 반석에서 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반석을 쳤던 것입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담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상담자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않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세가 그랬듯이 분별력을 잃어서 주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반석에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모세가 막대기로 반석을 치는, 즉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흥분을 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입니다. 상담자에게는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많은 목양자들이 이 부분에 실패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버려두고 자신의 생각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승리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아닌 곳에서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성경 안에서 찾으려고 하십시오. 결코 자신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피상담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상담하는 자신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3.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들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훌륭한 상담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저에게 만일 그 대답을 하라고 한다면 피상담자에게 가장 적은 말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상담자들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피상담자가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피상담자들은 상담자가 어떠한 말을 해 줄 것인가에 대한 사실도 대부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상담자는 그들을 찾아 온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피상담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면 그 상담은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양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피상담자에게 주입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상담하다보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그가 말하기도 전에 다 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의 말을 막고 대신 말해주면서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결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특별한 상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방법을 쓸 수도 있지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양자들은 주로 많이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듣는데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양자들이 피상담자가 찾아왔을 때에 미리 해결책을 제시하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상담자, 혹은 목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듣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미리 짐작하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담을 그르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담을 하다보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피상담자는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상담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이 대답해 준 것입니다. 많은 피상담자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담자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침묵을 통해 그의 해답에 동의하고 그를 돌려보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상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을 적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문제는 매우 쉽게 풀려질 것입니다. 4.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힘쓰십시오. 이 주제는 목양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양자들은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선호하는 책들과 사람들의 자료를 뒤적이고, 또한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을 볼 때는 언제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지식적으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비록 지식적으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상담에 있어서는 반드시 객관적인 기준 아래서 진행이 되어야만 합니다. 상담은 대부분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인 문제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상담자는 대부분 가정과 자녀, 물질과 사업 등 대부분 생활의 문제를 들고 상담자를 찾아옵니다. 문제는 그들이 결코 목양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목양자 수준의 삶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더욱 많은 고민을 안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를 부모나 선생님에게 상의하지 않고 친구들과 나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부분 부모나 선생님은 학생의 입장에서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 상담을 함으로서 그들을 꾸짖거나 나무라고 오히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찾아 온 아이를 더욱 고민스럽게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찾아 온 사람을 목양자의 입장에서 설교를 하듯이 말한다면 오히려 그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객관적이 되라는 말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환경을 이해하고 그의 능력의 정도를 감안하여 그가 어떠한 결정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성경을 들이밀고 "이대로 사시오!"라고 말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린아이 같은 자들은 오히려 실족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5장3절에서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는 말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게 되면 결국 그들은 독선적이고 강제적인 사람으로 비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상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칫 요긴한 지체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5. 상대를 자극하려 하지 마십시오. 상담을 하다보면 답답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상담자로 하여금 흥분하게 만드는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보고 상대를 자극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역에 실패하는 원인이 사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담법입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을 자극하게 되면 결국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오히려 논쟁의 장으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문제를 가지고 한 자리에 앉아있지만 문제는 뒤로하고 결국 무익한 변론만을 일삼은 채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극을 받은 이는 자연스럽게 이성을 잃게 될 것이고, 이것은 그 불씨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갈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상대방을 자극시키게 되면 결국 실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실족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귐은 어렵게 하면서도 헤어지는 일은 매우 간단하게 처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어진다는 것은 자칫 서로가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진리와의 구별을 위해서는 이러한 행동이 매우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상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상담자는 보호되어져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심판해서 구별해내야 하는 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상담을 위해 찾아와서 먼저 논쟁이 될만한 주제를 가지고 상담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자극하여 더불어 논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쟁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자극적인 말들을 피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를 자극시켜 상담보다는 논쟁거리를 만들어 놓게된다면 결국에는 더욱 좋지 못한 결과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6. 결론을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상담자와 피상담자들은 앉은자리에서 결론을 맺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며, 때로는 허탈감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결론을 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엉뚱하게 진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말로 하는 것과 현실에서의 문제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상담자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결론을 내더라도 피상담자로 하여금 결론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 이유는 문제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상담자들은 상담을 해 주고 난 이유에 곤혹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담자의 권면에 따라 생활에 적용을 하였는데 그 결과가 매우 나쁘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상담자가 원망을 듣게 될 것이며,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무능한 상담자, 혹은 목양자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거의 도박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잘 해결되면 매우 유능한 자로 인정을 받게되고, 권위도 세울 수 있는 것이지만, 자칫 잘 못하면 사역에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결론은 피상담자의 몫으로 남겨두십시오. 상담자는 다만 성경적인 입장에서 지혜의 눈을 열어주고 피상담자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한다면 결코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7. 모든 대화에 하나님이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하며 결과를 맡기십시오. 기도하고 시작하십시오. 그것은 모든 대화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특별히 기도를 하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기도를 하고 시작한다면 상담자나 피상담자는 더욱 긴장된 상태에서 대화를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진실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상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기도로 마치십시오. 왜냐하면 상담의 결과도 역시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상담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주님께서만이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문제에 간섭하시는 일이 없다면 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결론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일은 상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도우심이 없는 상담이나 문제의 해결을 기대한다면 그는 차라리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주님의 도우심 아래서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모두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다만 우리의 대화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주님, 대화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하셔서 문제의 해결을 돕고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상담자가 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서 훌륭하게 쓰임받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 6. 무엇이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교회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오랜 정체 상태를 지속하고 있으며, 또한 그 해결책을 찾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몸은 반드시 성장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회가 성장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성장의 장애요인이 교회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양자들은 그 일에 대하여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지속되게 되면 교회는 병이 들 것이고, 결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병이 들 수 있다는 이 말이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이 병이 들 수 있는 것과 같이 교회도 경계를 조금만 늦추면 반드시 병에 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병의 근원은 부주의에서 옵니다. 그래서 건강한 몸을 갖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과 음식물 섭취, 또한 건강한 생각을 가지도록 대부분의 의사들은 권면합니다. 물론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라고 말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권면한 이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건강한 생활은 몸에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고 몸에 유익한 것들을 적절하게 취하는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해로운 요소들을 제거하고 유익한 것들을 적절히 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장에서 주로 교회성장을 방해하는 요인들, 즉 건강을 해치는 교회 안의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교회 성장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한 교회는 수년동안 성장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 교회는 매우 소망이 넘치는 교회였고, 또한 바른 복음, 바른 진리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될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 교회에 속한 많은 성도들로부터 매우 위험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이 정도로 성장을 했으니 우리는 성공한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교회가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매우 놀랐지만 그들이 더 이상 성장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지금 그 교회는 거의 해산이 되었고, 주님의 특별하신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가장 위험한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긴장을 늦추는 때입니다. 그것은 여유 있게 이길 수 있는 경기를 한 순간에 역전을 당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도 "이 정도면..."이라는 생각은 바로 사탄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기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게 이루어 놓은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이라면 교회의 성장은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장성한 사람의 몸을 가질 때까지 성장을 지속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예배당에 많은 숫자로 가득 채우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예배당 안에 신앙적으로 젖먹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곳은 성장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속히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해야하고, 온 성도는 이 일들을 위해 더욱 힘써야만 합니다. 교회의 성장을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교회의 약한 부분을 찾아서 더 강하게 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교만은 성장에 최대의 적입니다. 무너지는 교회들을 보셨습니까? 그 교회는 과거에 매우 신실하게 시작했던 교회들입니다. 만일 주님 앞에 신실함이 없었더라면 주님은 그들의 교회를 성장시켜 주실 리가 없습니다. 물론 진리가 없이도 외형적인 교회는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서 거짓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주님의 교회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명히 주님의 교회로 시작하였는데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급기야는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낳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성장과 더불어 사탄은 더욱 강력하게 교회를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공격 목표가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은 사람의 마음에 교만을 심어 놓고 목양자로 하여금 스스로 권위를 가지도록 하며,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일을 멈추도록 만들 것이며, 더 이상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의 결과는 명백한 것입니다. 때로 이러한 행동들은 "사역자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존재해 있습니다. 권위는 결코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세워주는 것이 진정한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양자는 스스로 본을 보임으로서 권위를 세워야만 합니다(벧전5:3). 그렇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펼쳐 놓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히13:17)고 가르친다면 그는 분명히 순서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역자가 자신의 종 됨을 알고 먼저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앞 선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는 자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깨닫도록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 곁에 다가오는 교만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사탄의 무기입니다. 3. 교회는 새로 거듭난 성도들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고무줄 교회" 이 말은 제가 현대 교회를 비유해서 즐겨 쓰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교회의 성도가 많아졌다가 어느 순간에는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교회, 이러한 현상은 현대 교회들이 겪는 고민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새로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데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회들은 대부분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외형적인 치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으며, 내부에 값비싼 물건들을 진열해 놓음으로서 사람들의 환심을 삽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러한 교회의 모습에 반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특징은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른 교회의 성도들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의 성도들로 채워지는 것은 진정한 성장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은 교회 내에 사소한 불만이 생기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치장은 빠른 시간 안에 그들로 하여금 싫증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들을 붙들고자 한다면 새롭게 치장해야 합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더 많은 헌금을 강요할 것은 분명하고, 교회는 더욱 화려해 가지만 진정한 성장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건강한 성장을 지속하기를 원한다면 교회 내에 새로 거듭난 성도들로 채워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전 성도들이 혼의 구원(Soul winning)을 위해 힘썼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다른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거나 갈등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데려 오는 방법으로 교회의 성장을 기대한다면 그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교회를 떠나게 될 사람들을 가지고 사역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처음부터 양육을 받은 성도들이 그 교회를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일꾼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교회가 운영과정에서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 때에 그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많은 교회, 바로 그러한 교회가 희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거듭나고, 양육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교회는 이러한 일꾼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것이 성장을 위해 매우 필요한 조건이 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4.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을 때 성장은 멈추게 될 것이다. 교회는 영적, 혹은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주님에 의하여 불러모아진 자들의 모임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여전히 사람이 모인 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자연히 조직과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사람을 따르는 일이 발생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순수한 교회들에도 특정한 사람을 따르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존경할 만한 믿음의 사람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의 신실한 삶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우리는 누구도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 대하여 존경하는 행위에 대하여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게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목양자가 올바른 교회를 세워가는 모습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를 감독하는 목양자는 당연히 존경을 받는자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이는 오직 주님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목양자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주님의 교회를 위임받는 목양자를 무시하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에서 온전한 믿음의 삶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시험을 받을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목양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회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하는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스스로 높아지려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자세들은 결국 사람 중심의 교회를 운영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것은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서 교회의 기본 질서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순수하게 시작이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님의 일을 하려할 것이며, 결국에는 스스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교회를 사유 재산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주는 도구로 이용을 하려들 것입니다. 목양의 일을 세습하고, 교회 회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심지어 실족하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곳은 더 이상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교회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계셨을 때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이 중심에 서 있게 된다면 그 교회는 성장을 멈추게 될 것이며, 설령 성장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 분명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교회의 주인이시며, 또한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5.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릴 때 성장을 멈출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히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것이 사랑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이 사랑을 교회를 통해 완성하고자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일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령은 보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주님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의 차원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가 마음이 통해야만 사랑을 합니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히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분명히 자신의 생애와 관계가 있는 사랑을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 연인이 사랑하는 것, 친구가 사랑하는 것 등 모든 부분에 걸쳐서 사람들은 분명히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특별한 대상을 두고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서로 원수관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힘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교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들에게서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전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원수들을 결국 원수로 대함으로서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을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법정 소송까지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빈부나 지식, 그리고 명예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들을 차별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몸의 구조를 바로 이해하는 자라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몸의 약한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고전12:22). 그것은 곧 약하고 부족한 자라 할지라도 어제나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주 넘어지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하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교회는 그들을 끊임없이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수없이 많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랍니다. 그러한 과정 없이 바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랑한다면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6. 일이 너무 많아 지치게 되는 순간 성장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분주하고 무엇엔가 쫓겨다니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떠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자들은 극히 적으며, 설령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허탈감에 사로잡혀 오히려 무력해 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목양자들에게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교회 성장에 실패하고 있으며, 교회 성장을 이룬 목양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지쳐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자신의 사역을 하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결국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너무나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유익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주님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일이 되어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양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주님과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 혹은 경건의 시간(Q.T)이라고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지 못하는 자를 과연 훌륭한 목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가 그러한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면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중요한 시간을 빼앗아갈까요? 바로 그가 안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가 사소한 일에 매어있는 한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또한 건강까지 해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목양자들이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언 듯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많은 일들로 인하여 병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병을 얻음으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자들입니다. 그것은 결국 지혜롭지 못한 결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언제나 피로하고, 분주한 생활 속에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유익한 말씀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충분한 묵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다른 이들의 설교를 가져다가 설교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이 말씀을 공급할 만큼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묵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양자이든 성도이든 언제나 자신의 몸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수면과 적당한 분량의 일, 그리고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의 성장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다면 보다 바른 진리 안에서 바르게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매사에 건강한 모습을 유지함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너무 많은 일로 인하여 지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여 분별력을 잃게 만들 것이며, 결국에는 우리를 넘어뜨릴 것입니다. 7. 교회가 성장보다는 교리에 집착할 때 성장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바른 교리 위에 서 있는가?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많은 이단 교리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바른 교리를 가진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는 이 교리 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다른 교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하려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은 각 교파마다의 교리 위에 교회를 세워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주님의 교회를 시작하려는 자들에게도 이것은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바른 교리 위에 교회를 시작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리만을 가지고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많은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도 교회는 오히려 더욱 심각한 정체를 보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른 교리를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바른 교리들을 무기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씩 다른 교리들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대부분 심각한 교리의 변질보다는 대부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나, 혹은 보는 견해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매우 집착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모습들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교회 안에 존재하며, 그들은 우리의 추상적 교리의 집착에 대한 거부감으로 결국에는 교회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단번 속죄와 같은 명백하고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추상적 교리들을 강조함으로서 사람들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교회는 이러한 논쟁들을 자제시켜야만 합니다. 만일 논쟁의 대상이 될만한 문제가 생긴다면 차라리 조용하게 넘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성도들이 요구하는 목양자는 학자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안전하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학자는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그와 더불어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부모님을 의지하고 있고, 그의 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목양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성도들의 부모와 같은 모습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언제나 품어주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생각이 조금씩 달라도 근본적인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격려하고 안아주는 모습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추상적 교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주님의 교회를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8. 교회는 성장을 위해 지속적인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해 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과거에 많은 희생을 해왔더라도 그들이 희생을 멈추고자 한다면 그와 더불어 교회의 성장도 멈추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더 이상 희생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교회는 계속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성도를 세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과거에 헌신했던 것을 자랑만 하고 현재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성도가 아닙니다. 이 말이 매우 심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이 말은 그가 과거에 했던 것들이 모두 무효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과거의 것을 가지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헌신을 해야만 합니다. 어떤 목양자는 "내가 과거에 고생했으니 이제는 좀 편안한 생활을 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감히 말하지만 그는 이제 목양의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목양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결코 주님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가 편하게 쉬고 있는 동안에 많은 성도들은 병에 들거나 실족해서 넘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만일 헌신을 해왔던 자가 "이만큼 하면 됐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는 교회에서 매우 심각한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사사건건 간섭하게 될 것이며, 주님의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헌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문제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더욱 헌신하게 함으로서 더욱 많은 일꾼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양자나 성도들 할 것 없이 지속적으로 헌신하도록 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9.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교회 성장을 막는 요소들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기도를 잃어 버렸을 때 교회의 성장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도 없이 교회가 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성장한 교회의 목회자들을 만나보십시오. 그들은 모두가 교회 성장의 제일 첫 번째 요건으로 기도를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주님의 교회를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 성장의 열쇠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성장을 원한다면 주님께 구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 우선적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기도의 목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기도회를 통해서 더욱 많은 문제들을 주님께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모임이 성경공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들은 기도가 지루하다고 생각하여 이름난 기도회로 정해놓고 그 시간의 대부분을 성경공부로 대신하려 합니다. 그것이 차라리 편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장을 생각하고 있다면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질병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교회에 오래 출석하고 있기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전도할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모두 기도 모임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이 문제들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삶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면 교회의 성장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