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67 전체: 179,179 )
워치만 니의 간증
lhyunsik

1. 워치만 니 소개 16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의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신실하게 수고한 시간들과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Boxer Rebellion)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는 20세기 초 중국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더욱 촉진하여 극적으로 전진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이 그 ‘지역에서 자란’ 전파자들을 많이 세우셨고, 특별히 1920년대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이라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를 많이 얻으셨습니다. 많은 똑똑한 학생 중에서 주님은 니쑤주(워치만 니)를 부르시고, 이 시간 동안 그분의 일을 하도록 장비시키셨습니다. 영어 이름이 헨리 니(Henry Nee)였던 니쑤주는 1903년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이 대(代)째 그리스도인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푸저우 미(美) 조합교회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푸지엔성(福建省) 북부의 조합주의자들 가운데서 첫 번째 중국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니쑤주는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께 헌신되었습니다. 아들을 낳기 원했던 그의 어머니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제게 아들을 주신다면 그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셨고 곧 니쑤주가 태어났습니다. 훗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 니쑤주는 말썽꾸러기 학생이었지만 뛰어나게 명석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푸저우에 있는 성공회의 삼일대학(Anglican Trinity College)을 졸업할 때까지 항상 반에서 일등을 하였습니다. 그는 장래에 대한 커다란 꿈과 계획이 있었고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복음을 알고 있던 니쑤주는 만약 그가 구원 받기 위하여 주님을 영접한다면 또한 그분을 섬겨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얼마간의 몸부림 후에 니쑤주는, 고등학생이었던 17세 때에 역동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바로 그 때, 이전에 세웠던 그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장래의 성공도 완전히 포기되었습니다. 그가 간증하기를, “내가 구원 받은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그분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후, 파수꾼을 뜻하는 워치만(Watchman)이라는 새로운 영어 이름과 파수꾼의 징소리라는 뜻의 토셍이라는 중국어 이름을 새로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어두운 밤에 경고의 징소리를 울리도록 일으켜 세워진 파수꾼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 2. 워치만 니 간증 워치만 니는 1936년 세 번에 걸쳐 그의 간증을 교통했습니다. 이 간증들은 웨이광시(魏光喜) 형제에 의해 〈워치만 니의 간증〉이란 제목으로 편저되었고 1974년에 초판되었습니다.(웨이 형제의 워치만 니에 대한 간증은 다음 부분인 ‘다른 이들의 간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정판(改訂版)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에서 1981년과 1983년에 출판했습니다. 이 책의 서문과 소개의 말의 일부분이 아래 다섯 대표 단락 위에 나와 있습니다. 개정판에 대한 서문 다음은 〈워치만 니의 간증〉이라는 본래의 책에 대한 개정판입니다. 1974년 출판되었던 초판은 본래의 원고와 약간 달랐습니다. 편저자인 웨이광시 형제의 편집하지 않은 중국어 원본의 원고를 확보하여 다시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결과물이 재편집된 다음의 책입니다. 서문 여기서 기록된 것은 워치만 니 형제가 1936년 10월에 중국 푸지엔성(福建省)의 동남부 구랑위(鼓浪嶼)에서 열린 사역자 집회에서 간증한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가 일생 동안 공식적으로 자기의 경험을 말한 것은 매우 드물었고, 오직 여기에서만 자기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고후12:8). 바울의 고린도후서 12장에서의 간증도 그런 일이 있은지 십사 년 후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나는 여러번 이 간증을 정리하여 출간하려 하였으나 그의 뜻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삼십팔 년 후, 곧 1972년 6월 1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로소 이것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라고 믿는다. 내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 본인의 어떠함보다는, 주님이 그에게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곧 그가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께서 그로 일하게 역사하게 하시어 주님의 영광이 그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살후 1:12). 첫 번째 간증: 구원받음과 부름을 받음에 관한 간증 두 번째 간증: (1)십자가를 누림. (2) 하나님은 나의 치료자. (3) 부흥의 시작. (4) 하나님이 맡기신 일. 세 번째 간증: (1)어떻게 믿음 생활을 하는가? (2) 금전에 대한 태도. (3) 하나님을 의지하여 문서 사업의 필요를 공급받음. 이 세 편의 간증에는 그의 1936년 이전의 영적 생활과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 1936년 이전의 것은 《부흥보(復興報)》, 《기독도보(基督徒報)》에서 공개하여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귀한 간증과 일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사역자 집회에서 시간 제한 때문에 다 말하지는 못했다. 편저자 웨이광시 구원과 부르심받음 성경 구절: 사도행전 26장 29절, 갈라디아서 1장 15절 ㆍ가정 환경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내 위로는 누님이 두 분 계시는데, 모친께서 누님들을 낳으셨을 때 나의 고모님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고모님은 연달아 딸 여섯을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풍습은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는 경시했다. 이 때문에 모친께서 두 딸을 낳은 후, 사람들은 어머님도 고모님과 같이 딸 여섯을 낳은 후에 사내아이를 낳을 거라고 말했다. 그 때 어머님은 아직 분명하게 구원 받지는 않았지만 기도할 줄은 알았다. 그녀는 주님께 “만일 당신께서 내게 사내아이를 주신다면 그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결국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가 태어났다. 훗날 부친은 나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가 이미 너를 주님께 드렸다.”고 말씀해 주셨다. ㆍ구원받은 동시에 부름 받음 나는 1920년, 십칠 세 때 구원을 받았다. 구원 받기 전 내 심중에는 큰 교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 받는 것은 어떻게 죄에서 구출되는가의 문제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죄에서 구원 받는 것은 또한 나의 종신 사업과 연관되어 있었다. 만일 내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동시에 나는 또한 그분을 주로 영접해야 했다. 그분은 나를 죄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건지셔야 했다. 그 때 나는 구원 받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구원 받으면 주님을 섬기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은 이중적인 것이어야 했다. 나는 주님의 부름을 한쪽에 제쳐 놓고 구원만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님을 믿으려면 양면을 다 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방면을 다 포기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은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ㆍ최후의 결정 1920년 4월 29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지 않자니, 또 불안하고 속에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기도할 말이 없었는데, 마침내 나는 내 앞에 많은 죄들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일생 중에 이러한 체험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면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구주를 보았다. 한 면으로는 죄의 더러움을 보았고, 또 한 면으로는 주님의 보혈이 나를 눈과 같이 희게 깨끗이 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한 면에서는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 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저항할 길이 없어서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에 다른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면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날 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했다. 죄를 자백한 후 죄의 짐이 다 벗어지게 되자 나는 가벼움을 느꼈고 마음속에 희락과 평강이 충만했다. 이것이 내 일생 중에 첫 번째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처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체험할 때였다. 이전에도 기쁨과 평강이 있었지만, 구원 받은 후의 기쁨과 평강이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내 방 안에서 빛을 보았고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주님께, “주여, 당신은 참으로 저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ㆍ내 장래를 포기함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세 명이 과거 나의 동급생이었다. 그 중 웨이광시 형제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얼마나 특이하게 행동하는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학생이었는지를 간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면으로 말한다면 나는 자주 학교 규칙을 어기는 학생이었고, 좋은 면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천부적인 총명을 주셔서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등을 했으며 나의 작문은 자주 게시판에 발표되었다. 그 때 나는 많은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내가 겸손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세상으로 나갔다면 아마도 큰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내 동급생들이 이 일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 받은 후 내게 많은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이전 나의 계획은 다 허무한 데로 돌아갔으며, 나의 장래는 이미 끝장나고 포기되었다.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울지 모르지만 내게는 매우 어려웠다. 이는 내게 많은 이상과 꿈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 받은 그날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구원 받은 것과 부름 받아 주님을 섬기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내가 부름 받은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장래를 한 번 정함으로 영원히 정하였다. 나는 나를 구원함은 한 면에서 내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주님은 한 면에서 나로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하셨고, 다른 면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과 동역하게 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전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성장할수록 내 눈에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이요, 가장 비천한 일로 보였다. 그 당시 전도사는 대개가 유럽과 미국의 목사들에 의해 고용된 일꾼으로서 목사의 눈치를 살폈으며 매달 월급은 팔구 불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는 전도할 뜻이 조금도 없었고, 나는 전도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전에 하찮고 비천하게 여겼던 전도의 직무를 택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배움 구원 받은 후로 나는 자연히 죄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들이 구원 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기 시작하였다. 약 일 년간 수고하였지만 한 사람도 구원 받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이유를 더 많이 제시할수록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능력이 없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ㆍ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 그 무렵 나는 그로브스(Groves)라는 한 서양 선교사를 만났다. 바버(M. E. Barber) 교사의 동역자인 그녀는 나에게 구원 받고서 일 년 동안 몇 사람을 구원시켰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아주 부끄러워하며 낮은 소리로, “급우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지만 그들이 듣기 싫어하고, 들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그들에게 돌려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솔직하게, 내게 “자네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네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있거나 감추인 죄를 아직 깨끗이 처리하지 않았거나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있기 때문일세.”라고 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러한 것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녀가 내게 그것들을 즉시 처리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나는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 “형제는 어떻게 간증했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아무나 붙들고 전했습니다. 상대방이 듣든 듣지 않든 전파했습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잘못되었네. 자네는 먼저 하나님께 말하고 그런 다음 사람에게 말해야 하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급우들의 이름을 적어내야 하네.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지 묻고, 이름대로 날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안배하실 때 그들에게 간증해야 하네.” 그녀와 교통한 후 나는 배상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과 급우들과 화목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는 일 등의 많은 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노트에 육칠십 명의 이름을 적고서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각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언급하였다. 어떤 때는 한 시간에 그들 모두를 위해 한 번씩 기도하였고 수업 시간에도 은밀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증거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급우들은 자주 농담으로, “전도사가 또 오셨네. 자, 설교를 들어보자.”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그로브스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당신이 내게 알려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는데도 왜 효과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낙심하지 말고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게나.”라고 말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주께 감사드린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내 노트에 적힌 칠십 명 중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순복하는 공과를 배움 1923년에 우리 가운데에는 일곱 명의 동역자가 있었는데, 나는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한 동역자와 함께 인도했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에 동역자 집회를 가졌는데, 기타 다섯 사람들은 자주 우리 둘이 다투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 때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각각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그는 내가 틀렸다고 말했다. 그 때 나의 육체가 아직 처리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주 화를 냈다. 오늘(1936년) 나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나는 거의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툴 때, 나는 내가 틀렸다고 시인할 때가 많았지만, 때때로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나는 자신의 잘못은 용서하기가 쉬웠지만 남의 잘못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요일에 다투고서 그 다음날에 바버 자매님에게 가서 나보다 다섯 살 위인 그 동역자를 참소하였다. 내가, “제가 그 동역자에게 어떤 일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으니 자매님이 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바버 자매님은 “그가 너보다 다섯 살 위이니 자네가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네.”라고 하였다. “일리가 있든 없든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렇네. 성경은 어린 자는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네.” “그렇다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치에 따라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네는 이치를 따지지 말게나. 성경은 어린 자가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네.” 나는 성경이 왜 이렇게 쓰여졌는지에 대해 마음속에서 화가 났다.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낼 수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 다툼이 있은 후, 나는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게 쓴 물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 나는 금요일 오후에 다투고 나서 저녁에 한바탕 울고 그 다음날 바버 교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고통을 토로했다. 그녀가 나를 옹호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가지만, 토요일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한바탕 울게 되었다. 나는 내가 왜 몇 해 더 일찍 출생하지 않았는가를 원망했다. 언젠가 한번 다투고 나서, 나는 내게 좋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고하면 그녀가 반드시 내 동역자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나를 지지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개 동역자가 틀렸는지는 별개 문제네. 오늘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형제를 참소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우냐? 어린 양다우냐?”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러한 질문에 나는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 날 내 말과 태도가 확실히 십자가를 지는 사람 같지 않고 어린 양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연장한 동역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일생에서 가장 보배로운 공과를 배웠다. 나의 머리는 많은 이상으로 충만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적인 실제 안으로 인도하기 원하셨다. 그 한 해 반 동안 나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십 명의 동역자가 있다. 그 한 해 반 동안 순종의 공과를 배우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어느 누구와도 동역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경 가운데 나를 두시어 성령의 통제를 받게 하셨다. 그 십팔 개월 동안 나는 나의 주장을 내세울 기회가 없었고 다만 울면서 고통스럽게 견딜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내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뾰족한 부분을 갈으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로 나를 이끌어,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이제 나는 연소한 동역자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의 연단을 견디지 못한다면,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없다고 말하겠다. 오직 온유하고 겸손하며 화평한 어린 양의 영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다. 당신의 웅지와 큰 뜻과 재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 나는 이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나는 자주 나의 과실을 시인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문제는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다운가에 있다. 교회 가운데 옳고 그름은 아무 지위가 없다. 계수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파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흘러 보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1924년에 처음 나는 내게 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만 미열이 있었고 육신이 무력함을 느꼈으며, 가슴에는 통증만 약간 있었다.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랐다. 왕화성 의사는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실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내게 와서 무슨 병인지 한 번 검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검사를 마친 후 그는 얼마동안 낮은 목소리로 왕등명 형제에게 어떤 말을 했다. 내가 그들에게 검사 결과가 어떠냐고 묻자, 처음에 그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왕의사는 나의 폐병이 아주 심각하고 장기 휴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일을 마치기도 전에 주님을 뵈러간다는 것이 주님께 죄송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과 많은 교통을 갖기로 결정했다. 나는 주님께, “나에 대한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목숨을 내려놓기를 원하신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약 반 년 동안이나 나는 주님의 뜻을 만지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었고 주님은 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때 각지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들은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내가 일에 과로하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했다. 어떤 형제는 에베소서 5장 29절 말씀을 인용하여 나를 책망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얼마 후 난징(南京)의 청치궤이(成寄歸) 형제가 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한 면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그가 스코필드(Dr. C. I. Scofield) 성경의 통신 과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 삼십여 형제자매들이 내게 와서 교통을 나누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나는 하나님의 손이 내게 있는 이유는 내가 최초에 본 이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부흥 전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도 내 폐병은 좋아지는 조짐이 없었다. 비록 억지로 문서와 사경회 일을 조금 했지만 매우 힘겨웠다. 매일 오후에는 열이 있었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식은땀이 났다. 한 형제가 나에게 많은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자, 나는 “내가 녹슬 정도로 휴식을 취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오래 살지 못할지라도, 한 면으로 나는 하나님이 내게 힘주심을 믿어야 하고 또 한 면으로는 내가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주님께, 마지막으로 내가 마쳐야 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만일 주께서 나에게 맡기시고 마쳐야 할 일이 있다면, 주님이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를 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처음에는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복음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는데, 나는 억지로 일어나 주님이 내게 힘주시기를 구했다. 집회에 가는 도중에 나는 여러 차례 전봇대를 붙들고 잠깐씩 쉬어야만 했다. 전봇대를 붙들고 잠시 쉴 때마다 나는 주님께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은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형제들은 나의 이러한 상태를 알고서 내게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잃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나는 한 달 이상 기도를 한 후,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들을 책으로 써내야 한다고 느꼈다. 전에 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야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나는 내가 곧 세상을 떠날 줄로 생각했으므로 책의 집필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장쑤성(江蘇省) 우시성(無錫城)에서 작은 방을 빌려 그 안에서 하루 종일 집필에 몰두했다. 그때 내 병세는 더 악화되어 누워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집필할 때에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가슴의 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해 가슴을 책상에 밀착시켜야 했다. 사탄은 나에게 “너는 곧 죽게 되면서 편하게나 죽지 이런 고통을 당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이다. 너는 물러가라.”고 말했다. 사 개월에 걸쳐 나는 〈영에 속한 사람〉 세 권의 집필을 끝마쳤다. 집필 기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생명을 단념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인도했으며 이 기간을 거치게 했다. 집필을 마칠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교회에 대한 나의 마지막 간증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 집필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히 가까우시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성 형제는 편지로 내게, “자네가 이렇게 극도로 자신을 소모시킨다면 어느 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장에서, “나는 나의 주님을 사랑하므로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네.”라고 말했다. 나는 길고 긴 투병 기간에 〈영에 속한 사람〉을 썼다. 내가 책을 다 쓰고 출판해야 할 때 약 사천 원이 필요했다. 내 수중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필요를 채우시도록 간구했다. 이러한 필요를 네 명의 동역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얼마 후 주님이 사백 원을 공급해 주셔서 우리는 인쇄소와 계약을 맺고 인쇄를 시작했다. 계약서에는 만일 이후로 기간에 따라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계약금 사백 원을 되돌려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때 나는 내 병으로 인하여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인쇄소는 정한 때에 와서 돈을 요구했고,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때에 따라 돈을 지불하게 하셨다. 인쇄소 사람들은 우리가 신용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 “당신들 외의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정한 시기에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당신의 종으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때 내 병은 악화되어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깨어나 침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으며, 몸은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밤에 식은땀이 나며 목은 잠겨 있었다. 내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귀를 내 입가에 갖다 대어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몇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간호하였는데, 그 중 한 노련한 간호원 자매는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내가 많은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처럼 불쌍한 상태에 있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삼 사 일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라고 간증했고,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내게 알려 주자, 나는 “이대로 끝났으며, 나는 내가 곧 죽게 될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형제가 전보로 각지 교회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나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왜 이렇게 저를 빨리 데려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게 아직 충성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봐 내 죄를 자복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다. 그날 나는 전일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일만을 하겠다고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오후 세시까지 금식했다. 동시에 동역자들도 리위엔루(李淵如) 자매의 집에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께 내게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는데, 그 때 그분은 나에게 일생 잊어버릴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 그 첫 번째 말씀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였고, 두 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서리라”(고후 1:24)였으며, 세 번째 말씀은 “믿음으로 행하리라”(고후 5:17)였다. 이 몇 마디로 인해 나는 기쁨으로 충만케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내게 말씀을 주셨고, 나는 하나님이 이미 나를 치료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했다. 그러자 곧 시험이 닥쳐왔다. 성경은 “믿음으로 서리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때 내 마음 속에는 몸을 일으켜 설 것이냐 계속 침상에 누워 있을 것이냐에 대한 싸움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침상에 누워서 죽는 것이 서서 죽는 것보다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능력을 발하여 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백칠십육 일 동안 입지 않았던 내 의복을 입었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서려고 할 때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사탄은 나에게, “네가 앉지도 못하는데 일어서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나더러 일어서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어서는데 온 몸에서 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서리라! 믿음으로 서리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서 옷과 양말을 가져다가 입은 후에 다시 앉았다.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내게 임하여 믿음으로 서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가 바지와 양말을 입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더 걷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은 제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하나님은 “너는 아래층 이백십오 호의 리 자매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서는 한 무리의 형제자매들이 내 병을 위해 이미 이삼 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집 안에서는 걸을 수 있으나 어떻게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나는, “오 하나님, 제가 믿음으로 설 수 있다면 또한 믿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나는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을 향해 가서 그 문을 열었다.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내가 층계 위에 서 있을 때 그것은 내 일생에 내가 본 가장 높은 층계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 “당신이 나에게 걸으라고 하셨다면, 내가 죽을지라도 걷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어서, “주여, 나에게는 걸을 힘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축하여 걷게 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나는 난간을 붙들고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왔다. 내 온 몸에서 다시 식은땀이 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믿음으로 행하리라. 믿음으로 행하리라.”고 외쳤다. 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나는, “주여, 당신이 나로 능히 걷게 하십니다.”라고 기도했다. 믿음 안에서 나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그 스물다섯 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층계 아래로 내려왔을 때 아주 힘있게 느껴져 빠른 걸음으로 뒷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리 자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님께, “이제부터 나는 믿음으로 살며 더 이상 누워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도행전 12장 12절부터 17절에 있는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문을 두드렸다. 다만 거기에 문을 열어주는 로데가 없었을 뿐이다. 문이 열리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고, 칠팔 명의 형제자매들은 나를 주시했으며,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약 한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이 다 잠잠히 앉아 있었다. 나도 거기에 앉아 있었으며 내 마음 속에는 감사와 찬미가 충만했다. 이후에 나는 그들에게 내가 은혜로 치유 받은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모든 이의 영에 상쾌함과 기쁨이 있었고, 우리는 높은 소리로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찬미했다. 그 날 우리는 자가용 한 대를 빌려 교외에 있는 강완(江灣)으로, 유명한 여 전도자인 도라 유(Dora Yu) 자매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얼마 전에 내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너무나 놀랐다. 나의 출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찬양했다. 그 주일 나는 강단에서 세 시간이나 말씀을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한 독일인 의사의 집에서 물건을 처분한다기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그 의사는 바로 수년 전 엑스레이로 나의 흉부 촬영을 해준 의사였다. 그는 석 장을 찍고 나서 내게 소망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다시 한 번 찍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 흉부 사진을 내게 보여주면서, “이 사람의 상태는 당신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가 두 주도 못 넘기고 죽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나를 만나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돈을 벌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듣고 아주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 년 전 나는 신문에서 어느 유명한 독일인 의사가 별세하여 집과 가구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 의사가 과거 내 흉부 촬영을 해주었던 의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손을 들어 주님을 찬미하면서 “이 의사가 죽었습니다. 그는 내가 머지않아 죽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가 먼저 쓰러져 죽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보혈 아래에서 나는 “이 의사는 나보다 건강했으나 먼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치유함을 받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했다. 그 날 나는 기념으로 남겨 두려고 그의 집에서 많은 물건들을 사왔다. 일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주님을 앙망함 1923년, 웨이광시 형제는 푸지엔성 북쪽에 있는 졘어우(建毆)라는 곳에 전도하도록 나를 초청했다. 그때 내 호주머니 속에는 십여 원밖에 없었고, 그 돈으로는 여비의 삼분의 일밖에 충당할 수 없었다. 나는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에 걸쳐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나 돈은 생기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에 나는 다시 기도했다. 그러나 돈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 속에는 내게 있는 오 원을 한 동역자에게 주라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본래 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정말 돈을 사랑했고 돈을 내놓기가 아주 어려웠다. 나는 다시 주님께 “주여, 만일 당신이 나에게 오 원을 내놓으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 속에는 그렇게 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다. 나는 사탄에게 속아서, 기도한 후 오 원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서 오직 그 때 한 번 돈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는 주님께 순종하고 오 원을 그 동역자에게 보내 주었다. 돈을 보낸 후, 내 마음 속에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 동역자가 내게 왜 이 돈을 자기에게 주느냐고 묻자, 나는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금요일 저녁에 나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나는 하나님께, “여비를 위해 십오 원으로도 부족한데 당신은 나에게 오 원을 누구에게 보내 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더욱 부족하게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정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는 먼저 기선을 타고 쉐이커우(水口)에 가서 그 다음 다시 작은 나룻배로 졘어우에 가기로 결정했다. 쉐이커우에 가는 데에는 돈이 조금밖에 들지 않았다. 기선이 도착할 때쯤, 나는 내 뜻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나는 어떻게 기도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또 나는 주님께, “만일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으시려면 나를 위해 저렴한 가격의 배를 마련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쉐이커우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공들이 내게 흥정하러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뱃삯으로 단지 칠 원만 요구했다. 이것은 내 예상 밖의 가격이었다. 평상시의 뱃삯은 이것의 몇 배나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공에게, 왜 이렇게 값이 싸냐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이 배는 한 정부 관리가 전세 낸 것인데, 나는 뱃고물에 따로 한 손님을 태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기 때문에 배 삯이 얼마인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본래 내 호주머니 속에는 십 오 원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 동역자에게 오 원을 보내 주었고, 작은 기선의 뱃삯으로 몇 전, 나룻배의 삯으로 칠 원, 음식물을 사는 데 일 원 정도가 들었기 때문에 건구에 도착했을 때 아직 일 원 삼십 전이 남아 있었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분의 안배하심은 언제나 선한 것임을 인해 그분을 찬미한다. 졘어우에서 일을 마치고 푸저우(福州)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나에게는 돌아갈 충분한 여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주 월요일에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토요일까지 기도했다. 이번에는 내 심중에 확신이 있었고, 푸저우를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동역자에게 오 원을 보내주라고 하셨는데 그때 내가 주기를 아까워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누가복음 6장 38절을 읽게 되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나는 이 말씀을 붙잡고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의 약속대로 나를 위해 여비를 마련해 주시기를 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일 저녁에 영국의 필립스(Mr. Phillips)라는 한 선교사가 웨이 형제와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확실히 구원 받았고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형제였다. 저녁을 먹을 때 그는 나에게, 내 메시지로 인해 그와 그의 선교단체가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왕복 여비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 여비를 책임지는 분이 있다고 말했다. 내 말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당신이 푸저우로 돌아간 후에 일본에서 주님께 크게 쓰임받은 한 복음 전파자 윌키스(Mr. Wilkes)씨가 쓴 〈사역의 폭발력〉이라는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즉시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느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여비였다. 나는 그의 헌금을 받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저녁을 먹고서 나는 웨이 형제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필립스씨의 도움을 거절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기쁨과 평강이 있었다. 웨이 형제는 내 경제적인 형편을 몰랐다. 나는 그에게 여비를 빌렸다가 푸저우로 돌아간 후에 다시 갚아 줄까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에게 이 문제를 내놓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공급하시는지를 보기 원했다. 이튿날 출발하려고 할 때 내 호주머니 속에는 단 몇 전(錢)밖에 없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중 나왔고 어떤 이는 내 짐을 들어다 주었다. 나는 걸으면서, “주여, 당신은 나를 이곳에 인도하시고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반쯤 갔을 때, 필립스씨가 사람을 통해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내 주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록 누가 당신의 여비를 책임졌다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의 당신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 나이든 형제도 한 몫을 감당할 수 없겠습니까? 부디 이 돈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편지를 읽고서 이 돈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꼈으므로 그것을 받았다. 그 금액은 푸저우로 돌아올 여비뿐 아니라 한 번의 〈부흥보〉를 인쇄하기에도 충분했다. 푸저우로 돌아온 후, 전에 그 오 원을 받았던 동역자의 아내가 나에게 “당신이 떠나기 전에, 당신이 쓰기에도 부족했을 텐데 왜 오 원을 제 남편에게 보내 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그녀에게 그 오 원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수요일에 우리 집에는 일 원밖에 남지 않았고, 금요일에는 다 써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금요일에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내 남편은 밖으로 나가서 산보를 좀 해야겠다고 느꼈고, 그러다가 당신을 만났는데 당신이 그에게 오 원을 주었습니다. 그 오 원을 오 일 동안 다 쓰고 나자 하나님은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공급하셨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날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오 원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굶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녀의 간증을 듣고서 나는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했다. 주님이 나를 통해 그 오 원으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정말 신실하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이것이 내가 일생동안 배운 공과이다. 이제 나는 경험이 있어서 내 손에 돈이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께서 내게 더욱 주실 것임을 안다. 이 길은 가기 어려운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느끼겠지만, 막상 시험이 닥치면 두려워한다. 만일 당신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이 이 길을 가는 것을 권하지 않겠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엘리야 때의 까마귀의 공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 여러분이 이것을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자주 마지막 일 원을 쓸 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나는 이것을 십사 년 동안 체험하였다. 매번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얻으셨다.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공급하셨고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전에 공급했던 사람이 오늘 공급하지 않을 수 있고, 공급하는 무리는 계속해서 바뀌고 또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그분은 영원히 변함없으시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 이 길에서 여러분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이 일을 부득불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열 가지 또는 스무 가지 이상 여러분에게 제시해 줄 수 있다. 물질을 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확실한 액수를 정해야 한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든 이분의 일이든 그것을 하나님 손에 두어야 한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그녀의 천연적인 면에서는 드리기를 아까워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분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 아멘. ============================================================ 3. ** 워치만 니 형제를 통해 구원받은 형제들의 간증들. ****** 장이룬(張宜綸)-워치만 니의 처남 ㆍ그와 워치만 니 형제의 관계 워치만 니 형제님의 조모와 나의 조모는 동급생이었고, 그들의 우정은 우리 두 집안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부친들도 동급생이었고 누님들도 동급생이었다.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은 또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단지 세상 사람의 우정의 관계가 아닌 두 그리스도인 형제로서의 관계였다. 우리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내내 계속되었다. 1927년,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과의 교통을 통해 내 자신이 구원 받은 것에 대해 분명해졌다. 1934년에 그가 나의 누님과 결혼하여 비록 내 매부가 되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친척의 관계가 아닌 그리스도 안의 관계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ㆍ워치만 니 형제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음 나와 니 형제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내가 그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내게 공급함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참되고 살아 있는 누림 안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는 다만 나에게, “자네는 구원 받았는가?”라고 물었는데, 나는 “모르겠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자네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믿는가?”하면서, 이 구절을 몇 마디로 나누어 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을 믿는가?” “그것도 믿네.” “자네는 구원을 받았는가?” “나는 모르겠네.” 그러자 그는 강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만일 자네가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내 마음 속에 가려져 있는 수건을 제했고 내 영을 살렸다. 나는 즉시 내 속에서 기름부음을 느꼈고 내가 구원 받은 것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ㆍ워치만 니 형제의 섬김을 받음 나는 여러 차례 개인적인 문제로 니 형제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그를 찾아갔었는데, 그는 한 번도 나를 책망하지 않고 다만, “자네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아래서 일어나며 또한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로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롬 8:28-29). 한번은 내 처(妻)가 수술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 후, 원수는 그녀를 참소하고 공격하여 그녀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 이 소식이 니 형제에게 전해지자, 그는 내 누님과 함께 그녀를 심방했다. 니 형제님은 내 아내가 원수의 참소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서 계시록 12장 11절 말씀으로 그녀에게 공급했다.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다음 그는 내게 전화로, 그가 내 아내를 주님과의 교통 안에 머물게 돕지 못하여 원수에게 공격할 여지를 준 것은 그의 실패였다고 시인하며, 이 실패에 대해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는 이러한 전쟁이 단지 내 아내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더욱 남편과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 용서를 구했다. 그는 원수와 싸우기 위해서 내게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과, 이에 대해 그가 나와 하나로 서 있는데 있어서 그가 소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잘못은 그에게 있지 않고 내 헌신이 부족하고 내가 세상을 사랑함으로 원수에게 여지를 남겨 둔 것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주님께 회개했다. 회개한 그 순간 원수는 내 아내에게서 떠났고, 주님은 그녀에게 평강을 주셨다. 이튿날 아침 니 형제의 모친이 와서 그녀와 함께 기도할 때, 그녀는 이미 주님께 찬송하고 찬미하며 주님의 달콤한 기름 부음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니 형제님이 하나님의 법칙을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의 영적인 분별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정은 도움을 입었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회복하게 되었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대한 나의 인상 니 형제는 완전히 주님으로 적셔진 사람이자 주님 면전에 사는 사람이었다. 바버(M. E. Barber) 교사의 여러 해에 걸친 온전케 함을 통해 그는 개성과 성격과 행위에 변화가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과 의견을 가로막지 않고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내적인 존재가 주님에 의해 만진 바 되었고, 주님의 다루심을 받음으로 그는 풍성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천재적인 사람이 어리석고 우둔한 젊은 형제인 나와 함께 하기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후에 나는 그와 아주 가까이 일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어떤 사람의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건축될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되었고, 다른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든 사람의 결점과 미숙함으로 인해 좌절되지 않았다. 니 형제의 사역하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나는 그가 한 번도 자신의 권위로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본으로 세웠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하는 시간이 규칙적이며 또 그는 어떤 일도 경솔하게 대하지 않고 느슨하게 행동하지 않았으며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상관’으로 여기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친히 일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일할 때 온화함과 사랑과 인내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의 그에 대한 비평은 거의가 교회에 관한 그의 사역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 관한 그의 사역은 교리적인 것이나 이론적인 것이나 실행할 수 없는 어떤 계획이 아니라고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교회에 관한 계시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계시를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비록 니 형제의 생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해 준 교회의 실행을 대대적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는 온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수천의 믿는 이들이 교회 생활의 온전하고 충만한 실재 안에 살고 있다고 간증할 수 있다. 웨이광시(魏光喜)-그의 동급생 나와 워치만 니 형제는 푸저우(福州)에 있는 영국 성공회에 의해 운영되는 삼일학원에서 수년 동안 같은 반 급우였다. 우리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친구였고, 자주 함께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는 다 이름뿐인 교인이었으며, 머리 속에는 성경 지식이 가득했고, 겉으로는 세례와 성찬과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 등의 기독교적인 예식을 지키곤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지는 않았었다. 우리는 다 세상을 사랑했고 세상적인 허영을 추구했었다. 워치만 니 형제는 중국 문학에 조예가 아주 깊어서 자주 신문사에 기고했었다. 그는 그가 얻은 원고료로 복권을 샀다. 또한 그는 경극을 좋아했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고 명예와 사람들의 칭찬 얻기를 좋아했다. 대학교 일 학년 때 나는 그의 생활이 갑자기 변한 것을 보았다. 그는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과거의 세상을 사랑하던 생활을 끝냈다. 그는 학교에서 자주 친구들에게 간증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님을 믿었고 평상시에도 자발적으로 학교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곤 했었다. 수업 시간에 그는 자주 성경을 읽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 때에 그는 모든 과목에서 거의 최고 득점자였다. 그의 점수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생활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학교의 사감도, 학칙을 지키지 않았던 개구쟁이 학생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졌고 학칙을 위반하는 학생들을 처리하는 일들도 많이 줄어든 것을 시인했다. ㆍ워치만 니 형제를 통해 구원 받음 워치만 니 형제는 나에게 복음 집회에 참석하도록 요청했지만, 나는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기를 일심으로 추구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내 숙소에 와서 개별적으로 내게 복음을 전해 주면서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권했다. 그 당시 나는 그와 종교 문제를 가지고 변론했는데, 그는 나와 변론하지 않고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해왔다. “자네는 죄를 범한 적이 없는가? 자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자네가 구원 받은 것을 아는가?” 그 때 나는 이상하게 내 마음 속에서 괴로움을 느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성령의 정죄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다만 내가 진심으로 그분을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그가 내게 믿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나는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가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도 주께서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기도했다. 또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내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이 충만했다. 내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회개의 열매도 맺게 되었다. 나의 이름은 그의 기도 노트에 들어있는 이름들 중의 하나였고,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주께 감사드린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의해 회복됨 1924년에 나는 난징(南京)에 있는 진릉(金陵) 대학으로 전학했는데, 거기서 신신학(新神學)의 영향으로 나는 신앙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때 워치만 니 형제도 마침 난징의 한 형제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를 찾아가 교통했는데, 그는 나에게 신신학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의 병세가 조금 회복되었을 때 나는 그를 진릉 대학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안배하였다. 결국은 나의 동급생 두 명이 분명한 구원을 받았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의해 온전케 됨 1928년, 내가 대학을 떠날 때 쯤 나는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길 것을 고려했다. 나는 월급을 받는 전도사가 되기를 원치 않았지만,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니 형제와 교통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그때 그는 매우 외로웠고 마음을 같이하는 동역자가 필요했다. 내가 이 일을 그와 교통했을 때, 그는 그의 동역자들의 필요나 친분으로, 임의로 내게 나와서 주를 섬기라고 격려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나에게, 요단강의 물이 갈라진 후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발을 강물에 내디딜 때 비로소 강물이 갈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이 내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환경이 다 안배된 후에야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나오려고 했다(오십 년 전 중국에서 나는 워치만 니 형제같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한쪽에 제쳐놓고 팔 년 간 교편을 잡게 되었다. 1934년 봄, 상하이에서 열린 제3차 이기는 이 집회에서 워치만 니 형제는 오전에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주성에 대해 말하고, 오후에는 하나님의 이기는 이들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특별 집회의 메시지를 통해 주님은 나로 계시를 얻게 하셨고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큰 전환을 갖게 하셨다. 그 결과, 나는 처음으로 대집회에서 일어나 내 일생을 주님께 드린다고 선포했다. 당시 나는 여전히 교직에 남아 있었다. 1935년, 산둥(山東) 옌타이(煙臺)에서 새로이 성령 충만을 체험한 후, 니 형제는 푸지엔성(福建省) 톈주(泉州)에서 특별집회를 열었다. 그는 나에게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 특별집회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성령 충만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었고,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과 담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기는 생활의 비결, 곧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간증한 바와 같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시는 이 비결을 전했다. 그때의 집회는 한 차례의 대부흥을 가져왔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의해 확증되고 위임됨 1936년 10월, 워치만 니 형제는 푸저우 구랑위에서 동역자 집회를 가질 때 전보로 나에게 참석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이미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분명했고, 직장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주님의 인도를 앙망하고 있을 때, 니 형제의 전보를 받은 나는 이것이 주님의 안배임을 알고서 즉시 참석하러 갔다. 주님이 내게 극히 드문 기회를 주사 후에 내가 후에 출판한 세 편의 워치만 니 형제의 간증을 듣게 하셨음을 감사드린다. 그 특별집회를 마친 후, 니 형제는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나를 먼저 광저우(廣州)로 보냈으며 그 다음 홍콩에 가서 사역하도록 안배했다. 1937년, 워치만 니 형제는 중국 서남부 지역에 있는 윈난(雲南) 쿤명(昆明)에서 주님의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후, 그가 곧 떠나야 했기 때문에 그는 내가 그곳 교회에 와서 돕기를 원했다. 나는 그 부담을 받고서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나는 그곳에 남아서 1940년에 홍콩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삼 년간 일했다. 제이 차 세계대전 후, 워치만 니 형제가 광주나 홍콩에 올 때마다 나는 기회를 잡아 그와 교통을 가졌다. 사전에 나는 그에게 질문할 항목들을 적어 두었는데, 그와 교통한 후에는 많은 문제들이 물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매번의 교통에서 나는 풍성한 생명의 공급을 얻었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의해 훈련받음 1948년, 나는 다시 상해 교회에서 열린 특별집회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니 형제는 그 집회에서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온전히 주님께 양도함(헌신)”에 대해 말씀을 전했는데, 그의 말은 매우 강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으며, 집회 가운데 임재가 가득했고, 많은 사람들이 부흥되어 자기 자신과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기를 원했고, 교회 가운데서 함께 동역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다. 그 특별집회의 마지막 집회에 내가 푸저우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니 형제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있는 데에서 나를 보내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본래 그리스도는 한 분이셨으나 오늘날 일꾼들의 관점과 강조점이 다름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여러 분으로 나누인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일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그 그리스도를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의 일은 실패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와 아주 친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다만 예수를 에워싸고 있다(막5:24). 혹 참되게 주님의 등을 만지고 주님의 손을 잡고 심지어 주님의 옷자락을 찢었을지라도 생명에 있어서는 그분과 조금도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병든 사람은 다만 혈루병을 앓는 그 여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 안에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한 사람뿐이었다(마9:22-23). 오늘날 어떤 사람은 실로 벳세다의 그리스도를 알고(막8:22-26), 고라신에 계신 그리스도(막5:1-20)와 엠마오의 그리스도(눅24:13-35)를 알고 있다. 그들은 체험에서 참되게 기적과 기사를 보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러한 기적을 행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만일 참된 내적인 계시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엠마오의 그리스도를 감동적이게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며 심지어 사람들 마음속에 실지로 뜨거움이 있게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참된 일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다. 나는 다만 웨이 형제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역자와 형제자매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시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공급해 줄 수 없다면, 우리의 일은 실패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님의 일꾼의 두 종류의 입장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일과 성경 해석과 기적과 기사와 기도에 응답받음 등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계시된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ㆍ워치만 니 형제와의 마지막 접촉 1950년 초에 워치만 니 형제는 홍콩에 왔고, 얼마 후 위트니스 리도 왔다. 과거에 두 형제가 한 지방 교회를 동시에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어서 그들의 사역은 홍콩 교회에게 큰 부흥을 가져다주었다. 원래 삼백 명 밖에 안 되었던 모임이 짧은 기간 내에 이삼천 명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홍콩 교회가 받은 특별한 축복이었다. 장우천(張晤晨)-그의 훈련생 ㆍ워치만 니 형제를 통해 구원 받음 1935년 여름, 산둥 옌타이에서 나는 처음으로 워치만 니 형제를 보았다. 그때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비록 내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도 했으며, 외조부님이 교파의 순회 목사였지만, 기독교가 내게 준 인상이 나빴으므로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로 하여금 워치만 니 형제와 위트니스 리 형제를 만나게 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 내 이모는 내 구원에 대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회를 잡아 위트니스 리 형제의 응접실에서 워치만 니 형제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그가 내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변론했다. 그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많은 이유를 들어 증명해 주었지만, 나는,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논쟁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방안에 있는 공기와 전파를 볼 수 있습니까?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이것들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속에 있는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 당신은 그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접촉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당신의 깊은 속의 필요와 느낌에 따라 다만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니 형제가 가르쳐 준 대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내 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주일이 되어서 나는 집회에 참석하러 갔다. 그날은 위트니스 리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의 말씀은 매우 능력이 있어서 나를 정복하고 구원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확실하게 구원 받았다. ㆍ워치만 니 형제의 서적을 통해 도움 받음 구원 받은 후, 나는 은밀히 내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다. 주님께서 내게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했기 때문에, 나는 세상을 원치 않고 일생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 후 십이 년 동안 워치만 니 형제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영적 출판물을 통해 계속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게 훈련을 받음 나는 1948년에 푸저우 구링산(鼓嶺山)에서 니 형제님의 훈련을 받은 제일 기 훈련생이다. 나는 약 사 개월 동안 그의 훈련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내가 간증하고 나서 그가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해주었다. 형제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 때로 일어나지 못하고 속에 고갈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까? 나는 형제가 오늘 후로 이러한 것들을 개의치 않기 바랍니다. 형제가 일어날 수 있든 없든 주의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고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주님은 자연스럽게 형제를 이끌어 통과하게 하실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은 우리 자신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가까이 할 때, 어려움은 곧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네의 우화를 들려주겠습니다. 하루는 지네가 길을 가다가 자기의 발을 쳐다보면서 어느 쪽 발이 먼저 움직이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왼발일까, 오른발일까, 여덟 번째 다리일까 열 번째 다리일까. 계속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생각 속의 어려움이 그의 행함의 어려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 햇빛이 나자 그는 생각 없이 빛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는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고, 어느 쪽 발이 먼저 움직이고 어떻게 걷는지를 잊어버리고 다만 걷게 되었습니다. 생각 속의 어려움이 사라질 때 실행에 있어서의 어려움도 사라집니다. 내적인 메마름과 눌림과 일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신이 이것을 한 가지 일로 삼는다면 한 가지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가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문제가 싸움으로써 정복되지만, 어떤 때에는 잊어버림으로써 정복됩니다. 많은 일들은 능력과 강함을 통해 지나가게 되지만, 어떤 때에는 잊어버리기만 하면 지나가게 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당신의 발버둥침과 방법을 포기할 때, 오히려 그분의 능력이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풍성을 조금 보여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나 기도나 집회나 형제들과의 교통을 통해서 약간 주님의 영광을 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어려움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적인 충만은 잊어버리는 것에 달려 있고, 잊어버리는 것은 주님을 한 번 만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게 됩니다. 나의 간증에 대한 그의 평가를 받고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저는 폐병을 앓았으며 침 속에 피가 섞여 나오는 상태에서 일 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 믿음이 생겨 내 병은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다시 피를 토하고 증세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니 형제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병이 치료받는 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고 (2) 병의 증세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고 (3)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만성 위장병이 있어서 바울은 그에게 더 이상 물을 마시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 집 아래에 연못을 파서 빗물을 모아두거나 다른 근원에서 물을 끌어 왔습니다. 물 속에서 균이 번식하여 그 물은 위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약간 쓰라고 했는데(딤전 5:23), 술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혈액을 순환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바울에게 병을 치료하는 은사가 있어서 상당히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지만, 그는 디모데의 병은 치료해 주지 않았습니다. 디모데 자신도 은사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의 위장병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나는 물을 마시든 포도주를 마시든 문제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염된 연못의 물을 마시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외적인 행위로 볼 때는 같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일어나 걷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일어나 걷는 것은 외적으로 볼 때 그 행위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걷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어떤 위생의 원칙을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결코 그러한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손이 마른 그 사람을 보십시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병의 증세가 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증세를 보지 않고 주님이 손을 내밀라고 하실 때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증세는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믿을 만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강건케 된 후에야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실 때 곧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맥박이 정상인지 또는 열이 내려졌는지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라면, 당신은 위생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가 극단적인 사람이 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 워치만 니 형제는 그가 어떻게 치료받았는가를 간증해 주었다. 내 자신이 병을 앓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나를 치료하셨습니다. 나는 내 병의 증세를 다루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치료되었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병을 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당신이 계속 병 자체를 주시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효력을 잃게 됩니다. 열이 좀 내려도 나는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열이 좀 높아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내 눈은 열의 높낮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열의 높낮음과 혈구의 많고 적음은 주님이 아니요, 오직 주님만이 주님이십니다. 열이 나는 것에 대해 웃고 그 높낮음을 개의치 않기를 배워야 하며, 병세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병세는 거짓된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았다고 말씀하셨다면 나은 것입니다. 붉은 피를 토해낼 때는 믿음이 시험받을 때입니다. 병세는 변하기 때문에, 병세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처음에 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으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여전히 위중하였으므로, 나는 일어나서 “주여, 만일 병세가 거짓된 것이라면 병세를 책망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한 후, 한두 시간 후에 병이 나았습니다. 나에게는 폐병과 신장병과 간장병과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1923년에는 복막염으로 한 달 동안 누워 있었는데, 숨쉬기만 해도 아팠고 열도 높았으며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미야우(繆) 형제가 몇몇 형제자매들에게 가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나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자매(바버 교사)가, “주여, 무덤 안에서는 누구도 당신을 찬미할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가 죽으면 당신을 찬미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내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은 여전히 높았고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나는 일어나 뤄싱타(羅星塔)에 가서 한 기(期)의 기독도보(基督徒報)를 편집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조심스럽게 당신의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더 이상 병세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병세들은 시험과 거짓말로 취급하고, 그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어떤 병은 즉시 낫지만 어떤 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은 병으로 인해 내가 주님의 치료하심을 구했는데, 주님은, “병이 빨리 치료되지는 않겠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한 척의 배가 강에서 항해하다가 앞에 있는 큰 암초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너는 내가 돌을 옮겨서 너로 지나가게 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수위를 높여서 그 위로 지나가게 하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내 속에서 주님의 뜻에 대해 분명해지자, “주여, 나는 어려움이 제해지기보다 은혜가 더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병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병세를 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고서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하면 되며 병세로 확증할 필요도, 병세의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비록 돌이 제해지지 않았지만 수위가 높아졌으므로, 이것은 간신히 통과한 것이 아니라 넉넉히 통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이상의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2)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병세를 보지 마십시오. (3) 하나님의 말씀이 즉시 치유하지 않으면 그분의 은혜가 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결코 병만 앓게 하고 족한 은혜를 주지 않으시려는 뜻이 없으십니다. 비록 바울은 몸에 병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질병은 결코 일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참되고 신실하신 주님께 의탁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구링(鼓嶺) 훈련에 참석하기 한 달 전에 나는 다시 많은 피를 토해서 상해 병원에 입원했었다. 각혈이 그쳤을 때 구링에 갔기 때문에, 나는 병이 치료되었는데도 여전히 병세가 남아 있는 문제를 물었던 것이다. 니 형제님이 내게 준 도움과 인도를 얻은 후, 주님은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되고 그 외의 것들은 다 거짓된 것임을 내게 보여 주셨다.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내 병은 치유함을 받았으며, 병이 치유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병세를 주의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병세는 다 거짓된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948년 유월부터 1991년 오늘까지 사십삼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각혈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침에 피가 섞여 나온 적도 없었다. 병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ㆍ워치만 니 형제에 대한 인상 사람들이 니 형제님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그의 답변은 언제나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분명하고 명쾌하며 기름부음과 빛이 충만했다. 그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럽고 열려 있었으며, 그는 누구나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한 도량이 넓고 마음이 관대했다. 영적인 일에서 그는 높이 올라갔으며 깊이를 만졌다.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는 극히 풍성한 인식과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방을 받았지만, 한 번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더욱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니 형제님, 누가 형제님을 오해할 때 왜 그들이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형제님,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믿는다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면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사람들이 배후에서 그를 비방할 때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면하여 그를 책망할 때에도 변명하거나 변론하지 않았다. 그는 금전을 아주 경한 것으로 여겼다. 그의 손을 거친 금전의 액수는 상당했고, 주님의 일에서 그에게 분배된 것과 그가 주님을 위해 경영함으로써 번 돈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쪽 손으로 들어온 것을 저쪽 손으로 내보냈다. 한번은 그가, 중국의 동역자들 가운데서 마지막 일 원을 가장 자주 사용한 사람은 자기일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그를 가까이한 사람은 그의 두 손이 자주 비어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기를 위해 무엇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일과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드렸다. 장위란(張郁嵐) 박사-친밀한 동역자 워치만 니 형제는 1945년 3월 6일에 중칭(重慶)에 왔는데, 도착하고 나서 삼 일 후에 중칭 교회는 그를 애찬에 초대했다. 그는 나의 집에서 십 일간 묵었고, 우리는 일 년 동안 함께 있었다. 후에 니 형제님은 부근에 있는 샤오롱칸(小龍坎)으로 이사했다. 우리 몇몇 사람은 매주 한두 차례 그의 집으로 찾아갔으며, 반 년 이상 그와의 교통을 추구했다. 나는 자주 어떤 문제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하나씩 니 형제님에게 질문했는데, 이러한 교통을 통해 나의 많은 난제들이 해결되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아주 달콤한 느낌을 주었으며, 친근하고 존경할 만하며, 태도가 온유하고 겸손하며, 그의 말은 기름부음으로 충만했다. 그와 만나서 대화해 본 사람은 속에 공급과 적셔짐이 있다고 느낄 뿐 전혀 간격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칠팔 명의 형제자매들은 자주 그의 주위에 둘러 앉아 몇 시간씩 묻고 대화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언행이 나에게 남긴 인상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ㆍ영적인 가르침에 관하여 니 형제님은 그의 학생 시절에 매주 한 번은 꼭 바버 교사를 찾아가 책망을 들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책망할 것이 없을 때 바버 교사는 의도적으로 어떤 질문을 내놓고 그에게 답변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답변에서 흠이 잡히면 즉시 책망했다. 그는 이로 인해 아주 좋은 영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한번은 한 고용인이 약 네 시간 동안이나 삿대질을 하고 책상을 쳐 가면서 워치만 니 형제를 책망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몇몇 동료들은 그 고용인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워치만 니 형제는 잠잠히 의자에 앉아서 손에 신문을 들고 안색도 변하지 않은 채 아무 일도 없는 양 앉아 있었다. 그는 책망을 듣는 동안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볼 때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손에서 징계를 받고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에 그 자신을 계속 복종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주 워치만 니 형제는 갑자기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모든 환경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 아래 있으므로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그에게 해를 입힌 형제들에 대한 워치만 니 형제의 관념은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한번은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범죄한 형제는 흙탕물에 넘어진 어린 아이와 같다. 그들의 의복과 머리카락이 더럽혀졌지만, 목욕을 하면 깨끗하게 된다. 모든 형제자매는 장래 새 예루살렘에서 다 투명한 보석이 될 것이다.” 중칭에서 형제들이 여러 차례 그에게 만찬에 참여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묵묵히 기도할 뿐 떡을 떼거나 잔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하이 교회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여기서 떡을 뗄 수 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언제 사역이 회복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사역에 관한 주님의 인도에 있어서 워치만 니 형제의 분별력은 매우 예리했고 판단력은 매우 신속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묻자, 그는 “만일 내가 틀렸다면, 주님이 나귀를 사용하여 발람을 제재했듯이 나를 제재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는 워치만 니 형제의 행함이 항상 성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ㆍ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한번은 워치만 니 형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제도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제도를 처리하는 것이 헌신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도 안에서 헌신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돈을 걸지 않는 도박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워치만 니 형제의 답변은 이러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한 것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옳고 그름은 생명의 정도에 달려 있다. 생명의 정도는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를 보면 된다.” ㆍ기도와 주님과의 교통 워치만 니 형제는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말해 내면서 기도했는데, 그 말 끝에 특별한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중칭에 있을 때, 나는 무의식중에 그의 기도하는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임재가 나와 함께한다고 느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님을 향해 말해졌으며, 말씀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났다. 나중에 한 인도하는 형제님이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책망해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는 여전히 한 단어 두 단어,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있는 것을 토해 낸다. 이러한 기도로 나는 쉽게 기름부음을 만질 수 있었다. 주님과의 교통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해, 니 형제님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기차가 쓰촨(四川)에서 쿤명(昆明)으로 달릴 때, 많은 굴을 통과하기 때문에 명암이 교차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과의 교통을 체험하는 것도 이와 같다.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먼저 죄를 자복해야 하고, 죄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의지를 사용하여 계속 교통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ㆍ생명의 성숙 생명의 성숙에 관하여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의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 사람은 큰 두뇌를 가지고 있을 뿐 실제적인 성숙에는 이르지 못한다. 성숙은 분량의 확장의 문제이다. 당신의 분량을 넓히기 위해서는 당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허락해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오 원을 손해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있겠지만, 천 원을 손해 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두세 차례 남을 용서할 수 있지만, 다섯 번째로 남을 용서할 때에는 손이 떨리게 된다. 설익은 과실과 잘 익은 과실의 차이는 그 맛에 있다. 선 것은 시고 떫고 쓰고 딱딱하다. 익은 것은 달고 향기롭다. 마담 귀용은 성숙한 향기를 풍겼으며, 나이든 사람의 선생이자 어린아이의 친구였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설익은 바나나를 억지로 익히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다. 인자는 오셔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먹고 마실 때 그 사람의 참된 상태가 드러난다. 생명은 수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이 있다면 수양이 필요 없고, 영이 없을 때 사람은 수양하려고 한다. 백합화의 꽃이 피고, 나는 새의 깃털이 자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전혀 그러한 것들을 위해 수양할 필요가 없다. 수양하는 것은 단지 세상적인 관념에 따른 성자가 되게 할 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힘써 열매 맺으려고 할 필요 없이, 다만 소극적인 면에서 십자가의 표시를 지니기만 하면 족하다. 우리가 힘쓰는 것은 다만 생명의 성장을 지연시킬 뿐 생명의 성장과 성숙을 촉진시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환경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안배가 바로 성령의 통제이다. 한 번 하나님의 안배를 피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분량을 한 번 넓힐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 속에서 생명이 성숙하는 시간이 더 지연되고, 심지어 보충 수업을 거쳐야만 성숙할 수 있게 된다. 고난을 거칠 때 믿는 이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의 분량이 넓어지거나 그가 강건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고난을 당할 때, 생명의 성숙은 바로 성령의 통제하심을 받아들인 총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의 생명이 성숙했는가만 볼 뿐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은밀한 가운데 받아들인, 그에게 가해진 성령의 통제는 보지 못한다. ㆍ몇 가지 영적 격언 한번은 워치만 니 형제가 “물건은 낮은 데 둘수록 안전하다. 컵은 바닥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더욱 안전하다는 뜻이다. 또 한번은 그가, “십자가에서 바람이 빠지면 바람에 날아간다.”고 말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질 때 사람들에게 뭔가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뭔가를 말할 때 십자가의 의미는 끝나게 된다. 또 한번은, “어떤 사람은 누각 위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누각 아래서 서는데, 누각 아래서 서는 사람은 누각 위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비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 사람을 권면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니 형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을 권면할 때 두 가지 결과가 있게 된다. (1) 그를 회복함. (2) 그를 더 강팍하게 함. 사람에 대한 권면이 합당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권면한 사람을 보면 된다. 만일 그가 당신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아 어두움에 떨어진다면, 당신의 권면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만일 그가 당신의 권면을 받지 않고서도 여전히 주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의 권면이 합당치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처마 밑에서 자고 있는 거지들을 깨워서 그들에게 물만두를 한 그릇씩 사주고 복음을 전해 준다면, 형제는 형제 안에서 기름부음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만에 온 후, 워치만 니 형제의 조카 수푸를 만났는데, 그는 어렸을 때 워치만 니 형제가 길가에서 한 무리의 인력거부가 땅에 웅크리고 앉아서 도박을 하는 것을 보고 그도 그들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함께 말하고 웃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워치만 니 형제는 참으로 몇몇 사람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 같이 되었다. ㆍ워치만 니의 생활 워치만 니 형제의 생활을 관찰해 볼 때, 그는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알고 궁핍한 데 처할 줄도 알며, 언제 어디서나 그는 비결을 배웠다고 느낀다. 그가 처음 중칭에 왔을 때, 그는 침대 하나와 테이블 하나와 의자 하나 밖에 없는 한 성의 누각에서 살았다. 내가 그를 보기 위해 그 누각을 오를 때마다 나무로 만든 계단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워치만 니 형제는 후에 자기가 경영하는 공장의 빌딩에 거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 차이가 없었고 그의 태도는 여전했다. 음식에 있어서, 그는 한 끼에 만토우(중국 북부의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딱딱한 흰 빵 : 역자 주) 하나를 먹고 냉수만 마실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풍성한 애찬을 누리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생활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엘리자베스 레드메첼(Elizabeth P. Rademacher)-서양 선교사의 간증 내가 워치만 니 형제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십팔 년 전의 일이다. 그것은 1943년 2월, 미국이 정식으로 일본과 교전하던 때였다. 그 때 중국 상하이의 국제 거류지에 있던 외국인들은 대다수가 일본 사람들의 통치 하에 있었다. 나와 기타 많은 미국인들(내 동역자들은 영국인들임)이 억류되기 전날 밤, 워치만 니 형제는 의례 그러했듯이 사전에 아무 통보 없이 우리 서양인 네 사람을 방문했다. 약간의 다과를 먹으면서 달콤한 교통을 누린 후, 그는 그의 생화학 공장에서 만든 농축 비타민이 들어 있는 상표 없는 작은 병을 건네주면서, “매일 반 스푼씩 드십시오.”라고 말했다. 얼마 동안이나 억류될지 모르는 한 작은 자매에게 워치만 니 형제는 이러한 돌봄과 관심을 가졌다! 내가 처음 워치만 니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1934년이었으며, 그 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었다. 나는 그에 대해 흰 머리에 긴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를 연상했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을 줄이야! 그때 그는 삼십 세 정도였다. 몇 년 후, 나는 나보다 연장한 서양 선교사와 함께 허퉁루(哈同路)에 가서 만찬집회와 특별집회에 참석하면서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ㆍ그 영의 내주하심 1938년 초, 워치만 니 형제는 상하이 교회에서 성령에 대한 사경회(Bible Study)를 인도했었다. 나는 오순절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순절파에 대해 다소 혼돈과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워치만 니 형제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으며, 나를 괴롭혔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그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의 문제들은 예를 들어, 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충만함과 나타남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그들의 생활은 이것과 일치되지 않는가? 경건한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왜 나는 실패의 생활만 하는가? 등이었다. 주님이 워치만 니 형제를 통해 내게 주신 말씀은 내 일생에 혁명적인 돌파를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내가 그로부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 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의 하늘이 맑아졌다! 전에는 주님께서 내게서 아주 멀리 계신 분 같았지만, 이제 그분은 내 안에서 이렇게 참되시다. 이것이 나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오늘 나는 내 안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성령의 역사에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외적인 면에는 은사와 나타남이 있지만, 더 중요한 내적인 면이 있는데, 바로 생명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내적 충만이다. 그는 내게 아주 도움이 되었던 한 가지 예를 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바로 무거운 짐을 실은 차의 바퀴에 바람이 부족한 상태로 시동을 걸면 차가 망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러 차례 성령의 옮겨 부음을 체험했으나 그의 속에 이와 부합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한 폭의 적절한 그림이다. 나는 ‘망가진 차’가 되지 않은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왜 과거에 내가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사랑했지만 주님을 위해 내려놓았던 한 여자에 대한 간증을 들었다. 그는 시편 73편 25절을 인용하면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씀이 그의 실재가 되었다고 증거했다. 이 간증은 나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ㆍ왕국 사경회을 마쳤지만, 내게서 주님의 역사는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워치만 니 형제가 홍콩과 영국으로 떠나기 전, 주일 저녁에 우리 여섯 사람은 한 선교사 부부의 집에서 난로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전에도 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모임을 몇 차례 가졌었다. 늘 적지 않은 서양인들이 모여서 함께 음식을 먹고 교통을 나누며 니 형제님이 유창한 영어로 왕국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가 전한 성령에 관한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질문하며 그의 답변을 듣기를 사모했다. 한번은 갑자기 하나님이 여기에 서서 말씀하신다는 깊은 내적 느낌이 있었다. 이것이 그가 출국하기 전 날 그에게 주어진, 그의 부담을 나누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나는 왕국에 대해 조금 더 교통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작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주님은 왕국을 전파하고 선포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 순간 나는 감동을 받았고, 워치만 니 형제는 그것을 알아차리고서, “레드메첼 자매님, 두려워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바로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충성되고 겸손하고 온화하며 친근한 주님의 종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ㆍ이 외의 회고담 나는 또한 그가 아주 실지적이고 자상하게 사랑의 관심을 보였던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한다. 하루는 워치만 니 형제가 아내와 함께 우리를 찾아와 우리 선교사 각 사람에게 실크 이불을 한 채씩을 선물했다. 여러 차례 우리는 그의 집으로 식사에 초대되어 음식이 정교한 푸저우 요리를 누렸다. 한번은 내가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결정을 내렸는데, 얼마 후 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나에게 한 답변은, “때로 우리의 잘못도 옳은 것입니다.”였다. 나는 큰 위로를 얻었다. 1940년부터 1943년 초까지 교회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우리는 도시의 여러 지역들에서 비교적 작은 지역 주(主)의 상(床) 모임과 지역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워치만 니 형제는 보통 주일 오전과 수요일 저녁에 말씀을 공급하셨고, 때로는 금요일 저녁에 새로운 믿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으며, 이외에 또한 특별집회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나는 그가 자주 바버 교사에 대해 언급한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기에 그녀로부터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씀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고, 내 안에 지울 수 없는 많은 인상들을 심겨 주었다. 예를 들어, 그는 로마서 12장 1-2절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자격이 있는가? 선한 것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합니다.” 또 그는 새로운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말을 했었다. “구원만 받고 헌신하지 않는 것은 마치 철로 위에 한 쪽 선로만 놓여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노정에서 전진하려면 이 두 가지 다 없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진리 중에 당신을 자유케 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진리는 곧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진리가 당신에게 ‘진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뜻에 관한 한편의 메시지가 나를 온전히 정복했다. 그 메시지는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의 하나님의 뜻을 묘사했다. 그가 말한 중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본래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의 의지-하나님의 의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탄이 타락하자 우주 가운데에는 두 번째 의지-거역하는 의지-가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을 창조하시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택할 수도 있고 사탄을 택할 수도 있게 하셨다. 영원 미래 안에서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진 후, 우주 안에는 다시금 하나의 의지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의지는 태초의 의지와 다르며,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로 연합된 의지이다. ㆍ워치만 니의 인도를 신뢰함 1942년에 워치만 니 형제의 사역이 중단되었다. 우리는 그의 동향이나 다른 지방에서의 그의 사업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중단을 처음에 이상히 여겼다.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나는 그의 합동로에서의 사역이 이미 중지되었다는 것을 몰랐지만 한 줄기 암류(暗流)가 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들은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도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는데, 나는 그 이유가 일본인의 침략 때문인지, 우리가 간첩 활동을 할까봐 두려워서인지 몰랐다. 그 기간에 때때로 워치만 니 형제는 아무 연락 없이 우리를 찾아 왔는데 그것은 우리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때 그는 생화학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친히 우리를 안내하며 견학시켜 주었다. 그의 ‘장막 짓는’ 기간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든 우리는 다만 그의 인도를 믿고 신뢰했었다. 어떻게 우리가 그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충성되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우리 몇몇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교회 생활 안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위트니스리(witness Lee)-그의 동역자 ㆍ워치만 니와의 접촉에서 받은 인상 1925년부터 1950년까지, 나는 워치만 니 형제를 이십오 년에 걸쳐 알아왔는데, 그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해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ㆍ주님께 절대적임 그는 주님을 그의 처음 사랑으로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주님은 모든 일에서 으뜸이셨다. 주님의 권익에 있어서도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편리를 위해 어떠한 진리도 희생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다. 주님에 대한 그의 헌신은 절대적이었다. ㆍ온전히 균형 잡혀 있음 성경을 아는 것과 교회 실행에 있어서 그는 매우 균형 잡혀 있었다. 그는 교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균형을 잃고 지나치게 어떤 가르침이나 어떤 실행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어떤 일에 대한 관점을 다른 관점과 비교했었다. 일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동일한 원칙을 실행했다. ㆍ포괄적임 그는 많은 고전적인 기독교 서적을 읽음으로써 여러 기독교 단체의 모든 성경적인 장점들을 취하여 그 모든 것을 교회 생활의 실행에 적용했다. 그는 결코 성경에 부합되는 어떤 장점이 잘못된 근원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거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극단적이 오순절파에서도 좋은 것들을 취했다. 이러므로 그는 역대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에게 주신 모든 풍성들을 현재 교회의 실행 안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는 지방 교회들 안에서 편협하지도, 종파적이지도 않은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 모든 풍성들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ㆍ성경에 대한 인식 내 일생에 워치만 니 형제처럼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을 결코 만나본 적이 없다. 그가 역대의 가장 좋은 그리스도인 저자들로부터 많은 면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그는 또한 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성경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보았다. 그는 성경의 문자들을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의 영을 인식했다. 그는 성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성경의 영을 만졌다.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빛이 충만했고 생명이 충만했다. 그는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를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도 가졌다. ㆍ주님에 대한 인식 그는 진실로 주님을 온전히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행사뿐 아니라 주님의 길도 알았다. 그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공의와 거룩을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영원한 뜻과 현시대의 그분의 경륜을 알았다. 그는 주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생생한 주관적인 체험을 온전히 가졌다. 그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분의 몸 된 교회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았다. ㆍ생명에 대한 인식 그는 주님이 그의 영 안에 거하시는 산 영이시라는 것을 인식했고, 또한 그 영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거절하기를 훈련했고, 또한 영 안에서 행하고 처신하기를 훈련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의 생명이신 주님에 의해 살았다. 그는 일을 지나치게 주의하지 않았고, 언제나 일보다 생명을 더 관심했다. 그는 거듭거듭 일이 생명의 흘러넘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역은 일의 사역이 아닌 생명의 사역으로서 생명에 의해 수행되는 사역이었다. 그는 그의 행함보다 그의 어떠함을 더욱 주의했다. 그는 진실로 생명의 사람이었다. ㆍ교회에 대한 인식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그의 생명과 내용으로 지닌 그리스도의 표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또한 그는 오직 지방 교회가 존재함으로써만이 교회가 실행될 수 있고, 지방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완성하고 음부의 문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합당한 입장 위에 있는 정상적인 교회 생활의 회복이 하나님의 현재 경륜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교회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내용과 실제만이 아닌 교회의 실행에 관해서도 신약으로부터 온전한 계시를 얻었다. 수년 동안의 그의 사역에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중요시했을 뿐 아니라 교회 생활의 실행도 강조했다. 그의 이상(異象)은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이었고 교회는 그의 생활이었다. 그가 교회를 위해 받은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보다 많았다. 교파가 그에게 가한 핍박은 대부분 그가 교회를 강조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교회 생활의 실행에 관한 이상을 수행할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모든 도시들에 지방 교회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기를 갈망했다. ㆍ시대적인 은사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이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을 위해 이 시대에 그분의 몸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은사인 그를 절대적으로 존중한다. 나는 내가 주님의 권익을 위해 이 땅에서의 현재 주님의 움직이심 안에서 이 은사를 따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충분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시대의 독특한 은사이자 이 시대의 신성한 이상의 선견자인 이 사람을 따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다. 내가 구원 받은 후 즉시 나를 니 형제님과의 이러한 유익한 관계에 두시고 긴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을 통과하면서 그분의 회복의 역사 안에서 나를 그와 가장 친밀한 관계 안에 두신 주님께 더욱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그 영과 생명에 관한 계시에 있어서 내가 그를 통해 본 것과, 생명의 옮겨 부음에 있어서 내가 그로부터 받은 것과, 일과 교회에 관한 일들에 있어서 내가 그로부터 배운 것은 영원으로라야 그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