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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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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은사에 대해서
lhyunsik

출처 : LA 말씀침례교회 **은혜와 은사에 대해서 현대 교회의 이상한 병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한 것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완전히 다른 단어이며, 다른 의미입니다. 하지만 은사와 열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나, 은사와 은혜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예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구원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게 와서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저는 은혜를 받는게 뭔지, 누가, 어디서 주는 것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란 제목으로 이런 문제들을 짚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0번째 시간으로 은혜와 은사에 대해서 성경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흔히 교회 시대를 은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롬6:14). 현재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모두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매 은혜 위에 은혜니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요3:16,17). 은혜란 사전적인 의미로나 성경적인 의미로나 동일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 "Charis"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란 단어는 신약에서만 129회나 사용되지만 특이하게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일서와 요한 삼서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단순한 호의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다스린다(롬5:21).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하나님의 은혜는 의를 통해 우리를 다스립니다. 마음의 근심과 불안, 걱정과 염려, 두려움 등 모든 것을 잠잠하게 하며, 하나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무서운 율법과 징계와 저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은혜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도록 마음을 변화시키시며, 자발적인 순종과 겸손한 복종으로 이끄십니다. 평생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아오면서 의(義)라곤 조금도 알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의(義)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진노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부드러운 그분의 은혜입니다. 살인자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변모시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갈릴리의 어부들을 주님의 순교자로 만든 것도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쟌 뉴튼은 위대한 목사로 만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평강한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도답게 만듭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육신에 눈병으로 너무나 고통을 당하여 세 번이나 기도를 하면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 간구하는 바울의 힘겨운 투쟁을 한 순간에 감사로 돌려버린 것도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처한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대신 족한 은혜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얼마나 자주 어려움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도록 얼마나 자주 부르짖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환경을 고쳐 주시거나 건져 주실 수도 있지만, 족한 은혜를 통해 연약함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감사와 기쁨과 찬양을 돌려버리십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약함을 넉넉히 채우고도 남는 어떤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것, 나의 성격이 좀 모난 것, 나의 인격이 덜 성숙한 것, 나의 지혜가 모자란 것, 몸이 약한 것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넘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빈약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성도는 누구나 주의 뜻을 행하려고만 한다면 넘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일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십니다. 나의 것을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백만장자여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이기 때문에 형제, 자매들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으로, 아니면 습관적으로, 종교적 관습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여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 이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 당당히 요청하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인해 모든 일에서 넉넉하게 선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도 생활은 다른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합니다. [또 그들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직접 너희를 위해 기도함으로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9:14). 성도가 성도를 향한 열렬하고 효과적인 기도 생활은 성도를 가장 사랑하는 ACTION입니다. 은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히12:28). 세상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를,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힘으로, 돈으로 굴복시킵니다. 그들은 인위적인 존경을 받으며, 가식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승복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 가운데 자발적인 승복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노예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거나 상사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섬기는 종업원 같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은혜를 힘입어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이 참된 섬김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강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적을 무찌를 만큼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체력 단련을 통해서 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정신력 강화, 정신 무장을 외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강건하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야말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대로 무장시켜 주는 힘입니다. 힘이 없는 군인에게 아무리 좋은 무기를 준다해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서의 인사말과 맺음말에 항상 “주의 은혜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썼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르친다 (딛2:11,12).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딛2:11,12).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르칩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도록 가르칩니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성도들의 입이 바뀝니다. 이는 언어 생활이 바뀌며, 술, 담배를 비롯한 입으로 악한 짓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길이 가는 곳이 달라지고,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손버릇이 바뀝니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아무 책이나 아무 영화에나 눈길이 가고, 손이 가던 사람이 성경에 눈이 가고, 손길이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어느 덧 주일이 찾아오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정신이 흐리멍텅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나의 사고 방식을 바꾸어줍니다. 이는 마인드컨트롤이나 명상이 결코 흉내내지 못하는 맑은 정신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술취한 세상이요, 혼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한없이 맑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디서 발견합니까?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서입니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은혜의 말씀"(행14:3)이라고 합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성경을 손에서 놓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왕좌"(히4:16)입니다. 누구나 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나아가십시오. 오늘밤에도, 내일 아침에도,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왕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히10:29)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인내로 모든 것을 참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견디며, 되 갚지 않습니다. 나에게 닥친 모든 환경을 하나님이 나에게 안배해 주신 섭리의 손길로 받아 들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신자는 사랑과 믿음과 체험과 지혜와 같이 모든 면에서 자라나야 하듯이 은혜 안에서도 자라나야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어떻게 역사하는지 성경을 파고 공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회중이 흩어진 뒤에 유대인과 신앙심 있는 유대교 개종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람이 그들에게 말하며 권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continue in) 하니라.](행13:43). 우리는 지식적으로 은혜를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생활에 적용하고 평생동안 꾸준히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에 대해서 배웠으면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주시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 특히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은혜를 입지 않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경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 주시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겸손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약4:6). [참으로 그분께서는 비웃는 자들을 비웃으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잠3:34)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벧전5:5). 그럼 잠시 은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말로 은사(恩賜)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GIFT, 즉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은사입니다. 은사주의가 너무나 팽배한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은사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정작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는 선물만 챙겨들고 얼른 자기 방으로 달려가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는 선물보다 아버지의 손을 잡는 데서 신앙의 성장은 시작됩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PIRIT)과 성령의 선물들(THE GIFTS OF THE HOLY SPIRIT)에 대해 차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Spirit)은 of가 소유격이 아닌 목적격으로 사용되어 “성령이란 선물”이란 뜻입니다. 성령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기 위해 주어지는 성령님이 바로 성령의 선물(은사)입니다. 반면 성령의 선물들은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자신의 뜻대로 다양하게 부여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every man)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벧전4:10). [그러나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있기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다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동역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 혹은 사역이면 우리의 사역하는 일로 섬기며,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하고,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5-8).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목적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은사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전14:12).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엡4:11,12). 만약 목적에 어긋나게 은사를 사용한다면 이는 은사를 주신 분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구하고,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원하는 은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covet).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한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리라.](고전12:31).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왕상3:5-13). 이는 왕으로서 주의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면 가장 좋은 은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소홀히 여기고, 갖고 싶은 은사에만 온 신경이 가서 갈망하지 않습니까? 간혹 너무 은사를 갖고 싶은 나머지 거짓 은사를 소유한 채 자랑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잠언 25:14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스스로 거짓 선물을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들과 바람 같으니라.] 흔히 오해하는 은사들 성경에는 24가지의 구체적인 은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 4가지의 은사는 일시적인 은사였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 병을 고치는 것, 방언, 방언 통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4가지의 은사는 사도들에게 주어졌으며, 은사인 동시에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은사를 구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으시지만,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엄히 책망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영적 성장을 이루는 대신 표적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기를 바란다면 이는 악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고 말씀하셨고,[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고후4:1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추구하는 바가 아니며 기도 제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사들을 구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신유, 방언 통역과 기적을 행하는 것은 표적으로 주어지는 은사란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고, 대신 이것을 부추기는 거짓 목자들이 강단에서 이런 것을 부추기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방언은 지상의 언어요, 외국어입니다.(고전14:21은 이사야 28:11,12을 인용한 것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신 표적입니다. 결과는 믿음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의 천사들의 방언은 히브리어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설명해 줄 것. -->모두 믿지 않는 불신자(유대인들)이 믿게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임. 병 고침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적으로 병의 치유를 경험합니다. 병원에서 포기한 병을 하나님이 고치신 예는 지금도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이지 누가 은사를 받아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빌2:26,27, 딤전5:23, 딤후4:20).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실 수도 있고, 고쳐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방언이 없다면 방언 통역은 당연히 필요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은 자주 발생합니다. 지상 최대의 이적 가운데 하나는 죄로 물은 인간이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금을 물린 것도 아니고, 반 죽음에 이르도록 때린 것도 아니고, 정신 개조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딴 사람으로 변하는 이 일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적을 행하지 않고 독사의 독을 마신다든지, 뱀을 집어 마시든지,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내게 주어졌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만큼 많은 은사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은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