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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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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과 새 사람, 겉 사람 vs 속사람
lhyunsik

출처 : LA 침례교회 ** 옛 사람과 새 사람, 겉 사람 vs 속사람 성경을 읽다 보면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구절들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모습과 성경이 말하는 모습과의 상당한 차이점을 느끼게 되고, 당황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내 안에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거듭난 신자가 얼마동안 기쁨과 넘치는 소망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다 어느 순간인가 예전의 자기 모습이 돌출되어 나올 때, 나는 과연 거듭났는가?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5-7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5-7).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에서 나는 것은 육신의 출생을 말합니다. 물은 물 침례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물에서 나는 것은 말씀으로 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물이 말씀을 가르치는 구절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압니다. 에베소서 5:26과 히브리서 10:22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통해 물이 곧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거듭남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 3장의 물로 태어나는 것이 말씀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 거듭난다는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물이요, 말씀은 거듭남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1:23, 야고보서1:18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다시 한번 요한복음 3:5-7을 보시고, 요한복음 6:63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5-7). 3:5-7절을 한 문장을 죽 읽어보면(문맥적으로), 물에서 나는 것은 육에서 나는 것이요, 영에서 난 것은 성령에게서 난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우리는 말씀이 바로 영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에서 난 것은 모두 육체적 출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서 움직이는 피조물(被造物)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창1:20). [네 샘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며 또 젊을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잠5:18).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육신적으로 한 번 출생한 후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한 번 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born again · 중생(重生) 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 태어났기 때문에 내 안에는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은 두 가지 성품이 아니라 한 가지 성품만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자연인(natural man)-본성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첫째,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둘째, 지각이 어둡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천재라고 해도 영적으로 그들은 아무리 쉬운 설교와 성경공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지각(知覺)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無知)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8). 셋째, 이들은 육신의 욕심, 육신의 생각, 육신의 만족, 육신의 자랑 등 모든 것이 육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을 새롭게 하여 마음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자연인은 아무리 종교적이고, 이타적이고, 헌신적으로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일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일하고,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포용적이라 해도 자기 방식을 고집할 뿐 하나님의 법에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집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애인들을 위해서 밥을 짓고, 집을 지어주는 아름다운 사랑과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양심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여 한점 부끄럼없는 삶을 살면서도 정작 한 가지, 유독 하나님의 법에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다섯째, 그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가장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천성이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 천성이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 태어날 때는 백지상태인데 살아가면서 결정난다는 환경 결정론 등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롭겠느냐?](욥15:14).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개혁하거나, 개선되거나, 교육을 통해 나아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디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이 세상의 누구도 자기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고, 어떤 표범도 자기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어떤 사람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은 사람은 예외없이 누구나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네게, 너희가 반드시(must)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요3: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남을 통해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을 심으십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출생이 아버지의 씨와 어머니의 태가 필요하듯이 영적인 출생 또한 부모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씨(아버지)를 우리의 마음(어머니) 안에 뿌리심으로 그것이 태어날 때 우리 안에는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씨앗에 생명이 없을 때 싹이 나올 수 없듯이 우리 안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을 때 영적 생명은 출생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출생은 새로운 성품을 가져다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영에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이렇게 태어난 새 생명은 속 사람을 이루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4:9, 5:18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구절을 보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아니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실제의 나의 모습과 교계의 모습, 성경 속에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 보았을 때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순같은 구절입니다. 요일4:9,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죄를 지을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라.](요일4:9). 이 생명은 육신의 부모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생명은 인조 인간이 아닙니다. 개조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도를 깨우친 해탈한 승려들이나 도인들도 아닙니다. 천사가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속사람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기록되기를,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요일5:18,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기 자신을 지키매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러나, 이 구절들이 바로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이란 사실을 알 때 모든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술과 색욕에 빠진 방탕한 인간이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가운데 받으면 새롭게 태어납니다. 수도승 마틴 루터에게 로마서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고, 하나님의 값없는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사실을 조명받고, 믿었을 때 그는 1500년간의 중세 암흑 시대를 종결 지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쓴 로마서의 서론을 읽은 죤 웨슬레 형제는 영국을 복음의 물결로 뒤덮었습니다. 세속의 사가들조차 영국을 피의 혁명으로 구한 것은 웨슬레의 감리교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간증을 수없이 많이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없던 문제들도 많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두 사람이 한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동시에 거하기 시작함으로 나의 혼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갈등과 반목 속에서 전에 없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이 둘의 치열한 전쟁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세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특히 로마서 7:21-24에는 절정을 이룹니다.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는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바울은 여기서 누가?라고 질문함으로써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과 달리, 어떻게(how)? 무엇을 해야(what)? 언제쯤(when)?이라고 질문하고 답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뇌와 어려움 가운데 항상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25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회심 후 성령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육신을 이기는가를 배울 때까지 이런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예외없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혼이, 나의 의지가 성령을 통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통치하도록 내어드릴 때까지 이런 갈등은 계속됩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6). 승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내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내 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순종과 굴복(yield)입니다. 로마서 6:13,16,19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바로 yield입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리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반복적인 갈등과 다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평안, 기쁨, 감사, 안식, 찬양, 승리란 용어는 요원한 말이요, 죽고 나서 주님과 함께 저 세상에서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내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대항해 어떻게 전쟁을 치러야 하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해야 합니다. 이 전쟁은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육신이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휴전도 없고, 정전도 없습니다. 마귀는 지속적으로 나의 육신을 지원합니다. 그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육신을 자극하고, 돕고, 여러 가지 환경을 조성하여 육신이 승리하도록 이끕니다. 반면 성령은 우리의 속 사람을 지원합니다. 성령은 육신을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이끄십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누구와 손잡고 누구와 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께 복종하여 마귀와 싸운다면 육신은 무기력해지고 말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거나, 신뢰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12, 빌립보서 3:4을 보겠습니다. [육신으로 잘 보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뿐이니](갈6:12). [비록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도 하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빌3:4). 육신을 신뢰했던 사람은 누구나 패배했습니다. 이는 성경의 역사가 입증해 주는 가장 명확하고도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렘17:5). 사람은 신뢰할 대상도, 두려워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신뢰해야 할 분이시며, 두려워해야 할 분이십니다. 셋째,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3:14, 벧전2:11을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대상인 육신에게 기회를 주고, 힘을 북돋우어 줌으로써 스스로 패배를 자초합니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환경들을 잘 살펴보고 정리할 것은 정리해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은 포기해 버리고, 더러운 것은 피해 버려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2:11). 요셉과 다윗을 비교해 보십시오. 사무엘하11:2-4 vs 창세기 39:7-12. 이들은 둘 다 육체의 정욕에 불을 지필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처하는 방법은 천양지차였습니다. 그 결과 또한 하늘과 지옥만큼이나 달랐습니다. 2.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의 지붕 위에서 걷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 여기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다윗에게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다윗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내려 볼 일이 아닙니다. 3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관해 물어 보게 하였더니 한 사람이 이르되, 이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 다윗은 안목의 정욕에 빠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습니까? 그는 죄에 이미 사로 잡혔습니다. 우리는 이때 욥과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욥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내 눈과 언약을 맺었거늘 어찌 처녀를 생각하랴?](욥33:1). 4. [다윗이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오게 하니 그녀가 그에게로 오니라. 그녀가 자기의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그녀와 함께 누우매 그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은 죄를 범하는데 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대신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전쟁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백전 백승의 용사였지만 지가 안에 찾아든 육신과의 한판 승부에서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냥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 순간 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약속하나 정작 자기 자신은 부패의 종이 되었으니 이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벧후2:19). 죄는 싸워 이겨야 할 것 있는 반면 피해야 할 죄가 있고, 아예 기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싸울 필요가 없는 죄가 있습니다. 어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신에게 기회를 제공해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적에게 내 안에 진지를 내어 주고 나서 싸우자는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도 자기 옷을 태우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뜨거운 숯불을 밟고서도 자기 발을 태우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잠6:27,28). 창세기 39:7-12을 펴 보십시오. 7. [이 일들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나] 이는 죄에 대한 제안입니다. 누군가 진리를 거스르는 제안을 할 때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에 지리산 산행을 한 적이 있는데 1박2일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평소에 운동량이 없었던 형제들인지라 첫날 저녁에 이미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었고, 한 형제가 쓰러졌습니다. 밤에 기온이 내려가자 몸이 춥고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배낭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 들고 몸이 추운 사람들은 한 잔씩 마시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평소 술에 약했던 형제는 이제 좋은 핑계거리와 술을 마셔도 된다는 합리적인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 친구는 일어서다 말고, “이게 누구의 음성인고?”하며 앉았습니다. 그는 제안과 타협을 분별하고 거부할 줄 알았습니다.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안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으매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리이까? 하니라.] 요셉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면 많은 죄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평소는 물론이고, 기도할 때에조차도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중언부언하다 마치고 맙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요셉은 자기와의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이 이미 마음이 확고히 정해져 있었습니다. 말씀에 꾸준히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의 순간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할 따름이니이다.](시119:9). 10. [그녀가 날마다 요셉에게 말하였으나 요셉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옆에 눕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는 거부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죄를 피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11. [이럴 즈음에 요셉이 자기 일을 보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 그 집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더라. 12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요셉이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가매] 죄가 나의 손을 잡았을 때, 악이 나를 붙잡을 때 요셉은 얼른 피하였습니다. 다윗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저와 여러분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이 죄에 쉽게 빠지는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허증은 아닙니다. 육신이 연약하기에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속 사람을 먹여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날 때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합니다. 이후로 순수한 말씀의 젖을 꾸준히 먹고 자라야 합니다(벧전2:2). 거듭난 신자는 곧 바로 성장을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말씀은 우리가 먹고 마실 영적 양식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꾸준히 말씀을 먹는다면 강건하여 질 것입니다. 먹고 나서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일이나 운동이라고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강건해집니다. 만약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한다면 그는 성장대신 비만에 걸릴 것입니다. 비만은 성장도 성숙도 아닙니다. 비만은 오히려 각종 질병의 원인이며, 정상적인 성장을 가로 막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기만 하고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 비만에 걸려 점점 움직임이 둔화되고, 결국은 여러 가지 부작용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집에서 T.V, 잡지, 신문, 소설만 읽거나 아니면 매일 육체 노동만 하다가 성경을 한 줄도 못 읽은 채 교회에 오신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허기지고, 메말라 갈 것입니다. 올 한 해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그 안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고, 말씀을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 사람은 절로 강건해 질 것입니다. 성장이야말로 악한 습관을 벗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린 아이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아이가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고, 유치한 짓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아이를 때려서 어느 정도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겠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커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크면 저절로 해결될 것들은 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1, 에베소서4:13-15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아이와 같으며 생각하는 것이 아이와 같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유치한 일들을 버렸나니](고전13:11). 에베소서 4:13-15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오늘날 교회에는 몸은 더 컸는데 영적으로는 여전히 기저귀를 찬 어린아이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성장을 포기해 버린 듯한 그리스도인들이 득실대고, 성장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성장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 성장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쉽게 속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어리기 때문입니다. 왜 흔들립니까? 욕할 것 없습니다. 그는 어리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는 일으킵니까? 어리기 때문입니다. 가르쳐도 왜 깨닫지를 못합니까? 어리기 때문입니다. 왜 어리석게 말합니까? 그것은 어리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어렵습니까? 반대로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다섯째,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지속적으로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해 우리는 앞서 3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 떨쳐 버릴 것.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육신과 성령은 결코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 중에 한 가지는 포기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절제해야 합니다. 우승한 운동 선수들 가운데 배불리 먹고, 자고 싶을 때 다 잤다는 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대가들 가운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떨쳐 버리고 달려 갔습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1). 둘째, 잘라 버릴 것.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매 맺기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절단해야 합니다. 순간의 아픔과 고통이 있겠지만 그것은 더 많은, 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로서 열매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잘라 내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모순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직장을 잘라 버리십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자녀나 배우자를 잘라 버리십니다. 어떤 때는 막역하던 친구들을 다 잘라 버리십니다. 셋째, 죽여 버릴 것. 골로새서 3:5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벗어내고, 잘라내서 해결안될 문제라면 죽여 버려야 합니다. 의사들은 우리 안에 들어있는 암 세포를 잘라냅니다. 잘라도 재발하거나 불가능하다 싶으면 그 부위를 레이저나 약을 이용하여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우리 지체를 죽여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이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참된 생명을 얻은 후 그 생명으로 열매맺으며 살아가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로써 우리는 날마다 삽니다(고후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