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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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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형제와의 교제--제임스 패커
lhyunsik

1. 하나님과의 형제와의 교제--제임스 패커의 책에서 발췌 헬라어의 교제라는 말은 함께 나눔,혹은 어떤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함을 의미한다. 공동참여의 형태는 두가지다. 하나는 당신이 갖고 있는 어떤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는 일이며 또,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것을 당신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제는 두가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수직적인 차원이고 , 다음은 수평적인 차원이다. 교제의 수평적차원은 그 존립을 가능케하고 있는 수직적차원을 전제로 한다.교제의 수직적 차원은 요일1:3에서 정의를 정확히 표현해준다. 이러한 교제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있다.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없는 자는 제 아무리 의롭고 경건하다 할지라도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교제의 수평적 차원은 항상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누고 참여하는데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삶의 모형이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중에 나타나는 교제의 원천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 개인의 경건 생활에 부각되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한낱 영적인 기호품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교제가 반드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달아야 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과 우리와의 교제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유지되도록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리고 부단히 그러한 교제를 나눔으로 그것의 깊이와 부요함이 더해 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히10:24,25 교제가 있는 곳에서 언제나 교회가 부흥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했기 때문일것이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구속받은 자들이 누리는 교제는 언제나 구속주와 함께 누리는, 교제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그들만의 교제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사이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존립한다. 2.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우리 죄인들을 그의 영광의 자리에 참예하게 하시기 위하여 과거에 행하셨으며, 지금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모든것들을 포함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가 믿음과 회개를 나타낼수 있으며 그에게 바치고 그에게서 받아 내는 모든것들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의 근거로써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친히 우리에게 내주신 바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수반되는 축복들을 얻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마 10:40), (요 1:12)라고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었다. 이와 같은 아들로서의 고유한 신분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데 있어서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매일 매일의 삶을 천부께서 부여해주신 은사로 생각해고 감사하는 삶을 산다. 매일 죄를 용서받으며, 매일 죄를 용서받으며, 매일 그의 약속으로부터 확신을 얻고, 매일 그의 말씀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삶을 산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실패했던 일들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고하며, 우리 어깨에 메인 무거운 짐들을 벗어서 그에게 맡긴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과의 주고받는 교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주고받는 삶을 삶으로써 우리의 회개는 받아들여지며 다음과 같은 매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잠 23:26 ; 롬 6:13 ; 마 11:19 ; 막 10:21)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체적으로 형성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하나님 자녀들의 가족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의 교제와 같이 양자가 주고 받는 왕복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첫째로 교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들을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내 보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풍성한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하여 이 방면을 중시하여 설명해 놓았다. 그는 요한일서에서 말하기를, 그 편지를 쓰는 동기는 (요일 1:3)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나누었던 그 교제를 그의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다. 요한이 그들에게 원했던 바는 “우리와의 사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일면을 말해 준다. 즉, 교제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둘째로 교제는 자신의 영혼에 능력과 활성과 유익을 부여받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 관해 나타내 보이신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와 같이 교제는 사람이 주는 것은 물론 얻기를 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방면에 관해 잘 설명해 주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그러나 바울은 자신과 미성숙한 교회들 사이의 교제를 일방 통행의 관계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곧 이렇게 덧붙인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1이하) 바울이 원했던 교제 방식은 왕복 통행 방법이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자신이 용기를 얻기 위하여 교제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려 갈 때, 그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물론 그들도 바울에게 선행하는 것을 기대하노라고 솔직히 말했다. 오랬동안 신앙 생활을 해온 어떤 신자들에게서 영적으로 도움될 많나 것들을 조금도 얻어 내지 못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의 교회 회중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또하나의 단면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사랑과 겸손의 표현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개인적인 약점과 궁핍을 느끼는 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주고자 하는 소망에서 우러나온다. 그것은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경우와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경우, 즉 두가지 동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과 선을 제공받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바를, 서로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4. 교제의 중요성 첫째, 교제는 은혜의 수단이다. 사람의 영혼은 교제를 통해서 소생하고 성장하게 되며,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식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을 때, 당신은 어려움을 보살펴 주는 동료 신자들이 있을 때, 당신과 함꼐 그들의 고난과 승리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친구가 있을 때, 매우 풍성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당신은 당신의 도움을 받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성숙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그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계속적인 간청을 했다(롬 15:30 ; 고후 1:11 ; 엡 6:19 ; 골 4:3 ; 살전 5:25 ; 살후 3:1,2 ; 몬 22 ; 히 13:18 참조). 그리고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약 5:16)확실히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은혜의 수단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무시한다면 궁핍과 위험을 자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교제는 삶의 시금석이다. 교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위선과 가장이 있는 곳에 진정한 교제란 있을수 없다. 그러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할 때 모든 위선과 가장을 훌훌 털어 보리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열려 있는 정직한 자다. 자신의 전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빛을 들어오게 하지 않는 자는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자신 약점이 노출될까 하여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자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요일 1:7)이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셋째 교제는 하나님의 은사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14절에서 그의 축복 기도를 묘사한다. 이것은 당연히 옳은 말씀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인간은 영적으로 소생함을 입으며, 은혜가운데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을 도울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며 교제가 가능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말을 하게 한다. 이것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께서 교제하셨던 방법에 따라 되어지는 역사다. 우리가 함께 교제 나누기를 원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제 3 위 성령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존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일을 행하신다. 이와 다른 방법으로 사람과 행하는 교제는 허무하고 무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때 교제의 목적-우리의 주님을 보다 확실히 알고자 하는 목적-은 여지없이 죄절되고 말 것이다. 5. 교제의 방법 교제는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말했던 내용에서 밝혀졌다. 교제는 두세 사람이 서로서로 하나님을 더욱 잘알게 하도록 하면서,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함꼐 교환할 때 비로서 실현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편과 경우에 따라 생겨난다. 설교 중에, 함께 기도하는 중에, 개인적인 담화 중에, 그룹 성경 공부 하는 중에,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부부가 난로가에 오순도순 앉아서 이야기하는 중에 생겨난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가지 형편 가운데서도 생겨나는 역사는 매한가지다. 주님께서는 (마 18:20)의 말씀을 약속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어떤 공식 예배에만 함께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사적인 교제에도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회중들이 함께 모여 영적인 것들을 교제할 때에도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최소한 내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장애가 되는 요소 한 가지는 자기 만족이다., 각 개인들이 상호 간에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교제란 있을 수 없다. 영적인 자기 만족으로 도도해 하는 자들의 태도는 불신자들의 죽어 있는 상태를 방불케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들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의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의 어두운 상태를 묘사한다(히 5:12이하 ; 롬 12:1-3참조).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성장했다고 하는 자들일 것이며, 교만이나 허물, 혹은 위선을 갖고서, 아니면 이 세가지 모두를 갖고서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 만족은 시초부터 교제를 가로막는 요소다. 두 번째 장애 요소는 형식주의다. 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공공 예배, 특히 성만찬 석상에서, 그리고 엄격한 진행과 정확한 절차 가운데서 찾으려 하며, 그 이상 다른 어떤 친밀한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사상은 우리시대에 외서 특히 전권적인 근엄한 형식주의로 말미암아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다분히 있다. 살아 있는. 그리고 생기 있는 예배는 확실히 교제를 동반한다. 세 번째 장애 요소는 적대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잔인함이다. 히브리서 12:15에서는 "쓴뿌리"로 인한 괴로움에 대해 묘사하였다 잔인함은 대부분 상처입은 자만심과 원한으로 인하여, 부정이나 학대, 혹은 배신감으로 인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위치나 성공을 시기함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특히 시기는 논쟁, 무정함, 험담(다른사람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을 주고 하고 있다), 항의, 그리고 분쟁등으로 감추어진 쓴뿌리다. 진정한 교제의 목적은 다른사람을 나보다 낫기 여기는데 있으며, 여기에 정당한 비판이 설 땅이 있다(비판은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것처럼 사랑을 동반해야 한다). 그 비판은 건설적이어야지 파괴적이어서는 안된다. 허물을 깨닫는 사람은 온화함과 삼가 조심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중에 이러한 비판을 아무 때나 받아들이고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는 자가 있을까? 쓴뿌리가 작용하고 있는 동안에 비판을 자칫 잘못하면 그것을 시정시키기는커녕 교제를 그릇되게 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 것 이다. 네 번째 장애요서는 엘리트 의식이다. 이것은 우월감과 배타성을 가지고 형성되며, 결국은 파당을 조장한다. 이것은 진정한 교제와는 반대되는 요소로서 사탄의 모조품이며 거기서는 불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다. 최우수의 정예화된 이 그룹은 신앙의 독특함에 의해서, 혹은 어떤 지도자의 마술적인 지도력에 의해서 한 단체로 분리되어 나온다. 그러나 그들 안에 일체감과 자부심은 살아 있을지언정 진정한 교제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제의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더욱 세밀히 검토해 볼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논의한 내용만 가지고도,"여기에 왜 교제가 없는가?"라든지 그 외 다른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그 질문에 답변을 하는데 과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논의했던 것들로부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첫째,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연령의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누구도 영적으로 스스로 충족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든지 못깨닫든지를 막론하고 교제가 없다면 우리는 유약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법칙이다. 우리는 이미 웨슬리의 현명하고 참된 명언을 인용한 적이 있지만 독단적인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더 이상 다를 바가 없다. 둘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제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친교모임을 갖고 있지만, 진정한 교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참으로 거의 그것을 고하지도 않는 형편이다. 이것은 우리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연유한다. 우리는 교제를 친목회와 같은 세속적이고 사교적이 개념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상호 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써의 교제, 즉 성경적이고 삼위일체적인 교제와 대치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혀 교제와 무관한 행위를 하는데도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여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그리스도인들, 영적으로 굶주려 있으며 낙심가운데 처해있는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번창하는 교회의 교인들과 바쁘게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사역자들 즉 모든 사람들은 교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나누는 친구"(bosom friend)를 달라고 간구하곤했다. 그들은 정말 모든 것을 사심없이 함께 나눌 수 있고, 기도의 동반자로서 교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거룩한 것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열망했고, 또한 그것을 위해 규칙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두가지 면에서 그들의 모본을 따를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다. 역사상, 그리고 신학상으로 교제와 부흥은 언제다 동반되었다. 참으로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의 교제가 있는 곳에서 부흥이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과 기독교회의 건강에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반드시 교제를 얻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위한 은혜의 수단이 되도록 합당한 위치에 올려 놓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