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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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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고백을 피하는 법 -- 데이빗 클라우드
lhyunsik

〓〓〓〓〓〓〓〓〓〓〓〓〓〓〓〓〓〓〓〓〓〓〓〓〓〓〓 * 이 글은 <성경의 교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http://www.biblechurch.or.kr/ 〓〓〓〓〓〓〓〓〓〓〓〓〓〓〓〓〓〓〓〓〓〓〓〓〓〓〓 거짓 고백을 피하는 법(1) - How To Avoid False Professions - 데이빗 클라우드 / 임재영 옮김 어떠한 복음전도자도 거짓 회심자를 가질 수 있다. 주님의 사도조차도 그랬다(행 8:20-21). 그러나 “회심자”의 극소수만이 구원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많은 근본주의 사역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바이다.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의 회심자들의 거의 대부분이(심지어 99%까지) 성경적 증거를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이 자신들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복음 선포자나 교회도 완전히 거짓 신앙고백을 피할 수 없지만, 실제로 거짓 고백의 증가를 조장하는 구령의 방법들이 있다. 다음은 우리가 이러한 해로운 방법론을 피할 수 있는 길들이다. 1. 서두르지 말라. 복음을 피상적으로 전하는 것을 피하라 구원은 복음의 이해를 포함한다. 로마서 6:17은 구원을 “너희에게 전해진 그 교리의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에베소서 1:13은 구원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씀한다. 디모데전서 2:4는 구원을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으로 기술한다. 이들 구절은 모두 복음이 이해하고 믿어야 하는 명확한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죄 사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네팔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일반적으로 성경지식이 전혀 없이 성장한 이방인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복음은 반드시 신중히, 알기 쉽게, 차근차근, 며칠이나 몇 주나 몇 달이 걸려서 전해져야 한다. 미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구령자(救靈者)가 처음 대면한 사람을 금방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통상 그 사람이 성경지식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테네에 있는 마르스의 언덕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에서와 같이(행 17:34), 간단하게 전해진 복음을 처음 들은 죄인을 구원케 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권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조차도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을 떠난 후에 바울의 복음을 믿었던 이들이 그들이 실제로 구원받기 전에 바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하나님의 권능이 영광스럽게 드러났던 초대교회 때조차도 복음이 신중히, 때로는 상세하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사도행전 2:14-39에 기록된 설교뿐만 아니라 “또 여러 다른 말씀들로 증거하고 격려”한 것을 알 수 있다(40절).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구원받기 전에 그에게 상세히 복음을 전했다. 빌립은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을 전하고, 구약의 대언서들을 설명해 주었을 뿐 아니라, 침례도 전했다(행 8:35-36). 복음전도자들은 죄인들에게 신중히 복음을 전해서 다양한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자신들이 믿는 바를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충분히 확인하지 않고 복음의 기초들을 짧은 시간 안에 대충 훑어보는 것은, 그가 복음의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참되게 이해하지 못할 경우, 헛된 신앙고백을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죄에 관한 교리를 보자. 만약 당신이 일반인과 짧은 시간 안에 복음을 대충 훑어본 후 “당신은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흔히 그는 “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성경이 말씀하는 사악한 죄인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반인은, 심지어 북아메리카에서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죄가 의미하는 참된 의미를 모른다. 북아메리카의 일반인이 죄에 관해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부족하거나 비교적 사소한 결점을 갖는 것, 등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죄 가운데 태어난 자로(시 51:5),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로(렘 17:9), 하나님 앞에 참된 선(善)이나 의(義)가 없는 자로 여기지 않는다(롬 3:10,12)(사 64:6). 그러나 이는 정확하게 성경이 우리 각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바이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자신이 성경적 관점에서 사악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해서 어긴 “비참한 사람"이며,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고 이해하며 시인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오늘날 일반인은 자신을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는 자신이 완전하지는 않다고 인정하지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과 비교하지는 않지만 자기 이웃과는 비교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옛 본성이다. 사회에 인본주의와 심리학이 퍼져서 이러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하나님이 자기편이며, 자신들은 가치 있는 자들이며, 자신을 중히 여겨야 한다고 배워왔다. 심리학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손상시켰다. 이는 복음의 모든 면에서 동일한 사실이다. 간혹 사람들은 창세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죄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신중히 복음을 제시해서 복음을 받는 자로 하여금 복음을 이해하고 정통한 믿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선포한 후 관심이 있는 자들을 데리고 가서 더욱 신중히 가르친 것을 본다. 필자는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라고 믿는다. 가정 성경공부는 이를 행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교회의 지체들이 성경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을 비공식적인 소규모 성경공부 모임으로 초대해서 복음을 신중히 제시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다. 필자는 성경학교에서 사람을 만나서 구령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질문에 답변하지 말도록 배웠다. 『Romans Road』(역자 주 : 복음 전도를 위한 로마서 요절(要節) 모음집)의 세 네 구절을 계속 사용하며, 질문을 할 경우 “그것은 좋은 질문입니다.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합시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뒤로 미루라고 배웠다. 만약 질문이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로막으며 그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면, 추후에 질문에 대한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또한 사람이 올바르게 복음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답변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많은 질문들이 있다고 믿는다. 필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은 삼일 동안 내내 같이 지내면서 인내로 성경을 가르치고, 필자가 품고 있었던 많은 질문과 논쟁에 답변해 주었다. 만약 필자가 성경학교에서 배운 방식처럼 그가 필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면, 그는 더 이상 필자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의 질문은 그 때 필자가 믿던 바를 반영한 것이기에, 성경적으로 답변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답변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하여 그가 성경적 답변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필자를 크게 감동시켰다. 성경에서 그 같이 많은 부분이 율법인 이유는 복음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다(갈 3:24). 율법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시며 그가 얼마나 죄 많은 자인가를 보여준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사람들은 성경적 의미에서 그리스도께로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히 6:18). 과거에 복음선포자들은 복음의 향기로운 열매를 맺기 전에 반드시 율법으로 인간 마음의 근거를 일구어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것은 빠르고 피상적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복음을 자신들의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로마카톨릭 교인이 다시 태어남(거듭남)에 관해 처음 들었을 때, 침례나 다른 종교적 의무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영접함)”에 관해 들었을 때, 성례전을 통하여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에 관해 들었을 때, 죄에는 여러 가지 범주가 있으며 특별히 어떤 형태의 죄만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구령자에게 자신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전에 배운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왜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운동이 충분치 않은가에 대한 이유이다. 빌리 그래함과 루이스 팔로(Luis Palau)가 로마 카톨릭 교인에게 설교할 때 자주 건전한 복음 메시지를 전하지만 카톨릭 교인들은 그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며, 에큐메니칼 복음전도자는 거짓 교리에 반대하여 명확하게 전하기를 거부한다. 이해하기 위하여 진리는 반드시 오류와 알기 쉽게 대조되어야 한다. 필자는 결코 직면한 복음주의가 잘못되었다거나,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만난 곳에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올바르게 인도하기를 힘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거짓 고백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피상적이고 충분치 않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신중하고 장황하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거짓 고백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피상적으로 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거짓 고백을 크게 줄일 것이다. 2.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라. “그러나 그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도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7,8) “먼저 다마스커스 사람들에게 보인 뒤 예루살렘과 유대아 온 지역에 두루 보이고 그 후에 이방인들에게까지 보이며,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라 하였나이다.”(행 26:20) “말하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 너희가 이런 헛된 일들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서라고 선포하는 것이니,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니라.”(행 14:15) “이 같은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그 사람에 의해 세상을 의로 심판하시고자 한 날을 정하시고, 이에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으로 이 일을 모든 사람에게 확증해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그들이 스스로 우리에 대하여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에게 들어갔고,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9) 헛된 고백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는 구령자들이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근본주의 침례 성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70년도 중반에 대형버스 사역에서 일한 이후로 지금까지 이 실패를 보아 왔다. 구령자는 ‘죄인의 기도’를 드림으로 죽을 때 확실히 하늘(천국)에 갈 수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돌아서는 것(회개)이 요구됨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반드시 성경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돌아설 수 있다. 우리가 한 가지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반드시 우리의 등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십자가에 도달하는데 중요한 것은 “회개”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개념이다. 가장 단순한 의미로서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며,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령자들이 반드시 신중하게 죄인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죄인은 반드시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구원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지만, 반드시 행위를 낳는다. 성경적 회개는 삶의 변화를 낳는 마음의 변화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은 “행위 구원”이라고 비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는 삶의 변화를 낳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2:8~10이 가르치고 있는 바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참된 하나님의 은혜는 선행을 낳는다. 회개와 믿음은 비록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같지는 않다. 만약 회개와 믿음이 같다면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선포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행 20:21). 회개가 요한복음에는 언급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정녀 탄생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동정녀 탄생을 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일생에 관해 한 복음서만 주시지 않고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다. 마태, 마가, 누가는 회개를 강력하게 강조한다. 성경을 떼어서 자기들이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포하는 이들은 거짓교사들이다. 침례자 요한, 주 예수님, 모든 사도들은 회개를 선포했으며, 회개로 인한 증거를 요구했다(사도행전 17:30, 26:18-20의 바울). 누구든지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회개는 위대한 명령(Great Commission)의 일부분이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지각(知覺)을 열어 그들로 하여금 성경기록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또 말씀하시되, 이와 같이 기록되었은즉,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남이 마땅하며, 또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회개와 죄들의 사면이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하리니,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라.”(눅 24:44-48) 근본주의 신자들은 성경적 회개를 돌아서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렇게 선포했다. 다음의 예들을 생각해 보라. “회개한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과 죄에 대한 마음 또한 영을 바꾼다는 말이다. 당신의 죄들로부터 진지하게 마음을 다하여 돌아서서, 당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며, 회개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간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죄로부터 돌아섰을 때 회개하였다.”(존 라이스, What Must I Do to BE Saved? 1940)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엄숙한 의무이며 또한 불가분의 은혜로서, 하나님의 살리시는 영에 의해 우리의 혼에 역사한다고 믿는다. 회개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유죄(有罪), 위험, 무력함과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을 깊이 깨닫고, 거짓 없는 참회와 고백과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그분을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유일하신 구주로 고백한다.” (Baptist Bible Fellowship, Articles of Faith, 1950) “회개는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이다.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신뢰를 두고 더 이상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영구적이다. 회개는 일생의 영원한 체험이다. 일단 회개하면 당신은 결코 마귀를 다시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결코 다시는 삶의 습관 같이 마귀와 함께 희롱거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결코 죄 안에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껍질이 결코 당신의 혼 안에 있는 갈망과 열망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회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늘(천국)로 가고자 한다면 회개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Lester Roloff, 회개냐 멸망이냐, 1950년대) “회개에 대한 그리스어의 의미는 ‘행동의 변화를 낳는 마음의 변화’이다. 회개가 사람을 가리킬 때 죄에 대한 슬픔을 포함한다. 이 정의는 신약성경의 용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Trench와 Thayer의 연구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브루스 라케이, 회개는 마음의 변화 이상이다. 라케이 박사는 이것을 1970년대 초에 가르쳤다.) 그러나 최근 50년 동안 변화가 있었다. 필자는 최근에 경건하고 진실한 근본주의 침례교 목양자를 방문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10분짜리『Romans Road』계획을 세 번이나 전한 후(이것은 본래 좋은 복음을 제시하였다.) 즉시 사람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이해한다고 말했다.) “질문이 있으십니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지금 즉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 목양자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곧 돌아서는 것의 필요에 대해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았다. 이것은 마르스 언덕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한 연설과 얼마나 다른가! 그 연설에서 바울은 “이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라고 선언했다. 그는 단지 신도(信徒) 수(數)에만 관심을 갖는 목양자가 아니다. 그는 필자가 존경하는 자로서, 오랫동안 사역을 하였으며,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담대히 성경적 입장을 취한 성숙한 인도자이다. 필자가 믿기로 문제는 그가 단순히 자신이 배운 구령 계획을 따랐으며, 그 계획은 많은 근본주의 신자들의 표준 메뉴라는 점이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남아시아의 힌두교 신자와 같이 거의 성경을 모른다. 대다수는 진화를 믿는다. 진화는 힌두교의 신화와 같이 꾸며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아시아에서 그러한 구령 수법을 애써 사용했다면, 만나는 사람들의 반을 “죄인의 기도”를 하게 하여 하루 만에 하늘로 가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을 자신들의 힌두교 신들에 추가했을 것이며, 이는 통상 힌두교 신자가 예수님을 처리하는 첫 번째 일이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에 대하여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에게 들어갔고,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 1:9에서 보듯이, 힌두교 신자가 주님과 구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과 다른 모든 신들에게서 돌아서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많은 구령 프로그램이 죄인에 의해 복음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죄인이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진실로 알기 전에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눅 13:3,5)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다. 회개는 삶의 변화를 낳게 하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마음의 변화이다.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결신자(決信者)”의 수를 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만이 정직하고 성경적인 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회개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 David W. Cloud 著 『How To Avoid False Professions』 - 거짓 고백을 피하는 법(2) - How To Avoid False Professions - 데이빗 클라우드 / 임재영 옮김 3. 사람들을 조정하는 기법을 피하라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조정한 사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을 조정하는 많은 기법이 구령에 사용되고 있다. 첫째, 사람을 조정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법(Presentation Manipulation)이 있다. 예를 들면, 톰 섹톤(Tom Sexton)이 만든 Andrew Fellowship Training Manual은 사람들을 지혜롭게 이끌어 ‘죄인의 기도’를 하도록 구령자들을 가르친다. 돌아서는 것이나 회개에 관한 암시가 일체 없는 하나님의 단순한 구원 계획을 죄인들에게 어떻게 소개하는가를 설명한 후, 섹톤은 구령자에게 “당신은 만약 성경에 따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하면 그분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까? 라고 묻도록 가르친다. 만약 죄인이 "예"라고 대답할 경우, 그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그가 '예'라고 말하자마자, 이렇게 말하라. '자, 기도합시다.....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합시다. 그러면 그가 머리를 숙일 것이다.'... "자, 우리 머리를 숙이고 기도합시다. 주님, _____씨가 보여준 친절과 환대에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모든 것을 들으심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가능성은 듣는 데 있다. 그는 누군가가 이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과 환대에 대해 내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듣는다. 이는 그가 계속해서 친절과 환대를 베풀고자 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저자 주 :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주님께서 거기 계시며 모든 것을 들으셨음에 대해 감사드렸다. “____씨가 자신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아는 것으로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 그가 당신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음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는 “이 사람이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중대한 사항이다. <저자 주 : 처음 보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는 아마도 마음 편히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는데 이 종교광(宗敎狂)이 오래 끌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그가 할 수 있도록 그에게 용기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초대한다. ‘자, 우리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읍시다. 내가 이 방을 나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 손이 주님의 손이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주님의 손을 잡는 것처럼 내 손을 잡으시오.’” 그는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이 때가 영접할 수 있는 기회이다. <저자 주 : 아마도 그는 다시 사실이 아닌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단지 내 손을 잡고 예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는 내 손을 잡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당신을 인도하고자 합니다. 나를 따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는 내가 죄인임을 압니다. 당신이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 안으로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당신을 위해 살며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마칠 때, 그 사람의 용기와 주님을 기꺼이 믿고자 하는 태도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저자 주 : 다시 그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에 관해 상상하고 있다.>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라. “기도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주님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만약 그가 주님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하면, 이렇게 물으라. "로마서 10:13의 약속이 내게서 온 것입니까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까?” 만약 그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 이렇게 물으라. "성경에 따라 방금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는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The Andrew Fellowship Training Manual, Murfreeboro : Sword of the Lord, 2000, pp. 74, 75) 시종 구령을 가장하여 사용된 심리학적인 조정 기법을 보라. 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기쁘게 받아들이고, ‘죄인의 기도’를 하고, 심지어 그가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게끔 조정하고 있다. 죄인의 기도에서 그가 “당신을 위해 살며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하게끔 인도하고 있음을 주지하라. 이상하지 않는가. 기도를 인도하면서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암시도 없다. 불쑥 그는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 이것은 교묘하게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며, 심지어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죄인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 복음을 살짝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 이러한 형태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체제 안에서 그렇게 수많은 거짓 고백이 있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수십 가지의 주요한 복음주의 서적과 강좌에서 가르치고 있고 수천 개의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준 방법이다. 당신은 바울이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는가? 둘째, 사람을 조정하여 영접하게 하는 방법(Invitation Manipulation)이 있다. 이것은 교회 모임에서 영접하도록 초청하는데 사용되는 방법이다. 우리는 성경학교에서 “사람들을 통로로 내려오게 하는 법”을 배웠다. 예를 들면 죄인을 초대하는 시간에 다른 이들이 나옴으로 해서 부담을 덜 느끼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임무를 맡은 교회 회원들이 기계적으로 앞으로 나온다. 다른 예는 교회 회원이 방문객에게 가서 누가 강단 앞에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일단 방문객이 강단 앞으로 나가기 위하여 통로로 내려오면, 죄인의 기도를 하도록 재촉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방법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종의 속임수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영접 기도를 하고 침례를 받게 할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또한 사람들을 나오게 하기 위하여 음악이 사용될 수 있다. 몇몇 교회들은 전통적인 찬양 시간의 두 배나 되는 시간 동안 죄인을 초청하는 찬송을 불러서 사람들을 나오게끔 분위기를 만든다. 음악은 강력한 것이다. 음악은 레스토랑과 같은 곳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사거나 더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이 만든 기법은 복음의 역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복도로 나오게 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정당화하지만, 회심자들을 살펴보면 통상 순수한 회심자와 많은 거짓 고백을 한 자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죄인들을 자리에서 나오게 하고 침례탕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그같이 멋들어진 수법을 많이 갖고 있는데 누가 성령님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잘못되거나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절대적으로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새로운 출생은 “육신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요 1:13). 복음 사역과 관련해서 사람은 비켜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언가 하려고 성급하게 애쓰지 않는 것이 좋다! 4. 확신을 주는 것에 주의하라. 필자는 (앞의 예에서 언급한 방식을 따라) 방금 ‘죄인의 기도’를 마친 사람이 진실로 구원을 받은 증거가 없거나 구령자가 전하는 것에 관해 막연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확신을 주는 것을 볼 때 자주 움츠리게 된다. 확신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확신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확신은 오직 구원받은 자를 위한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결코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내어갈 자가 없으리라.”(요 10:27,28) 하나님께서는 다시 태어난(거듭난)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지만, 단지 죄인의 기도를 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지 않는다. 요한복음 10:27, 28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28절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양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27절은 그분의 양들이 그분을 따른다고 말씀한다. 28절이 구원의 영원한 축복인 반면에 27절은 구원의 증거이다. 27절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 한 28절의 약속을 취할 수 없다. “너희가 육신을 좇아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살리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롬 8:13, 14) 구원의 증거는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며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육신을 좇아 사는 자들은 자신들이 결코 다시 태어난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을 밝히 알게 하노니, 너희가 또한 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 서 있느니라. 너희가 만일 내가 선포한 그것을 명심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고전 15:1,2) 구원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기억하는 자들이며 헛되이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것은 그들의 구원의 방법이 아니다. 그들의 구원의 증거이다. “헛되이 믿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어떤 것을 “믿지만” 구원은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장 23-25 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에 그분을 믿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 요한복음 6장 66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실족하여 그분을 떠났다. 요한복음 6:15과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계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믿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해주고 대적들을 패배시킬 왕으로 “믿은” 것이다. 또한 다음의 구절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 “또 전에 사악한 행위들로 인하여 마음으로 멀리 떠나 대적이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자기 육체의 몸으로 화해케 하사, 그분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 없는 자로 드리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 안에 거하여 터가 다져지고 정착되어, 너희가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느니라.”(골 1:21-23) 그리스도와 화해하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은 믿음 안에 거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이다. 단지 영접 기도를 하고 믿음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자신들이 결코 다시 태어난 적이 없는 자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디모데후서 2:19를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으니, 이렇게 인치시기를, 주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아신다,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셨느니라.”(딤후 2:19)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불법에서 떠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님께 속한 자들임을 입증하고 있음을 주지하라. 히브리서 3:6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우리가 그분의 집이라.”(히 3:6) 이 구절은 우리가 소망의 확신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에 사용된 정확한 표현법을 주지하라. 이 구절은 우리가 소망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구원을 받을 것(will be saved)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우리가 소망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구원을 받은 것(are saved)이라고 말씀한다. 달리 말하면, 견디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지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붙잡음으로 구원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소유한 것을 입증한다. 히브리서 3:14을 깊이 생각해 보라. “이는 우리가 처음에 가진 확신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될 것임이라.”(히 3:14) 이 구절은 히브리서 3:6과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는 것은 이미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돌아선 자들은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다. 히브리서 6:9-11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하나, 너희에 대하여는 더 좋은 것들과 구원을 동반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향하여 보여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시나니, 너희는 성도들을 섬겨왔고, 지금도 섬기고 있느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도록 동일한 열심을 보여”(히 6:9-11) “구원을 동반하는 것들이 있음”을 주지하라. 헛된 고백은 성경적 구원이 아니다. 헛된 고백을 한 자들, 곧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하였든지, 얼마나 많이 침례를 받았든지, 그들에게 확신을 준 자가 누구이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참된 구원은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동반한다. 히브리서 6:11은 충만한 확신이 오직 자신들이 다시 태어났음을 증거하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히브리서 10:38을 깊이 생각해 보라.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이 구절은 구원을 증거하지 않는 자들과 그리스도로부터 뒤로 물러간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한일서 3:2-3을 깊이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심과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1절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2절은 계속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그들의 삶을 순결하게 한다고 경고한다. 순결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구원의 방편이 아니다. 구원의 증거이다. 이 모든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단순히 영접 기도를 한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했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믿음을 행사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영접 기도만 했다면,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잃어버린 자들이다. 어떤 이들이 진정으로 구원 받았는지를 모를 때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해로운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의 예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유다는 이에 대한 훌륭한 예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주여, 주여”라고 기도한 자들과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 로마서 10장에 언급된 유대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열심이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 베드로후서 2장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했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 디도서 1:16에 언급된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했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죄인이 주님을 부르는 동기에는 순전한 성경적 구원보다 거짓된 동기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는 삶에서 어떤 문제로 도움을 원하거나, (이 땅에서의 삶에서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을 섬길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 하늘(천국)에 가고 싶거나, 기도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성취해야 할 많은 종교적인 일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도움 받기를 원한다. 어떤 이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으로부터와 성경으로부터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이방인이 단순히 죄인의 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구령자가 그에게 확신을 주고 하늘에 있는 집을 약속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로마서 10장 13절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근거한 것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죄인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구령자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일이며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를 성취하신다.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으니, 이로써 우리가, 아바, 아버지, 라 부르짖느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5. 복음에 관심을 갖는 것과 구원을 혼동하지 말라. 복음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호전적인 사람에게 오랫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 열매를 얻지 못한 후, 복음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만날 경우, 복음 전도에 활기를 되찾게 된다. 그렇지만 흥미와 확신을 혼돈하거나, 자진해서 ‘죄인의 기도’를 하는 것과 회개와 믿음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 가운데 한 가지 점에서 그분에 대해 흥미를 가졌지만, 때가 이르자 대부분이 그분을 떠났다(요 6:66). 반면에 베드로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의 증거를 가졌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님,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오매, 저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저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케 되었나이다.”(요 6:68-69) 필자의 마지막 결론은 순전한 구원은 항상 성경적 증거를 동반한다는 것이다(히 6:9)(고후 5:17)(요일 2:4). 6. 침례의 규례를 지켜라 거짓 고백을 피하는 다른 길은 교회가 침례를 행하는데 있어서 신중히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시 태어났는지 여부와 자신들이 행하는 바를 깨닫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죄인의 기도를 하고자 자리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신속하게 침례를 주는 실행은 거짓 고백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도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7,8) 침례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으로 자신의 양심을 달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을 믿는 구원하는 믿음의 공적 증거이다. 교회는 침례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 고백으로부터 규례를 지킬 수 있다. (1) 교회는 반드시 구원을 요구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한 후 즉시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본다. 그 모든 경우에서 회심은 매우 확실하고 극적이었으며, 회개의 증거는 분명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들을 깊이 생각해 보자. 바로 그날 그들은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의 말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서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을 주지하라. 이러한 것들은 극적이고 분명한 회심들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스스로 침례를 요청했으며 극적인 회심을 증거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8절에서 사울은 침례를 받았지만, 그의 회심은 극적이었으며 분명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코르넬리우스의 경우와, 사도행전 16장에서 리디아와 그의 집안과 빌립보의 간수와, 사도행전 18장에서 회당장 크리스푸스와 그의 온 집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회심은 극적이고 분명했으며, 회개와 믿음에 관한 많은 증거가 있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우들을 볼 수 없다. 매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지만, 소수만이 사도행전에서 보는 참된 회심과 회개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에서 침례의 규례는 단순히 의식에 지나지 않거나 판에 박힌 지루한 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회중은 소수의 회심만이 참되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침례에 관해서 부주의한 분위기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아멘”할 뿐이다. 심지어 몇몇 교회에서는 성가대원들이 돌아서서 보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 이 의식을 회복하자. 분명한 회심을 체험한 자가 침례를 받을 때 전체의 분위기가 변한다. 교회 회원들이 이미 알았고 위하여 기도했던 사람이거나,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할 경우, 열광적으로 “아멘”할 것이며, 심지어 큰 소리로 외치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이러한 침례의 규례가 되어야 한다. 침례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구원의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 아무런 권위가 없다. 필자는 여러 번 침례를 지원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신뢰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모르겠는데요.”라거나 “그렇게 생각합니다.”와 같은 불확실한 대답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쨌든 침례를 받았다! 침례는 매우 중요한 교회의 규례이다. 회심에 관한 분명한 증거를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는 방식으로 인해 침례의 가치를 떨어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2) 교회는 반드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침례에 관한 다른 요건은 침례의 의미를 아는 지식이다. 침례에 관한 아무런 이해 없이 침례를 받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의식(儀式)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단순한 영접 기도로 침례를 베푸는 교회에서 침례를 받는 몇몇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구원받기 전이나 침례의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침례를 받게 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과정을 너무나 신속히 끝내서 그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어떤 사람이 일요일 아침에 교회 앞에서 “주님께로 인도함을 받고” 침례에 관해 배우는데 모두 10분 내지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필자는 왜 교회가 그러한 강요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구도자(求道者)를 교회 모임과 별도로 인도해서 신중히 구원과 침례에 관하여 살펴보고, 그들이 하고 있는 바에 관해 알고 있는지와 진정으로 회심을 했는지와 침례의 중요성을 이해하는지를 확인하지 않는가? 도대체 왜 서두르는가? 우리는 죄인들에게 오늘이 구원의 날이며 내일이면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서둘러 알려 주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왜 침례의 절차를 서둘러야 하는가? 거짓 고백을 증가시키도록 이끄는 강요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동기가 무엇인가? 7. 교회 회원의 자격에 관한 성경의 기준을 유지하라. 거짓 고백의 증가를 피하는 마지막 길은 교회 회원 자격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 “그 때에 그의 말을 반갑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니, 그날에 제자들에게 삼천 혼 가량이 더하여지더라. 그들이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며, 늘 빵을 부수며, 늘 기도하기를 흔들림 없이 하더라.”(행 2:41,42) 첫 번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예가 증명하듯이 교회 회원 자격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갑게 받아들이며(31절),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42절) 증거되는 회개와 믿음이다(38절). 사람들이 이 기준을 무시하고 몸 안으로 들어 올 때, 그들이 진정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또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는지에 대한 아무런 증거없이, 단순히 영접 기도로 교회 회원이 될 때, 교회 회원의 자격은 그 기준이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더욱이 사람들이 단순히 신앙고백으로 교회 회원이 되고, 순전한 회개와 믿음이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지 않을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옴으로 교회는 약해지게 된다. 또한 교회의 징계를 실행할 방법이 없게 된다. 이러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실례(實例)로서, 필자의 아내가 지난 수 년동안 네 명의 사생아를 낳고 타락한 삶을 살아 온 한 부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필자의 아내에게 자신이 한 근본주의 침례교회의 회원이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아내가 “언제 그 교회 회원이 되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수년 전이죠.”라고 대답했다. 한 도시에서 우리는 대형 근본주의 침례교회의 회원이었던 몰몬교도를 만났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믿음의 실제를 시험하지 않고 교회의 징계가 거의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히 기도로 주님을 영접하는 방식에서 침례와 교회 회원 자격이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형제들이여, 절대로 이러한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8. 용어에 주의하라. 오늘날 너무나 많은 거짓 고백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어제 모임에서 20명이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대신 “어제 20명이 그리스도를 고백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거짓 주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9.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시도록 인내하며 그분을 의지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것에 대해 무엇이든지 흥미를 보이기만 하면, 서둘러 그를 조정하여 영접 기도를 하게 하고 천국행 공짜 표를 약속하는 대신에, (성경에는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동안 하늘을 언급하는 예가 없다.) 성경의 양식을 따르며,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통하여 그의 삶에서 기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믿고 기다려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적이다.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심지어 이 세상의 모든 기도로도 단 한 번의 구원의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 말을 듣자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허락하셨도다, 하니라.”(행 11:18) “디아티라 도시 출신의 자주색 옷감 장수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우리 말을 들었는데,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여시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들을 귀담아 들으니라.”(행 16:14) “네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구령자의 일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를 구원하는 것은 구령자의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향해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을 때에 그녀에게 역사했던 것같이,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집안에 역사했었던 것같이(행 11:14-18), 구령자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죄인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필자는 결코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필자는 성경주의자이다. 필자는 결코 어떠한 사람의 조직신학에도 전념하지 않는다. 필자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다. 성경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요나 2:9)(요 1:13),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요일 2:2), 이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계 22:17), 사람에 의해 거절될 수 있다고도 말씀한다(마 23:37). 필자는 비록 칼빈주의자는 아니지만, 수많은 헛된 고백을 하게 하는 자들과 (자신들의 방법론 때문에) 회개와 믿음과 상관없이 단순히 영접 기도를 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실행되고 있는 인간중심적 유형의 복음주의보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강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David W. Cloud 著 『How To Avoid False Professi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