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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ontokjv
토론토 은혜침례교회는 2005년 6월 12일 Canada, Toronto의 구원 받은 이 형제님이 운영하는 한 의원 부설 학원에서 10명 의 성도들이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한 형제의 열정적인 수고와 바른 성경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작은 모임이지만,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을 주님의 공급으로 이겨내면서 토론토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본 침례교회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성도의 교제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오프라인 상의 성도의 교제이겠지요 *^^*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물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교제가 없다면,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 홈페이지는 복음전파와 진리전파 외에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답고 건전한 나눔과 섬김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이 주 안에서 규모있고 아름답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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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기도(14)
lhyunsik

묵상과 기도 2005-05-05 07:00:22, 조회 : 7 오늘은 [묵상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흔히 침묵 기도라고 불리는 이 기도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주로 하는 통성 기도와는 달리 입을 열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서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한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는 것은 잠이 오고 잡념이 떠오른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묵상 기도는 불교의 승려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돌리며 드리는 명상이나, 카톨릭 사제들이 묵주를 돌리며 하는 기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적으로 다른 기도입니다. 종교는 명상을 권하지만 성경에는 명상이란 말이 없습니다. 세상 사전에는 명상과 묵상이란 용어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명상’과 ‘묵상’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명상은 종교적 수행이며, 마치 기도를 ‘영성 수행’이나 ‘영적 수련’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등에서 ‘영성 개발’을 위해 명상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가운데도 명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명상은 자신의 스스로 생각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일 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 기도의 방법이 아니라 종교적 수련 방법이며, 자기 수행(修行), 정진(精進), 수도(修道)에 불과합니다. 명상은 자신의 혼적 잠재 능력을 개발하고, 정신 세계를 확장하는 수행 방법이지 결코 기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명상은 묵상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신을 주체로 하는 것이고,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것입니다. 묵상(Meditation)이라는 말의 어원은 원래 '메디켈루스'라는 말로서 약(Medicine)이란 말의 어원입니다. 약이 몸 안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 약효를 내듯이, 묵상이란 어떤 한 생각이나 사실이 인간의 내면으로 퍼져가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묵상은 성경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되새기는 사고활동으로서 말씀의 의미를 캐내는 과정입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읊조리며 마음 판에 새기는 작업입니다. 기록(scriptures)으로 주어진 말씀을 종이가 아니라 내 마음에 새기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3:3). 말씀을 듣고, 말하고, 암송하고, 그것을 깊이 묵상할 때 마음 판에 말씀이 기록됩니다. [내 아들아, 내 말들을 지키며 내 명령들을 네게 쌓아 두라. 내 명령들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그것들을 네 손가락에 묶으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7:1-3). 잉크가 아니라 영으로, 돌판이 아니라 마음 판에 기록하는 것이 묵상입니다(고후3:3).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하늘에 영원히 세워 두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성경으로 주셨고, 영원히 보존하십니다. 동시에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백성들 즉 우리 안에 두십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너는 마음 속에 두고](신6:6). 주님은 모세에게 기록된 말씀을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셨지만 언약궤 안에만 귀하게 모셔져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한권 베껴서 곁에 두고 매일 읽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 안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두어야 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 이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두고, 쌓아둘 때 주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역시 말씀을 마음 속에 두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마귀는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을 채어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마13:19,막4:1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묘한 책이다. 그렇게 듣고 읽어도 다 잊어 먹고, 읽을 때마다 처음보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마귀가 말씀을 계속해서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자 디모데에게 성경 묵상을 매우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이것들을 묵상하고 네 자신을 이것들에 온전히 드려 네가 유익을 끼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우리 역시 성경은 책장이나 손에만 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두고, 거하게 해야 합니다. 묵상과 기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묵상함으로 기도는 더욱 강력해지고, 주님 앞에 드려지는 귀한 향이 됩니다. 기도하면서 묵상할 때 주님은 말씀을 통해 각종 영적인 복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를 나의 모든 말을 네 마음 속에 받고 네 귀로 들으라.](겔3:10)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있어야 할 바른 위치는 우리의 마음 속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음식은 입에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음식은 입을 통해 뱃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먹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먹었습니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렘15:16). 말씀을 먹었을 때 동족들로부터 멸시와 수치와 모욕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예레미야의 눈에는 눈물과 슬픔대신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임했습니다. 에스겔 역시 말씀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한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겔3:1). 말씀을 먹었을 때 에스겔은 증거의 능력을 얻었고, 진정한 말씀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그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이르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계10:9).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묵상은 때로 입에는 달지만 배는 쓰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말씀을 두지 않으면 빈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생각, 악한 상상, 세상의 염려 등이 그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맙니다. 주님은 마음의 악한 보고(寶庫)에서 각종 악한 것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가득 들어 있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우리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채우고 있습니까? 묵상은 성경 읽기, 성경 암송, 그리고 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 순서를 보십시오. 읽고, 묵상하고, 지켜 행하라.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는 것은 묵상이 아니라 자기 생각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이며, 영적 망상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유난히 정신 세계를 강조하고, 혼적 깨달음, 달관의 경지,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억하고 읊조리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미로 속에 오랫동안 방황하는 철학(哲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영적 망상이라고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둘의 차이는 시편과 전도서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윗은 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밤의 경점에, 이른 새벽에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의 말씀을 찾았고, 갈급해 했습니다. [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시119:97). 묵상은 다윗의 일상 생활이며, 그의 사고와 사상을 지배하는 습관이었습니다. 다윗은 헛된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말씀을 묵상하기를 즐겨하고 사모했는지 보십시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밤의 경점(更點)보다 앞서 갔나이다.](시119:148). 그는 한 밤 중에도 주의 말씀을 묵상했고, 주야로 묵상했습니다(시1:2). 그의 묵상의 결과가 바로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들 솔로몬은 말씀을 묵상한 기록은 전혀 없고, 생각에 잠긴 철학자였을 뿐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달리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지혜를 부여받았지만 그 지혜를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 대신 해 아래 모든 것을 탐구하고 생각하고 조사하는 일에 보냈습니다. 그는 학자적 자세, 철학자의 모습, 구도자의 자세는 너무나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잠언, 음악, 식물학, 광물학, 천문학, 조류, 어류, 곤충과 동물들은 물론 초본 식물까지 두루 섭렵했던 현학자였습니다. [그가 삼천 개의 잠언(箴言)을 말하였고 천 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으며 그가 또 나무에 관하여 말하되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으로부터 담에서 솟아나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날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관하여 말하였으므로 ](왕상4:32-33). 그의 연구는 철저하게 ‘해 아래에서’의 일들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博學多識)했고, 거의 모든 분야에 정통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묵상의 사람 다윗보다 놀라운 지혜의 소유자인 솔로몬을 더욱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묵상하는 다윗보다 탁월한 지혜로 명성을 얻고, 존경받는 학자 솔로몬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인생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다윗은 평생을 전쟁과 위험 속에서 보냈지만 그는 주님을 찬양했고, 주님을 노래했고, 주님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말년은 아들 솔로몬에게 주님을 버리지 말고 주님만을 신뢰하라는 신앙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궁궐에서 부와 명예와 존귀와 모든 쾌락을 즐기는 삶을 보냈지만 ‘허무’를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서 한 권에서만 무려 27번이나 “해 아래에서”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는 묵상대신 연구를 했고, 묵상대신 조사를 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불가지론(不可知論), 회의주의(懷疑主義), 허무주의(虛無主義)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말씀을 묵상하는 대신 사물을 주의해서 관찰했습니다. [이때에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눈여겨보고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음을 /알았나니/ 이는 사람이 수고하여 그것을 찾아내려 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 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리로다.](전8:17).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내가 내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을 밝히 보이고자 하였으니 곧 의로운 자와 지혜로운 자와 그들이 행한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라.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이나 미움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전9:1). 솔로몬의 말년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마음이 갈라지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지혜는 자신을 우상으로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1:4,5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늙었을 때에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주] 자기 하나님께 완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족속의 가증한 /신/ 밀곰을 따랐음이라.](왕상11:4-5).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지키던 다윗과 달리 그는 자연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고, 시를 짓고, 잠언을 정리하였지만 말씀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전에 이 민족들에 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들에게로 들어가지 말며 그들도 너희에게로 들어오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에게 굳게 붙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왕상11:2). “주께서....말씀하셨으나”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무런 믿음의 유산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분열 왕국과 우상 숭배와 배교(背敎)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묵상의 유무(有無)로 판가름났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묵상 기도를 하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증거하고, 일생동안 다윗처럼 마음의 묵상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다같이 시편 5:1-3을 보겠습니다. [오 [주]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나의 묵상하는 것을 살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는 내가 주께 기도할 것임이니이다. 오 [주]여, 아침에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위를 바라보리이다.](시5:1~3).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기도와 묵상, 다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묵상은 기도 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묵상한 후에 다시 기도했습니다. ‘묵상 기도’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주님께 아뢰는 기도란 뜻입니다. 묵상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말과 마음의 묵상이 동반된 묵상 기도였습니다. 묵상은 기도의 준비 단계이며, 기도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우리 입술의 말을 듣기 전에 이미 마음 속의 묵상을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묵상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시편 19:14,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내 입의 말,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드려집니다.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마음에 없는 것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말을 입술 발림(lip service)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며, 위선입니다. 우리는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을 함께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묵상하는 것을 살피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분명 통성 기도를 했지만 동시에 묵상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아무 생각없이 입만 여는 앵무새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정신없이 떠벌리기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약속을 찾아서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입은 닫고 마음으로 생각만 있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입을 열어서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입술의 희생제를 받으시며, 입술의 열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중에 묵상의 사람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저녁 무렵을 들에 나가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라, 낙타들이 오더라.](창24:63). 우리는 여기서 그의 영적 생활의 비결을 단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더 복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묵상의 시간을 갖다가 신부 리브가를 맞았습니다. 우리 역시 묵상의 시간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들을 선물로 받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묵상하고, 주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윗은 복있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1복있는 사람은...2오직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시1:2).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증거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행13:22)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복된 사람을 특징짓는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쁜 기도가 되고, 묵상의 결과로 입을 열어 전도를 할 때 지혜를 말하게 됩니다. 시편 49:3,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의 묵상이 명철(明哲)이 되리로다.](시49:3). 마음의 묵상은 명철이 됩니다. 명철이 무엇입니까? 명철은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철의 말씀입니다. 잠언 1:2에 [이것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明哲)의 말씀들을 파악하게 하고](잠1:2)라고 잠언의 기록 목적을 밝혀 두고 있습니다.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고, 지혜가 있지만 명철이 부족한 사람이 많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입니다(잠1:7).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자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주님께 구할 때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자신의 입에서 내시기 때문이로다.](잠2:6). 그럼 명철은 무엇입니까? 명철은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잠9:10). 마귀는 지혜가 넘치지만 명철이 없습니다. 세상 지혜는 거룩한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명철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 명철은 어떻게 옵니까? 명철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의 묵상이 명철(明哲)이 되리로다.](시49:3). 말씀 묵상은 지식, 지혜, 명철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다윗은 자신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시119:99). 말씀 묵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이며, 성령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 교사가 필요 없다거나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묵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의 증거를 묵상할 때 명철을 소유하게 됩니다. 주의 증거를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신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많은 명철을 얻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깊은 묵상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묵상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구하며 묵상할 때 주님은 놀라운 이해력(understanding-명철)을 주십니다. 다윗은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또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 주의 명령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리이다.](시119:48). ‘내 손을 들고’란 말은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딤전2:8). 다니엘은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예언의 종료 기간을 깨달았고 기도했습니다(단9:2). 가브리엘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단9:22).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을 깊이 생각할 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 {주}께서 모든 일에 네게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노라.](딤후2:7). 주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요일5:20).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확실한 깨달음을 얻게 하십니다(골2:2).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말씀의 묵상을 통해 명철(깨달음)을 얻고, 기도를 통해 계시와 조명을 얻는 올바른 영적 생활의 선순환(善循環)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와 말씀이 따로 노는 악순환(惡循環)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 다윗은 야밤에 T.V를 보거나 신문을 보느라 시간을 다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고, 잡담하고, 먹고, 마시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을 묵상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그리하오리니](시63:6). 그는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주를 묵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낮에 부지런히 일을 하고 빨리 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야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지혜와 명철을 얻은 사람입니다.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나니](잠3:13). 다윗은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다윗은 고난의 때에 묵상했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비방할 때, 정치적 위기에 몰리고,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그는 불평하거나 원망한 것이 아니라 주의 법규를 묵상했습니다. [통치자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였나이다.](시119:23).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몰릴 때 평소의 신앙 인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신앙 생활 잘 하다가도 어려움에 처하면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때에 중심을 잡고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묵상이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학대 받을 때 무엇을 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변명하고, 명예를 회복하려 하고,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에 오직 한 가지 ‘주의 훈계들’을 묵상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까닭 없이 나를 학대하였사오니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소서. 오직 나는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리이다.](시119:78).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 비방, 오해를 받으며, 인간적 갈등, 경제적 어려움, 난처한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경우에 놓이는 경우가 옵니다. 요령도 방법도 찾을 수 없고, 나를 도와 줄 사람도 찾을 수 없을 때 평소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던 것이 나옵니다. 말씀을 묵상한 사람은 그런 때 더욱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념하며, 주님을 신뢰합니다. 다윗은 묵상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묵상함이 달콤하리니 내가 [주]를 즐거워하리로다.](시104:34). 고기도 맛을 아는 사람이 잘 먹듯이, 묵상도 맛을 알아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물이 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악을 먹고 마십니다. 시키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그리로 끌리는 까닭입니다. 반면 주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묵상하고 즐거워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체질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말씀의 맛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 [주의 말씀들이 내 입맛에 어찌 그리 단지요! 참으로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달콤하다. 달다!! 이것이 묵상의 깊은 맛을 경험한 다윗의 평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묵상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시119:97).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법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종일토록 묵상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눈을 떠도 그 생각 뿐이란 것입니다. 저는 어떤 친구가 사귀는 친구가 지방에 있어서 저녁 9시에 안부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아침 8시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참 미쳐도 가지가지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 경험하는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법을 그렇게 사랑했기에 종일토록 묵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묵상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명령들을 금보다 더 사랑하오며 참으로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119:127). 그는 장군으로서 많은 전쟁을 참전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얻는 최고의 기쁨은 전리품을 얻는 것입니다. [많은 노략물을 얻은 사람같이 나는 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나이다.](시119:162). 이는 고시 준비생이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나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이나 학자가 만족스런 연구 결과를 얻는 것이나 부모가 자식을 얻는 것이나 목자가 양을 얻는 것이나 농부가 수확을 얻는 것이나 매 한가지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